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ㅇ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
"성인에게는 과거가 있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다." <가톨릭의 격언> 본문 중에서
독서 자료 보냅니다. 봄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모두 건강 하시기를 요. - 이 수 영
................
■ 공지영 산문
0 1963년생, 연세대 영문과 졸
0 1988년 구치소 수감중 집필한 <동트는 새벽> – 창작과 비평
0 1989 첫 장편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0 1993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0 1994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가 베스트 셀러에
0 대표작 : 봉순이 언니, 착한 여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즐거운 나의 집
도가니, 높고 푸른 사다리, 먼바다 등
0 산문집 : 상처 없는 영혼,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시인의 밥상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
0 2001 20세기 문학상, 2002 한국 소설문학상, 2004 오영수 문학상
2007 한국 가톨릭 문학상, 2011 이상 문학상
■ 작가의 말
온 천지는 가을이다. 내가 사는 지리산 남녘은 아직도 따스하지만 질 앞의 은행은 이미 노란빛으로 물들어간다. 저 멀리 가을과 이어진 겨울의 매듭이 보인다. 이 바람은 숲을 메마르게 하고 꽃들을 지게 하며 뿌리를 더 깊이 땅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나비는 바람에 해진 날개를 떨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알을 낳을 것이다. 천지는 숨을 죽이고 더 깊숙이 엎드려 겨울의 눈보라를 견딜 채비를 할 것이다. 시골에 살다 보니 자연의 빛이 내게 흘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연의 빛 속으로 들어간다. 이 자연은 가만히 놓아두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아무리 큰 통나무라 해도 생명이 다한 후에 그것들은 아스라이 흙 속으로 스며들어 하나가 된다. 어쩌면 죽는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하나 됨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것은 아무리 작은 것들도 자연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영원히 썩지 않은 채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 그것들이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본
- 1 -
질이 아니라 껍질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저 넓은 바다까지 흘러 들어가 미세플라스틱이라는 이름으로 떠돌아다닌다.
사람이 만든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그래서 외로웠나 보다. 도시에서,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 많은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화사함 속에서도 나는 오래된 목욕탕의 굴뚝처럼 외로웠다. 그런데 이 적막, 이 침묵, 이 자연 속에서 나는 외롭지 않았다. 저 나무, 산, 바위, 그리고 바람과 구름들, 우리 집 강아지 동백이와 자태가 아름다운 들고양이들조차 에덴의 신성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껍질의 허망함을 아는 듯했다. 그들은 도시에서 헤매다가 하늘이 주신 신성을 다 잃어버리고 누더기가 되어서 돌아온 나에게 그것들을 한 숟가락씩 먹여주는 듯했다. 이곳에서 내가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닌 까닭이 그것이었다.
가을이 떠나고 있는 뜰에 앉아 나는 섬진강과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마지막 가을의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나무 데크에 붉은 고추를 말린다.
죽음을 거쳐온 사람들, 사랑에 상처 입은 사람들, 주린 이들과 배고픈 이들, 그리고 샘을 갈망하는 사람들, 밤새 광야를 헤맨 사람들에게 내 책을 전하고 싶다. 그들은, 아니 어쩌면 그들만이 이 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11월 공지영
■ 천 번 별이 지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묻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라.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려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귀 기울여라.
인생의 문이 닫힐 때 그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지 마라.
문이 닫힐 때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
- 파카. J.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중에서
나는 별일 없이 잘 지냈다. 새벽에 잠이 깨고 나면 기도 방으로 가서 우선 촛불을 밝혔다. 어둠이 물러서면 밤새 내 머리맡에 놓였던 시간들의 상자가 열리고 밤새 대기를 떠돌던 찬 물방울들이 이슬로 맺혔다. 새 아침의 새벽, 천지 창조의 순간처럼 여리고 고요하고 순결한 시간.
- 2 -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섬진강에 정착한 지 3년이 넘게 흘러갔다. 그동안 별들이 천 번쯤 뜨고 또 지고 반딧불이들이 날고 죽고 또 태어났다. 먼동은 새들의 지저귐으로부터 터온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십 대 이후로 죽음에 대해 거의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선택을 해야 할 때 하다못해 이사를 할 때도 나는 ‘이곳에서 생을 마쳐도 좋은가?’하고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지금도 날마다 한다 ‘이렇게 하고 죽어도 좋은가’ 혹은 ‘이것이 너의 마지막이어도 후회하지 않을 텐가’하고.
“혼자서 뭐 하고 지내요?”하고 물으면 나는 가볍게 “네 저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한다. 사람들은 못들을 소리라도 들은 듯 소스라친다.
내가 거의 평생에 걸쳐 죽음을 그토록 의식하는 건 그것이 공평하게도 모든 인간에게 오기에 얼결에 떠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대개 죽음의 질이 삶 전체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정직하게 그리고 타인을 위해 고생까지 하면서 살아왔지만 안 좋은 일에 연루되어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은 지인들이 있다. 이들은 그럼으로써 살아왔던 삶 전체를 무효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 죽음은 그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영 회복의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그를 사랑하던 우리에게도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러나 죄 많은 내게는 희망도 있다. 가톨릭의 격언처럼 “성인에게는 과거가 있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다.”
살수록 신기한 것은 이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처음’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하늘 아래 똑같은 것도 실은 없다. 어제 그 하늘이 오늘의 저 하늘은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섬진강이라 부른다고 해도 어제 그 강물이 오늘 저 강물은 아니며, 수만 년 동안 남들이 한 그 사랑이 내 첫사랑은 아닌 것이다.
침대 곁의 동쪽 창이 밝아오면 나는 더 누워 있을 수가 없다. 오늘에 대한 설렘 때문이다.
오늘 나는 무슨 ‘처음’을 맛볼까? 오늘은 어떤 꽃이 새로 피고, 오늘은 어떤 싹이 새로 돋고, 오늘은 어떤 구름이 바람을 타고 내 곁을 스칠까? 그것은 모
- 3 -
두 처음이 될 것이고 이 처음은 내가 맛볼 마지막 처음일 것이기에 이 단어를 쓰고 있자니 다시 설렌다. 설렘을 가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나는 3년 넘게 남들에게 글을 내비치지 않고 살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국숫집을 열까. 피자를 구울까 하는 망상도 가끔은 즐거웠다. 수입은 형편없이 감소했지만, 수입이 감소하자 내야 할 세금도 큰 폭으로 줄었고 일단 악의를 품은 사람들로부터 언어의 독화살을 피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약간 더 행복했다. 다시 글을 쓴다면 정말 쓰고 싶어서, 생계가 아니라 정말 그러고 싶어서 쓰고 싶었다. 안전한 은신처에 숨어 있는 안온함 같은 것이 나를 감쌌다. 만일 내가 이십 대에 이런 경험을 했더라면 어쩌면 나는 평생 가족을 만들지 않고 세상에 내 이름 석 자를 알리지 않고 살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잠시 부질없이 생각하기도 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내가 작가로서 번 아웃 상태라는 것을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니, ‘희미하게’라고 굳이 부사를 써서 둘러대는 것은 그것이 직업의 은퇴를 의미하기에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더 이상 글을 쓰는 일이 즐겁지 않았고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데다가 글을 하나 발표할 때마다 몰려와 온갖 종류의 모욕과 악담을 해대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굳이 이런 일을 더 할 이유가 있을까?’ 싶어 나는 그걸 생각해 보기로 했다.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너는 약속의 땅에 가지 못한다
- 암만에서 느보산 모세 기념 성당으로
“갈등의 씨앗이 트려고 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기 틀릴 수 있습니다.”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 4 -
나는 요르단을 여행하기로 마음 먹으면서 마음으로 간절하게 느보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느보산,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은 땅,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모압 광야에서 예리고 맞은 편에 있는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오르자, 야훼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주셨다.(……)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한 땅이다. 이렇게 너의 눈으로 보게는 해준다마는, 너는 저리로 가지 못한다.”
야훼의 종 모세는 그곳 모압 땅에서 야훼의 말씀대로 죽어…….
-신명기 34장 1, 4~5절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모세 5경 중 마지막 책인 <신명기> 전체를 후손에게 주는 거룩한 ‘잔소리’로 채운 모세는 그것이 다 ‘너희들이 지지리도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모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기까지 4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고 온갖 못들을 소리를 들으며 왔는데, 고생뿐인 인생이었는데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없는데 심지어 저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도 말씀드렸는데, 그래도 네가 민족을 데리고 다니라고 고집하시더니 고작 제게 돌아오는 것이 이겁니까, 대체 왜요? 게다가 이 민족의 지도자가 될 젊은 여호수아는 괜찮은 아이이긴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리고 미숙합니다.”하고 물었을까?
걸어서 열흘이면 다다를 길은 40년 동안 헤매다 죽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노예에서 해방시켰다는 모세의 궤적은 사실 이렇게 약간 어이가 없기도 하다.
이들의 광야 방황기는 교리공부를 하던 어린 시절 나에게도 꽤 많은 묵상 거리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광야에서 헤맨 것은 노예의 기억, 즉 노예근성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육체에서 지워버리기까지 4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말로 기억하고 있다.
- 5 -
점심을 먹고 우리는 느보산 모세 기념 식당으로 갔다. 프란치스코회 수사님들이 운영하시는 성당이었다.
느보산, 이곳에는 4세기 중반부터 모세를 기념하기 위한 성당이 세워졌으나 이 근처의 모든 유적지들처럼 이곳도 파괴되고 재건되고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여러 번 했다. 그것을 끝없이 복구해 온 덕에 성당 안의 유적은 아직 남아 있고 박물관도 흥미로웠다.
나는 성당을 잠깐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이 성당만 빼고 눈앞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광야였다. 누런 광야, 저 아래 요르단강이 흘러가는 왼쪽 끝으로 사해가, 오른쪽으로는 예리코가 보였고 눈앞으로 멀리 이스라엘 땅의 전경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목적에 도착하지 못해도 삶은 괜찮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기 위해 모세는 저 강을 건너지 못하고 여기서 죽은 것일까.
“더는 저리로 간너가지 못한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 하던 낡은 구세대들은 거기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주님이 친히 “이 악한 세대들”이라고 명명한 세대, 안 그래도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 구세대들,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던 이집트의 물질의 번영을 몸이 익혔던 그들,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숭배하여 자기들을 구한 신을 배신하던 그들, 그들이 새 땅에 들어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길게 보았을 때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정확히는 여기 젊은이들과 아이들을 위해서 구세대들을 새 땅과 새 하늘로부터 떼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 모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을 떠날 무렵 나는 내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열렬하게 옹호했던 한 사람이 내가 이전까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걸 인정하기까지 사실관계들을 조사하면서 나는 수일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고 마침내 내가 틀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며칠 동안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부끄러웠고 참담했다. 돌아보니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가끔 자료를 찾고 시사 방송을 들었지만 나의 편향에 부합된 것들뿐이었다. 그것은 변명이 될 수 없으리라.
나는 내가 원하는 것만 믿었다. 그가 어제 옳은 말-내 생각에-을 했으니 오늘 하는 말도 옳다고 게으르고 안이하게 믿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도 내 편
- 6 -
향에 편향을 거듭하여 진실을 왜곡하는 온갖 언어를 쏟아내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내가 태극기 부대 할머니와 무엇이 다를까. 꿈에서도 내가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쏟아놓은 글들을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사과를 하고 어떻게 내 생각이 오류였다고 고백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의 경우 사기는 주로 ‘진보’, ‘사랑’, ‘정의’, ‘연민’, ‘그리스도’라는 단어에서 왔다. 나에게 있는 돈과 사간과 사랑 혹은 열정을 훔쳐내려면 이 멋진 단어들을 적당히 버무리기만 하면 되었으리라. 나는 이 단어들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가난하고 불쌍하고 궁색해진 이들을 착하다고 근거 없이 믿어버렸고, 그리스도나 정의 혹은 진보라는 걸 말하는 이들은 정직할 거라고 철썩같이 신뢰해 버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휘둘렸다
아마도 나는 나 자신의 망상을 사랑했었다. 독재에 항거하는 정의와 외피를 쓰고 있으면, 게다가 그것이 신앙이나 그리스도로까지 금칠을 하고 있으면 나는 완벽하게 속았다. 내 집착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망신시켰던 녹음 유출 사건도 나를 속였던 그가 성모님의 뵈었다고 한 말을 꼼짝없이 믿고 만 데서 기인했다. 지금 생각하면 사이비교도보다 더 어리석고 미친 일이었다. 가난이나 사랑, 정의, 신앙 같은 것도 집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내 마음은 많이 아팠다. 그리고 지금도 그건 아프다.
독재 시절의 때는 내게도 묻어 있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 본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나는 독재자와 그 옹호자들을 많이 생각했었고 그들과 많아 맞섰기에 더 많이 그랬다. 그걸 벗는 데 내게도 40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고통과 방황의 40년이. 아니다. 40년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광야도 필요하다.
올해 나는 예순. 떠나오기 전 후배들이 깜짝 환갑 파티를 해주었다. 한 말씀 하라기에 내가 말했다.
“젊은 시절에 비하면 너무나 현명해지고 너무나 너그러워지고 너무나 침착해졌다고 너희가 칭찬해 주니 그게 참 기뻐, 그런데 이렇게 된 건 나이가 내게 준 것이 결코 아니야. 나이를 먹고 가만히 있으면 그저 퇴보할 뿐이야. 더 딱딱해지고 더 완고해지고 더 편협해지지. 자기가 바보가 된 줄도 모르는 바보가 되지.”
- 7 -
미사가 끝나고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뒤쪽 언덕으로 돌아가니 안개 바다 속으로 커다란 해가 지고 있었다.
사해는 끓고 있는 커다란 물이었다. ‘죽은 바다라는 듯의 사해(死海)는 받아들이기만 할 뿐 아무에게도 물을 나누어주지 않아, 결국 생명 없는 호수가 되었다고 했다. 그저 가지려고만 하고 움켜쥐려고만 할 뿐 내어주고 흘려보내고 놓아버리지 않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죽음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사해는 보여주고 있었다.
■ 그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예리코
“희미한 기억의 퍼즐들이 안개를 걷고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개를 뚫고 떠오르는 것은 그때 썼던 편지의 구절이 아니라
편지를 쓰던 자신이었다.
배가 고팠던 밤, 바람이 거셌던 길고 긴 밤들,
결국 추억이라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그 상대를 대했던 자기 자신의 옛 자세를 반추하는 것일까.”
공지영 <먼바다> 중에서
모세가 죽고 구세대들도 모두 광야에서 죽어 여호수아가 가나안으로 진군할 무렵, 이 지역의 세계정세도 바뀌고 있었다.
남쪽의 이집트는 제 19왕조 람세스 2세의 치세 후 빠르게 쇠약해지고 있었고, 북방의 히타이트도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우리도 그 이름을 알 만큼 유명한 메소포타미아의 강자 아시리아마저 기원전 13세기경인 이때 빠르게 힘이 빠지자 당연히도 이 지역에는 크고 작은 민족들의 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강국들의 틈바구니 혹은 세력의 사각지대에 놓였다고 할 수 있는 가나안 지방으로 다른 민족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구약에서 블레셋이라고 부르던 필리스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원래 에게해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무렵 이들도 북으로는 시리아 지역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지방에 광범위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름을 따서 이 지역은 아직도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다족과 북의 해양으로부터 내려온 필리스틴 사람들, 이
- 8 -
들의 대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3,000년에 걸친 전쟁이었다.
아침 일찍 우리를 싣고 버스는 암만의 호텔을 출발했다. 여기에 쓰지는 않았지만 페트라의 거대한 돌산들과 멋진 유적, 안자라의 눈물 흘리시는 성모님, 거의 통째로 고대를 보존한 듯한 제라시의 로마 도시들…사과와 바나나와 오랜지 같은 과일이 싸고 싱싱하고 맛있었고, 연둣빛의 버진 올리브유는 세계 최상이었던 소박한 요르단에게 나는 마음속으로 안녕을 고했다.
버스는 한 시간쯤 고도를 낮추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요르단강을 건너 이스라엘 영토로 들어갔다. 국경 검문소였다.
우리는 한 명씩 관문을 통과해 이스라엘 지역으로 넘어왔다. 속옷이 들춰지거나 화장품 통이 휘저어지는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다. 잠시 후면 나오겠지 싶었는데 어느덧 두 시간이 더 지나고 있었다. 나머지 일행은 우선 면세 구역 밖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던 이스라엘 버스를 탔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스라엘 당국이 그 여성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 시간이 지난 후 그 여성이 돌아왔다. 여전히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여성의 이름이 자기들이 보유한 북한의 테러리스트 명단에 있는 이름과 비슷해서였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짐작뿐이었다.
“이스라엘 당국은 절대로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아요.”
가이드가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여권에 한국이라고 써 있는데 입국 심사를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북한과 한국도 구별 못 한다는 말이야?”
누군가 묻자 다른 이가 대답했다.
“오지 말라잖아요, 이스라엘이.”
우리는 많이 지체했고 내 마음은 불길해졌다.
떠나오면서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서 느낀 것-이스라엘 국토의 크기는 경상북도만 하다. 나는 혼자서 약하게 비명을 질렀다. ‘이 좁은 땅 차지하려고 몇천 년을 그렇게 싸웠다는 거야?’ 게다가 그 땅의 반 이상 즉 60%가 내가 본 요르단 광야처럼 황무지였다. ‘그런데 왜 몇천 년 동안 싸우는 것이지?’- 이지만
- 9 -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시골로 이사 와서 여남은 평의 땅 경계 때문에 이웃과 의를 상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니 경상북도 땅만 하다면 죽고 죽일 만하다는 말인지……. 이것이 인간일까.
그러나 지도를 조금 더 넓게 해서 바라보면 약간 이해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패권이 이집트 혹은 비옥한 메소포타미아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고리 같은 지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가 이집트로 갈 때도 그랬고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나 지중해로 갈 때도 같았다. 그러니 강대국들이 일어나 다른 강대국들로 가기 위해 이곳은 필연코 움켜쥐어야 하는 곳이었다. 나중에 예수 시대에 로마가 이곳을 점령한 이유도 같았다. 땅도 작고 생산력도 떨어지지만 문고리를 잡아야 문을 열 수 있지 않겠나.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의 위치와 고도였다. 예루살렘은 해발고도 800m, 사해는 –430미터이다.(사해는 우리가 살아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지역이라고 한다.) 예루살렘에서 사해까지는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이니 그 가파름이 새삼 놀라왔다. 예루살렘을 조금 더 지나 유다 산지에서 사해까지는 직선거리로 20~24Km인데 고도 1,200미터를 내려오는 여정이었던 것이다.
이건 대관령을 지나 강릉으로 내려가는 길보다 더 가팔랐다. 우리가 “서울로 올라간다”, “지방에 내려간다”라고 말하면 그건 상징일 수 있겠지만 여기는 진짜였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하는 것이고, 갈릴래아나 예리코로는 ‘내려가야’한다.
암만시에서 줄곧 입고 있던 얇은 카디건과 재킷은 다들 벗어던진지 오래였다. 벌써 11월인데 이곳의 기온은 섭씨 영상 3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은 세계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곳이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기원전 7,000년 경 – 상상도 안 된다 – 신석기 시대에도 원시적이긴 하나 이미 도시의 형태가 잡혔다고 한다. 그래서 예리코는 약 9,000년이나 된 성곽을 품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도시 예리코는 그 후로도 수많은 왕들의 겨울 별장이 있던 곳이라고 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등 온갖 과일이 나고 거기에 더해 대추야자가 명물인 곳이었다.
- 10 -
여호수아가 요르단강을 건너 처음으로 점령하였다는 도시 예리코, 이곳은 모세가 죽은 느보산과 요르단강을 사이에 두고 정확히 대척점에 있다. 성경에 따르면 모세가 죽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진군해 갈 때 이 지역 토착민인 라합은 유대인들을 도와주어 그녀의 식솔들과 함께 살아남는다. 그는 어찌 보면 자기 동족을 배신한, 창녀 출신의 여자이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의 조상이 된다. 라합이 창녀였다는 것을 모르는 이스라엘 사람이 없을 텐데도, <마태오복음>은 첫 장부터 그 유명한 족보를 늘어놓는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았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으며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마테오 복음 1장 1~2, 5~6절
이 족보는 성경 첫 장을 열자마자 사람들을 질리게 하는 모티브로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차용되기도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여성들이다. 말하자면 기존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온전한(?) 여성이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 족보 같았으면 어땠을까?
아시다시피 라합은 창녀였다. 나중에 등장하는 룻은 유대인이 아니며 청상과부로 하층민 출신이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엄마 밧세바 역시 유부녀로서 간통을 하여 자기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는 후궁이 된 여자였다.
그러나 세리였던 마태오는 기록한다. 이 위대하고 거룩한 기록의 첫머리에, 인류를 구원하는 우리 그리스도의 여성 조상으로 당당히.
우리는 예리코에서 가장 큰 호텔에 짐을 풀었다. 시내를 두루 돌아보았는데 예상대로 아름다웠다. 부유한 느낌도 많아 났다. 역시 부자였던 예리코의 유명한 인물 자캐오가 떠올랐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이름을 자캐오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었고 또 부자였다. 그는 키가 작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서는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그곳에 와서는 쳐다보시고 그에게 “자캐오 얼른 내려오시오. 오늘은 내가 그대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기뻐하며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셔들였다.
- 11 -
이것을 보고 모두 투덜거리며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다니” 하였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보십시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등쳐먹은 일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아주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 - <루카복음> 19장 2~9절
남들보다 키가 많이 작았던 자캐오, 남들에게 손가락질당했던 세리 자캐오, 민족을 배반하고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던 민족의 반역자 자캐오는 예리코 거리를 지나는 예수를 보려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간다. 그는 한 마디로 체면이고 남의 눈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뚜렷이 나아가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돌연 선지자, 그 유명한 스타 예수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부끄럽게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키 작은 사람의 이름을 말이다.
“자캐오.”
이름이 불리는 것의 중대한 의미를 우리는 안다.
하느님도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말한다.
“저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어라.”
그것은 사실 엄청난 일이다. 이름을 붙임으로써 아담은 동물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름을 불리고 부르면서 그들의 삶이 이름 하나로 얽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 역시 지리산에 정착했던 초반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면서 우리 집에 오는 열댓 마리 고양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름을 불린 자케오가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서 잔치를 열고 재산을 나누겠다 선언한 것은 무리도 아니었다.
이름을 불러주신 예수님은 어쩌면 그의 고통, 그의 병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이름을 불린 자캐오는 평생 처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키가 작다고 놀리는 것도 아니고, 세리라고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고, 네 집에[ 머무르고 싶다’고 하며 이름이 불린 것은 어쩌면 처음이었다는 것을.
자기를 알아봐준다는 것, 이름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이름을 불러주신 예수님은 어쩌면 그의 고통, 그의 병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이름을 불린 자캐오는 평생 처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키가 작다고 놀리려는
- 12 -
것도 아니고, 세리라고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고, 네 집에 머무르고 싶다’고 하며 이름을 불린 것은 어쩌면 처음이었다는 것을.
자기를 알아봐 준다는 것, 이름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 완전한 것은 모던한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미래이다
- 나자렛,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 잊지말자, 희망은 원래 억지로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갖는 것 자체에 엄청난 힘이 있다. - 작자 미상
멀리서도 나자렛시의 모습이 잘 보였는데, 남쪽의 광야와는 달리 땅 색깔이 붉고, 초목이 우거진 예루살렘 북쪽의 비옥한 평야에 마치 제주의 오름처럼 솟아 있는 도시였다.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해말 430미터 고도의 분지라는 것이다. 예수 시대에도 이곳은 작고 가난한 곳이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 번성한 도시나 길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 이전의 모든 도시들이 그렇듯 방어적 의미에서 그리고 더위를 피하기 위해 산 중턱에서부터 도시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가파르고 좁은 땅이어서 비탈은 심했고 길은 협소했다. 후에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한 후 필립보가 나타니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바 있는 그분을 우리는 만났습니다. 그분은 요셉의 아들로서 나사렛 출신 예수입니다.”라고 했을 때 나타나엘이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수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요한복음>1장 45~46절)라고 반문했을 만큼 작고 가난한 곳이었으리라. 더구나 이방인의 땅과 가까워 혼혈이 많다고 유대인들은 대대로 이곳을 경멸했다고 한다.
나자렛은 길들이 좁고 가팔라서 마치 한때 방문했던 울릉도를 연상시켰다. 무슬림 지역의 작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아침 일찍 주님탄생 예고 기념 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은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은 그 동굴을 품고 있는 성당이었는데 이슬람 권역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 성당이라고 한다. 성당 밖에는 세계 각국의 성모자 초상화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각 나라의 순례자들이 거기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은 물론이었다. 우리나라의 성모자상도 걸려 있었다.
언제나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한 성당들은 참 여성적이게 아름답다. 이 성당
- 13 -
또한 아름답기로 치면 내가 방문해 본 세계 각국의 그 많은 성당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넣고 싶은 곳이었다.
나는 가끔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 마리아에게 “인류의 구세주께서 너를 통해 오시리라”는 것 전해주는 장면을 묵상해 보려고 하는 데 잘 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아의 나자렛이라는 마을로 보내시어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남자와 정혼한 처녀에게 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는 마리아에게로 가서 “기뻐하소서,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고 말하였다.
(……)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마리아! 당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습니다. 두고 보시오. 당신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그러자 마리아는 천사를 향해 “제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성령이 당신에게 내려오실 터이니,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감싸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분은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니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
그러자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시기 바랍니다.”하고 말하였다. 이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따니 유다 산골 고을로 서둘러 가서…….
<루카복음> 1장 26~30, 34~39절
그때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고 전해지는 마리아, 그녀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채 임신하면 심한 경우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천사의 예고에 “예”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용기였다.
(……)
마리아는 자신의 약혼자인 요셉에게도 알리지 않고 사촌 언니인 엘리사벳을 보러 먼 길을 떠났다. 그녀는 엘리사벳의 환대를 받고 자신의 임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일고 있었기에 이렇게 선언한다.
- 14 -
“보라, 이제부터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권능 떨치는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도다. 그분의 이름 거룩하여라.” - <루카복음> 1장 48~49절
그녀는 임신의 의미를 분명히 알았고 자신이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받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내 친구는 한때 그런 마리아를 두고 “하느님을 자신의 아이로 배 속에 받아들일 만큼 이미 배포가 큰 여성”이라고 했다.
마리아는 자신의 입으로 끝내 요셉에게 변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러했듯 요셉에게도 하느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소식을 전달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었다. 그녀의 신앙은 대체 얼마만 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꿈을 꾸고 난 후 말없이 누구 아이인지도 모를 아기를 임신한 약혼녀 마리아와 결혼한 요셉의 믿음은 대체 얼마만 한 것이었을까?
요셉 성인은 당연하고 확연한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기득권을 버리고 마리아가 처한 그 모든 운명을 품어주었다. 그것은 얼마나 크나큰 위대함이었을까? 그는 참으로 하느님 아들의 아버지가 될 모범생이었으며 또 먼 훗날 생겨날 수많은 아들의 아버지가 될 모범생이었으며 또 먼 훗날 생겨난 수많은 아버지, 그리고 의붓 아버지들의 모범이 될 만한 분이었다.
성가정.
그 거룩한 가정은 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와, 미혼모였던 그 엄마, 그리고 그 아이의 의붓아버지가 이룬 가정이었다. 몹시 모던하지 않은가 말이다.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모든 진리 혹은 진실한 것들은 모던하다. 죄 많은 인간들은 보통 그것에 아직 도달하지 못하기에 그것은 늘 미래의 것이기 때문이다.
■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 엔 케렘, 성모 방문 기념 성당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차를 타고 그 동네로 진입했다. 먼 유럽 어느 소박한 중산층 동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올라가는 골목은 부겐빌리아가 담장마다 진홍빛 꽃타래들을 쏟아놓고 있었다. 곳곳에 멈춰서 사진을 찍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언덕길이었다. 그런 깨끗한 동네에 마리아가 방문한 그 엘
- 15 -
리사벳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었다. 이름은 성모 방문 기념 성당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세상에서 성모님 관련 이름을 달고 있는 성당들은 모두 다 아름답고 특히 하늘빛과 금빛 들이 주조를 이루는데 이 성당 역시 그랬다. 이 성당 뜰 벽면에는 세상 모든 나라의 언어로 쓰인 성모 마리아의 찬가 <마니피캇> 액자가 걸려 있는데, 우리나라 말도 있었다.
마리아는 정말로 먼 길을 왔다.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자동차로 나자렛으로 갔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 직선거리로는 140Km이다. 성당 뜰에는 또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배 나온 두 여자의 조각상이 있다. 배가 많이 나온 쪽이 엘리사벳, 배가 조금 나온 쪽이 마리아다. 순례를 하는 여인들은 이 여인들의 조각상앞에서 서로 많이 나온 배와 조금 나온 배 - 이들의 배는 물론 임신에 의한 것은 아니리라 - 를 내밀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무렵 내가 읽었던 논픽션 마이클 길모어의 <내 심장을 향해 쏴라>에도 이런 얘기가 나온다. 1970년대 중반 거의 사라져가던 미국의 사형제를 스스로 ‘가열차게’ 부활시켰던 살인범 게리 길모어. 그의 막냇동생 마이클 길모어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쓴다.
오욕과 범죄, 간음과 폭력으로 얼룩진 가계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둘째 형인 게리가 어떻게 미국을 뒤흔든 살인마가 되었는지 추적한다. 그러면거 그가 곁들인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들 가문은 몇 대에 걸쳐 폭력과 절도 그리고 온갖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중 가정폭력은 너무나 심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고 아들들을 때렸으며 어머니 또한 아들들을 때렸다.
첫째 형 프랭크 2세는 어느 날 사탕 가게에서 사탕을 훔치다가 주인에게 발각된다. 주인은 어린 그를 잡고 –당시에는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경찰에 넘길 수 있었던 모양이다 – 잠시 망설이다가 말한다. 너를 경찰에 넘길 수도 있고 여기서 매질을 할 수도 있고 부모에게 일러 크게 혼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네 행동에 책임을 지라고, 그건 이것이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 너는 여기 출근해 청소를 해라.”
폭력적인 부모가 두려웠던 프랭크 2세는 그렇게 한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주인은 그에게 원래 그가 훔치려고 했던 만큼의 사탕을 쥐어주며 말했다.
- 16 -
“이건 네 임금이다. 내가 네게 일을 시켰으니 나도 내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범죄로 얼룩진 길모어 가문의 역사에서 그걸 피해간 이는 저자 마이클과 사탕 가게에서 용서받았던 큰형 프랭크 2세, 바로 두 사람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부모는 막내 마이클만은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마이클은 썼다.
“그 사탕 가게 주인의 작은 친절이 큰이 범죄자가 되는 것을 막았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랬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 누가 더 나쁠까
- 베들레헴, 주님 탄생 기념 성당에서 갈릴래아로
*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행복은 존재한단다.
불을 켜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지. - 영화 <헤리 포터> 중에서
버스는 예루살렘 쪽으로 올라가다가 방향을 틀어 지하에 있는 좁은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이다. 토마스 형제가 말했다.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해요. 요르단이 아니에요. 여기서 서로를 놓지면 정말 큰일 납니다.”
길은 마치 서울 남산의 오래되고 좁은 뒷골목처럼 이어졌다. 가끔 예쁜 카페가 보이길래 안전한 지역인지 물어보았더니 ‘치안이 개판’인 지역이고 나 같은 여자는 ‘절대로’ 혼자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계속 날아왔다. 요르단에서 일행들이 밤에 과일을 사러 나가기도 했다는데 이곳은 확실히 달라 보였다. 헉헉거리며 200여 미터를 도보로 올라가니 언덕이 나오고 주님탄생 기념성당이 나타났다.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언덕에는 주님 탄생기념 중앙 성당(그리스 정교회 소속), 성 카타리나 성당(로마 카톨릭 소속), 그리고 이슬람 모스크 등이 서 있었다.
‘빵의 집’이라는 뜻의 베들레헴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성당 안은 물론 광장까지 사람들로 붐볐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327년경 성당을 짓게 했다고 하니 1,700년도 넘은, 세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이라고 한다.
- 17 -
보통 12월 베들레헴의 밤 기온은 7~8도, 밖에 그냥 서 있기에도 추운 날씨이다. 페딩 점퍼도 침낭도 없던 때, 문을 두드리는 여관마다 거절당했을 때 마리아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첫 아이를 낳기 전 그 긴장과 두려움을 어머니가 된 여자들은 안다. 마리아는 그리고 요셉은 ‘설마’ 했을 것이다. ‘하느님 아기이니 곧 좋은 곳을 마련해주시겠지’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 거절당하고 또 거절당한 하느님의 아들은 마구간으로 쓰이는 어느 동굴만 겨우 허락받는다. 그리하여 태어난 그 아기는 동물들의 먹이통에 놓였다. 아기를 바닥에조차 누이지 못했던 것은 바닥에서 끊임없이 냉기가 올라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뭐 하러 이런 고생을 해가며 어린 아기로 세상에 왔을까. 인간의 아기란 누구든 손에 쥐고 바로 없애버릴 수도 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의 극치, 마리아와 요셉 또한 무력하고 힘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성경은 그 시작부터 비효율적이다. 왜 하느님은 천사를 보내어 마리아를 찾아가 잉태에 대한 허락을 구하고 고뇌에 빠진 요셉의 꿈에 간여하고, 해산일이 되자 이 지상에 방 한 칸도 예약해 놓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보냈을까?
곰곰 생각해 보면 하느님 하시는 일이 이렇다.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그냥 바다를 쫙 갈라지게 해도 될 것이었다. 그러나 굳이 모세에게 지팡이로 그것을 치게 한다. 그렇다고 바다가 쫙 갈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밤새 동풍을 보내 바다를 말린다. (<탈출기> 14장 21절)
언젠가 어떤 신부님이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보다 차라리 하느님이 우리를 더 믿으신다”인 것일까? 요리를 하다가 아기에게 엄마랑 같이 빵 만들자 하며 몰랑한 반죽을 쥐어주고는, 빵이 다 구워지자 “아이고 우리 아기가 맛있는 거 만들었네”하는 엄마의 마음인 걸까? 나중에 예수가 오래도록 나를 울린 말, 자기가 병든 여인을 다 고쳐주고는 했던 그 말. “여인아, 가거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했다.”한 것처럼.
■ 이것밖에는 길이 없어
- 갈릴레아 호수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 기념 성당으로
- 18 -
갈릴리라고도 하고 갈릴래아라고도 하는 호수는 생각보다 크고 아름다웠다. 이 사막지대에, 이 바위투성이 광야에 이런 넓은 호수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웠다. 우선 그 규모를 보면 동서로는 가장 긴 곳이 약 14Km, 남북으로는 가장 긴 곳이 21Km, 전체 둘레는 53Km에 달한다. 길이 21Km를 상상해 보면, 한남대교 남단에서 판교 톨게이트까지가 21Km가 안 되니 그보다 더 긴 호수로 상당히 크다. 깊은 곳은 수심이 45m나 되며, 무엇보다 여기에서 고기기 많이 잡혔다. 성경에 보면 예수 제자들의 주요 구성원들도 이 호수의 어부들이었다.
이곳의 수면은 약 해발 –210m이다. 게다가 예루살렘 쪽으로는 해발 800m로 1,000m 이상 고도 차이가 나는 산지이고 요르단 쪽으로도 역시 높은 산지이니 가끔 바람이 불면 몹시 물결이 거세었다고 했다. 성경에 예수의 제자들이 풍랑 앞에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우리가 묵은 호텔 앞이 바로 호수였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보름이었다. 완벽한 원을 가진 보름달이 호수 위로 떠올랐다. 아름다웠다. 플루메리아 꽃이 한창이어서 나는 하와이에라도 온 듯 그 꽃송이를 머리에 꽂아보았다. 요르단의 광야를 거쳐 이스라엘의 고단한 기행 중에 들렀지만 일부러 휴양지에라도 온 듯 평화로웠다.
다음날은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갔다. 바람이 불지 않아 배는 푸른 장판 위를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지 알 수 없지만 갈릴래아 호수의 아름다움은 두고두고 남았다. 고단한 기행과 기행 사이 쉬는 시간 같았다. 바람은 상큼했고 공기는 딱 알맞았다.
먼저 요르단강 세례 터에 도착했다.
깜짝 놀랐다. 걸어서 열 걸음만 가면 될 좁은 도랑 같은 것이 강이라니 6미터 폭이니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서 요르단 국기가 펄럭였고 그쪽으로 내려온 관광객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세례 터에는 수많은 버스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흰옷을 준비해 와서 다시금 세례의식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흰옷 입은 세계 각국의 인종들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나는 사흘 동안 갈릴래아 호숫가에 머물렀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나중에 돌아본 막달라 마리아 기념성당이었다.
- 19 -
그 성당은 가장 최근에 지어진 곳으로 실제로 터 자체의 발굴이 2,000년이 넘어서라고 했다.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의 레지오 수도회가 이곳을 사서 피정의 집을 지으려고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유물들이라니 하느님이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시다. 그래서 이곳은 이스라엘 여행 안내서에는 거의 나와 있지 않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순례 중이라면 다른 곳도 중요하지만 이곳은 꼭 둘러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우선 이곳은 대성당과 각 경당의 벽화들이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게다가 대성당의 제대는 배 모양이어서 미사를 드리려고 신자석에 앉아 바라보면 사제가 예수님이 타셨던 배 위에 서서 미사를 집전하는 듯했다. 그 뒤로 갈릴래아 호수가 보임은 물론이다. 시간이 좀 있어 나 혼자 대성당 뒤로 돌아보니 지은 지 1년도 안 되어 보이는 현대식 리조트가 있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 우리는 타보르산 주님의 거룩한 변모 기념 성당으로 갔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올라 그 희고 거룩한 모습을 보이셨다는 성당이었다. 타보르산은 히브리어로 ‘높은 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너무 썰렁한가 싶은데, 여기 올라오면 모든 것이 다 보여서 “다볼 산이에요”하는 아재 개그까지 이어졌다. 버스를 타고 올 때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산이 우뚝했다. 이 산은 십자군 때부터 수없이 많은 전쟁터가 되었고 그중 유명한 전투도 여러 번이었다. 게다가 이 산은 이스라엘에서도 비교적 비옥한 이즈르엘 골짜기 중심에 있다.
타보르산 위의 성당은 모두 세 개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기념 성당, 모세 기념성당, 엘리야 기념 성당, 현재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알려진 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기념 성당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 바를루치 가 설계하여 1924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우리는 대성당 왼쪽의 모세 기념 성당에 들어가 미사를 드렸다. 이곳에서 예수가 만난 또 한 사람을 기리는 엘리야 기념 성당은 우측에 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이곳에 와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보고 말한다.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타보르산은 아름다웠다. 예수님도 내려가기 싫었을지 모르겠다. 베드로가 그
- 20 -
렇게 말했을 때 그의 마음이 일순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고쳐주고 나서 가끔 혼자 외딴곳으로 기도하러 떠났던 내향적 사람, 이 젊은 예수에게 호젓한 산 초막은 얼마나 큰 유혹이었을까. 게다가 이제 여기서 내려가면 그는 십자가를 지고 고문받고 못 박혀 죽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
■ 무의 황홀, 사막으로 가고 싶었다
- 쿰란 유적 터와 유다 광야
땡볕은 사방에서 내리쪼였다. 선글라스를 끼고도 눈이 부셨다. 사해 쪽으로는 철조망이 끝도 없이 쳐져 있고, 건녀편으로는 깃발을 흔들면 화답을 받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 요르단이 바라보였다.
사해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호수이다. 이미 해발고도 0보다 많이 낮은(약 –430미터) 땅이기에 어디로 물을 내보낼 수도 없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을 그냥 받기만 하고 나눠주거나 버리거나 내보내지 않아 그 자신과 모든 것을 죽였다.
구약에 나와 있는 불과 유황으로 멸망했다는 소돔과 고모라도 이 사해 남부의 도시였다. 모세가 죽었던 요르단의 느보산에서 바라보았을 때도 말했지만 이곳은 지진에 의해 함몰된 지반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치명적인 소금 함량이 어떻든 나중에 수영복 입고 들어가 보았는데 진짜 둥둥 떴다. 호수는 시치미 뚝 떼고 시리게 푸른 하늘빛을 닮아 잔잔했다. 저 안에 생물이 하나도 살 수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얼핏 보기엔 그냥 지중해의 휴양지를 닮았는데 말이다. 그 바로 근거리에 있는 쿰란은 정말 오고 싶었던 곳이다.
쿰란 유적 터는 1947년 세상에 알려졌다. 길 잃은 염소를 찾던 목동이 한 동굴을 발견했고 그 안에 있던 항아리 여덟 개를 세상에 알린 것이 이 쿰란 발굴의 시작이었다. 항아리 속에는 글씨가 가득한 두루마리들이 있었다. 이 두루마리들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 ‘성서의 전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보는 구약이 씌어진 두루마리다. 이 두루마리를 기록한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대로 에세네파 혹은 에세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독신이어야 했고 재산을 공유했으며 자급자족, 금욕, 동굴 생활과 정결례를 치르고 광야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어쩌면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모체 같은 곳이기도 하리라. 기록에 따르면 이들의 수는 많을 때는 4,000명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 21 -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양피지에 쓰인 <이사야 서> 필사본은 현대의 성경과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았다니 엄격하고 훈련된 노동이었으리라. 7미터 길이의 <이사야 서> 두루마리는 1장부터 66장까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쿰란 필사본이 발견되었을 때 그걸 입수한 학자들이 두루마리 앞뒤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았는데 – 이것은 당시 최고 기술이었다고 한다 – 이 스카치테이프를 떼는데 다시 40년이 걸린다고 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두루마리가 100년만 더 먼저 발견되었어도 이것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라는 거다. 기술적 한계 때문이다.
■ 통곡의 벽
버스가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동안 홀연히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검문이 더 많아지고, 나무와 풀 혹은 광야 말고 건물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하자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여행 중 처음으로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여름옷을 입고도 더웠던 사해 지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갑자기 히터를 틀어야 했다. 기온은 32도에서 9도까지 떨어졌다. 한 시간 남짓한 사이의 변화였다. 버스 안에서 겉옷을 꺼내 입었지만 목도리도 둘러야 할 만큼 추웠다.
예루살렘, 평화라는 뜻의 ‘샬롬’에서 유래되었다는 도시, 그러나 평화와는 가장 거리가 먼 도시,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죽여 바치려고 시도했던 곳이며 다윗이 성을 지어 솔로몬의 영화의 토대를 마련하고 드디어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봉헌했던 도시, 오랜 시간 후 유대인들이 떠났을 때 메카에서 태어난 마호메트가 하필이면 이리로 와서 승천한 도시, 그리고 예수가 죽어 묻히고 부활한 도시. 그래서 여의도의 10분의 1 크기인 이곳은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세 종교의 성지이다. 특히 이슬람에게도 예루살렘은 메카 메디나와 함께 3대 성지이다.
우리가 예루살렘을 표현할 때 흔히 쓰는 사진에 등장하는 황금 돔 사원이 있는 곳은 이슬람 지역이다. 691년 이슬람은 여기에 이 사원을 지었다. 그 황금 돔 사원 지붕에는 실제로 순금 500 Kg이 쓰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4차에 걸친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으면서도 이 사원만은 손대지 못했다.
이렇게 복잡한 의미와 역사를 지닌 예루살렘은 그리하여 네 지역으로 분할되
- 22 -
어 있다. 예루살렘 성안, 즉 올드시티 지역을 시계판으로 본다면 정오부터 3시까지가 이슬람구역, 3시 반부터 6시까지가 유대인 구역, 6시부터 9시까지가 아르메니아 구역, 9시부터 12시까지가 그리스도교 구역이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외신이 유대인들의 소식을 전할 때 가장 많이 자료화면으로 나오는 그 벽, 통곡의 벽이었다. 지금은 서쪽벽이라고도 불리는 이 벽은 유대인이나 유대교에 관한 기사에서 사람들이 붙들고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벽이다. 나는 드디어 예루살렘 올드시티, 그 성벽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검정 옷을 입은 유대인들이 벽을 붙들고는 고개를 까딱까딱 빠르게 자동인형처럼 움직이며 기도하고 카키색 군복을 입은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광장 여기저기서 우리에게 날카로운 눈초리를 겨누고 있었다.
이곳은 유대인들의 전통상 남자와 여자가 기도하는 곳이 구분되어 있었고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우리가 보는 벽은 그 높이가 약 18미터, 길이가 50미터이지만, 그 아래로 커다란 돌의 단이 지하로 17단이나 더 들어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곳을 순례하며 미세하게 갈라진 성벽의 돌 틈마다 자신의 소망이 적힌 쪽지들을 꽂아 놓았는데 이제 더 이상 뭘 집어 넣을 틈도 없어 보였다. 신앙이 없는 여행객들은 물론 가톨릭여행사에서 온 우리 일행도 여기에 소망을 적은 종이를 끼워 넣고 있었다.
한때 이 성안은 이 일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였다. 기록에 의하면 예수 탄생 무렵 이스라엘을 통치하뎐 헤로데 왕 재위 기간 동안 예루살렘의 인구는 기존의 두 배인 6만 명까지 불어났고 왕궁은 물론 더 크게 확장되었으며 야외극장과 경기장도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 예루살렘의 성전이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다른 기록에도 남아 있다.
헤로데의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그의 생애에서 아름다운 건축물을 바라볼 기회를 놓친 것과 같다. 그 성전은 파랑, 빨강, 녹색 등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헤로데는 그 돌에 금칠을 하고 싶어했지만 현인들은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더 아름다웠던 것이다. 대리석이 마치 출렁이는 파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빌론 탈무드> ‘선해’중 마지막 운 편<예수 시대의 생활풍습>에서 재인용
- 23 -
<바빌론 탈무드>에는 이 세상에 아름다움의 척도 열 가지가 주어져 있는데 예루살렘이 그중 아홉을 가졌다고 했을 정도이니 그 당시 이 황량한 지대에 우뚝 솟은 예루살렘의 영화가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게 한다.
이런 기록들을 상기하면 예수께서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돌 위에 돌 하나도 여기 남아 있지 않고 허물어질 것입니다” (<마테오복음> 24장 2절)라는 말씀을 하자 사람들이 왜 그에게 살의를 느꼈는지 약간은 이해가 간다.
유대인들이 여기에 도읍을 정한 후 예루살렘은 총 30차례 침입을 받았으며 지배자만 스무 번 바뀌었고 완전히 파괴된 것이 열 번이라고 알려졌다.
통곡의 벽은 이 성전이 두 번째로 지어진 후에 다시 파괴되어 버릴 때 유일하게 남은 그 한 조각이다. 일찍이 예수가 죽기 전 예루살렘을 보며 여기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한 대로 로마인들은 서기 70년경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여 이 성전을 완전히 파괴했다. 완전히 파괴하는 데 5개월이나 걸렸다고 하니 성의 규모가 어떠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파괴의 주역인 로마의 티투스 장군은 유대인들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였을까. 일부러 서쪽 벽 하나만 남겨두었다. 유대인들은 타향에 흩어져 살다가 1년에 딱 한 번 허락된 날, 아브월(유대력 5월, 우리 달력으로는 7~8월) 아홉 번째 날 여기에 와서 기도했으니 통곡이 나올 법도 하겠다. 게다가 여기는 자신들이 극한의 성스러움으로 여기던 지성소와 가장 가까운 벽이라고 했다. 이후 거의 2,000년이 지난 1967년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이 벽을 되찾는다.
이곳에 와서 젊은 부부 마리아와 요셉은 그들의 첫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했다. 당시의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도하러 가거나 축복 받으러 가는 데는 돈이 필요한 것인지, 가난한 마리아와 요셉은 성전 예물 중에서 큰 것들을 살 수 없어서 살아 있는 비둘기 한 쌍을 사서 봉헌했다. 가장 작은 예물이었다. 묵주 기도 드리는 중에 ‘마리아가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심’이라는 대목을 묵상할 때, 나는 당신들이 첫아기에게 더 좋은 것을 선물해 줄 수도 없었을 그들의 가난에 대해 가끔 생각하곤 했다.
예수, 그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었다. 사는 동안 어떤 영화도 맛본 일이 없다. 그런데 그가 선포한 구절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
- 24 -
는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는 선언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아직까지도 아무도 더는 말한 이가 없다. 그는 여기서 다 나아간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 지금 박해를 받는 사람도 행복하다고 선언한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고 그들이 하늘나라의 주인이라고 말이다.
이 혁명가 예수에게 군중들은 환호했다. 내가 서 있는 광장도 그렇게 사람들로 가득했다.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었다. 통곡의 벽 위쪽으로 보이는 황금 돔 사원에는 또 이슬람 순례객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경배하는 신은 ‘평화’를 외쳤건만 신이 한 말 중에서 평화, 그것만 여기에 없었고 그들은 그것 빼고는 모든 것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2025. 2. 14.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 25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