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우녕의 자료는 우연히 보았던 경우다.
하동에 재첩 먹으로 갔다가 피곤하여 잠시 쉰곳이 진교인데 잠시 쉴곳을 찾다가
주차를하고 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비석들이 보여서 촬영을 하다가보니
경상도 관찰사 인 홍우녕의 비가 보였다.
다른 비석과 는 달리 아주 크게 만들어 졌고 귀부는 아름답게 되어 있다.
그리고 조그마한 오석에는 거의 행적과 칭송의 글이 새겨져 있어 홍우녕의 관찰사로 많은
선정을 베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홍우년의 선정비는 .상평마을 비석거리에 있던 비를 현재의 하동군 진교면 진교리 하평마을 민다리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그리고 일반적인 이름인 아닌 구황휼민비유래(觀察使洪公禹寧救荒恤民碑由來)’ 새겨져 어떠한 선치가 있어지만
비면에는 그러한 흔적은 지워지고 없으나 주민들이 오석으로 홍우녕 관찰사의 선치를 새긴 비가 보인다.
비를 받치는 귀부는 얼굴의 모습이 많이 마모가 되어 뚜렷하지는 않으며 몸통 또한 둥근원에 가깝게 만들어
다른 귀부와는 달리 비는 크고 몸은 작게 만들었다.
돌을 쉽게 구하지 못하였기에 그러한 것으로 생각된다.
1714년에 지진이 발생하여 한발과 흉년이 들었는데 홍우녕 관찰사가 조정에 건의하여
구휼미 2000석을 내려서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에는 관찰사 순력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나 경상도 다른 곳에 선정비가 있어
대조를 하여 보면 해답이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홍우녕의 비는경상도 다른 곳에도 있다.
겸순찰사로 시작되는데 겸은 대구도호부사겸경상도 관찰사라는 뜻이다.
1660년(현종 1)~~~1717년(숙종 43)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여성(汝成), 호는 정와(靜窩).
1710년 정언에 임명, 다음해 사은사 정재륜(鄭載崙)·박권(朴權)과 함께 서장관으로 청을 다녀 왔다.
장령으로 있으면서 전권(銓權)을 잡은 자가 편벽되게 사(私)를 따르고 있다는 소를 올려 체직되었으나 곧 등용되었다
.1713년 대사간을 지낸 다음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1716년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영남의 곡식 8,000석을 옮겨서 제주(濟州) 백성을 진구(賑救)하라는 명을 받자 민사(民事)가 더 급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2,000석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717년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미처 교대하지도 못하고 임지인 경상감영에서 죽었다.
임지에서 죽으면 타루비를 세우는 경우가 있는데 홍우녕의 타루비는 보이지 않았다.
양평 용문사 갔다 나오다가 우연히 들린 곳이 홍우녕의 묘 였다.
운이좋은 것이다.
홍우녕은 홍우령으로 검색해야 찾을 수 있는데 두음법칙이 적용되어 많이 햇 갈렸다.
많은 인물이 평양감사로 가면 최고의 자리라 하였지만 가뭄과 흉년이 많은
경상도 관찰사는 힘든 곳이라 좌천이라 생각하겠지만 관찰사의 경우는 지방의 최고 통치자로서
많은 권력을 가졌기에 최고의 자리라고 생각된다.
다만 조선후기의 관찰사기록은 몇 군데 남아 있지만 초 중기의 관찰사의 활동사항이나
여러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하기에 조선왕실록과 승정원 일기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상도 관찰사를 찾는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