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가 바뀌었음에도 자리를 내주지 않던 더위가 하루 아침에 섭씨10나 내려가더니 오늘은 위용을 자랑하던 지난 여름의 끝자락을 물고 늘어져 다소 기온이 올라가 초가을이라기 보다는 초여름의 날씨였다.
오늘의 답사는 명륜동에 있는 문묘로 부터 시작하였다.
오늘의 답사코스를 보니 꽤 많은 곳이 잡혀 있어 3~4시간에 모두 둘러 볼 수 있을 지 마음이 쓰인다.
그러나 모두 둘러 보지 못한들 아쉬울게 무엇이 있겠는가.
시험을 볼 것도 아니고 더 많은 역사지식에 목말라 할 나이도 아닌데 그저 좋은 친구들과 유유자적하면서 천천히 즐기면서 답사하면 될 것을, 하나라도 더 보여 주려고 서두르는 해설자가 우리를 좀 배려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즈음 "느리게 살자"라는 생활패턴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문묘는 공자, 맹자 등 중국성현 21인과 설총, 최치원,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등 우리나라 명현 18인을 모시고 1년에 2번, 봄 가을에 제사(釋奠祭)를 지내는 곳이다.
유학을 국가이념으로 하고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문묘가 정신적 지주였다.
유학이라는 학문이 종교적 차원으로 까지 발전한 유교는 중국에서는 BC 136년 한나라 때 국교로 선포되었고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의 정책으로 사실상 유교가 국교였다.
유교가 종교인지 여부에 관하여는 양론이 있지만 브리태니커사전에도 유교가 종교라고 하고 있으며 인구 센서스에 유교인이 80만명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문묘가 있다면 을지문덕, 최영, 최윤덕, 이순신 등 나라를 지킨 무인(武人)들을 향사(享祀)하는 무묘(武廟)도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관우에게 제사지내는 관묘도 있는데 무묘가 없다니 도대체 아국은 자고로 국방의식이 있었는지 한탄스럽다.
문묘 답사를 마치고 담장 사이에 있는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성균관은 고려말 부터 이어진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충선왕때는 국학, 공민왕때는 국자감이라 불렀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조선건국초에는 150명이었는데 학문을 좋아하는 세종은 50명을 증원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영조집권시는 74명으로 구조조정했다.
입학자격은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이었고 이외에도 소정의 선발시험인 승보나 음서를 통해서도 입학할 수 있었다.
정원 미달시에는 소과초시합격자나 조관 등에서도 보충하였다.
성균관 교육과정을 마친 유생에게는 대과응시자격을 주었다.
성균관에 오니 불현듯 수주 변영로가 회상된다.
내가 워낙 술을 좋아해서인가?
그는 우리 고교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린 <논개>를 지은 시인이자 영문학자이며 외무부장관을 지낸 변영태의 동생으로 당대의 대주호(大酒豪)로 수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 중에서 백미는 성균관 해프닝인데,
왕년에 술께나 마신 동문들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非酒類 諸賢을 위하여 기억을 더듬고자 한다.
수주가 혜화동에 살 때인데 하루는 공초 오상순과 성재 이관구 그리고 횡보 염상섭이 놀러를 왔다.
이들은 모두 당대를 주름잡는 酒林의 巨頭들로써 不可無 一杯酒, 두주불사를 마다 않는 酒仙들이었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술 사먹는 수주의 수중에는 수삼원 밖에 없어 이 돈으로는 보통 주당 4인이 대작하기에는 큰 지장은 없었으나 이들 3 酒仙을 대접하기에는 택도 없었다.
궁리 끝에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고하 송진우에게 동네 꼬마 편에 편지를 보내 "좋은 기고를 하여 줄 터이니 50원만 선불해 달라" (당시 쌀 한 가마 5원)하여 소주 술 말이나 사고 고기 근이나 사가지고 동네 심부름꾼의 지게에 매고 사발정약수터(성균관뒤)에 가서 남비에 고기를 끓였다.
쾌음(快飮), 고담(古談), 농담, 치담(恥談), 문학담을 순서없이 지껄이며 권커니 잣커니 마셨다.
이야기도 길고 술도 길었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옷을 찟어 버리고 대취하여 광가난무(狂歌亂舞)하다가 소나무 그늘에 소 몇마리가 메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몸에 일사불착(一絲不着)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 타고 소위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인 그들이 공자를 모신 문묘를 지나 큰 거리 까지 진출 하였다가 큰 봉변을 당하였다 한다.
이들은 당대를 풍미하던 로맨티스트로 이러한 호연지기가 마냥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 숨막히는 일제가 얼마나 답답했기에 술로써 망국의 한과 울분을 토했을가 생각하니 숙연해지기도 한다.
성균관을 뒤로 하고 서울성곽을 끼고 성북동으로 넘어갔다.
대개 무슨 동(洞)하면 부촌인지, 빈촌인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성북동은 북악산 북쪽 기슭과 골짜기 넘어 마주 보이는 남쪽의 구릉지로 양분되어 이 곳은 재벌의 저택과 외국 대사관저가 밀집되어 있는 최고의 부촌과 이사짐 옮기기나 연탄배달도 어려운 서울에 얼마남지않은 최하의 달동네가 공존하는 동네이다.
오밀 조밀한 낡은 집 사이로 비탈진 좁은 골목이 이어진다.
이런 달동네는 월세가 싸서 기초생활수급자나 노년층이 많이 사는데, 길이 경사지고 가파라서 무거운 짐을 들고 시장은 어떻게 보는지, 지금 내가 걸어 내려가기에도 조심 조심하였는데 눈이라도 오면 미끄러워서 어떻게 바깥 출입을 하는지 만감이 오간다.
비탈길을 좀 내려오니 만해 한용운이 55세 부터 입적한 65세 까지 살았던 집, 심우장이 나온다.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가족과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그에게 승려 벽산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 사장과 몇몇 유지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대지 113평 건평 16평의 집을 짓고 이를 심우장(尋牛壯)이라 이름 지었다.
심우장이란 명칭은 선종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가지 수행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제의 식량배급도 거부하고
독립선언서가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의 작품임을 알고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다시 쓰겠다고 고집하다가 공약삼장만 기초한
철저한 독립운동가인 그는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되므로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에 집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사실 이 집이 자리하고 있는 이 일대는 백악산 동북쪽 기슭의 급경사 사면으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현격히 낮은 지형이어서 남향집을 짓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다.
이 일대의 집들이 대부분 북향집임을 고려할 때 만해가 조선총독부를 혐오해서 북향집을 지었다는 것은 전설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전문가가 아니라도 현장답사를 관심있게 해 보면 답이 나온다.
어쨌던 그 아버지에 그 딸이랄까 심우장에는 만해의 외동딸(이복인 남동생은 월북) 한명숙씨가 살았으나 건너편 언덕바지에 일본대사관저가 들어서자 "꼴 보기 싫다"며 명륜동으로 이사를 갔고 그뒤 서울시 문화재인 심우장의 땅을 1999년에 서울시가 매입했으나 심우장 마당 한켠에 서있는 시멘트 건물은 여전히 한씨 소유이며 현재 관리인 가족이 살고 있다 한다.
서울시는 한씨와 협의와 보상을 통하여 시멘트건물을 허물어 원래대로 복원하고 만해의 삶과 사상을 전하는 문화재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그는 심우장에서 <흑풍> <박명> <후회> 등의 신문연재소설을 썼다.
마포나룻터에서 새우젖장사로 갑부가 된 이종석의 깔끔한 한옥별장을 둘러보고 다음에 찾은 곳은 수연산방(壽硯山房)으로 월북작가 상허 이태준의 집이다.
그런데 걸어 오면서 새우를 몇마리나 잡아 젖을 담아 팔아야 저런 별장을 지을 수 있나 설왕설래가 이어진다.
수연산방은 상허가 직접 형편이 되는데로 조금씩 지어 나갔다 하는데 그래도 가난한 작가가 이만한 집을 마련한 것은 대견스런 일이다.
심우장이 16평 건물에 "장중할 <莊>"이란 이름을 부친 것에 비하여 규모에 있어 뒤지지 않고 건축미가 한결 뛰어난 수연산방을 "방 <房>"이라 당호를 지은 것만 보아도 두 분의 성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만해는 호방하고 두주불사형이었으나 상허는 소박하고 사색적이었다 한다.
이 집은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안에 들어오니 작으면서도 넓고 옹색하면서도 더 없이 넉넉하였다.
이 집은 예전에는 "이태현의 집"이라고 불리다가 1988년 월북작가들이 해금되고 나서야 "이태준의 집"이란 제 이름을 찾았다.
이태준은 <달밤> <돌다리> <복덕방> 등 그의 소설에서 대부분 토착적인 생활의 단면을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지금은 상허의 외손녀가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한과도 팔고 있다.
오늘도 빈 자리가 없이 손님들이 여유롭고 한가롭게 차를 즐기고 있는데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문화인이 아닐까?
스타벅스다 뭐다 하며 원두커피집이 우후죽순으로 늘어 나는데 원두커피만 즐기는 된장녀들이여! 이런 곳에서 석양을 즐겨봄이 어떨까?
인근 도로변에 선잠단지가 있는데 이 선잠단은 누에치기를 처음했다는 중국고대황제의 황비 서릉씨를 누에신(잠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이 단은 고려성종 2년(983)에 처음 쌓은 곳이였다.
단의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누에를 키우게 했다.
세종대왕은 누에를 키우는 일을 크게 장려했고 조선시대 왕비의 소임중 큰 하나는 친잠례를 지내는 일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간송 전형필(1906~62)이 수집한 소중한 문화재와 값비싼 고미술품이 전시된 간송미술관을 위치 확인만 하였는데 이도 해설가의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미술관은 매년 5월과 10월 중순에 보름동안 무료로 개방되니 각자 알아서 관람하라는 뜻이 아닐까? 맞습니까? 해설가님!
성북동 문화유산의 거리를 이리 저리 헤메다 보니 여기 저기 우암 송시열 집터라는 표지석이 나오는데 그 규모가 어림잡아 수만평은 되지 않나 싶다.
자연암벽에 우암의 친필로 회주벽립(會朱壁立)이란 글씨를 새긴 곳으로 부터 심지어 올림픽기념관과 보성고교 자리까지 포함되어 있다.
우암은 율곡의 학통을 계승한 주자학의 대가로 영조와 정조시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 지면서 그의 지위는 더욱 견고해 졌다.
그는 충북 옥천 외가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고 고향은 충남 회덕이었다.
그런데 그가 성밖인 성북동에 살았다면 조정에 어떻게 출퇴근을 했는지 궁금하다.
좌의정까지 지낸 그가 걸어서는 다니지는 않았을 터이고 가마를 타고 입궐했을 터인데 그렇다면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렸을가.
아마도 본가는 북촌에 있고 성북동일대는 일종의 그의 별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회덕인인 우암이 만석꾼도 아닐텐데 아무리 성밖이라지만 도성과 맞 붙어 있는 이 광할한 땅을 어떻게 차지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가 말년에 사약을 받았으니 탄핵을 받아 부정축재로 이 거대한 땅을 국고에 환수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제4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내고 미술사학자인 최순우 옛집을 찾았다.
이 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전통한옥으로 건물의 형태와 현판 그리고 정원 등이 조선시대 말 선비의 멋과 운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시민문화유산제1호이다.
최순우가 돌아가시고 나서 성북동 한옥의 양옥화 추세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 것을 2002. 12에 내셔널트러스트(외국에는 이런 운동이 많음)에서 기금을 모아 이 집을 사서 보수를 한 후 2004. 4에 일반에게 개방하게 된것이다.
매입금액은 7억8천만원, 보수비용 2억원이 들었는데 대지 120평에 건평 30평이다.
뒷 뜰에는 작고 아담한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한옥의 여유와 정취가 요란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게 은은하게 베어 나온다.
관심이 있으신 회원은 부인을 모시고 여기를 둘러보고 수연산방에서 차 한잔을 즐기면 그 또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저녁식사차 어느 돌대통령이 자주 들렸다는 "국시집"을 찾아 성북로를 내려오다 보니, 길가에 오원 장승업의 작업실 터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그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성북동에 오니 이 일대가 이렇게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음을 미쳐 몰랐고
유홍준의 말대로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며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그의 시대적 유행어가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되는 이번 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