<<영웅의 역사>> 제1권 <覇者의 길>中에서 '秦 始皇帝'...책장에선 빠져 있지만...>
5년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다. 그때도 하룻밤새에 읽어 치웠던것 같은데 다시 읽어도 재밌다.
우선은, 기이한 그의 출생 이야기부터가 소설적이지 않은가?
그 때문일까?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루기 전의 진왕 정에게 만큼은 나름의 애정을 갖게 된다.
물론 진시황이 된 이후로는 그의 바램처럼 진인으로 봐줄 수야 없지만, 과연 그가 우리와 같은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일까 싶기까지 하다.
재미있게 읽은만큼, 그의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책의 내용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 출생 때는 동주東周의 춘추 시대가 끝나고 군웅이 할거하는 전국시대 말... 서쪽의 강대국 秦에 대항해 합종연횡을 일삼던 趙,韓,魏,齊,燕,楚 6개국 가운데, 조의 수도 한단은 진나라를 비롯한 6개국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마치 미녀가 살포시 잠들어 있는 듯한 정취가 감도는 한단은 모든 물자와 진귀한 보물의 집산지였고, 많은 현인과 처사들이 살기도하고 머물기도 하는 곳이어서 꿀을 찾아 날아드는 벌떼처럼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이곳 한단에 한나라의 호상豪商 여불위呂不偉가 나타났는데, 그가 취급하는 물건은 고가의 골동품이나 유서 깊은 보물과 그릇으로, 그는 한단에 갈때면 "기화奇貨를 찾으러 간다" 고 하였다.
기화를 찾기위해 한단을 몇날 며칠을 헤매던끝에 그가 찾아낸 기화가 바로, 오래전 진나라에서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왕족 이인異人(훗날의 자초) 이었다. (이인은 당시 진나라 태자인 안국군의 아들이었다.)
뜻밖의 기화를 만난 여불위는 타국에서 돌봐주는이 없이 허름한 집에서 형편없는 생활을 하고 있던 이인을 설득한끝에, 진나라의 안국군이 가장 총애하면서도 아들이 없는 화양부인에게 접촉 하여 이인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의 자리에 앉히게 된다. 이때부터 이인의 이름은 자초로 바뀐다.
자초가 진나라에 입성하기 전, 여불위가 베푼 연회에 초대되어 갔다가 첫눈에 반한 여자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조희이다. 조희는 여불위가 사랑하는 여인이었으나 장사꾼답게 주판알을 굴린 여불위는 기꺼이 조희를 자초에게 헌납한다.
하지만 여불위와 조희는 자초를 사이에 두고 비밀리에 여전히 애정행각을 벌였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진나라의 시황제 영정이다.(물론 표면상으론 자초의 아들이지만)
● 진왕 정政 옥좌에 앉은 자초는 타국에서 비참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던 자신을 '기화'로 보고 갖은 어려움을 극복한 끝에 진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일등 공로자 여불위를 진의 승상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즉위 3년만에 자초(장양왕)가 사망하고 13살의 나이로 영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에 여불위는 상국相國이 되어 중부仲父의 존칭을 하사받고 이른바 섭정을 실시하며 절대적인 권세를 떨치게 된다.
여불위의 주도 아래 진왕 정은 차례로 6개국을 물리쳐 통합하기에 이르고, 장양왕이 사망한 이후에도 여불위와 조태후의 밀애는 계속 되었는데 이때문에 아침햇살처럼 모든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여불위는 한가닥 불안을 떨칠 수 없게된다.
궁리끝에 여불위는 조태후의 처소로 남근이 아주 커다란 노애라는 인물을 들여 보내는데, 그의 예상대로 조태후는 노애에게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노애와 조태후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면서 다시 불안해진 여불위는 태후의 궁전을 진의 수도 함양에서 1백킬로미터 떨어진곳에 지어 노애와 함께 이주시켰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진왕 정에게 태후와 노애의 음탕한 행각이 발각된것과 때를 같이해 노애는 진왕 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체포되어 산채로 손과 발이 오라에 묶여 사방으로 마차를 달리게 하는 거열행車裂刑에 처해진다.
여불위가 자신의 생부임을 알게된 진왕 정은 어머니 조태후는 궁중의 한적한 곳에 연금시키고, 여불위는 상국의 지위를 박탈하여 하남 지방의 소제후小諸候에 봉하여 추방 시켰다가 다시 촉蜀 땅으로 가서 여생을 보내도록 하는 친서를 보내는데 여불위는 친서를 받고 자결한다. 이때가 진왕 정 12년(24세) 청년왕 시절이다.
● 믿어야할 사람을 믿지 못하고... 여불위가 사망한 후 등장한 인물이 초나라 상채 출신의 이사李斯이다. 이사는 당시의 법가사상과 성악설의 대가인 순자荀子의 제자로서 그 또한 여불위가 '기화'로 보고 발탁한 인물이다.
노애의 난으로 칩거 명령을 받은 여불위를 대신하여 이사는 왕의 옆에서 중책을 담당하면서 사실상의 승상으로 활약한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승승장구 하던 이사에게 걸림돌처럼 등장한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韓 왕족인 한비韓非였다.
당시 한나라는 7개의 전국 가운데 인접 국가의 침입을 가장 많이 받아 상당한 영토를 이미 진나라에 빼앗긴 상태였다. 한비 또한 순자의 문하생으로 이사와는 동창이다. 한왕의 공자들 가운데서도 생모의 신분이 낮아 서자로서의 대우를 받았던 한비는 순자의 문하생이 된 후 고대 사상을 체계적으로 습득할 정도로 무섭게 학문에 몰두한다.
순자의 문하를 떠난후 한의 왕궁으로 돌아온 한비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던 탓에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신을 생각만큼 전달하지를 못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비애와 분노를 혀가아닌 붓으로 표출하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게 <한비자韓非子>이다.
"인간 본성은 악하며 이욕利慾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말에 현혹되지 말고 그 본질을 꿰뚫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군주는 신하의 본심을 잘 알아보고 인물의 진위眞僞를 가려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는 수완을 갖추어야 한다."
이 말은 한비자 실천 철학의 골자이다. 요컨대 '인간과 정세를 간단하게 보지 마라, 머리로 믿고 얕보지는 마라' 는 성악설에 근간을 둔 인간 불신 철학인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지금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정사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 왕실에 대한 우국충정의 마음에서 쓴 <한비자>가 한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한 반면 적대국 진왕 정의 눈에 띄어 <한비자>를 읽은 진왕 정은 침식도 잊고 탐독하게 된다.
이후 한의 사절로 온 한비를 만난 진왕 정은 한비를 돌려보내지 않고 그의 곁에 두고 그로부터 가르침을 구할것을 예를 다하여 청하게 되고 한나라에서 온갖 멸시를 받던 한비 역시 진나라에 머물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이에 불안해진 이사의 계략으로 인해 한비는 결국 진의 감옥에서 독을 마시게된다. 죽기전 한비는 하늘을 보며 개탄 하기를,
"내가 쓴 <한비자> 중에서 간신들이 충신과 능신을 군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우려에 대해 설명한 <고분>, 그리고 의심스러운 신하를 구분하여 경계하는 것에 대해 설명한 <설의>를 왕께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나 있는 걸까? 사람을 보면 악인, 도적으로 보는 생각을 설명한 나의 철학이 나 자신을 향하는 칼날이 될줄이야! "
● 자객 ⊙ 형가 6개국 가운데 가장 먼저 한나라가 멸망하고(진왕 정 17년), 이어서 진왕 정 19년에 조나라도 멸망하게 된다. 이에 연나라에서는 주전파와 화평파로 나뉘는데 주전파의 우두머리는 태자 단丹이었다.
한때 진의 함양에서 인질생활을 하다 도망쳐 온 태자 단은 진왕 정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보복할 날만을 기다리던 중에 때마침 진왕 정과의 불화로 진나라의 명장 번어기樊於期가 연나라에 망명해 오게되고 태자 단은 번어기를 숨겨준다.
한편 검술과 학문에 뛰어난 형가荊軻를 진나라의 자객으로 보내어 진왕 정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 태자 단에게 형가는 번어기의 목을 가지고 진왕 정에게 접근하겠노라 하고 번어기가 자결토록 한다.
형가가 번어기의 목과 연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 독항督亢의 지도를 가지고 진나라로 떠나던날, 형가의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이자 축筑(금琴과 비슷한 대나무로 만든 악기)의 거장인 고점리가 울먹이며 부른 노래는 형가를 배웅 나온 이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바람은 풀이죽어 이수도 차가우니, 장사가 길 떠나나 다시 돌아올런지.........
진왕 정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던 번어기의 목과 연의 비옥한 땅 독항을 바치기 위해 왔다는 형가는 계획대로 진왕 정의 앞에까지 가게 되고, 그의 가슴에 살끝만 스쳐도 독이 퍼져 죽게 되는 비수를 겨누었지만 함께간 진무양의 실수로 인해 암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 처참한 죽음을 맞고(진왕 정 20년) 이듬해 연나라 또한 그 명을 다한다.(진왕 정 21년)
⊙ 고점리 형가의 절친한 친구였던 고점리는 연나라가 진의 공격을 받아 생명이 위험해지자 수도를 탈출 종자현宗子縣의 작은 마을에 숨어 살았다. 그는 축의 명인으로 이름이 알려진 터라 이후 자신의 이름과 모습을 바꾸고 어느 호상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축을 잘 타기로 유명한 그 지방의 명사가 초빙되어 객전에서 축 연주가 열렸는데, 마당에서 청소를 하던 고점리는 너무도 오랜만에 듣는 축 연주에 눈을 빛내며 "그 부분을 좀 더 강하게.....이 부분은 음을 죽이고.....그래, 좋았어" 하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로써 그가 축의 명인임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고 그의 명성은 이내 진왕 정에게까지 알려져 마침 거문고 연주와 축 연주를 좋아하던 진왕 정에게 초대되어 간다. 고점리의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애절한 연주에 진왕 정은 크게 감동하고 그를 가까이 두게된다.
하지만 고점리를 뒷조사한 결과 형가의 친구임을 알게되고 그의 재능을 아낀 진왕 정은 고점리의 눈을 멀게하여 자신의 곁에 둔다. 이를 계기로 진왕 정을 죽일 기회만 노리던 고점리는 축의 몸통속에 납덩어리를 넣어 묵직하게 만든 다음 진왕의 옥좌 바로 옆에서 연주하게 되자 연주 도중 혼신의 힘을 다해 진왕 정의 정수리를 향해 축을 휘둘렀다.
애석하게도 고점리는 맹인 이었다. 표적이 어긋난 고점리의 축은 옥좌의 등쪽 윗부분에 맞아 산산히 부숴지고 고점리 또한 형가를 쓰러뜨린 검에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시황제 탄생 6개국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나라가 멸망하자 천하는 진나라의 것이 되었다.(진시황 26년,기원전221년) 천하를 얻은 진왕 정은 역대의 왕들과는 격이 다른 절대적 지배자임을 선포하고 그에 걸맞는 천지天地를 지배할 자신의 호칭을 새로이 정하는데, '삼황三皇'의 황皇 과 '오제五帝'의 제帝를 따서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었다. 하늘아래 유일한 절대 권력자가 탄생한 것이다.
음양오행설에 따라 화덕火德인 주周나라의 국색國色은 赤이었으나 시황제는 주나라는 진나라에 복속 함으로써 물이 불을 끄므로 수덕水德을 진나라 것으로 삼았다. 따라서 수水는 흑색이므로 진제국의 색깔을 흑색으로 정하고 병장,의복,깃발 등 모든 것이 흑색으로 통일 되었다.
또한 수水가 의미하는 숫자는 6이라 하여 부절符節이나 冠의길이를 6촌寸(약 14센티), 가마는 6척尺,,마차는 여섯 마리의 말 등으로 규정하여 위반하면 엄벌에 처하였다. 심지어 황하의 '황黃'자가 좋지 않다고 하여 흑색을 의미하는 '덕수德水'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다.
전국을 다스리는 제후 대신 부국강병을 기치로 내세워 군현郡縣제도와 법가주의를 국시로 삼아 제도와 문물의 규제나 통제가 철저히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개혁으로 도량형의 통일과 글자체의 개혁을 들 수 있는데, 각국에서 사용하던 대전문자大篆文子가 제각기 다르고 난해하여 이를 이사가 개량, 고안하여 소전小篆이라는 글자체를 만들었다. 이 소전문자는 해서楷書와 거의 비슷한 예서 隸書로 개량되는 한자 역사상 미증유의 대혁명을 일으킨다.
◎시황제의 건축 신앙 수도 함양에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모여 살게하여 재력의 집중을 꾀하는 한편, 함양 북쪽의 산위에 금전옥루金殿玉樓가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한다. 또한 위수渭水와 함양 북쪽을 따라 흘러 위수와 합류하는 경수涇水 일대에 셀 수 없이 많은 일반 복도複道와 건물과 건물을 잇는 복도를 만들어놓은 금전옥루를 지어 여러 왕후로부터 헌상받은 미녀들을 거주하게 하였다. 복도란 상하 이중의 단으로 된 통로로 하단 통로로는 가마나 마차,말이 다닐 수 있다.
시황 27년에는 위수 남쪽에 건축의 정수를 집중시킨 장신궁長信宮을 준공하고 이곳에서부터 경치가 좋은 여산驪山까지 길을 내어 감천궁甘泉宮을 조영하였다. 함양에서 여산까지 이르는 이 길은 용도勇道라고 불렸는데 길 양쪽에 돌담을 만들어 황제의 가마가 오가는 모습을 밖에서 전혀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는 이후 전국적으로 만들어지는 제국 관용도로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관용 도로는 치도馳道 라고 불렸으며 아무리 험한 산이라도 깎아내고, 아무리 깊은 계곡이라도 메우고, 호수나 습지는 철저히 다지고, 활처럼 굽은 곳은 펴가면서 지반을 닦은 다음 쭉쭉뻗은 길을 만들었다. 치도의 중앙에는 시황제의 가마와 경호대가 사용하는 폭 10미터의 천자도가 있고, 좌우 각 30미터의 길로는 진나라의 정예군이 통과하였다. 따라서 치도의 폭은 약 70미터에 이르는 파격적인 규모 였다. 천자도는 양쪽에 1장丈(2.3미터) 정도의 높이로 돌담을 지어 보호했는데, 이 장대한 규모 의 치도는 황제의 지방 순시를 위해서만 사용된게 아니라 비상시 정예 기마부대를 급히 내보낼때 군용 간선 도로로서의 의미도 컸다. 실로 2천2백년전의 아우토반이었다.
사상 유례없는 환상적인 대궁전이었다는 아방궁阿房宮이 축조된 것은 시황 35년(기원전 212년) 부터로 함양이 급속하게 팽창하자 새로이 수도를 건설하고자 하였는데, 위수 남쪽 상림원上林苑이 낙점되었다. 새 수도의 황궁皇宮 전전前殿 으로서 축조된 궁이 바로 아방궁이었다. 그 지역이 아방이라 불리었기 때문에 임시로 붙여진 이름 이었다. 진 제국 내에는 궁형에 처해진 죄수들과 각종 죄목에 걸려 죄수가 된 자로 넘쳐났다. 죄수들 대부분은 가혹하고 엄격한 법령의 적용을 받은 억울한 희생자들로, 시황제와 이사는 이들 죄수 70만명을 동원하여 이중 38만 명을 아방궁 조영에 투입하고 나머지 32만 명을 여산으로 보냈다.
누구보다 장수하고 싶어하면서도 살아 있는 동안의 자신의 오진성奧津城 즉 자신의 능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는 또 하나의 아방궁을 지하 세계에 만든 것으로, 온 제국의 백성은 사역동물과도 같은 인간아닌 인간이었다.
시황제 능의 내부의 높이는 1백15미터, 둘레는 2천미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사후에도 많은 보물과 자재를 갖고 군림하는 대궁전과 이 세상의 풍경을 그대로 지하세계에 옮겨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지하 궁전의 구조는 극비에 붙여졌으며 미래의 도굴을 막기위해 모든 입구에 자동 발사 화살이 장착 되었다. 그러나 시황제의 엄청난 기대속에 시작된 오진성은 시황제 살아 생전에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 여행을 좋아한 시황제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시황제는 먼저 감숙 지방을 여행하였다. 이를 시발로 왕성한 황제의 순행巡幸이 시작되는데, 시황 28년(기원전 219년) 산동지방을 방문한 시황제는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산과 산동반도 해변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전국 칠웅 가운데 진나라는 바다에서 가장 먼 지역에 있었다. 따라서 진나라 사람들에게 바다는 거의 전설이나 다름없었다. 그토록 동경해오던 풍경을 앞에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치도를 만든 가치는 충분하다고 여기며 산동반도 일대에 마구잡이로 송진비를 세우기 시작한다.
" 그 공은 오제五帝를 능가하고 그 은혜는 우마牛馬에게까지 미쳐 덕을 입지 않은 자 없도다"
◎ 불로불사의 꿈...분서갱유...만리장성 축조 동해가보이는 산동반도 연안의 풍광에 매료되었던 시황제는 동해의 어딘가에 진인이 사는곳이 있다는 전설을 전해듣고 그 지방의 점술가나 방사方士들을 모아 진인을 찾아내도록 명하였다. 이들 방사 가운데 노생 이라는 자가 바다를 건너 진인을 찾으러 갔다 돌아와서 진인을 데려오지는 못하였으나 도중에 귀신을 만나 시황제에게 부탁한것이 있다면서 부符 하나를 봉정奉呈 하였다.
"진나라를 멸망시킬 자는 호胡 이다"
이로부터 9년 뒤 진나라가 멸망하는데 진나라를 쇠퇴시킨 이가 2세 황제 호해胡亥 였다. 하지만 시황제는 진나라를 멸망시킬 호란 바로 북방 민족인 호인胡人이라고 해석하고 즉각 장군 몽염에 게 군사 30만을 이끌고 정벌하도록 명령한다.
많은 방사들이 시황제의 불노불사의 갈망을 이용하여 금은보화를 챙겨 달아나는 와중에 누구보다 진인이나 불로불사의 영약이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노생 또한 어느날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이에 분노한 시황제는 방사와 학자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생매장 하기에 이르는데 이때 처형된 자가 4백 60여명에 이른다. 이때 사악한 무리와는 아무 관련없이 봉변을 당해 생매장된 유학자들도 적지 않았다.(갱유坑儒)
이와 더불어 새로운 것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옛 것만을 숭상하는 무리들은 지금의 정도政道를 비난하면서 백성을 현혹시키는 자들이라 하여, 앞으로는 사람의 사활이 걸린 의약, 점술, 그리고 농사에 관한 서적을 제외한 민간의 <시경詩經>,<서경書經>,그 밖의 제자백가의 서적을 모으거나 읽는것을 금지하고 모두 불태워야 한다는 이사의 간언에 따라, 이른바 후세에 시황제의 악명을 드높인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자행된다. 그러나 의약,농사,점술을 제외한 모든 서적이 재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진나라에 필요한 서적은 미리 재빠르게 확보하여 관고官庫에 보관해 두었다.
천하통일을 이룬 시황제는 진나라의 장성을 포함하여 제각각인 장성을 짜맞추듯 연결하였고, 기존의 방어벽을 보수 보강하여 더욱 연장해서 호지胡地와의 경계를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만리장성은 동쪽 끝의 산해관에서부터 서쪽 끝의 감숙성 임조에 이르는 장성이다.
'진나라를 멸망시킬 자는 호이다' 라는 귀신의 편지에 따라 30만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호인을 정벌한 몽염 장군이 여세를 몰아 본격적으로 장성의 축조를 시행한 것이다. 몽염은 호인들을 격퇴한 음산산맥 일대를 따라 장성을 축조하여 동서로 장성을 연장시켰다.
산들의 기복에 따라 용이 길게 누워 있는 듯한 모습으로 장성을 축조하는 일은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다. 방어벽인 장성은 호인들이 있는 쪽의 벽이 중국 쪽 벽보다 훨씬 높아 아무리 좋은 호의 말이라 하더라도 날개가 없으면 도저히 넘어올 수 없도록 축조 되었다.
만리장성 공사에 참여한 노역 인부로는 처음에는 30만 명의 병사가 투입 되었으나 공사가 진척 되면서 새로운 인부가 투입 되었는데, 정치범에서부터 아주 사소한 죄목으로 죄수가 된 백성들이 속속 보내져 죽을때까지 혹사 당했다.
특히 진나라의 최북단인 상군上郡이나 대군代郡 방면은 가장 중요한 방어 지역으로 매우 난해한 공사 지역이어서 엄청난 수의 죄수들이 사고로 죽어가 무수한 안타까운 희생자들의 유골은 흙과 섞여 방어벽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 사망 "순행하면 길하다" 라는 점괘에 따라 시황제는 생애 다섯번째이자 마지막 전국 순행을 떠난다. 무리한 순행으로 이미 병색이 깃든 시황제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노산의 궁전에 도착하여 며칠을 머무른뒤 몸상태가 심상치 않음에 급히 함양으로 귀환하던 중 5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시황제 37년, 기원전 210년)
시황제의 유해는 온량거에 실려 함양으로 돌아오나, 도중에 소금에 절인 생선을 넣어 시체 썩는 냄새를 감추었다고 한다. 여산 능에 장사 지냈다.
진시황... 그는 과연 시대의 영웅인가? 아니면 위대한 폭군인가?
ㅎㅎㅎ 위대한 폭군? 어불성설?
어쨌거나... 모처럼 그를 만나느라 주말과 휴일을 집에서 차분히 보내고 있으니 고맙기도...^^
<서동요 촬영장에서...2005.11.06> |
출처: 하늘과 땅사이에... 원문보기 글쓴이: 초록구두
첫댓글 오래 후대에 그 이름이 회자되는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도 당연히 드라마틱하겠지요...그래서 두고두고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되 읽곤 하는 것 같아요..^^*..엉키고설킨 권모술수,..그리고 빠질 수 없는 로맨스? 그리고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는 내면의 향방,.. 50세로 죽었다지만 아직 살아 있는 듯,..^^* 토막토막 읽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