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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金勳 (1901 ~ 1936)】 "1920년 청산리대첩 중 백운평·천수평·어랑촌 전투 참전
1901년 평안북도에서 출생하였다. 이명(異名)으로 김춘식(金春植)·양림(楊林)·양녕(楊寧)·양주평(楊州平)·베스티(畢士悌)·주동무(老周) 등을 사용하였다. 부인은 김금주(이명 이추악李秋岳)로 1919년 만세운동 과정에서 인연을 맺었으며, 1924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광둥(廣東)으로 망명한 후 결혼하였다. 중국공산당 최초의 조선인 여성당원이었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평양에서 중학교 재학 중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아버지도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희생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해 가을 만주로 망명하여 지린성(吉林省) 퉁화현(通化縣) 허니허(哈泥河)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해 1920년 5월 졸업하였다. 이후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平)에 있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로 옮겨 구대장(區隊長), 교성대(敎成隊)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9월 12일 사관연성소는 졸업생 298명 가운데 200명으로 교성대를 조직하고 북로군정서의 기간(基幹) 병력으로 양성하였는데, 대장은 나중소(羅仲昭), 부관 최준형(崔俊衡), 중대장 이범석(李範奭), 소대장 이민화(李敏華)·이탁(李鐸)·남익(南益) 등이었다.
1920년 10월 21일을 전후해서는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다. 일제는 만세운동 이후 만주지역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활발해지고 봉오동전투에서의 패전 등으로 예민해진 상황에서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확정하고 만주지역 독립군단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 작전을 시도하였다. 이에 북간도지역 독립군단들은 초기에는 피전책(避戰策)으로 일관하며 지형이 험하고 산림이 우거져 일본군의 접근이 어려운 백두산지역으로 이동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을 추격해 오던 일본군이 만주지역 한인들에 대한 가혹한 학살과 방화·약탈을 자행하자 독립군단의 지도자들은 1920년 10월 16일 허룽현(和龍縣) 싼다오거우(三道溝)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일본군과의 일전(一戰)을 결의하고 부대를 3개 연대로 편성하여 주요 지점에 배치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가 새롭게 편성한 부대 편제에서 이민화·백종렬(白鍾烈)·한건원(韓建源) 등과 함께 사령부 소속의 종군 장교로 임명되었다.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白雲坪)전투에 참가해 이범석(李範奭) 휘하의 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였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부대를 2개의 제대(弟隊)로 나누어 제1대인 본대(本隊)는 총사령 김좌진이 직접 지휘하고, 박격포와 기관총수를 포함한 정예 부대로 편성한 제2제대는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에게 지휘케 하였다. 이때 독립군 부대는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교전지(交戰地)가 될 넓은 고지를 기준으로 철저한 매복을 전개하였다. 정면 좌·우에는 이교성(李敎成)과 그 중대가 배치되었으며, 백운평 계곡의 좌·우 산허리 부분에는 각각 이민화와 한건원의 중대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북로군정서 군의 매복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독립군의 행군 경로를 따라 야스카와(安川) 소좌의 전위 중대가 계곡 안으로 들어서자 독립군은 일제 사격을 가해 이들을 전멸시키는 한편, 야마다(山田)연대 본진에 대해서도 맹공을 퍼부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0월 22일에는 천수평(泉水坪)전투에 참가하여 시마다(島田) 중대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1개 기병 중대를 기습, 말을 타고 도주한 4명 이외에 전원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백운평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군은 일본군의 후속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얼다오거우(二道溝) 갑산촌(甲山村)으로 이동하였으며, 이곳에서 마을 주민으로부터 인근 천수평 마을에 일본 기병 1개 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독립군 지휘관들은 야영중인 일본군을 포위 섬멸하기로 결정하고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때 자신의 중대를 천수평 마을 동쪽의 만록구(萬鹿溝) 고지에 배치하고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민화중대는 천수평의 남쪽 고지를 점령하여 흩어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고 이범석은 한건원·이교성의 2개 중대를 거느리고 일본군의 정면을 공격하였다. 공격이 시작되자 독립군 각 중대는 특히 일본군 기병중대가 자고 있는 촌락과 토성 안으로 집중 사격을 가하고 돌격전을 감행하여 독립군의 기습에 놀라 허둥대는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같은 날 전개된 어랑촌(漁郞村)전투에서도 대원들을 독려하며 격전을 치렀다. 전투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는 한건원 중대와 함께 랴오투(老頭溝) 방향으로 철수하는 본대를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어랑촌전투는 10월 22일 오전 7시 30분부터 해가 질 때까지 얼다오거우 어랑촌 서남방 표고 874고지 남측에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연합부대가 함께한 대격전이었다.
1921년 2월에는 신흥무관학교에서 활동하던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되었다. 그 해 2월 29일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2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개최된 환영대회에서 간도지역에서의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 설명하고 독립운동의 필요성과 독립군들의 용맹성을 강조하는 한편,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이 무기와 병력의 부족으로 퇴각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전하였다. 또한 『독립신문』 1921년 3월 1일자와 21일자에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1)·(2)를 기고하여 청산리전투의 성과를 상세히 소개하였다. 1921년 5월 10일에는 임시정부 내 무장 투쟁파인 이동휘(李東輝) 계열에 가담하여 노태연(盧泰然)·도인권(都寅權) 등과 함께 군사력 양성과 외교문제를 담당하였다.
1921년 말, 보다 전문적인 군사지식을 배울 목적으로 쿤밍(昆明)에 있는 윈난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에 16기생으로 입학하여 제6대 제1구대에 소속되었다. 이때 중국인으로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이름을 양주평(楊州平)으로 바꾸었다. 입학 후에는 학업에 열심이며 두각을 나타내는 우수한 학생으로 인식되었다. 같은 학교 17기생으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5군 군장(軍長)이었던 주보중(周保中)은 “윈난강무학교 교무장은 늘 양림(김훈)을 예로 들어 학생을 교육하곤 했는데 그는 매일 아침 벽돌 10장을 등에 지고 10여 리를 달리며 두 다리를 단련하고 있다고 칭찬하면서 그를 따라 배울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밖에 총검술을 가르치는 일본인 교관이 자신과 맞서서 5분을 버틸 수 있는 중국인 학생은 나와 보라고 하자 모든 학생이 주저하고 있는 가운데 용감하게 나서서 10분 이상을 버틴 후 패할 것이 두려워진 일본인 교관으로부터 ‘장하다’라는 칭찬을 듣고 대결을 끝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1923년 말 윈난강무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자, 교관으로 채용하겠다는 학교측의 제안을 거부하고 1924년 5월 광둥성(廣東省)에 새로 설립된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훈련부 기술주임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중국공산당 광둥구위원회(廣東區委員會)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주도하는 민족해방대동맹(民族解放大同盟)에 참여하였다. 특히 광저우시(廣州市) 동고대도대회당(東皐大道大會堂)에서 개최시 저우언라이의 연설과 보고 등을 자주 접하며, 공산주의사상을 수용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 황푸군관학교 집중훈련처의 주임이 되었으며, 이해 2월 300여 명의 황푸군관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제1차 동정대(東征隊) 제3기 학생대대 제4대장으로 반군벌투쟁(反軍閥鬪爭)에 참가하였다. 6월에는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동정군과 함께 윈난·광시(廣西)의 군벌인 양희민과 유진환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포병과(砲兵科)를 전공한 기술 교관이었지만 주위에 민가(民家)가 많아 포격하기 어려운 지점에 있던 양희민 사령부에 2발의 포탄을 명중시킴으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를 하였다. 11월에는 광둥성 조경현에서 중국공산당이 직접 이끄는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단이 결성되자 제4군 독립단 제3영 영장(營長)에 임명되었다. 또한 이 시기 중국공산당의 핵심을 이루는 중국청년군인연합회(中國靑年軍人聯合會)에 가입하는 한편, 중국공산당에도 입당하였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蔣介石)의 쿠데타로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결렬되고 많은 공산주의 청년들이 탄압을 받았다. 이에 중국공산당의 보호 방침에 따라 아내와 함께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다. 부부는 8월 상하이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쑨얏센대학(中山大學)에 입학하였다. 쑨얏센대학과 모스크바 육군보병학교에서 각각 1년 동안 정치이론과 군사학을 배웠으며, 소련에서 공부하는 기간에는 베스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30년 봄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돌아왔으며,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의 요청에 따라 만주로 이동하였다. 그 해 8월 동만(東滿)에 도착하여 10월 하순 동만특별위원회(東滿特別委員會) 순시원의 자격으로 옌볜(延邊)에서 박윤서·유지원·김명균·신춘 등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했거나 군사적 경험이 있는 인물들을 만났으며, 동만특위 내에 군사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동만유격대 사업요강」, 「동만적위대 사업요강」, 「반제투쟁에 대하여」 등의 문건을 작성하였는데 이 가운데 「동만유격대 사업요강」은 유격대 사업의 방향성을 정확하게 논술한 옌벤당부(延邊黨部)의 첫 번째 문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항일유격대의 중요성이 더욱 강화되자 만주성위원회로부터 군사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었다. 1932년 6월 4일에는 판스현(磐石縣)에서 이홍광(李紅光)이 7명의 대원으로 조직한 적위대(赤衛隊)[일명 개잡이대]를 반석의용대로 발전시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군의 토대를 닦았다. 이때 이홍광 등과 함께 판스에서 ‘4·3’, ‘5·1’, ‘5·7’ 투쟁을 지도하였다. 그 가운데 5월 7일 하마하자(蛤螞河子)에서 있었던 항일 시위에서는 4000여 명의 대중들이 참여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항일 시위를 전개한 후 일제 부역자 50여 명을 처단하고 친일 지주의 식량 1,000섬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32년 가을 중국공산당 서기이며 중앙소비에트 노전위원회(勞戰委員會) 주임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만주를 떠나 강서 중앙소비에트구역으로 이동하였다. 부인 이추악은 그대로 만주에 남아 훗날 만나기로 하였으나 국공내전(國共內戰)이 격화되고 중국공산당 중앙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개별적 이동이 어려워 만나지 못하였다. 1933년 1월 강서 중앙소비에트지구에 도착하여 중앙군사위원회의 총병참부 참모장으로 장제스군대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이른바 제4차 포위토벌전(包圍討伐戰)을 돌파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1934년 1월에는 조선족을 대표하여 중앙소비에트 제2차 대표자대회에 참가해 대회 주석단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선거를 통해 소비에트 공화국정부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되었다.
1934년 7월 15일 중국공산당이 「중국노농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고 대장정(大長征)에 오르자 22일 ‘홍색중화통신사’를 통해 「홍군북상항일옹호선언」을 발표하고 중국인들의 단결과 반국민당(反國民黨) 투쟁의 역량 강화를 호소하였다. 그 해 10월 15일 중앙군사위원회 홍군간부단(紅軍幹部團)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1935년 5월 1일에는 금사강 권양기 나루터 점령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10월에는 홍군 15군단 75사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36년 2월 22일에는 15군단 75사 223단 제1영의 대원들을 이끌고 황허(黃河) 도하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지휘하였다. 홍군이 황허를 건너기 위해서는 국민당 군벌 옌시산(閻錫山)이 강 동쪽 산 기술에 설치한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 불리는 토치카로 구성된 방어선을 돌파해야만 하였다. 그날 밤 10시에 명령을 받은 선발부대는 약 4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중심 진지(陣地)와 하가요촌을 점령하였으며, 다음날 오전 홍군의 황허 도하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투 중에 복부 총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