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박제천시인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법고창신, 시읽기의 참맛
박제천
1.
주경림 시인의 세 번째 새 시집 『풀꽃 우주』를 읽었다. 시읽기의 참맛을 흠뻑 맛볼 수 있었다. 시인의 도저한 정신 탐구가 역사의식과 맞물리는 특징적인 시세계는 연암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떠올릴 만큼 전통의 현대적 수용과 변용을 맛깔지게 작품으로 구현해냈다.
“자연과 시인의 습합을 통하여 자연은 인간이 되고, 인간은 자연이 되는 신화세계의 화엄경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시인의 이번 시집은 네 덩어리로 갈라져 있다. 자연과의 교감이 돋보이는 제1부 <낙엽 참새>, 전통예술과 유물들을 현대적으로 변용시켜 정신의 삶으로 형상화한 제2부 <풀꽃 우주>, 일상과 사물의 외피를 걷어냄으로써 새로운 형상과 의미로 변환해내는 제3부 <흑요석 눈물별>, 불교적 진아를 화두로 삼은 제4부 <악착보살처럼> 등이다. 진경산수의 자연과 자연이 문물 속에 녹아들어간 문인화와 그러한 예술세계를 작품으로 구현해낸 고절한 정신세계들을 배경장치로 활용하고 있기에 한 시집에 수록되기엔 정신의 외연이 너무 넓고, 내용은 그 깊이의 바닥을 짐작하기가 어려울 만큼 심층적이라 할 수 있다.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이번 시집은 동양적인 사유세계를 한 시인이 어떻게 작품화하고 그 내용을 육화하여 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집이자 그에 걸맞는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동양적인 전통세계는 사실 요즘의 젊은 시인이 다가서기에는 고답적이라 할 수 있다. 한자문화라는 걸림도 있지만, 그 세계가 거둔 예술작품의 금자탑들 역시 정신의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학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고, 그뒤에도 박물관대학과 같은 문화예술교육과정을 비롯해 독학의 적공을 발판으로 삼았다 하더라도 대상에 대한 대단한 애정과 치열한 몰입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시인의 작품에는 엘리엇이 말하는 역사의식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더욱 금상첨화를 이루고 있다.
역사의식은 과거의 과거성뿐 아니라 현재성에 대한 인식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작가로 하여금 자기 세대를 뼛속 깊이 이해하는 동시에 호머 이래의 유럽 문학 전체와 그 일부를 이루는 자국의 문학 전체가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동시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쓰게끔 한다. 이 역사의식은 시간성의 의식이기도 하고 영원성의 의식이기도 한데, 이것이 작가를 전통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작가로 하여금 시간 속에서의 그의 위치, 즉 그 자신의 현재성을 가장 날카롭게 의식하게끔 한다.
다시 말해 엘리엇은 개인적인 시인의 정서가 객관화된 보편적인 정서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다. 시인의 작품은 정신의 쇳물에서 수많은 담금질 끝에 얻어지는 거푸집이며, 이러한 거푸집을 만들었다가 버리고 다시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곧 한 시인의 정신사이자 그가 만들어내는 시세계이기 때문이다.
주경림 시인은 이 과정에서 불교에 많이 도움을 받은 것같다. 시인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다보면 그 바닥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불교 정신의 결정체를 만나기 때문이다. 시인의 불교인식, 불교적 사유의 크고 넓은 세계에 의지한 시공부의 수준은 이번 시집 전편에 그림자를 드리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4부 <악착보살처럼>에 나오는 불교소재의 시편들이 괄목할 만하다. 예컨대 “관음석상이 아침 햇살을 불러/ 길상사 뜨락에서 젖은 옷을 말립니다”(「햇살이 가사 한 벌을 거두다」)와 같은 구절에서 확인되듯이 마음의 한 경지에 올라서 있다.
여담이지만 시인의 한소식은 큰스님의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선과 시의 경계라 할 수 있겠지만 시인은 언제나 도를 닦는 게 아니라 순정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시를 쓰고자 함에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시인의 이런 공부는 경전읽기가 아니다. 내가 읽었던 고승열전의 스님들처럼 자신의 팔을 잘라 대오각성하기보다는 그야말로 길가다가, 남의 이야기를 듣다가, 아는 체하다 따귀를 한 대 맞고 깨우치는 경우도 많다. 불교의 일체유심조, 삶의 일체가 한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순간 번뇌에서 벗어난다.
주경림의 경우 역시 시에 나오는 수많은 사찰 순례의 무심한 발길에서 시를 얻었으리라 생각한다. 용맹정진의 3천배를 올리다가, 절마당에 앉아 땀을 들이다가, 머리없이 1,200년이나 살아온 부처님 돌머리를 바위틈에서 찾아다 합체한다는 기막힌 소식을 생각하다가, 방생집회에 끌려온 그물 속 꿩을 보다가, 문득 문득 한소식을 얻었으리라 생각한다. 종교의 깨우침과 달리 시인은 무상의 변화법을 오히려 쇳물삼아 담금질의 미학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2
주경림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을 읽으며 문득 라이네 마리아 릴케가 생각났다. 시세계의 지향점은 다르지만, 시세계의 변모과정이 릴케를 떠올릴 만큼 전향적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보들레르 이후 서구시의 정점을 이루었다 평가되는 릴케의 경우에도 제1시집은 소박하다 할 정도의 몽상적인 신낭만파 시집이었지만 제2기에 들어서서 자신의 개성을 살려낸 『형상시집』, 『시도시집』 등으로 독자적인 시의 경지에 올랐다. 주경림 시인 역시 제1시집의 소박함과 달리 제2시집 『눈잣나무』를 통해 시적 성과를 화려하게 조명받았고, 이번에 발간되는 제3시집 『풀꽃 우주』의 수록시편들 역시 발표될 때마다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수록작품의 하나인 「석양에게」는 2008년 문학과창작 작품상을 수상하였고, 여타의 신작시편들 또한 여러 평자와 시인들에게 빼어난 작품의 성취도를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시인이 과연 릴케처럼 『두이노 시편』과 같은 정신의 대화엄을 이룰지는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시집을 거둘 수록 일취월장하는 시인의 시력이 돋보이고, 그만한 결과를 얻기 위해 치루었어야 할 시인의 부단한 정진이 릴케를 연상할 만큼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과 근작에 대한 평가가 두드러지는 것도 이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생명을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어루만지며, 감싸안고, 생명력을 위해 안간힘으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예리하게 통찰해내고 있다. 가령, 시적 화자가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며 눈잣나무 줄기를 밟는 가운데 그 나무의 생명에 대해 도달한 성찰성은 시인의 시세계에 진정성이란, 생명의 물꼬를 터놓는다. 눈잣나무의 생명에 대한 시적 인식은 구체적이다. 시적 화자는 눈잣나무와 한몸이 된 채 뿌리에서 빨아올리고 있는 물소리를 듣고, 시적 화자의 “두 다리의 혈관을 타고 오”르는 물소리를 온몸으로 감지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빙하시대에도 살아 남았다는” 눈잣나무의 “억센 생명력”의 비밀이 “자세를 낮추는 일”에 있다는 진실을 간파해낸다(「눈잣나무」).
―고명철, 「생명 탐구를 위한 시적 고투」 부분
주경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눈잣나무』가 거두었던 시적 성과는 “무형의 관념화할 수 있는 주제를, 유형의 구체적인 실재감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시인의 시안(詩眼)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참으로 눈부신 것이었다.
시집 『눈잣나무』 이후에 발표된 시인의 근작시들 역시 개개 작품이 보여주는 성취도도 화제였지만, 시인이 한 단계 뛰어올라 보여주는 정신의 형상화가 더욱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관련해 장이지는 시인의 새로운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파탈무애한 시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주경림의 시선은 어느 재개발지구 공사장의 무너진 건물더미에 가서 머물고 있다. 그 신산스런 풍경을 오히려 편안하게 보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이 콘크리트 더미, 먼지 구덩이가 ‘들꽃마을’이라는 ‘자연의 질서’를 환기하는 이름과 함께 놓여 있는 것이야말로 이 시의 주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무너져서 참 편안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라는 직설 화법은 벌써 시적 의장을 벗어버린 파탈무애擺脫無碍의 경지를 체현한 것이 아닌가. 더욱이 그 편안함이 ‘죽음의 상태’와 유사하다는 깨달음은 자연의 ‘본연지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도 편안해지는 한 종교적 경지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이야말로 無慾에의 도달이며 모든 人爲를 벗어난 자연의 상태가 아니겠는가.
―장이지, 「신생의 빛, 혹은 파탈 속의 자유」 부분
「무너짐 혹은 어울림」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들꽃마을 재개발지구 공사장에는
망가진 철근들 한 무더기 모여 산으로 솟아났다
뒤엉킨 무리 중에도
어떤 것은 아직 힘이 남아 고개를 쳐들고
삐죽한 끝으로 하늘을 찔러 본다
서로 부등켜 안고 녹슨 뺨을 비비는 것들,
새끼 꼬듯 내 몸 네 몸을 번갈아 감고
하나로 합쳐진 것도 있다
잘 나갈 때는 힘주어 하늘과 땅을 받치느라
콘크리트 속에서 꼼짝을 할 수 없고
혹여, 몸이 닿을까 경계했지만
이제는 끼리끼리 팔을 베고 누워 보고
등을 대고 기대앉고
싫증나면 저만큼 혼자 떨어져나가기도 한다
딱이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뻗치고 휘어지면 그뿐,
무너져서 참 편안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다
아마, 우리 죽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무너짐 혹은 어울림」 전문
이 작품 역시 주경림의 여타 시편들이 보여주듯 어법이 편안하기 그지없다. 망가져 버려진 철근들이 들꽃마을에 모여 사는 이야기다. 이것들을 의인화하여 서로 부둥켜안기도 하고, 싫증나면 저만큼 혼자 떨어져 나가는, 그야말로 “제멋대로 뻗치고 휘어지면 그뿐,/ 무너져서 참 편안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찾아낸 것이다. 존재의 저 너머를 들여다보는 무섭도록 서늘한 눈길인데도 그 눈길이 짚어내는 것들은 하나같이 따듯하고 평화롭다. 참으로 탁월한 어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백미는 시인이 보여준 “무너져서 참 편안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곧바로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아마, 우리 죽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시인은 그저 담담하게 되뇌이지만, 독자는 어느새 죽음과 자유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고 만다. 이보다 더 확신에 찬 단정어법이 있을까.
3
주경림 시인의 새 시집에 붙이는 이 글에서 나는 시인의 근작이 거둔 성과를 일일이 거론하고 싶지 않다. 이제까지의 성과가 놀라운 만큼 앞으로의 길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시인이란 한 세계의 탐구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면 다시 또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 목적지도 모르고, 길잡이도 없다. 지도도 없고 나침반도 불필요하다. 시인이 가는 길의 지도는 시인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지고, 그 길의 곳곳에는 오로지 시인이 만들어 세운 이정표와 안내판이 새로운 여정을 보여줄 뿐이다. 이것이 곧 시인이 평생에 걸쳐 이루어내는 문학지도이자 문학영토이다. 그 지도가 제국을 망라한다 하여도 뒷날엔 조그만 읍내지도를 과장한 것일 수 있고, 한 동네의 골목만 돌아다닌 지도라 하더라도 전인미답의 우주와 같을 수 있음을 문학사가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포크너가 그러하고, 카프카가 그러했던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나는 오히려 덕담삼아 이 시집에서 장자와 추사를 연상시키는 두 작품을 골라 그 배경에 대한 소회나 풀어내고자 한다. 그것이 새 길을 떠나는 시인에 대해 합당한 배웅이라 생각한 것이다. 먼저 「풀꽃 우주」에 나오는 추사부터 생각해보자.
버드쟁이나물, 타래난, 산박하, 부채꽃, 층꽃나물…
하늘의 본성은 그런 모습일 게다
메마른 땅에 겨우 뿌리를 붙이고
발뒤꿈치 조심스럽게 들며 다복하게 일어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목숨을 이어
그 아픈 끝에 겨우 풀꽃 한 송이 다는,
바람이라도 불면 꽃잎은 흩어져버리고 말 걸
난을 칠 때는 세 번 꺾임을 주어야 한다는
‘삼전의 묘법’은 아랑곳없이
그저, 힘닿는 대로 쭉 뽑아낸 풀꽃 목숨
산국, 구절초, 쑥부쟁이, 참취, 고들빼기…
고개를 숙일 듯 말 듯하며
풀꽃들은 자기 목숨만큼의 우주를 열고 있다
더러는 바위 밑에 숨어서
혹은 개울가에 발목을 잘팍하게 담그고
그 또한 바로 내 모습이니,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를 그렇게
자꾸 바라보았다 마음이 잎사귀처럼 기울어
첫 서리가 내리면 시들어 버릴 풀꽃우주에
허리 굽혀 입맞춤 한다.
―「풀꽃 우주」 전문
주경림의 「풀꽃 우주」는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를 시에 곧바로 인유한 경우다. 하지만 대개의 용사 활용법과는 달리 마무리가 될 때까지 감추어두었다가 불쑥 내놓는 기법이 참으로 노련하다. 오브제 역시 난초를 대신해서 각종 풀꽃을 나열한다. 마지막 연에서야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를 그렇게/ 자꾸 바라보았다”고 한다. 여기의 ‘그렇게’가 바로 묘미를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렇게’ 볼 「불이선란도」에 대해서는 더이상 기술하지 않는다. 비록 그 장치를 모르는 독자라 해도 풀꽃 하나에서 우주를 보는 시인의 시력에 만족할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들어냈다. 읽기에 따라 뜻이 달라질 수 있는 겹구조를 마련했기에 「불이선란도」에 대한 정보를 알면서 이 작품을 읽는 맛은 더욱 값지다.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난초 그림을 20년이나 그리지 않았는데
우연하게 그리다보니 하늘의 본성이 나타났네
문을 닫아걸고 깊이 깊이 찾아 드니,
이 경지가 바로 유마의 불이선(不二禪)일세.
추사가 이 그림이 20년만의 “우연”이라며 스스로 “신품”이라 자부하는 「불이선란도」에 덧붙인 화제다. 문인화에서는 그림으로 다하지 못한 작가의 심경을 화제로 덧붙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작품의 화제는 ‘부작란도’라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위에 인용된 문구 외에도 몇 가지 문구가 덧붙여 있다. 자신의 여러 호 중에서도 ‘만향(曼香)’ ‘선객노인(仙客老人)’ ‘구경(謳竟)’ 등의 이름을 들어 혹은 화제를 쓰거나 혹은 주석이나 심경을 여백마다 써놓았다. 난초그림이 주인인지 글씨가 주인인지 알 수 없이 곳곳에 씌어진 글씨와 난초줄기가 흐드러지게 어울리고, 사이사이 붉은 낙관과 유인을 꽃처럼 활짝 피운 한세상의 경지를 열어놓은 것이다. 추사의 여러 작품 중에서 고절한 여백의 미학으로 잘 알려진 「세한도」의 정신도 드높지만, 「불이선란도」는 삶이 곧 평범이고 평범이 바로 삶의 질임을 깨우쳤기에 유마의 침묵을 몇가닥 난 줄기가 마음대로 고졸하게 휘어지고 퍼져나가는 자연의 이치로 담아냈다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추사의 「불이선란도」를 배경장치로 활용함으로써 시인의 오브제는 추사의 오브제로 전이하고, 이러한 전이가 이세상 모든 것에 두루 미치는 것이다. 이에 시인은 그 빌미를 준 추사에게 감사의 헌사를 바친 것이다.
「풀꽃 우주」의 추사와 달리 「석양에게」는 배경장치가 거의 배제되어 있다. 순수 서정시라 할 만큼 담백하다. 고미술사의 석물들이 보여주는 각종 신화적 상징과 견주어도 새끼밴 양이 가져다 주는 것은 다산의 생명성 뿐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읽고난 뒤의 여운이 짙다.
세중世中돌박물관에서 석양의 무리를 만났다
그 중, 한 마리는
뱃속에 새끼 양이 들어 있어 불룩했다
꼬부라진 귀며, 눈과 코가 다 생기고
네 다리에도 힘이 붙어 보인다
꼭 어미를 닮았는데…
과연 출산 예정일은 언제일까
어미의 뱃속에서 어린 양이 잘 나오도록
석수장이의 손놀림을 흉내내어
돌 뱃속에 아기길을 만들어주고 싶다
어미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어미의 등어리에 검버섯이 꺼멓게 돋아났다
출산 예정일이 지났어도 한참 지났다
주위에는 석호, 석마, 석사자 등이
앞발을 세우고 공격자세로 앉아 있다
오라, 험한 세상에
어린 것을 내보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석양石羊에게」 전문
돌박물관을 찾아간 시인은 문득 무리를 이룬 석양 중에서 배가 불룩 튀어나온 석양 한마리를 본다. 새끼를 밴 것이다. 시인은 그 돌 뱃속의 새끼양을 본다. “꼬부라진 귀며, 눈과 코가 다 생기고/ 네 다리에도 힘이 붙어 보인다/ 꼭 어미를 닮았는데” 이 대목이 이 작품의 절창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도입부부터 숨쉴 사이조차 없이 상상력의 증폭을 몰아쳐나가는 힘이 일품이다. 독자는 시인에게 그대로 동화되어 “출산예정일은 언제일까.” 함께 걱정하면서 “석수장이의 손놀림을 흉내내어/ 돌 뱃속에 아기길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을 지순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석양의 뱃속에서 시작된 시인의 눈길이 다시 새끼를 낳아줄 어미에게 이동하면서 이 작품은 돌연 긴장감을 갖는다. 어미의 등어리에서 “검버섯”을 보았기 때문이다. 노화의 현상인 검버섯을 본 순간, 시인은 출산예정일이 지나도 한참 지난 걸 깨우친다. 동시에 ‘어쩌다 이렇게 늦어진 걸까’를 생각할 사이도 없이 어미 옆에 공격자세로 둘러앉은 호랑이며 말이며 사자와 같은 돌짐승들을 본다. “험한 세상에/ 어린 것을 내보내고 싶지 않은” 어미의 심경을 읽은 것이다. 오로지 그 뱃속의 어린 생명체가 어찌 될까 조마조마 마음조아리는 어미의 심정과 일체화된 그 공감의 자장은 참으로 강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연민은 공감을 만들어내는 최상의 질료다. 시인이 연민으로 숨은 그림 속의 약육강식과 모성의 지극함을 읽어낼 때 이 작품은 절정을 맞는다. 공자의 ‘시즉절(詩卽切)’은 이렇듯 읽는이가 절실함에 닿아 있어야 시가 태어남을 다시 한번 일러준다.
이러한 시인의 작업에 2008년 문학과창작 작품상이 주어진 것은 너무나 합당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심사평을 보면, “자연과의 어우러짐에 망설임이 없는” 시인의 작업이 “대상의 본질을 작품에 육화한” “도저한 시력과 마음바탕”이 시인이 갖춘 최상의 덕목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주경림 시인의 시세계는 자연과 시인의 습합을 통하여 자연은 인간이 되고, 인간은 자연이 되는 신화세계의 화엄경을 보여준다. 시인은 특히 진솔하면서도 담담한 시력으로 대상의 본질을 작품에 육화시키는 데 능숙하다. 시집 『눈잣나무』에서 보여주었던 식물적 상상력의 세계에서 진일보하여 자연과의 어우러짐에 망설임이 없다.
이번 수상작 「석양에게」 외 1편 역시 대상에 대한 따듯한 애정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한낱 석물에 지나지 않은 양에게 생명을 부여할 뿐아니라, 그 모성애에게까지 미치는 마음가짐은 시인된 자 누구나 본받을 만하다. 주경림 시인의 이 도저한 시력과 마음바탕이 앞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궁금할 만큼 시인의 작품은 그 외연이 넓고, 깊이를 아울러 갖추었기 때문이다.
―2008 문학과창작 작품상 심사평 부분
이 작품을 읽다가 문득 장자 「제물론」의 첫대목에 나오는 ‘지뢰’를 떠올렸다. 장자는 ‘뢰(퉁소소리)’를 예로 삼아 ‘천뢰, 지뢰, 인뢰’의 세 가지로 나눈다. 쉽게 말해 ‘인뢰’는 사람이 부는 퉁소소리, ‘지뢰’는 땅이 부는 퉁소소리, ‘천뢰’는 하늘이 부는 퉁소소리다. 사람이 부는 퉁소소리는 들어볼 수 있겠지만 땅이나 하늘이 부는 퉁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해 땅이 부는 퉁소소리(지뢰)를 자세하게 말한다. 나는 이 대목을 가끔 시에 견준다. 견강부회라 할 수 있지만, 시의 품(品)으로 나눌 수도 있고, 시의 지향점을 단계별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지뢰’에 대한 설명만 요약해본다.
땅은 어떻게 무엇으로 퉁소를 부는가. 한마디로 말해 땅이 숨쉬는 소리다. 계곡을 포함헤 땅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구멍이 나 있다. 땅은 그 구멍으로 숨을 내쉰다. 그 숨소리가 바로 장자가 말하는 땅의 소리이니 바꿔 말하자면 바람소리다. 대개 여덟 가지로 나눌 수 있는 바람소리가 땅의 구멍마다 드나드는 소리가 다 다른 데 한번 울려나간 앞소리를 뒷소리가 다시 화답해 준다고 한다. 이것들이 나날이 시간마다 내는 소리가 다르다니 그야말로 가짓수를 헤아리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 이 대목을 읽고서 나는 어느 작품에 서른 세 가지 소리라 쓰기도 했다. 모든 소리의 원천인 『장자』의 33편을 기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가에서는 자연을 정신적인 것으로 본다. “사람은 땅을 법으로 삼고, 땅은 하늘을 법으로 삼으며, 하늘은 도를 법으로 삼고, 도는 자연을 법으로 삼는다”고 한다. 자연의 바람소리가 세상의 온갖 구멍을 드나드는 천변만화를 깨우치고 느끼고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는 일이야말로 시인이라는 부류의 몫이 아닐 수 없다.
장자의 자연이 우린 현실의 자연이 아니라 정신의 자연이라는 함의까지 아울러 생각하자면, 시인의 지향점 역시 정신의 자연에서 벌어지는 제현상이 곧 우리 마음의 변용이기에 그 각성이야말로 우리네 정신을 갱신시키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하지 않아도 말이 되고, 서로 달라도 다르지 않는” 천연의 음악(‘천뢰’)이야말로 최상의 시가 갖는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서구시에서는 이런 경우를 가리켜 ‘대가시’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완성은 곧 하늘의 것, 사람으로 사는 우리네 시인은 오히려 땅이 부는 퉁소소리에 취해 바람이 나뉘었다가 그 많은 바람소리가 다시 하나의 바람소리로 환원하고 풀려나가는 하염없는 생멸의 변화를 즐길 뿐이다. 오욕칠정에 붙들린 우리네 삶의 이모저모를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뚜드려보다가 어느 날 우연히 사물의 본성과 마주쳐 저절로 눈물나고 마음아리는 연민에 젖을 때가 있다. 그 순간 천연의 음악이 우연처럼 한 소리를 내주기도 하는 게 아닐까. 이것이 「석양에게」를 보면서 장자의 천뢰를 떠올린 연유이다.
이렇듯 좋은 글이나 그림과 같은 예술작품의 매력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작품마다 전해주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같은 작품이어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품성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모든 예술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언어예술의 시 장르는 다중구조의 장치를 가장 적극적으로 가동시키기에 그 느낌이며 깨우침이며 여운의 농밀함이나 장력의 강도가 더욱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사족삼아 덧붙이면, 장자의 여러 담론 중에서도 나는 ‘천뢰’가 나오는 「제물론」을 좋아한다. 이 글은 마치 연작시와 같은 형태로, 크게 나누면 일곱 개 대목이다. 그 일곱 번째 대목에 사람들이 자주 들먹이는 ‘호접몽’ 이야기가 들어 있다. 장자 꿈 속의 나비인지 나비 꿈 속의 장자인지 그나 나나 아직도 분간을 못한다. 어떤 이는 그걸 장자의 행운과 나비의 불행으로 바꾸어 읽기도 한다. 이런 류의 바꿔읽기가 가능한 것이 바로 장자를 시로 생각하는 이유이자 되풀이 읽는 재미라 할 수 있다.
장자는 나아가, 사람의 말이나 침묵이 돌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고, 다르지 않은 게 또 무엇이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람이든 석양이든 우리 이웃의 생명체로 여겨질 때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서로 웃고 즐기고 근심하고 위로하는, 꾸밈없는 자연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 자연의 세계는 ‘포정해우’에서 소 한마리의 결과 결이 저절로 나뉘듯 추사의 「불이선란도」 역시 글씨와 난과 유마의 침묵과 추사의 웃음이 읽는이에 따라 나뉘어지고 합해지기에 ‘부작’의 꾸밈없음이 또한 바탕이 되는 것이다.
「풀꽃 우주」는 난초가 아닌 “버드쟁이나물, 타래난, 산박하, 부채꽃, 층꽃나물” 또한 “자기 목숨만큼의 우주를” 열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저절로 태어나게’해주는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천연의 음악(천뢰)이 꾸며지지 않은 저절로이기에 추사의 ‘부작’ 또한 저절로 ‘우연’의 짝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모두가 곧 하늘의 것이니 추사는 문득 그 ‘신품’을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거듭 자신을 재우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주경림 시인의 새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문득 ‘장자’와 ‘추사’를 하나로 다시 읽어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법고창신의 변통이 무르익은 추사를 통해 시를 배우고 읽은 것도 값지지만, 그 물길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시의 맛이 달고 감치다는 모범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이 더욱 각고정진해 법고창신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거목이 되기를 바란다.(시인, 문학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