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점령시기 만주에서 발행되던 만선일보(滿鮮日報)에 중학생 신분으로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한 천재시인 심연수(沈連洙? 1918~1945). ‘제2의 윤동주’라 불리며 학계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 그를 광복 58주년을 즈음해 되새겨본다. /편집자주
해방을 일주일 앞둔 1945년 8월 8일 중국 간도성 왕청현. 27세의 청년이 거친 숨을 내쉬면 어두운 산길을 헤치며가고 있었다.
일본이 곧 패망한다는 소문을 듣고 2년여 도피생활을 청산하는 길이었다.
가족들이 사는 용정이 막 눈에 보이는 순간. 정적을 깨뜨리는 총성과 함께 그는 풀밭에 쓰러졌다.
일본대학 졸업후 학도병 징병을 피하기 위해 흑룡강성에 숨어들어 소학교 교사로 지내던 심연수. 학생들에게 반일 사상과 독립의식을 일깨워 두 차례 구속되기도 한 그가 시인 윤동주와 어깨를 나란히 한 걸출한 민족작가인 사실이 알려지기 까지 역사는 반세기를 넘게 기다려야 했다.
고인이 영면한지 55년이 지난 2000년에야 유족들은 항아리 속에 숨겨온 고인의 유작을 공개했다.
그의 작품이 비로소 연변 사회과학원의 ‘문학과 예술’ 잡지에 실리자 학계는 흥분했다.
남성적이며 거창한 문체, 일제 강점기 정신적 빈곤을 파헤친 거침없는 그의 글들은 가히 ‘저항문학’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학계가 그에게 ‘제2의 윤동주’라고 부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다.
그를 동시대를 호흡한 윤동주와 같은 반열에 올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변 현지에선 ‘심연수 문학작품연구소’가 세워져 그의 작품 전반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국내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가 불붙기 시작했다.
중앙대 이명재 교수는 “심연수의 작품을 미학적 특성과 문학사적 의미에서 분석할 때 실로 식민지시대 항일문학의 전형”이라며 “민족수난의 삶과 항일적인 작품 실적 등에서 결코 윤동주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한글문학을 지켜온 쌍벽”이라고 말했다.
관동대 엄창섭 교수는 “그의 작품에는 그 시대 한국인이 품고 있던 본원적인 기대와 갈망, 고향에 대한 자연회귀의식 등 다양한 정서가 표출되고 있다”면서 “일제 강점기 그만의 빛나는 서정은 한국적 자연에 힘입고 형상화돼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했다.
심연수의 유작은 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평론 등 312편에 이른다.
연변인문출판사가 이 가운데 238편을 ‘심연수문학편’이란 책으로 엮어냈다.
이밖에 그가 창작 공부를 위해 베껴 쓴 창가노트 1권, 미술 습작을 한 노트가 더 있다.
편지 200여통과 일기, 기행문도 남아 일제 당시 생활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시와 일기 곳곳에서 일제강점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민족사상을 은밀하게 시사하는 대목이 발견된다.
을지문덕을 찬양하면서 구국의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대목이나 만주국이 문약(文弱)해 독립투쟁에 나서지 않는 점을 비판한 대목 등에서 그의 저항정신이 배어난다.
남다르다고 할 만큼 강렬한 저항성을 띤 심연수의 문학성은 시편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대표적 저항시 ‘소년아 봄은 오려니’에서 좌절과 어둠 속에서도 봄(광복)을 기다리는 의지가 강렬하게 피어났으며, ‘고집’에선 굽실거리는 친일파들의 아부에 메스를 가했다.
당시 민족적인 경향이 드러나는 한글작품을 발행하기 어려운 시대였는데도 그가 발간을 염두에 두고 시집형식으로 묶은 유작 노트집은 그의 문학적 열정과 민족정신을 그대로 전해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문학사에 있어 심연수의 갑작스런 등장은 1941~1945년 한국문학사의 암흑기를 규명하는 키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한글사용을 금지 당하고 친일문학가가 득세하는 등 일제말 우리민족의 문학상황은 그동안 학계에서는 ‘수치에 찬 문학의 공백기’로 남아있었다.
또 당시 용정을 중심으로 한 간도지역에서 한글문학 창작행위에 대한 재조명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박영순 기자
2003-08-13
심연수-윤동주 비교
심연수와 윤동주는 만주서 소년기를 보내고 일본서 유학한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동시대 작가이며 민족의식을 형상화한 유작을 남기고 광복 직전에 일제에 의해 요절했다.
두 시인은 같은 용정 땅 가까운 거리에서 중학시절을 보냈다.
윤동주는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을 염두에 두고 자필로 3부를 남겼으며, 심연수는 48편을 묶은 자선시집 육필 유고집 1부를 남겼다.
윤동주가 부유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서정적 성향의 작품을 구사했다면 심연수는 소작농 유교 집안에서 출생해 호쾌하고 대담한 필치로 남성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남겼다.
유고의 분량은 심연수가 윤동주의 3배에 가깝고 수필, 만필, 일기, 평론 등 장르도 다양하다.
윤동주
12. 30 중국 간도(연변)출생.
기독교 집안, 농촌서 성장
명동소학-은진중-광명중학-연전문과-일본입교대-동지사대 영문과 수학
1934~1942년, 8년 남짓 창작활동주로 시, 동시 발표
유고 116편 남김
은유적, 자성적 작품
정지용류 모더니즘 성향
미혼
945. 2. 16 일본서 옥사함.
심연수
1918. 5. 20 한국 강릉출생
유교집안, 농논서 성장
용정소학-동흥중학-일본대 예술학원 문창과 졸업
1932~1943년, 10여년 간 창작활동
유고 250편 남김
직정적, 대응적 작품
김기림류 모더니즘 성향
신혼수개월 지냄
1945. 8. 8 간도서 피살됨.
/박영순 기자
2003-08-13
심연수 약력
1918년 5월20일 강릉시 경포면 난곡리 삼척 심씨 집성촌인 ‘날밀마을 청룡끝’에서 태어남. 아버지 운택씨와 어머니 최정배씨 사이 3남2녀중 장남.
1925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1928년 조선인 강제이주정책 시행으로 만주국으로 피한다.
1930년 중국 길림성 용정시(당시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 경화촌 길안툰)에 정착
1937년 동흥소학교 졸업. 1940년 동흥중 졸업. 문예반장으로 활동하면서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여창의 밤’등 5편의 시-소설을 게재
1941년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 입학.1943년 졸업과 함께 실시된 태평양전쟁 학병 징집을 피해 용정으로 돌아옴.
1944년 신안진 성서국민우급학교 교사 생활.
1945년 일본 패망 직전의 혼란기를 틈타 5명의 조선인과 함께 용정 집으로 돌아가다 8월 8일 왕청현 춘양진에서 일제 앞잡이에 의해 피살. 현재 전해지는 원고는 대부분 그때 그가 들고 있던 트렁크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피살되기 6개월 전인 1945년 2월 백보배씨와 결혼, 장남 심상룡을 유복자로 두었는데 그는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박영순 기자
2003-08-13
추신: 심연수선생도 제가 따르는 윤동주선생 못지않게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인물입니다. 더 발굴이 늦지 않은 점은 가히 행운이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