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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遠的亞洲歌姬 鄧麗君傳 逝世十六週年紀念 |
作者是 網站管理人 |
週五, 22 四月 2011 15:31 |
鄧麗君逝世了近十六年來,對於其政治傾向及為什麼不到大陸演唱的話題,在華人圈裡一直紛紛擾擾。近幾年,我反覆地求證及收集資料,終於可以公正客觀地以最貼近史實的論點,將這些被模糊及炒作的事情定調,並作為本站OneAndOnly對於鄧小姐在傳記上的文獻及論述,希望讀者在閱覽此篇內容之前,能夠先將原本對於鄧麗君小姐的固有印象全部拋棄。 特以此文,做為對鄧麗君小姐逝世十六週年的紀念。
덩리쥔이 서세한지 거의 16년이 다가오는데,그녀의 정치적 경향과 어쨰서 대륙 공연을 이루지 못하였나의 화제에 대해, 중화권에서 쭉 논란이 분분하다. 거의 몇해 동안 나는 되풀이 하여 증거와 자료 수립을 하고 있는데, 마침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논점으로서, 이런 모호하고 조작된 사정 조사, 아울러 본 사이트 OneAndOnly가 만든 덩샤오제의 전기에 대한 문헌과 논술등을, 독자들이 이내용을 열람하기전에, 먼저 본래 덩리쥔 샤오제에 대한 고유의 인상 전부를 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前言
如果要用簡短的幾句話來介紹鄧麗君,你會怎麼樣來詮釋呢?是歌藝精湛、很愛國或者是偏好中國傳統風格的歌手?除了我們表面上看到的鄧麗君之外,私底下的她其實也跟其他的人一樣,有著屬於自己的喜、怒、哀、樂。她對於事物的評判上,也同時存在著正面與反面的情緒,隨著歲月的過去,她的所見所聞,也不斷地在自我成長,最後才讓我們看到這麼樣讓人敬佩與喜愛的鄧麗君。
만일 간단한 몇마디로 덩리쥔을 소개 하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어떨게 설명할 수 있나요? 노래 예술이 매우 뛰어나고 매우 나라를 사랑하고 또 특히나 중국 전통 풍격을 좋아한 가수 인가요? 우리가 겉으로 보았던 덩리쥔 이외에, 남이 모르는 그녀의 진면목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기쁨,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사물에 대한 평판상, 또한 앞면과 뒷면의 정서가 동시에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녀에 대한 소문도 끊임없이 스스로 퍼져나가 마침내 비로서 우리는 이렇게 경탄과 존경스런 덩리쥔을 보게 되었다.
鄧長禧:「我們生長在一個軍人的家庭。我的老爸軍校十四期畢業,曾參加過台兒莊、營口等戰役,所以從小看到軍人就有一份說不出的親切感。我的老姊從一個陌生城市唱到另一個陌生的城市,雖然觀眾的歡迎是歌手最大的安慰,但心中永遠有一種掌聲驅除不去的孤寂感。她告訴我只有在面對著國軍表演的時候,那一份孤寂的陌生感就一掃而空了!阿兵哥熱烈的掌聲常常使她感動得熱淚盈眶,她成天的叼念,希望有一天能夠像美國的鮑勃霍伯一樣,年年風塵僕僕的為自己國家的阿兵哥盡心盡力。」
덩창시: 우리 누나는 3가지 바람이 있었는데 첫째는 바로 학생으로 책을 많이 읽은 것 이고 둘째는 언젠가 미국의 Bob Hope처럼 자신의 국가를 위하여서 해마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고생하는 장병들을 위하여 진심진력하는 것이다.셋째는 마음이 돌아가 쉴 곳을 가지는 것이다. 덩창시: 우리는 군인의 가정에서 자랐다. 우리 아버지는 사관학교 14기로 졸업하여 일찌기 台兒莊、營口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어릴 때부터 군인들을 보아 왔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 누나는 낯선 도시에서 또 다른 낯선 도시로 다니며 노래를 하였는데, 비록 청중의 환영은 가수의 최대의 위로이었지만.그러나 마음 속에는 박수 소리가 결코 없애 수 없는 쓸쓸함이 언제까지나 있었다. 그녀는 내게 말하기도 하였는데, 국군 장병을 바라보며 공연을 할때만 이런 쓸쓸한 낯선 느낌이 한꺼번에 없어진다고 하였다.! 장병들의 뜨거운 박수 소리는 언제나 그녀를 감동시켜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하였다.그녀는 하루 종일 생각하기를, 언젠가 미국의 Bob Hope처럼 자신의 국가를 위하여 먼지를 뒤집어 쓰고 고생하는 장병들을 위하여 해마다 진심 진력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일본에서의 덩리쥔
鄧麗君:「很多人以為我一定很喜歡日本,其實我頗討厭日本,沒去日本以前,我從書上就對日本沒多大好感。跟他們接觸以後,也沒有發生甚麼好感。」鄧麗君說,在日本的前三年,和日本人只限於工作上的接觸,下班之後,她就不跟他們在一起。因為他們工作時態度很認真,但工作以外卻愛喝酒鬧事,對女性不太尊重,所以她不喜歡和日本男士在一起。鄧麗君甚至曾經因為這樣的事及環境,在公司及母親的面前邊說邊落淚。
덩리쥔: 많은 사람은 내가 상당히 일본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나는 일본을 매우 싫어 하였다. 일본에 가기 전에는 나는 책을 통해서 일본에 대하여 큰 호감이 었었다. 다른 사람과 접촉을 하고 나서도, 그다지 호감이 생기지 않았다.라고 덩리쥔이 이야기를 하였는데, 일본에서 첫 3년간, 일본 사람과 단지 업무상으로 접촉하고 , 퇴근한 뒤에 그녀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들이 일할 때의 태도가 매우 진지하였지만 일 이외에는 오히려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시끄러웠고, 여자에 대하여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일본 남자와 함께 하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았다. 덩리쥔은 심지어 일찌기 이런 일과 환경으로 인하여 회사와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那麼鄧麗君為什麼還要待在一個她不喜歡的國度呢?鄧麗君:「日本歌壇環境很健全,也很單純,歌星只要專心一意的把歌唱好,其他一概不必煩惱,而且還可以經常看到國際著名藝人的歌舞表演,以及日本全國性的職業與非職業的歌唱競技,作為自己學習的借鏡。」這說明了即使鄧麗君不喜歡日本的一些人事,但仍然肯定了日本是個對她很有幫助的好地方。 在日本一開始,鄧麗君也是很辛苦,畢竟是從零開始,每天不停的登台演唱、跑夜總會、上電視,全日本巡迴的四處演唱,慢慢地隨著名氣的打響,才減少了上通告的頻率,身價提升,財富也迅速累積。很快便過了五年,鄧麗君嘆息道:「我喜歡唱歌,但就我記憶所及,一生除了唱歌之外什麼也沒做。我到日本是要看看自己能否成功,我覺得我已經做到了。我過膩了這種刻版的生活,為上電視彩排,錄音,參加演唱會,一年又一年,我需要暫時離開一下。」
이렇게 덩리쥔은 어째서 또한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 나라를 혼자서 머물렀을까? 덩리쥔: 일본 가요계의 환경은 매우 건전하고 또한 매우 단순하여 가수는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노래를 잘 부르기만 하면 기타는 모두 고민할 필요가 없었고 게다가 또한 언제나 국제적으로 유명한 예술인의 노래와 춤 공연을 볼 수 있었으며 일본 전국적으로 직업적 그리고 아마추어적 노래 경연대회가 있어서, 스스로 공부하는 데에 거울로 삼을 수 있었다. 이것은 설령 덩리쥔이 일본의 여러 가지 문물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일본은 그녀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좋은 곳이라고 설명된다. 일본에서 시작할때 덩리쥔도 매우 고생스러웠다.결국 밑바다에서 시작하였으며, 날마다 끊임없이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였으며 야간공연에도 달려가고, 텔레비전에도 출연하며, 전 일본 순회하는 전국 공연도 하여, 천천히 이름이 알려지는 초보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비로소 홍보하는 빈도가 감소하였고, 출연료가 오르기 시작하고, 수입도 빠르게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아주 빠르게 5년이 지나갔는데, 덩리쥔이 탄식하며 말을 하였다: 나는 노래하는 것을 좋아 하지만, 그러나 내 기억에 따르면, 내내 노래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하지 못했어요. 내가 일본에서는 자신의 성공여부를 알아 보고 싶었는데 내 생각에는 이미 해냈다고 느꼈다. 나는 이런 틀에 박힌 생활에 너무나 진절머리가 났고, 텔레비전에 출연하기 위하여 리허설하고, 녹음하고, 공연에 참가하고 하는 한해 또 한해.... 나는 잠시 떠나고 싶었다.
緊接著不久,在1979年2月,發生了「假護照風波事件」,鄧麗君因為違反日本的「出入國管理令」被驅逐出境一年的時間,而事實上,那份護照是真的,但是取得的過程不合法。在當時,台灣也出現了大批的討伐聲浪,甚至有媒體以「叛國」為標題來報導此事件。那為什麼會跟叛國有所牽扯呢?正因為鄧麗君所使用的是印尼籍的護照。那時候在沒有邦交的國家出入境過程相當不便,於是許多常在外面跑的藝人私底下也都有那麼本其他國籍的護照。而在當時,台灣的政治氛圍,正因為中美斷交之故,全國特別重視國人對自己國家的忠誠度,以導致整個事件被用放大鏡來檢視,鄧麗君也因此飛到美國洛杉磯避風頭。在那段時間裡,鄧麗君也藉此機會重拾書本,過起當學生的日子,並且也履行了一些在美國及加拿大的演唱合約。鄧麗君在這個事件上的處理態度,突顯出台灣當時的政局仍然屬於威權時代。
뒤이어서 오래지 않아, 1979년 2월에 가까 여권 파문 사건이 일어났고, 덩리쥔은 일본의 출입국관리령을 위반하였기에. 일년간 국외추방을 당하게 되었지만, 사실상 그 여권은 진짜이었지만, 취득과정이 합법적이지 않았다. 당시에 대만에서도 많은 비난의 목소리가 넘쳐났으며, 심지어 어떤 매체는 나라를 배반하였다는 제목으로 이사건을 보도하였다. 그럼 어째서 나라를 배반하였다고 까지 연루가 될 수 있었던가? 때마침 덩리쥔이 사용한 것은 인도네시아의 여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국교가 없던 국가를 출입국하는 과정이 상당히 불편하였기에, 늘 외국으로 다니는 수많은 예술인들도 남몰래 이렇게 다른나라 국적의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그때 대만의 정치 분위기는 때 마침 미국과의 단교로 인하여 온나라가 특히 자기 국가에 대한 국민의 충성도를 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확대경으로 검사하게 되었고,덩리쥔도 이로 인하여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가 이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시기에 덩리쥔도 이 기회를 틈타서 다시 책을 잡았다. 학생으로서 시간을 보냈고 아울러 또한 미국과 카나다에서 여러 공연 계약을 이행하였다. 덩리쥔은 이 사건을 처리하는 태도에서 갑자기 당시 정국과 여전히 권위 주의적 시대에 속한 대만이 드러났다.
日本歌迷喜愛穿著旗袍並且露出玉腿的鄧麗君
일본 가요팬들은 치파오를 입고 아름다운 다리를 드러낸 덩리쥔을 좋아하였다.
鄧麗君說,日本的歌迷喜歡她穿旗袍的扮相,兩側開高叉,露出一截玉腿,她本來不知道的,但看到歌迷來信,都要索取她穿旗袍的照片,更有歌迷在信中,寫詩歌頌她的美腿,使她受寵若驚。鄧麗君:「我從未想過,我的腿部具有如此魅力。」她說,「我在日本演片,十分不利,因為和我差不多外型及歌路的女星不少,故公司為我設計穿著旗袍的形象而已。」這說明了鄧麗君一開始並沒有特別偏愛穿著旗袍,而是因為歌迷喜歡所以才穿,以及是因為唱片公司的策略。而在台灣後來也因為發表像「淡淡幽情」這類的中國傳統風格專輯,日子久而久之,旗袍也就變成了鄧麗君登台的時候,習慣穿著的服裝之一。
덩리쥔이 말을 하기를, 일본의 팬들은 그녀가 양쪽을 높게 트이고 아름다운 다리를 노출시킨 치파오를 입은 모습을 좋아 한다고 하였는데; 그녀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팬들이 보내 준 편지--모두가 그녀가 치파오를 입은 사진을 바란다는 것을 보고서 더욱이 어떤 팬은 편지 속에 그녀의 아름다운 다리를 노래한 시를 써서 보냈다. 이런 것이 그녀를 너무나 과분한 사랑에 어쩔줄 모르게 하였다. 덩리쥔: 나는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내 다리가 이처럼 매력이 있다는 것을. 그녀가 이야기하였다: 내가 일본에서 공연할때 매우 불리하였어요, 나와 거의 차이가 없는 자태와 노래스타일을 가진 여자 스타가 적지 않았기에, 회사에서 나를 위하여 치파오를 입은 자태로 설정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설명한 덩리쥔은 애당초 특별하게 치파오 입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다고 하였지만 팬들이 좋아하였기에 비로소 입기시작하였고 또한 음반 회사의 전략이었어요,그리고 대만에 나중에 돌아와서도 「淡淡幽情」같은 중국 전통풍격의 앨범을 발표하였기에 세월이 흐르고 흘러,치파오는 덩리쥔이 무대에 오를 때, 습관처럼 입는 의상 중의 하나로 되어 버렸다.
鄧麗君對於到大陸演唱的情感演變대륙 공연에 대한 덩리쥔의 소회의 변화
萌芽期 初生之犢不畏虎싹트던 시기, 갓 태어난 송아지는 호랑이도 무섭지 않네
2010年5月,筆者拜訪了鄧麗君文教基金會,在一次的談話中,鄧麗君的三哥鄧長富說:「我妹妹,她不懂政治,她甚麼都不懂!」,我當時乍聽之下,以為只是一時的意氣之詞,或許是鄧麗君的三哥不願意再把鄧麗君與政治框在一起,所以才這樣說著。畢竟在鄧麗君過世後的這近幾年,唯一代表鄧麗君的官方機構「財團法人鄧麗君文教基金會」可是相當賣力地挺進中國大陸市場的。雖然當初如此認為,但在訪談事後,經過我反覆的調閱資料及查證,終於也就弄懂了鄧麗君的三哥為什麼會這樣說了! 鄧長富:「有一次,受邀到香港參加宴會,去了之後才發現是為雙十國慶所舉辦的,當時,我們都說不要上台,不想跟政治有太多牽扯,別上台。可是我妹妹,就自己拿著國旗上台,跟著人家一起揮起旗來了。」,鄧麗君說:「揮我們自己國家的國旗,有什麼好怕的!」,當時的鄧麗君,就跟大部分的台灣人一樣,認為熱愛自己的國家是一件非常自然的事,又何需顧慮的那麼多呢!
2010년5월 필자가 덩리쥔 문교기금회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중에,덩리쥔의 셋째 오빠 덩창푸가 이야기하였다. 내 여동생 그녀는 정치를 잘 몰랐어요, 그녀는 아무것도 모두 알지 못했어요! 나는 그때 잠깐 들었을 때ㅡ 단지 한때의 감정의 말이나 아니면 덩리쥔의 셋째 오빠로서 더이상 덩리쥔을 정치권과 함께 엮기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여겼었다.결국 덩리쥔이 세상을 떠난 뒤 수년이 가까와 지는데, 덩리쥔을 대표하는 유일한 공식기구인 「財團法人鄧麗君文教基金會」은 중국대륙 시장에 상당히 애써서 진출하려고 한다.비록 당초 이처럼 생각하였지만, 이번 대담을 마치고 나서, 나는 되풀이 하여 자료와 증거를 살펴보고는 마침내 덩리쥔의 오빠가 어쨰서 이렇게 말을 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가 있었다. 덩창푸: 어느날 홍콩에서 연회에 참가해 달라고 초청을 받고서 갔었는데 그서야 비로소 쌍십절국경절에 의하여 개최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모두 무대에 서지 말고, 정치와는 많이 연관을 가지지 않을 생각이어서,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하였지만,내 여동생은 스스로 국기를 들고서 무대에 올라 사람들과 같이 깃발을 휘둘렀다. 덩리쥔이 말하였다: 우리가 자기 나라 국기를 휘두르는 것이 그렇게 무슨 무서운 것이 있나! 당시의 덩리쥔은 대부분의 대만인과 마찬가지로 자기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겼고, 또한 무슨 고려해야 할것이 그렇게나 많나요!
家庭經濟的主要支柱 가정살림의 주된 기둥
鄧麗君的父親鄧樞,以前是一名軍人,1949年攜同家人跟隨著中華民國政府從中國大陸退守到台灣。1953年1月29日,鄧麗君出生在台灣雲林縣褒忠鄉田洋村,本名鄧麗筠。從小在這樣一個軍人的家庭中生長的鄧麗君,由於鄧媽媽愛好音樂,每次看電影聽戲都帶著她,於是培養出鄧麗君在音樂方面的興趣,開始時,也都是鄧媽媽替鄧麗君報名歌唱比賽,帶著鄧麗君去試音,而鄧麗君的父親也是時常一早就帶著鄧麗君到河邊吊嗓子。九歲時,鄧麗君便隨著九三康樂隊四處勞軍,十歲時參加「中華電台」黃梅調歌曲比賽以「訪英台」贏得冠軍,接著又應「中廣」的邀請,出任六個廣播節目現場的演唱,從此開啟了鄧麗君的演唱生涯,並且也開始成為家庭中主要的經濟來源。 덩리쥔의 아버지鄧樞는 이전에는 군인이었는데, 1949년 중화민국 정부가 중국대륙에서 후퇴하는 것을 따라서 가족을 데리고 대만으로 왔다. 1953년 111월29일 덩리쥔이 대만의 운림현 포충향 전양촌에서 태어났는데 본래 이름은 덩리윈(鄧麗筠)이다. 어릴 적부터 이런 군인가정에서 자라난 덩리쥔은, 덩리쥔의 어머니가 음악을 매우 좋아하여, 영화나 연극을 볼때 마다 덩리쥔을 데리고 갔는데, 이것이 덩리쥔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주게 되었다. 처음에도 늘 덩리쥔 어머니가 덩리쥔을 대신하여 노래자랑대회에 신청을 하고, 그녀을 데리고 경연에 참가하였는데 덩리쥔의 아버지도 늘 아침일찍 그녀를 데리고 강가로 가서 발성연습을 하였다. 9 살때 덩리쥔은 九三康 밴드를 따라 군 위문을 다녔고 10살 때 중화 텔레비젼 방송국 黃梅調노래 경연대회 에 참가하여 「訪英台」노래로 일등상을 차지하였고, 이어서 또 「中廣」의 요청을 받아서, 6개 라디오 프로그램의 현장 공연을 담당하게 되어 이때 부터 덩리쥔의 연예 인생이 시작되었으며 아울러 또한 집안의 주된 경제적 원천이 되기 시작하였다.
1967年,學校得知鄧麗君一邊讀書之外,私底下還在外登台獻唱,於是找來家人商討,希望能讓鄧麗君專心的讀書,最後鄧麗君及家人做出了決定,從金陵女中休學並選擇了歌唱這條路。雖然說歌唱是鄧麗君的最愛,但是未能像一般人一樣地讀書求學又何嘗不是鄧麗君的遺憾呢! 1967년 학교는 덩리쥔이 공부하는 것 이외에 남몰래 바깥에서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때 가족을 불러 상의하였는데, 덩리쥔이 오로지 학업만 하기를 바랐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가족은 결정을 내렸는데, 진링여중을 휴학하고 아울러 노래하는 이길을 선택 하였다.비록 在過去,普遍的媒體報導皆是說鄧麗君小時候的家庭經濟比較貧窮,而在五歲時鄧麗君的父母便安排她到屏東市仙宮附近學習芭蕾舞,但是在當時的台灣社會,百姓在經濟方面可說是普遍的貧窮,是很難有這個閒錢來學習芭蕾舞,小孩子穿著修補過的衣服可說是稀鬆平常的事,這與之前的媒體報導顯然出現與事實不符合的現象。鄧麗君的三哥於鄧麗君過世後的一次採訪中首次透露,「小時候,我們家其實是小康家庭」,那這事總算也有了個符合情理的解釋了。但為什麼在1992年的華視採訪,在鄧麗君談說中仍然出現「因為小時候比較窮」這樣的用詞,那恐怕是小時候的鄧麗君真的感受到了自己的家庭比較貧窮,因為當時的鄧麗君要時常出門登台演唱掙點錢貼補家用,這或許就是傳統男尊女卑觀念之下的犧牲品,甚至該認定鄧麗君其實就是家庭培養出來為家裡掙錢的天涯歌女。
人生的轉類點 因緣巧合 不久,鄧麗君加盟了宇宙唱片公司,同年9月推出了第一張專輯「鳳陽花鼓」。在接下來的歲月裡,鄧麗君的生涯,主要就是四處登台演唱,經常在台灣、香港、新加坡及東南亞各地演出,也曾經參加過義唱,後來甚至轉戰到了日本。1973年11月,鄧麗君初到日本,正好趕上日本音樂界年末的各類盛會,日本唱片公司的舟木先生就順道帶領她去參觀日本音樂界的頒獎會場,鄧麗君當時看了「新人賞」的現場,就說:「明年我就要拿這個獎。」但是鄧麗君的歌唱生涯並非一直都一帆風順,在1974年3月初次進軍日本的時候,鄧麗君失敗了,首張唱片銷售量黯淡收場,鄧麗君還因此感到非常自責。為了搶得當年的「新人賞」,日本唱片公司很快地調整歌曲路線,同年6月改以演歌路線,推出單曲「空港」獲得日本唱片大賞「新人賞」等獎項,一舉打進日本唱片市場,開創了鄧麗君在日本演藝圈的道路。 直到1979年在日本發生了「假護照風波事件」,鄧麗君因為文章前面所提到的緣故,於是輾轉到了美國進修並舉行北美巡迴演唱。同年鄧麗君的歌曲突然在中國大陸造成轟動,更出現了「白天聽老鄧、晚上聽小鄧」「只愛小鄧、不愛老鄧」的說法。後來甚至謠傳中國大陸向鄧麗君提出邀請,並且承諾在四川舉辦數十萬人規模的演唱會。中華民國政府在得知此一情形之後,當時的總統蔣經國便在總統府召見了新聞局長宋楚瑜,基於台灣政府剛宣布對中共的重要國策,三不政策「不接觸、不談判、不妥協」,希望能勸阻鄧麗君登陸舉辦演唱會一事,於是便派員前往與鄧麗君溝通,希望鄧麗君能以大局為重、國家為重,後來達成協議,台灣政府不會刁難有關之前假護照事件,並希望鄧麗君能夠回台灣為國家勞軍,並積極培養其成為對中共進行統戰的歌手,這也是鄧麗君成為愛國藝人的轉類點。後來中共當局便以這首「何日君再來」為首的歌曲,進行查禁歌曲的行動。 1979年,鄧麗君的歌在中國大陸突然大受歡迎,當時的解釋是因為文化大革命時音樂創作受到諸多壓制,而且政治氣味濃厚,文化大革命後,便有了浪漫風氣反應,青年突然喜愛抒情的歌曲。但為什麼鄧麗君的歌曲特別受歡迎?有人認為那是因為她的1930年代風格,當時的中國大陸音樂就停留在那個時代。當時的鄧麗君也無法解釋為何那麼受中國大陸歡迎,她說:「我錄音時把全部的精神感情灌輸進去,聽眾可以感受得到,我相信是憑這個感動他們。」這說明了鄧麗君的歌曲在中國大陸受歡迎是無心插柳柳成蔭。 回國後的鄧麗君,於1980年10月10日在台北『國父紀念館』舉行義演演唱會,所得全數捐出做為「自強愛國基金」。
而在此時期之前的鄧麗君,雖然是曾經參加過勞軍,但並非是一位內心熱衷政治的人,之所以參加勞軍等等的活動,一部分是因為父親曾經是軍人的緣故,另一方面僅是因為身為一位國民基本的愛國情操所致,所以才跟團演出及勞軍。真切來說,1981年之前的鄧麗君只是一位熱愛歌唱的歌手。 1981年,在一次讀者文摘的採訪問道,如果中國大陸邀請鄧麗君去演唱,她會去嗎?鄧麗君說:「我當然願意為那裡的同胞演唱,據說有千百萬人欣賞我唱歌。但問題不在音樂,而在政治。我所關心的只是人和音樂,這和政治和革命一點關係都沒有,我希望搞政治的人明白這一點。」,在這段鄧麗君的話語中,不難發現,鄧麗君對於因情勢所逼而答應被培養為統戰歌手,已然心生不悅,這對於鄧麗君這樣一位崇尚自由與民主的人而言,是相對的感到反感。 還記得在前言的段落裡,寫道的一段鄧麗君的五弟鄧長禧的談話嗎?這一段的談話內容如果是套用於鄧麗君一生的註解是適用的,但若是以在當時發表內容的時間點來評論,內容其實夾雜著一些不被信任的字句,即便這是標記上親弟弟所發表的內容。該篇內容是在1980年間應中國時報之邀請所撰寫的一篇文章,在那個時期的鄧麗君又怎麼可能對於勞軍這件事,會有如此感人肺腑的言論呢?!理由無他,就是基於打造成為統戰歌手的出發點所產出的一篇文章。但是為什麼又說這段內容適用於鄧麗君一生的註解呢?正因為鄧麗君在這樣因緣巧合又半推半就的情況之下,被拱為統戰歌手,在接下來參與勞軍的過程裡,鄧麗君卻真的成為名副其實的「軍中情人」。
轉變期 因為接觸所以受感染
同年8月,鄧麗君在香港獲頒『金唱片』獎,一次拿到5張白金唱片,回國後的鄧麗君開始參加勞軍活動『君在前哨』(1981年8月)、『金門廣播站』等等的活動,台灣新聞局更是頒發「愛國藝人」獎座,也因此有了『愛國藝人』的稱號。而在勞軍的的過程裡,鄧麗君的歌聲也因為深受高層軍官的喜愛,在國防部政治作戰部的授意之下,借由軍報「青年日報」力捧為『軍中情人』。
勞軍晚會採訪片段 在參加勞軍晚會時,主持人問說為甚麼比較常參加國內公益表演、勞軍活動呢? 此時期的鄧麗君,因為很多的勞軍行程感到忙碌,但也是她從一位僅僅是熱愛唱歌的歌手,正式開始發展成為參與政治活動的愛國歌手的時期。 在台灣政府力捧鄧麗君的愛國形象的同時,鄧麗君在中國大陸的影響力仍然持續的在發燒,在1983年的反精神汙染運動中,中共當局更是明定不准再唱鄧麗君的歌。 1983年2月,推出世紀經典「淡淡幽情」專輯,這是一張由唐詩宋詞為基礎所創作的唱片。月底應邀前往美國拉斯維加斯「凱薩宮」演唱,是華人女歌星中首位在該地演出的歌手。 1984年1月,於台北舉辦鄧麗君15週年亞洲巡迴演唱會(台北站),並接受英國BBC記者訪問。同年2月於日本正式復出,前後於1984、1985、1986連續三年蟬連全日本有線放送大賞及日本有線放送大賞雙冠軍。1988年8月回台灣參加「光輝的八二三晚會」演出,並開始定居於香港赤柱。 1984年東京,鄧麗君:「做為一個中華民國的國民,我代表所有身在海外,心在寶島的遊子,恭祝總統連任,李副總統當選,在這裡我藉著一首新歌(娘心),與大家來分享這歡欣鼓舞的心情。」 1985年12月,在日本東京NHK大會堂,舉行僅此一場的個人在日本最大型的演唱會「One & Only」。
1987年5月24日鄧麗君接受新加坡「麗的呼聲」節目主持人徐惠民電話訪問。 徐惠民:「那麼前一陣子,我們還聽到大陸的朋友說,哦,你已經受邀請——好像是一份什麼《工人日報》的——邀請你,到他們那邊開演唱會,聽他們講呢,是很確切的哦,是很肯定的,但是事後呢,又沒有成行啊,那麼請問,是您拒絕呢,還是沒有這回事呢?」 鄧麗君:「哦,這個事情,我是完全、我都不知道的,我只是後來,看到報紙,才知道在這個上海,好像還有入場券出售,哎……」 徐惠民:「對呀。」 鄧麗君:「我是看到報紙。我自己,就不知道這件事情,我完全不知道,那麼,後來我聽一些朋友他們講呢,他們說是,完全是一些,哦,香港的商人啦,在從中取利啦,真的跑去賣票去了。」 徐惠民:「那就是說是一個騙局了。」 鄧麗君:「對,對,對。如果,我想如果我,今天我要去什麼地方演唱,就算我去新加坡,去……哦,上電視臺也好,或者是上電臺訪問的話,我想……這種宣傳啊,他們一定會做出來,因為我自己本人我也會,我也會由我自己本人來證實這件事情,但是上一次那,那個演唱會,我、我都不曉得,而且也沒有說從我自己本人的口中傳出來這件事情,我想這完全是因為有一些……哎,這種、這種從中取利的這種人哪,他們覺得這是一個很好的機會,因為、因為我的……——這是在他們來覺得好像,我的這、政治的背景啊,很多地方啊,都好像不太可能,去……自己……好像站出來去把這件事情解決,就有點好像偷偷摸摸的,好像、好像臺灣人要去大陸,哎呀,這件事情不能讓臺灣人知道啊,覺得……他們以為是這樣,其實根本不是這樣,其實根本是一些、我、就是說,不瞭解,真正不瞭解這種情形的人,在中間自己做一些宣傳啦,然後從中取一些這種“利”呀,這樣子。」 徐惠民:「如果是真正地是受到大陸那邊的邀請的話,您會不會考慮……?」 鄧麗君:「啊,我想……啊~……我現在也不知道,哦,因為他們從來沒有說,正式來邀請,那我也不曉得,到時候他們真正來邀請我的時候,我會是怎麼樣的回答,我、我現在也、也不曉得,因為……還沒有時間去想這件事情。呵呵。」 徐惠民:「正如你剛才所說的,可能是,有一些政治背景的關係嘛,會不會是因為,哦,你顧慮到這些?」 鄧麗君:「完全不是,完全、完全跟這個政……政治背景完全是沒有關係的一件事。在很多年以前,就是說,有這樣子的情形,就……很……我想在很多年以前了,當然,我是從臺灣來的,那麼我是臺灣生長的,忽然之間,跟……好像……跟……中國大陸有正面接觸的時候,多多少少,這個心……就是說,心理上完全沒有準備,但是,但是,最近這幾年呢,哦,臺灣的政府方面,他們都很開放,從來沒有,不會去……好像……故意去……好像啊,說,哎呀,你、你不能去呀,你去了以後你臺灣的家庭會怎麼怎麼,這個完……這種事情,這種憂慮根本沒有,完全沒有。」
1995年5月,北京中共中央宣傳部文藝局的一位官員對亞洲週刊說,當時文化部及中宣部針對鄧麗君現象做過商議,文化部向各地發了文件,說是鄧麗君的歌曲中有反抗戰及宣揚港台生活方式的靡靡之音,不宜出現在文化市場上,也不准在電視台、電台和報刊介紹。 後來又傳出中國大陸官方看準鄧麗君的文化宣傳價值,出高價邀請鄧麗君到大陸開演唱會。
大陸邀請鄧麗君去演唱 1988年中國大陸的中央電視台向鄧麗君發出參加第四屆海峽之聲音樂會的邀請,春節聯歡晚會的導演組也多次運作邀請她參加,但都屬於計畫的階段,最終都沒有成行。
在這個時期說明了1981年以前的鄧麗君,對台灣政府威權時代的不滿,對突如其來的勞軍工作產生情緒上的反彈,但隨著勞軍工作的投入,也開始接受現實並且了解政治,而到1987年代的台灣政局卻也因為人民要求改革的聲浪高亢,於同年7月15日宣布解除戒嚴令,允許人民回大陸探親;開放黨禁、報禁‧‧等。恢復人民少部份憲法所賦與的權利。鄧麗君並且由完全尚未考慮過到大陸演唱,轉變到有計畫去大陸開演唱會的想法。
決定期 一切由自己作主
來自人性的衝擊 1989年4月15日,中國大陸的胡耀邦逝世。就在代表改革派的胡耀邦十五日過世的下午,學生悼念胡耀邦在北京天安門進行示威活動,數千名學生高舉『打倒獨裁,反對官僚主義』並提出『重新評定胡耀邦』及『徹底否定去除精神污染及反對資本主義自由化』的訴求。 1989年5月27日,鄧麗君赴香港跑馬地演唱聲援「民主歌聲獻中華」活動,鄧麗君當天的頭帶寫著「民主萬歲」,頸上掛了一塊牌子,正面寫著「反對軍管」,演唱「家在山的那一邊」。同年5月28日『全世界華人抗議日』,支聯會舉行全球華人大遊行,香港有150萬人參與,澳門和上海都有約5萬人在當地遊行。台北、高雄、大阪、舊金山、洛杉磯、雪梨都有華人在當地遊行。6月4日爆發天安門事件『血的鎮壓』,鄧麗君對中共徹底失望及痛恨,並說:「我回大陸演唱的那一天,就是三民主義統一中國的那一天」。1989年末,鄧麗君的演藝事業進入半退隱狀態,並在法國邂逅了她一生的最後一位男人保羅,而後在法國置產,生活重心移往個人感情生活。
1991年金門自費回國勞軍 1991年3月回到台灣,並自費前往金門勞軍。鄧麗君在金門前線馬山觀測所時,向大陸的喊話:「 親愛的大陸同胞們,你們好,我是鄧麗君。我現在來到金門廣播站向大陸沿海的同胞們廣播,我今天要跟大家說的是,我很高興地能夠站在自由祖國的第一前線——金門,我感覺到非常地快樂、非常的幸福。我希望大陸的同胞也可以跟我們享受到一樣的民主跟自由,唯有在自由、民主、富庶的生活環境下,才能擁有實現個人理想的機會;也唯有全體青年都能夠自由發揮聰明才智,國家的未來才能充滿光明和希望。我希望很快地能夠再回到金門,跟金門的弟兄們見面;當然,還有跟沿海的大陸同胞們通話。在這裡祝大家身體健康,民主萬歲!謝謝!」 鄧麗君說:「就算我去大陸演唱的話,他們如果請我去演唱的話,有人問我說,你不喜歡那個制度,可以去唱給人民聽啊?!可是現在我沒有什麼多大興趣,我等你們一塊去!」,鄧麗君有所為,有所不為。 鄧麗君:「參觀八二三戰史館之後呢!感慨非常的深,使我更加的熱血澎湃的就是,我在想,經過這次戰役以後呢!我們年輕的一代,是更勇敢,更熱情,而且更有智慧!如果解放軍再來的話,我們一點都不怕你!」 同年於香港受訪時,表示已是退休階段,日後除慈善義演之外,不再做公開演出。
這個時期的鄧麗君,因為1989年在中國大陸發生的事件,認清了中共的本質,開始採用強勢的作風來表達自己的主張。
鄧麗君為什麼不願意到大陸演唱?
1991年8月,鄧麗君在巴黎法國國際廣播電台接受採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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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年鄧麗君在接受有田芳生的採訪時曾說:『因為在事件之前我們很積極的支持活動,如果我們當初不那樣努力支持的話,說不定學生就不會被殺。現在只要一唱歌就會想哭,內心的感覺也一直無法安定,我算是愛哭鬼吧!眼淚很容易奪眶而出,就因為如此,讓我感到演唱是不好的。』鄧麗君因為先前用歌唱方式來支持天安門的民運,緊接著卻發生六四事件,鄧麗君為此感到自責與悲傷。
1992年華視專訪:「尤其是在國外遇到一些不開心,又或者挫折的時候,我心裡就想,那我就回台灣,因為我家人都在,而且台灣是我生長的地方。我熱愛台灣的一些文化,台灣的水果是最好的,去到任何一個地方都比不上台灣。」,儘管鄧麗君先前因為身為藝人或是愛國藝人的身份,而感到被束縛、不夠自由,但台灣對鄧麗君而言,仍然是最後的避難所及歸宿。
1993年3月回到台灣,在台中清泉崗空軍基地舉辦「永遠的情人」勞軍晚會。 1993年3月,鄧麗君主動要求在香港亞洲電視台的「龍門陣」亮相,該節目以針貶時弊、詞鋒銳利著稱,在節目中說:「我沒想過政治,也不理哪一邊的中國,我只希望每一個中國人都生活的好」。 1994年6月回到台灣,參加慶祝陸軍官校七十周年慶「永遠的黃埔」勞軍晚會,鄧麗君說:「我記得,我的歌唱生涯大概是從八九歲的時候開始的,在那個時候呢!我就常常唱一首歌,那麼到現在呢!我也很喜歡那首歌曲─台灣好」,並且在晚會上陸續演唱了「梅花」、「台灣好」等愛國及反共歌曲,鄧麗君重申自己的政治立場。鄧麗君說:「因為…怎麼講,好像因為我父親那一代就是從大陸逃難到台灣來的,所以呢!我們就是第二代,總是好像父母的心願總是還沒有了,總是有一種感覺,希望有那麼一天能夠解救我們在大陸苦難的同胞,就是這種感覺。」
為什麼到巴黎? 去到遙遠的地方
鄧麗君從小就一直為家庭付出,父親管的嚴,母親也一直都跟在身邊。 從以上這點不難看出,鄧麗君對自己家庭的照顧真的相當多,至於鄧氏父母對鄧麗君的愛與關懷,這當然是無庸置疑的。 鄧麗君的父親在家庭的角色,就是負責擔任鄧麗君的經紀人,也就是洽談演出及酬勞。在鄧麗君歌唱事業轉往日本發展的事情上,鄧父也扮演著關鍵性的角色,參與演出與否主要也都是酬勞的問題,因為擔心當時的鄧麗君在東南亞已經發展得不錯,又何必冒險到日本去從頭開始呢! 左宏元:「可能是因為覺得家裡管的太嚴,所以在他父親過世之後,就一下子跑到很遠的地方去了!」。以前鄧媽媽也一直都跟在鄧麗君的身邊,以致鄧麗君時常抱怨,跟朋友出去別人都沒有媽媽跟著。 另一方面的因素,來自於人生最後的感情寄託,男友保羅。他是法國人,生活習慣跟鄧麗君也有很大的差異,當時家裡很反對這段戀情。鄧麗君其實也知道不適合,畢竟相差了十五歲之多,又是中西兩種文化上的差異,但是就是離不開這段感情,家裡的人也只好莫可奈何。另外的原因也是怕別人問起這段感情,乾脆也就離開的遠遠的。
最後一次的回家
1995年5月8日,鄧麗君因為氣喘病發去世。當日傍晚,在泰國北部城市清邁的湄賓酒店,氣息微弱的跑出所住的1502號房,當酒店的服務員發現她的時後已經有些遲了,30分鐘後她被送到市區的清邁藍姆醫院進行急救,就已經沒有了呼吸,鄧麗君孤獨地死在搶救的路途中。當時她的男友保羅正巧外出,保羅趕到醫院時鄧麗君已經去世,他非常悲痛,並不允許醫院觸碰遺體,還在太平間守候了她一晚。當她的家人接到酒店報喪的電話時。她的家人都驚呆了,誰也不能相信這是事實。 鄧麗君的遺體於5月11日的深夜由清邁返抵國門,數以百計的中外媒體和民眾守候在中正機場,迎接鄧麗君最後一次的回家。
筠園
1995年5月28日,鄧麗君的公祭在台北市第一殯儀館舉行。中華民國政府為表揚鄧麗君的愛國情操和演藝成就,特頒發褒揚令,明令褒揚。喪禮採用國葬儀式,靈柩上覆蓋青天白日滿地紅國旗和青天白日黨旗,當時的總統李登輝特頒「藝苑揚芬」輓額。國民黨並追贈最高榮譽獎章「華夏一等獎章」給鄧麗君。治喪委員會由當時的台灣省長宋楚瑜擔任主委,時任行政院長的連戰、前行政院長郝柏村、國防部長蔣仲苓、台北市長陳水扁等中華民國政要也親臨致哀,宋楚瑜並且為鄧麗君的墓園「筠園」題名。 下午約1時30分靈車抵達金寶山墓園,從殯儀館到金寶山墓園有多不勝數的歌迷夾道相送。2時整,覆滿鮮花的銅棺緩緩的降下,眼淚和百合花一起歸入泥土,自此與君相逢也只能在夢裡了。
總結
1953年至1980年期間,鄧麗君只是位熱愛音樂及關心人際關係的歌手,不熱衷於政治,但愛國情操對於鄧麗君而言是一件自然而沒有負擔的事,並且成為家庭經濟來源的主要支柱。而在當時,台灣的政局是屬於威權時代,鄧麗君對台灣政府給予的太多束縛,感到不滿。 1981年至1988年期間,是鄧麗君轉變為參與政治活動的時期,而台灣的政治環境也轉向開放,鄧麗君也對台灣政局的看法由壞轉好,並且由尚未考慮過前往到中國大陸演唱,轉而有去大陸開演唱會的想法,但都屬於計劃的階段,最終都沒有實行。 1989年至1995期間,鄧麗君對政治活動的熱衷程度陷入狂熱階段,並且自費勞軍,表現出對中共痛恨至絕,並強烈要求自由與和平以及民主。在演藝事業方面卻已進入半退休狀態,但仍然熱愛音樂,想要再深造,並且已經無意前往中國大陸演唱,生活重心轉移到個人感情生活及慈善事業,希望能對自己的國家(中華民國)或同胞(華人)有點貢獻。
鄧麗君說:「如果今天要我選擇,我寧願做另一個人,我不想做鄧麗君。」
鄧麗君說,她的命運,從來不能掌握在自己手上,沒有事業心,卻有機會不停工作,想嫁,又找不到好對象。 「我沒有想過要流浪,但我不是日本人,也不是香港人,但因為工作要不停流浪,我想做平凡人,現實不讓我做。」 鄧麗君把朋友分為兩類:「對普通朋友,我會很友善,友善與誠懇,這是最重要的交友態度。就算人家認識你,但你態度不友善,人家也不會理你,我也遇過不理你是鄧麗君的人。」另一類的朋友,自然是我們最珍惜的知己。 她心中的好友,謝玲玲排在重要位置,「玲玲是一個令人產生舒服感與安全感的人,她不多言,沉默,有好多次,我們能做到互相安慰,互相開解,而且,她從沒有出賣過我。」
鄧麗君從來沒有覺得自己是巨星,她唯一的想法就是「唱好歌,讓樂迷覺得有百聽不厭的感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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