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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시125:1-5)-2019.9.15
사람은 나름대로 무엇을 의지하며 삽니다. 비록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의뢰하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은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사실 세상에는 의지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 인생을 도울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때문에 성경에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가 받을 복에 대하여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의뢰하다’는 원어적인 뜻은 ‘맡긴다’는 기본적인 의미지만, 그보다 더 강한 개념은 ‘붙들어 매다’, 혹은 ‘접착시키다’는 뜻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삼고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기초로 세우고 그 하나님으로 인생의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인생의 전부를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를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믿는 자는 마땅히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신뢰하거나, 일시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이 태반일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본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이른바 예루살렘을 순행하는 순례자들이 성전을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시온 산 높은 꼭대기에 세워진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감격에 겨운 노래를 부르며 올라갔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의 도성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통해 장차 신약 성도들이 교회를 사모하며 찾아가는 모습을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전을 바라보며 올라가는 순례자들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뢰함으로 주기적으로 성전을 찾아 올랐을 것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의뢰하는 마음이 없으면 올라가지 않았을 테지요. 성전을 올라가는 순례자들의 기본적인 믿음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나아가는 순례자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처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는 말씀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1) 시온산이 요동치 않음같이(1절)
팔레스틴은 대부분 산악지대입니다. 그래서 산은 이스라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성경도 산에 관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자들이 산을 소재삼아 노래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본문도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에 대해 산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산이 주는 많은 이미지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견고함과 안전함이 아닐까요?
어떤 산도 요동칠 리는 없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시온산은 더욱 그렇습니다. 시온산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산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선택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산을 의미합니다. 시온산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음으로 어떤 외부적인 공격이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 산입니다. 물론 어떤 산도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산은 견고함과 안전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본문에서 시온산이라고 이름을 거명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각별하신 은총을 입은 산이기 때문입니다.
시온 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품 같은 산이요, 구원의 산이며, 희망을 노래하는 산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도 바벨론 강가에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던 것입니다(시137:1). 또한 2천년의 세월을 지나 디아스포라로 살던 유대인들이 자기 조상들이 살던 땅 팔레스틴으로 돌아오기 위해 부르짖던 유일한 외침도 시오니즘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시온 산은 마음의 고향이요, 삶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구약을 넘나들면서 시온산을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시온 산’(사4:5)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오바댜서는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옵1:17)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미가서는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미4: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4장1절은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나니’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공고히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온 산에서 자기 백성들을 견고하게 지켜주십니다.
우리 인간은 약점 투성이지만 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 약점은 불안정과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안정합니다. 누구든지 위기가 닥쳐오면 불안정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적당한 믿음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자는 불안정이 해소되고 영원함이 해결됩니다. 이른바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이’ 말입니다. 인간이 풀 수 없는 이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해결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절은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 중에 하나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러므로 민수기23장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당신의 신실하심을 감추지 아니하십니다. 당신을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신실하심을 나타내십니다. 당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는 다른 표현이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함같이 영원히 있음 같도다’는 말씀입니다. 신실함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며 변덕을 부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마치 시온 산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영원하십니다. 인간은 변덕을 부리지만 하나님은 변덕도 없으시고 변함도 없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그분은 일향 미쁘시니 자기 백성을 배반치 아니하시고, 버리거나 포기하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는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 하시는 확실한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무엇보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맛보고 사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2) 예루살렘을 두름같이(2절)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함같이’ 보장을 받음과 동시에 안전한 보호를 받습니다. 1절과 2절이 비슷한 의미인 것 같으나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1절과 2절이 신실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보장과 보호를 받는다는 내용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1절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의 믿음의 상태를 고백하는 내용이요, 2절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두름같이 영원까지 보호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른바 1절이 고백이라면, 2절은 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인 셈이지요.
믿음도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믿음의 기준이 있고, 자기편에서 자기 믿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기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절 같은 경우도 하나님 편에서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에게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은’ 믿음의 기준을 제시하시는 것이라면, 자기편에서는 하나님을 의뢰한다고 하는 믿음의 기준이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즉, 1절이 자기 신앙의 고백이라면, 2절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를 인정해주시는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자기 고백도 필요하고 증거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요동치 않는 믿음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런 믿음이 영원을 보장받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이런 보장을 약속해주십니다. ‘예루살렘을 두름같이’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산들 혹은 언덕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동쪽으로는 올리브 산, 북쪽으로는 스코퍼스 산, 남쪽과 서쪽으로도 다른 높은 언덕들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입니다.
대적들이 감히 침공하지 못하는 요새 같은 것입니다. 이른바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싸여 천연적인 방어망이 구축된 셈이지요.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고 있는 모양처럼 말입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의미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성곽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불성곽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가랴서2장4-5절은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관심은 예루살렘에 있다는 말씀이지요.
본문 2절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는 말씀은 가장 완전하게 그리고 가장 안전하게 보호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감싸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감히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일시적으로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까지 보장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전후를 두르셨다고 고백합니다(시139:5).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기 때문입니다(시91:1).
본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악인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요(3절상), 의인이 죄악에 손을 대지 못하게 막아주신다는 것입니다(3절하). 그리고 선인과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4절). 이보다 더 좋은 보장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악의 권세로부터 지켜주시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의 지뢰밭과 같습니다. 어디 가야 좋을지, 어찌해야 좋을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전지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아무 것도 두렵지 아니하고 어떤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말입니다. 사실 여부스족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정복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시대에 정복했습니다(삼하5:6-7). 그만큼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입니다.
(3)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임함같이(5절)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평강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평강이 어떤 평강인지 아십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평강’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차원이 다릅니다(요14:27). 아니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세상도 일시적으로는 평강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평강은 심령 깊숙한 곳을 만져줄 수 없는 평강입니다. 육신을 만족시켜주는 일시적인 평강일 뿐입니다. 그런 평강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참된 평강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빼앗길 수 없는 참된 평안이요, 영원한 평안입니다. 이 평안을 얻으면 우리는 세상이 주는 어떤 평안도 욕심을 내지 아니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평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라”(사26:3)고 말씀하십니다. 심지가 견고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뢰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그 평강은 하늘위에서 내려오는 평강입니다. 평강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라틴어의 평화 ‘팍스’(Pax)요, 또 하나는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입니다. 여기서 ‘팍스’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소유를 통해 얻어지는 외적인 평화이지만, ‘샬롬’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평강을 의미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평강은 팍스가 아니라 샬롬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평강은 내 영혼을 만족케 합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됩니다. 사실 불평은 영혼에 평강이 없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반드시 치유 받아야 할 질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평강의 복을 받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인사법이 샬롬이요, 성경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사가 ‘은혜와 평강’입니다. 물론 은혜는 헬라식 인사법이요, 평강은 히브리식 인사법입니다. 그러나 신구약을 넘나들면서 통용되는 흔한 인사법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제사장으로서 첫 번째 축복기도 하는 아론과 그 아들들의 축도 역시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였습니다(민6:23-26). 물론 사도 바울의 인사법 역시 은혜와 평강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평강은 하늘로부터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평강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릴 수 있는 권세를 가졌을지라도 평강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평생 병원신세 한번 져 본적이 없다고 자기 건강을 자랑할지라도 평강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입니다. 우리가 이 평강을 누림으로 하늘에 소망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강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5절).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들입니다. 즉,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평강의 평강으로 인도해주십니다. 평강은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신령한 평강이 우리 안에 부어지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분의 평강이 우리 안에 항상 흐르고 넘쳐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범사는 형통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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