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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세력을 격퇴하는 것으로 기반이 공고해진 수로왕의 가락국은 그후 나머지 변한제국(弁韓諸國)을 결집해 그 맹주자리에 오르는 한편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곧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허브로 발전해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구야국에서는 많은 양의 철이 산출되었고, 이로 인해 시스템화된 제철공업이 발전해 철정(鐵鋌)으로 규격화된 철상품이 일본과 중국으로 수출되었고, 한동안 가락국의 철은 동북아의 철 시장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철이라는 상품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한 가락국은 이어서 중국과 한반도, 일본열도를 잇는 무역네트워크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선진문물이 구야국에서 일단 도착한 뒤 일본에서 수입된 원자재 및 낙동강 수로를 통해 집적된 변한의 물품과 교환되었고, 그렇게 입수된 선진문물은 다시 한반도 내륙과 일본열도로 전해졌던 것이다. 가락국의 강성함과 동시에 인구도 증가했다.
현대 김해시 인구는 2009년 현재 48만9천명 정도이지만, 조선초기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의 인구는 속현인 웅신현(熊神縣)의 인구까지 포함해 고작 7천명 안팎이었다. 3세기경의 가락국의 인구는 면적상 훨씬 넓었던 김해도호부의 무려 4배에 가까운 2만 5천명이었다. 이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인구규모로 본 삼한소국의 분류에 따르면 대국(大國)에 속했다. 이런 해상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은 가락국을 변한제국내에서 맹주로서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주었지만 한편으로 이에서 소외된 변한제국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했다. 3세기 초입에 가락국에 눌려 해상무역에서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던 변한 남해안의 7개국과 역시 가락국으로 인해 해상무역에서 힘을 못쓰고 있던 전남의 침미다례세력의 중심인 보라국(保羅國)[1]이 연합해 포상팔국을 형성했고, 곧 이어 그 포상팔국이 해상무역권을 빼앗기 위해 가락국과 가야전체에 대항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209년에 포상팔국은 가락국과 가야의 두번재 중심국이었던 안라국을 침공했고, 중과부적으로 패했던 가락국은 당시에 유력한 적국(敵國)이었던 신라에 구원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신라군은 물계자장군을 앞세워 이를 구원하였고, 이후 전쟁은 포상팔국과 신라의 전쟁으로 비화되어 215년에 포상팔국 중에 3개국 연합함대의 울산 공격을 마지막으로 포상팔국의 패퇴로 끝나고 말았다. 포상팔국과의 전쟁에 신라의 지원을 받음으로서 가락국의 위신은 추락했고, 가야 전체의 맹주자리도 위협당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후 가락국의 해상무역은 다소 침체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백제가 고이왕대에서 근초고왕때에 걸쳐 중국의 대 가락국 무역항이 있던 요서와 산동을 점령하여 영토로 편입함으로서 중국문물의 수입로가 차단 당했다. [2] 독자적인 무역루트가 끊어지자 가락국도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려면 고구려나 백제같은 외국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했던 것이다. 주요 수출품이었던 철의 수출도 신라가 자체적으로 광산을 개발해 운영하면서 광공업이 발전하고, 그 생산력이 가락국을 능가하여 상대적으로 가락국의 광공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가락국의 패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신라와의 전쟁이었다.
신라는 가야사를 통해 가야의 가장 유력한 적이었다. 건국시기에 탈해세력이 수로왕과 가락국을 놓고 경쟁하다 패하여 신라로 도망한 이래 탈해 이사금이 신라왕에 즉위하자 신라는 서기 79년경에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합병해 낙동강 및 동부경남으로 진출을 개시함으로서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가야와 충돌을 빛기 시작한 것이다. 77년 가을 8월에 가야는 신라와 교전을 벌여 신라의 아찬 길문(吉門)에 의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1천명의 가야군 전사자가 발생했고, [3] 97년 1월에 신라의 파사 이사금은 가야를 치려 하였으나 가야의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파사 이사금은 이를 용서하였다. [4]이후 한동안 가야와 신라의 전쟁은 소강상태를 유지했는데, 102년 음력 8월, 파사왕이 진한제국의 맹주자격으로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해줄 것을 요청받자, 수로왕(首露王)에게 이를 의뢰했고, 수로왕은 분쟁지역을 음즙벌국에 귀속되게 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이를 축하하는 잔치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이 살인사건으로 비화되자 이를 기화로 분쟁당사국을 침공해 합병한 파사왕은 106년에 가야를 침공해 파사왕 다음인 지마 이사금때인 115년~116년까지 전쟁이 벌어져 결국 신라의 패퇴로 끝났다.
이후 포상팔국 전쟁에서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낼만큼 빚을 진 가야는 신라와 직접 전쟁을 피하는 대신에 일본의 소국들을 매수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일본의 소국들은 철 생산능력이 없어 가락국을 '쇠나라(須那羅)'라고 부를만큼 자국의 철 수요를 전적으로 가락국에 의존했고, 가락국 및 가야는 철의 공급력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신라는 모든 것이 가야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후 일본소국들의 공격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233년 왜구가 신라의 서라벌을 포위했다가 천명이 전사한 것을 시작으로 유례 이사금대인 286년~295년에 수차의 일본군의 침공이 있었다. 신라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의 중심지인 나니와(難波)근방의 아카시노우라(明石浦)를 공격하기까지 했고, 이로인해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5] 흘해 이사금대인 346년에 또다시 일본의 침공이 있었고, 내물왕대인 364년과 393년에 두차례의 일본의 공격이 있었는데, 이 두차례는 특히 가야의 신라침공을 위한 전초전이었다. 당시에 신라는 고구려와 제휴하고 있었고, 이에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백제가 신라에게 반감을 품고 유력한 동맹국이었던 가야를 부추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가야의 전체 인구는 30만 정도였고, 동원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락국을 포함해 가야소국 전체의 정규군 수는 2만명 안팎이었다. 여기에 가야는 일본의 소국들에서 수입한 용병단 3만명을 더해 신라를 치기로 한 것이다.
399년에 가야의 철기군은 신라의 주요항구인 울산으로 북상을 시작했고, 여기서 상륙해 있던 일본군과 합류했다. 일본군을 그 지휘하에 넣은 가야군은 남천가에서 신라군의 주력을 격파한 뒤 곧바로 서라벌을 공격했고, 신라는 국가멸망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신라의 내물 이사금은 급히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남하해 있던 광개토태왕에게 구원요청을 했고 곧 이어 가야와 마찬가지로 철기병이 주축인 5만명의 고구려군이 서라벌을 기습공격했다. 서라벌의 전투에서 일본군이 고구려군에 궤멸당해 와해되고 말았고 가야군도 1만 5천 안팎의 자국병력은 유지한 채 종발성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고구려와 가야의 철기군은 대등한 능력을 지녔지만 숫적으로 불리했던 가야군은 결국 고구려에 패퇴하고 말았고, 이 전쟁으로 가야는 패망하고 말았다. 가야가 패망한 뒤 변한지역은 반파국의 대가야가 등장하기까지 한동안 미증유의 혼란에 휩싸여야 했다. 가락국으로부터 대규모 난민이 발생되어 반파국등의 변한 내륙으로 이주하거나 일본열도로의 보트피플이 유입되어 경남내륙과 일본 큐슈일대에 가야계소국의 건국이 이루어지거나 반파국이 대가야로 도약하는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6] 한편 가야가 패망해 맹주지위를 상실한 가락국은 낙동강 수로와 고 김해만의 배후였던 부산지역을 상실했고, 이는 결국 가락국의 숨통을 막고 말았다. 해상무역이 적잖이 중요했던 가락국으로서는 무역로가 끊겨서는 먹고 살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이후 가락국은 가야의 일각에서 겨우 명줄만 유지할수 밖에 없었다.
가야의 패망이후로 가락국은 나라이름을 금관국(金官國)으로 바꾸었으리는 견해가 있다. 왜냐하면 이후에 변한지방의 맹주로 떠오른 반파국이 대가야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비록 "가야"라는 이름의 본 주인이었지만 더 이상 가야라든가 가락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금관(金官)이라는 이름은 신라가 가락국을 합병한 후 가락국의 철을 자신들이 다스리겠다는 의미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금관국이라는 국호는 가락국의 또다른, 혹은 새로운 이름이 되었고, 여기서 "금관가야"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가야의 멸망에서 대가야에 이르기까지 가락국은 소국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대가야의 후기에 들어서 대가야가 백제와 신라라는 양대 강국사이에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자, 가락국은 자주권을 잃고 신라의 보호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직 대가야가 호남 동부를 차지하면서 극성하던 496년에 가락국은 신라에 화친의 표시로 "흰 꿩"을 보냈다. 이는 사실상 신속의 의미였다.
대가야의 다른 지역에서 고총(高塚)이라는 대규모 고분이 조성되고 있을 때 가락국은 그런 규모의 고분 조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음이 확인될 정도로 가락국은 완전히 쇠퇴해 있었던 것이다. 529년 신라장군 이사부는 가락국의 다다라(多多羅)를 기지로 삼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안라왜신관에 소속되어 안라국의 명령으로 가락국의 자주독립을 지원하고 있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의 일본군을 웅천(熊川)에서 공격한데 이어서 531년에는 구례모라(久禮牟羅)의 백제군을 패퇴시켰고, 안라국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던 남가야는 산라와 백제 양쪽으로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 532년 가락국왕인 구형왕은 결국 신라에 나라를 바쳐 투항함으로서 가락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구형왕과 그 후손들은 구 가락국의 영역을 식읍으로 받아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했고, 이는 나중에 김유신등의 후손들이 신라의 정계로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가락국의 왕손들은 이후 신라황실의 성(姓)인 김씨에 대해 신김씨라 불리며 명목상 진골에 편입되었지만, 한동안은 신라의 상류사회로부터 경원시되었다. 이런 신김씨의 위상이 높아졌던 것은 김유신이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결혼동맹으로 제휴하면서부터로 이후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위에 올리는데 노력하는 한편 삼국통일 전쟁에서 높은 전공을 세워서 집안을 여타 진골귀족들과 동급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올렸고, 그 자신도 생전의 전공으로 사후에 흥무대왕에 추증되어 신라왕이 되었다.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은 당나라의 발해침공시와 때를 같이하여 북방의 말갈족을 평정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신김씨의 가세가 몰락한 계기는 780년 혜공왕이 대공의 난(大恭之亂)중에 피살당하는 것으로 무열왕계가 끊기고 선덕왕의 내물왕계가 왕위를 잇게 되면서부터인데, 무열왕계의 황실과 밀착하고 있던 신김씨는 무열왕계가 멸망하자 기댈 곳이 없어졌고, 다른 진골귀족들로부터도 다시금 경원당하면서 심지어 6두품의 하급귀족으로 추락했다. 고려시대 이후 신김씨는 본관을 김해로 지정받아 김해 김씨가 되었고, 여러 분성을 파생시키면서 현재 한국 최대의 성씨가 되었다.
가락국의 고토는 신라의 병합 이후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입되었고, 680년 김유신의 조카인 문무왕에 의해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승격하고, 16년 뒤에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개명해 지금의 김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문무왕은 가야왕실의 외손으로 김수로왕의 능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기도 했다. 신라말이 되자, 가야왕실의 후손인 김인광(金仁匡)이 강력한 사병군단을 기반으로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을 칭하며 진례성(進禮城)을 중심으로 김해와 창원일대를 장악하였다. 김인광은 김해지역에 잔류해 있던 신김씨의 후손으로 봉림사의 건립을 후원하여 선종9산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다. 906년에 김인광은 소충자(蘇忠子, 일명 蘇忠至)· 소율희 형제에 축출당했고, 이듬 해에 충자가 사망하자 그 아우인 소율희가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가 되어 김해, 창원및 함안지역을 다스렸다. 소율희는 나중에 자신의 성을 金씨로 고쳤고[7] 관직명도 지진례성제군사(知進禮城諸軍事)로 개칭하고 김해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김인광, 김율희의 활약으로 고려시대에 김해지역이 역사상 "금관가야"로 인식되었다. 김인광과 김율희등의 김해세력은 후삼국시대에 친 신라정책으로 일관해 후백제와 고려의 압력을 받기도 했다. 920년 대야성을 함락한 후백제군이 진례성까지 진출했다가 고려군이 이를 막아서서 김해지역이 두나라의 전쟁터가 되었고, 김해지역의 호족들도 친 백제파와 친고려파로 갈라져 분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김율희세력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한편 김율희는 김해지역을 다스리면서 선종의 불교를 적극 후원해 김해지역이 봉림산을 중심으로 선종의 종심이 되어 많은 고승들이 행적을 남기기도 했다. 후삼국의 통일후인 고려 태조 23년 940년 김해소경은 김해부(金海府)로 강등당했다가 다시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당한 뒤 임해군(臨海郡)으로 승격되었고, 광종대에 다시 김해부로 원상복구된 후에 고려중기에 금주(金州), 또는 금관주가 되어서 경남 동남부지역을 관할했다.
가락국과 그 외의 가야소국들은 고대의 페니키아나 아테네, 그리고 현대의 싱가포르와 같은 전형적인 상업도시국가였다. 가락국을 허브로 동북아연안 바다에서 해상무역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가령 중국에서는 신나라(新--)시대에 아주 잠깐 사용되었던 화천(貨泉)이라는 동전이 한반도에서 일본에까지 다수 출토되기도 하였다. 가락국의 주요산업이 해상무역이었음은 가락국의 초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탈해세력을 해군으로 쫓아내었다는 기록은 가락국의 해상력의 막강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수로왕비인 허황옥의 세력이 도래할 때 가져온 문물을 한사잡물(漢肆雜物)-한나라의 온갓물건이라 하여 중시 한 점에서 구야국은 건국초기부터 강력한 해상권을 기반으로 해외무역을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주요 무역상품은 철(鐵)이었다. 봉황대에서는 송풍구과 슬래그등의 제철소 유적이 확인되었다. 가락국은 "여뀌잎" 같다는 표현대로 땅이 좁아 농업기반은 취약한 대신에 철이 많이 산출되어 조선전기까지 상당한 철을 국가에 공납했을 정도였다. 가락국의 농업기반이라면 김해평야를 생각하겠지만, 당시에 김해평야는 고 김해만이라는 바다여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대신에 천혜의 무역항구를 가락국에 제공했다. 농업에서 뭔가 경제적인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가락국으로서는 싫든 좋든 공업을 발전시켜 외국과 교역을 해야만 했고, 그 교역의 길이 막힌 순간에 쇠망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주 농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던지 회현동 패총 인근 마을 유적에서 탄화미와 벼가 출토되었다. 1차 산업은 어업이 주가 되었다. 회현리 등, 많은 수의 조개무지(貝塚)가 발견되었다. 조개무지 안에서는 많은 량의 조개껍질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생선뼈가 확인되었고, 그 중에서는 심지어 고래, 참치, 상어도 발견되었다. 가락국은 농업으로는 수요를 채울 수 없는 식량을 외국과의 교역과 함께 어업에 의존했을 것이다.
가락국, 소위 금관가야는 김해와 부산 일대에 많은 수의 고분군과 그에 부장된 유물을 남기고 있다. 금관가야와 관련된 주요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동래 복천동 고분군이다. 복천동 고분군은 광개토태왕의 남정 전까지 활발한 고분조성이 이루어졌으나, 그 이후 그 조성이 중단되어 가락국의 패망을 시사해주고 있다. 신라와 함께 가야의 장례풍습 중에 주요특징은 다량의 유물을 껴묻는 후장(厚葬)이다. 이로 인해 다양한 토기와 유물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다. 또 한가지 특징은 독무덤(甕棺墓)과 함께 덧널무덤(木槨墓)에 있는데, 이와 함께 도질토기(陶質土器), 그리고 순장의 풍습 등은 북방문화의 영향일 거라는 설도 있다. 금속유물은 다수의 철정(鐵鋌)과 함께 철제 갑옷과 금동관이 파편으로나마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초기에는 철이 주종을 이루고 금, 은 등의 귀금속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에 많은 량의 옥{玉)제품이 출토되었다. 귀금속이 발견된 것은 5세기 이후의 일이다. 토기 중에는 가야계 토기 외에도 특이하게도 일본식 토기인 하지키도 발견되어 고대 일본인들이 실제로 가락국에 일부 터를 잡고 살았을 정도로 일본과의 빈번한 교류를 시사하기도 한다.
부산대학교 한국민속문화연구소(2000) - 가야각국사의 재구성 - 이영식/ 문헌으로 본 가락국사, 신경철/ 금관가야의 성립과 연맹의 형성
가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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