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 올마이티>로 우리 앞에 나타난 스티브 카렐은 이 시대의 소심한 중년 남성이라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캐릭터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은 배우다. 코미디언에서 출발해 주연배우로 거듭난 그는 강한 캐릭터 한 가지로 전성기를 구가 중이다.
배우 중에는 넓은 스펙트럼으로 인정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 가지 캐릭터로 주목을 받는 이도 있다. 곧 개봉하는 <에반 올마이티>의 스티브 카렐은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는 “개그를 연구하면서 줄곧 무능하고 소심한 중년 남자에 관심을 가졌었다”고 밝힌 만큼, 다양한 무대에서 무능한 중년 캐릭터만을 고수한 독특한 배우다. 또한 국내로 치자면 이한위, 오달수 같은 특급 조연에서 유해진, 이문식처럼 개성 하나로 주연으로 발돋움을 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배우이자 극작가이며 코미디언인 스티브 카렐은 1963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 후에 법률가의 꿈을 잠시 꾸지만 바로 접고 배우로 전향했다. 그는 1991년 시카고의 유명 코미디 극단인 ‘세컨드 시티’에서 연기활동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코미디 연기의 단짝인 스테판 콜베어을 만나게 됐으며, 그 해 <내 사랑 컬리수>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무명시절을 보내던 그는 <데이나 카비 쇼>(1996) <세터데잇 나잇 라이브>(1997)등의 TV 쇼를 통해 코미디언으로서의 명성을 쌓아갔다. 한편으로는 <오버 더 탑>(1997)<워칭 엘리>(2002~3)등의 시트콤과 우디 앨런의 <멜린다 앤 멜린다>(2004)에 조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연기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것은 무엇보다도 1999년 존 스튜어트의 정치 풍자 코미디 프로그램 <데일리 쇼>에서 통신원을 맡으면서다. 2005년까지 방영된 이 쇼는 20여분 간 그날의 이슈들을 뉴스형식을 빌려 풍자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다. 카렐은 트레이드마크인 무표정한 얼굴과 퀭한 눈빛이 오묘한 빛으로 변화하는 표정연기와 상황을 거스르는 대사 구사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내면 가득 들어찬 소심함은 카렐의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스티브 카렐은 2004년을 끝으로 프로그램에서 하차했지만 이듬해 흥행배우가 돼서 통신원이 아닌 게스트로 프로그램에 다시 출연한 에피소드는 아직도 회자 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다.
카렐은 2003년부터 할리우드에서 본격적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특히 짐 캐리와 공연한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말도 안 되는 멘트를 쏟아내는 앵커 에반을 연기했으며, 윌 페렐과 함께한 <앵커맨>(2004)에서는 아이큐 48의 기상캐스터를 연기하는 등 개성 강한 조연을 맡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 나갔다. 2005년, 스티브 카렐 자신이 각본과 기획과 첫 주연까지 맡은 <40살까지 못해본 남자>는 그의 연기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이다. 첫 경험을 하기 위한 작전을 펼치는 중년 숫총각 이야기는 스티브 카렐이 시카고의 극단 ‘세컨드 시티’에서 다진 경험과 아이디어에서 발전한 것이다. 그의 숙련된 코미디 정서는 이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제모 시술을 받으러 갔다가 얼룩이 되고 마는 식의 몸 개그가 연달아 이어지고 섹스 코미디에서 수줍음 많은 스티브 카렐이 자아내는 황당한 대사와 상황들은 미국인들의 배꼽을 사정없이 압박했다. 뿐만 아니라 베터랑 연기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만년 조연에서 자신 혼자서도 극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스티브 카렐에게 골든글로브 TV뮤지컬코미디 상의 영예를 안긴 NBC의 인기 시트콤 <디 오피스>에는 스티브 카렐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2005년부터 현재 세 번째 시즌을 마쳤지만 시즌이 더해 갈수록 인기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극중 스티브 카렐이 맡은 역할은 회사의 세 번째 덕목은 엔터테인먼트요,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이나 공부하는 것 모두 개그라고 우기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무능한 마이클 스콧 부장. 자신의 유머를 직원들이 너무 좋아하고 모두들 자기를 존경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스콧은 사실 눈치 없고, 능력이 없는 상사의 대명사다. 가령 한 에피소드에서 그는 신입직원을 회사에 적응시킨다는 명목 하에 포스터 잇을 남용한다는 것을 근거로 선배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한다. 하지만 곧이어 흐느끼는 직원에게 “몰카야!” 라고 소리치며 놀려댄다. 그 직원은 화가 나서 뛰쳐나가고, 스콧 부장은 어안이 벙벙해진 신입사원에게 “이렇게 재밌게 일하는 회사”라며 혼자 낄낄거리는 식이다.
한편으로 스티브 카렐은 한결같은 표정과 정서를 가진 캐릭터에 변화를 주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확장했다. <미스 리틀 선샤인>(2006)에서 그가 연기한 프랭크는 ‘소심한 중년’이라는 공통분모는 유효하지만 그간 코믹한 분위기와는 또 달리 수척해진 외모와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난 폐인으로 등장한다. 프루스트 연구의 권위자로 대학 강단에 섰던 프랭크는 유치원생인 조카딸에게 대학원생이었던 동성 애인에게 버림받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엉뚱한 캐릭터다.
이렇듯 그가 단독으로 출연한 작품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면서 스티브 카렐은 작년, ‘프랫 팩(Frat Pack)’의 일원으로 등극한다. 이는 각자의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수많은 영화에 함께 출연하거나 서로 품앗이 하는 할리우드 남자 코미디 배우들을 이르는 비공식 명칭. 프랭크 시나트라를 중심으로 한 'Rat Pack' 이라는 그룹의 명칭과 80년대 배우들 그룹의 명칭 'Brat Pack' 를 합성해서 US투데이에서 만든 신조어다. 기존 멤버로는 잭 블랙, 윌 페렐, 벤 스틸러, 빈스 본, 오웬,루크 윌슨 형제가 있으며, 그들만의 얼치기 정서로 무장했다는 큰 특징이 있다. <앵커맨>이나 <스타스키와 허치><피구의 제왕>은 이 그룹의 정수를 품고 있는 대표작이다. <40살까지 못해본 남자>로 데뷔한 저드 애퍼토우 감독과 스티브 카렐의 대부분의 영화에 같이 출연한 폴 루드는 ‘프랫 팩 주니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 창 잘 나가는 그가 두 번째 주연을 맡은 <에반 올마이티>는 전편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짐 캐리의 못된 라이벌 앵커 에반이 개과천선하고 국회의원이 된 후 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반이 신으로 부터 워싱턴 한복판에 노아의 방주를 만들라는 계시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판타지 코미디로, 미국 코미디 영화로는 사상최고액인 1억 7,500만 불의 제작비가 소요됐다. 하지만 개봉 직후 관객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영화의 크기에 걸맞게 스티브 카렐도 소심한 캐릭터에서 조금 더 벗어나는 변화를 시도했지만 전작들에 비해 웃음이 약해졌다는 평가다.
현재 스티브 카렐은 앤 해서웨이와 1960년대 미국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된 희극 첩보물을 영화화하는 <겟 스마트 Get Smart>에 출연 중이며, 애니메이션 <호튼 히어즈 어 후 Horton Hears A Who>에도 목소리 출연을 하고 있는 등 바쁜 한때를 보내고 있다. 가족 코미디물인<댄 인 리얼 라이프 Dan in Real Life>도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괄시받기 일쑤인 소심함을 낄낄거리는 유머로 승화시키는 스티브 카렐은 극과 극이 통한다는 진리를 아는 배우다. 그는 한 가지 캐릭터를 반복하면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소심하고 무능한 중년남성 스티브 카렐은 이제 마초 윌 페렐과 '돌아이' 잭 블랙, 꾀돌이 벤 스틸러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얼치기 영화를 빛낼 스타로 각광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