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nn Gould (1932-1982)
1955년 6월 어느날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한손에는 접이식 의자를 끼고
다른 손에는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식수로 사용할 2개의 물병,
갖가지 안정을 위한 5개의 약병, 약간의 소다 비스켓 등을 담은 트렁크를 들고
CBS 스튜디오를 들어선 이 남자는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첫 녹음하기 위해서 온 글렌 굴드이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CBS의 녹음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유명한 일화는 그가 어떤 사람이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그는 허밍소리에 대한 녹음 기술자들의 불만에
다음날 녹음할 때 2차세계대전 때 쓴 방동면을 가지고 왔을 정도로 위트 있던 사람.
글렌 굴드...
그를 한마디로 정의 하기는 힘들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주목 받았고, 1955년에 발표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굴드를 그저 단순한 피아니스트를 넘어서 예술가였다. 그를 단순히 피아니스트라는 한 영역에 묶어두기엔 불공평하다.
너무 주관적이고 독특한 스타일, 그리고 한정된 레퍼토리라는 점에서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는가 하면, 그래도 그가 20세기 후반의 모든 음악인들에 미친 지대한 영향도 있고,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피아노를 ‘너무나 잘 치는’ 연주가이므로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의 대열에 꼭 껴야 한다는 의견 등 그에게 너무많은 수식어들과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그는 너무 자주 신경증적인 ‘가짜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서 정작 치명적인 ‘진짜 통증’이 왔을 때 의사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거짓말쟁이 소년과 늑대’라기 보다 ‘가녀린 영혼과 죽음’에 가까운, 너무나 아까운 죽음이었다.
굴드가 그토록 기인처럼 보였던 이유도 이제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는 그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였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에 대한 분명한 자기의 입장과 소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해석을 옹호하기 위해 당시의 풍토와 맞서 싸워 나갔다. 이런면에서 그는 현대적 피아노 연주와 해석의 새로운 선구자 였다. 그의 이러한 모순과 독특한 면모는 당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그에게 매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부정적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20세기 가장 위대한 연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 덕분에 우리는 더욱 풍부한 음악 유산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우리가 보는 세상을 다른 시각에서도 볼 수 있는 도전을 심어준 자라는 것에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늘 모순 투성이었던 사람.
사람들과 멀이지고 싶어하면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했고, 추위를 싫어했지만 북쪽 지방을 동경했으며, 비행기 사고를 무서워해서 비행기를 타지 않았으나 자동차를 거칠게 몰았던 사람.
무대와 청중이 싫어서 스튜디오 녹음을 고집했으나, 실황이 휠씬 아름답다는 평도 있으며 낭만주의 음악을 꺼려했으며서도 젊은 시절 연주한 그의 쇼팽 연주는 굉장히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다고 사람들은 기억한다 - 개인적으로 굴드가 쇼팽을 연주하지 않은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 피아니스트였지만, 다른일에 더 열중했던 인생자체가 모순덩어리였던 그.
그는 이러한 자신의 광기와 고독을 음악으로 풀어냈던 것이다.
과거의 위인을 틀에 넣으려는 애쓰는
더욱이 수수께기 같은 그를 두고 음악학자나 일반인들의 관심을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이 자체를 즐기면서도, 나를 그냥 내버려 뒤!! 라는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낼것 같다.
유리처럼 맑고 아름다우나, 깨지기 쉬운 영혼의 소유자 글렌굴드.
글렌 굴드의 생애
1932년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기 글렌은 태어나 사흘째 되는 날부터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에 사진은 태어난 이듬해에 찍은 사진.
그의 아버지 버트말에 의하면
글렌이 태어나 사흘째 되는 날, 손가락을 계속 움직였어요. 마치 음계 연습을 하듯이 바로 이렇게요.(글렌의 아버지는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시범을 보였다) 팔을 앞뒤로 흔들며, 손가락은 이렇게 하면서요. 글렌이 음악적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었죠. 그래서 의사가 그런 말도 했어요. "이 꼬마는 이다음에 의사나 피아니스트, 둘 중 하나가 되겠군."
어쩜 이 의사의 말은 두가지 전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피아니스트로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의학적으로 전문과 뺨치는 책을 읽었고, 늘 스스로 자가진단을 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당장의 위기는 면했으나 장기적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작곡가 그리그(Edvard Grieg)와 외가쪽으로 진척이 된다고 했으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추어 바이얼리니스트인 아버지와 직업 피아니스트를 꿈꾸었던 어머니를 두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이 이루어 주길 바랬고, 굴드는 3세때부터 악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5세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였다.
글렌의 아버지 말해 의하면, 그는 어렸을 때 부터 자신의 손가락에 유별히 신경썼으며, 손가락이 다칠까봐 공놀이 따위는 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손가락이 다쳐서는 안된다는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1942년, 10세가 되던해에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토론토 왕립 음악학교에서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그 곳에서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 오르간, 그리고 레오 스미스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의 처음의 스승이자 마지막이라고 할수 있는 게레로에게서 그의 평생의 습관이라 할 수 있는 낮은 의자에 앉아 건반과 수평이 되도록 손가락을 유지하는 법, 어깨에서 파을 통해 전달된 에너지를 사용하여 손가락의 민첩함을 강조하는 법등 글렌 특유의 피아노 테크닉을 익혔다. 그의 어머니는 그런 자세를 소름 끼치게 싫어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위해서 특별히 의자를 만들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바닥에서 꼭 14인치 높이의 이 의자는 글렌이 평생 동안 피아노를 연주할 때 사용한 의자이다. 낡아서 뼈대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글렌은 이 불편한 의자를 바꾸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1944년, 음악원 수료와 함께 키바니스 페스티벌(Kiwanis Music Festival)에 참가하여 '피아노 트로피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듬해 1945년에는 음악학교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였으며 1946년에는 최고 성적으로 졸업장을 받았다. 음악학교에서 "베토벤의 4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주자로 데뷔하게 되었으며 다음 해인 1947년에는 카를랏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굴드의 공식적인 리사이틀과 함께 1950년에는 CBC를 통해 그의 리사이틀이 첫 라디오 방송이 되었다.
1955년 1월 11일, 굴드의 뉴욕 데뷔연주회가 이루어 졌다. 데뷔연주회와 함께 CBS와의 녹음계약을 맺었고 같은 해, 6월에 CBS스튜디오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그의 첫 레코딩을 하였다. 이 앨범은 레코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의 하나가 되었고 발매 당시에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굴드를 국제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로 만들게 되었다.
옆에 사진은 <골든베르크 변주곡>에 맞취 지휘하듯 손을 내저으면 춤울 추고 있는 굴드. 1955년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할 때의 모습이다.
이 당시 기자들이 녹음실에서 초청되어 글렌을 지켜보았고,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인터뷰를 해서 기자들에게 보답했다.
한 기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끝도 시작도 없는 음악. 사실상 클라이맥스도 종결부도 없는 음악, 보들레르의 애인들처럼 "구애받지 않는 바람의 날개위에 가볍게 얹혀 있는" 음악이다. 그때 음악은 직관적 통창력으로 통합되며, 섬세한 솜씨와 정밀한 관찰에서 나온 통일성은 대가의 손길로 완숙해져서, 예술에서는 참으로 드물게도, 잠재력의 정점에서 한껏 기뻐하며 그 무의식적인 구상이 영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1957년에 굴드는 냉전시대 캐나다와 북미 최초로 러시아에서 2주간의 콘서트를 가졌다. 러시아 콘서트 중에서 어느 하루 , 글렌은 손으로 쓴 쪽지를 받았다.
선생님, 관현악단 없이 바흐를 좀 연주해주십사 간청드립니다. 우리는 16일 연주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지 못했답니다. 길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답니다!
당신을 숭해하는 러시아사람 올림.
글렌은 그래서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위해 다시 연주해 주었다. 무대연주를 무척이나 싫어했던 글렌도 러시아에서의 연주는 꽤나 만족스러워 했다.이를 시작으로 처음으로 유럽 콘서트 투어를 가지면서 청중과 비평가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또한, 이 투어에서 굴드는 "베토벤의 3번 협주곡"을 카라얀의 베를린 필과 협연하였다.1960년에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 뉴욕 필과 함께 미국 텔레비젼에 처음으로 출연하였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캐나다의 TV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1964년 4월 10일, LA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다. 공식연주회에서 이토록 빨리 은퇴한 것은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이 그의 많은 다른 관심사들을 실현하는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굴드는 그 자신의 본업이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는 작가로서의 활동, 방송활동, 작곡, 지휘, 그리고 기술적인 갖가지 시도들에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과 똑 같은 열정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1981년 굴드는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26년전에 녹음했던 장소에서 골드베르크변주곡을 두 번째로 녹음했다. 굴드는 변주들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고 보다 큰 전체 속에서 하나의 리드미컬한 파동, 화성, 그리고 근원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개체들로 해석함으로 이전의 녹음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을 남겼다. 굴드는 기술 (테크닉이 아니라 테크놀로지라는 의미에서)이 만들어주는 가능성을 언제나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녹음이후 25년간 이루어진 녹음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굴드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재녹음하도록 결심하게 하는 데에 중요한 동기를 부여했다고 생각된다. 이 음반은 그의 마지막 음반이 된다.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이른 나이에 뇌졸증으로 사망하였다.
참고 : 피터 F.오스왈드<글렌 굴드>中
SONY의 글렌 굴드 공식 홈페이지
첫댓글 글렌골드에 대해서 몰랐던 사실까지도 알게 되어서 감상에 많은 도움이 될거 같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