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아이슬란드 동쪽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이하 월터미티)’에 나온 회픈공항을 찾아갔다. 영화에서는 ‘매트릭스’의 내용을 패러디한 빨간 차와 파란 차가 나란히 서 있던 그린란드의 공항으로 나왔지만 사실 그곳은 그린란드가 아니라 아이슬란드의 바로 이곳, 회픈공항이었다고 한다. 맨 처음 영화를 보고 나선 ‘그린란드 여행을 해보고 싶은데?’란 생각이 들었지만, 영화 촬영은 거의 아이슬란드에서 끝냈다고 하니 여러 나라로 분할 수 있는 이 나라의 매력을 좀 더 느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그린란드의 공항으로 나왔던 회픈공항
아이슬란드 동부에서 비교적 큰 도시, 에길스타디르(Egilsstaðir)를 목적지로 삼고 도로를 따라 쭉 이동했다. 비교적 차량 통행이 많았던 남부에 비해 동쪽으로, 동쪽으로 갈수록 도로를 오가는 차량이 뜸해졌다.
가파른 절벽을 깎아 만든 아슬아슬한 도로를 따라 에길스타디르로 가는 길. 북구의 겨울이라 해가 짧아 벌써 달이 떴는데 설상가상으로 최단 루트는 눈으로 인해 길이 폐쇄되어 피오르를 따라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하염없이 달려야만 했다. 운전해오는 동안 얼음 낀 도로에 지나가는 트럭이 자갈을 튕겨 차 유리라도 깨질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하면서 왔는지...
산 비탈길을 깎아 만든 도로. 동쪽으로 갈수록 급격히 차량 통행이 줄어들었다.
도로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순록들
동부에서 비교적 큰 도시라길래 숙소를 잡은 에길스타디르는 막상 도착해보니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슈퍼마켓, 주류상점(Vínbúðin), 작은 카페와 음식점 정도가 있는 마을 중심부는 그나마도 사람이 다니지 않아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에길스타디르에서는 ‘월터미티’에서 주인공 월터가 아이슬란드에 도착해 아이들에게 받은 스케이트보드로 신나게 활강을 즐기는 도로가 있는 세이디스피외르되르(Seyðisfjörður)를 다녀왔다. 그 도로는 계절이 계절인지라 눈으로 덮여 있어 여름에는 어떤 모습일지 짐작하긴 어려웠으나 월터가 신나게 내려왔을 그 내리막길에서... 우리가 탄 차가 빙판길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잠시 등골이 오싹해졌었다.
세이디스피외르되르로 가는 길, 도로 제설작업을 하는 차량을 만났다. 아이슬란드는 시시각각 날씨에 의해 도로 사정이 휙휙 바뀌어서 도로의 상황을 알려주는 사이트를 잘 참고해야 한다.
하마터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 나중에 도로주행 영상을 돌려보니 정말 몇 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었는데도 지금까지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얘기를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슬로모션처럼 지나가는 내 인생의 한 컷, 한 컷. 핸들을 쥔 손엔 식은땀이, 히터를 튼 실내엔 순간 냉기가 흘렀다.
4륜 구동에 스터드 타이어까지 장착했는데도 미끄러질 줄이야. 레이캬비크를 떠난 뒤로 ‘이 정도 눈길은 이제 익숙해졌지' 하며 약간 우쭐해져 있었는데 그 뒤로 안전운전, 안전운전을 되뇌며 운전하는데 한층 더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월터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신나게 내려오던 길, 바로 옆에 있는 구푸포스(Gufufoss)
차뿐만 아니라 사람도 조심해야 한다. 걸어가다가 이렇게 푹푹 발이 빠지기도 했다.
에길스타디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헨기포스(Hengifoss)라는 폭포는 트래킹 코스로도 유명한데, 폭포를 둘러싼 현무암 지층 사이에 얇고 붉은색을 띤 진흙층이 있어 알록달록, 예쁜 색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질적으로도 침엽수 화석과 갈탄이 있어 예전에 아이슬란드의 기후가 따뜻했음을 보여주는 곳이라고도 하는데 겨울에 방문하니 뭐… 알록달록은 온데간데없고 사방에 눈뿐.
올라가는 길, 짧은 겨울 해가 벌써 성질도 급하게 지려하고 있다.
일단 폭포의 모습을 보기 위해 트래킹을 시작하기는 했는데, 아무리 걸어도 폭포 같은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길에 산을 올라간 사람들의 발자국은 드문드문 이어지는데 기대하는 풍경은 도통 나오질 않았다. 그마저도 군데군데 지뢰같이 잘못 밟았다간 허벅지까지 쑤욱 빠지는 곳도 있어서 먼저 올라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밟으며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올라갔을까, 저 멀리 폭포로 추정(?) 되는 곳이 나타났다.
눈으로 뒤덮여 있어 어떤 것이 길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저 멀리 멋진 폭포가 보이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눈도 너무 많이 쌓여있어 가지 못했다.
여름엔 폭포 아래로 폭포를 올려다보며 트래킹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겨울엔 꼼짝없이 위에서 내려다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좀 더 올라가면 폭포가 가까이 보일 것 같긴 한데 이미 지평선을 향해 내려오고 있는 해 때문에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불빛 하나, 인적도 없는 곳인데 내려오는 중간에 어두워지면 큰일 날 것 같아서. 푹푹 꺼지는 눈길을 올라오는 것도 힘들었지만 내려가는 것도 정말 힘들었다. 내려갈 땐 그냥 굴러 내려가면 쉽게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보고. 사방엔 하얀색 눈뿐이라 어떤 길이 내가 올라온 길인지 구분하는 것도 어려웠다. 정말 온통 흰색으로 가득 차 있는 겨울의 아이슬란드.
끝없이 펼쳐지는 하얀 세상
아쉽게도 데티포스로 들어가는 길은 막혀 들어갈 수 없었다.
미바튼으로 가까워질수록 들끓고 있는 대지가 인상 깊었다.
크라플라 발전소로 가는 길에 뜬금없이 있는 샤워기.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화장실이라고 할만한 곳인데, 실제로 뜨거운 온천수가 나온다.
흰 눈은 풍경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여행의 주목적인 관광에 있어 각종 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에길스타디르에서 미바튼(Myvatn)으로 가는 길. 영화 ‘프로메테우스’에 나왔다는 데티포스(Dettifoss)는 눈으로 인해 가는 길이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고, 크라플라(Krafla)분화구로 가는 길 또한 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
미바튼에선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왔다는 온천 동굴을 정말 어렵게 찾아갔지만 온통 뿌연 김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우리와 비슷하게 온천 동굴에 도착한 사람들도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렸는데, 우리는 딤무보르기르(Dimmuborgir)를 구경하고 나서 다시 돌아와 온천 동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처음 방문했을 땐 지열이 좀 더 활발해서 수증기를 많이 만들어내 동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 같고, 지열이 한풀 꺾인 뒤 다시 방문해서 그런지 수증기가 좀 빠져있어 동굴 안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미바튼 호수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김
미바튼 네이쳐 배스, 노천온천으로 영하의 기온 속에서도 따뜻한 온천을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미바튼은 살아있는 지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미바튼에 있는 호수에선 온천수 때문인지 신비로운 안개가 피어올랐고, 노천온천에선 영하의 온도에서도 지구의 따스한 온기로 데워진 온천수에 몸을 담그며 밤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로라는 우리 앞에 그 수줍은 모습을 드러냈다.
온천욕을 하고 나와 따뜻하게 모락모락 김이 나고 몸도 노곤해져 숙소의 침실에서 뒹굴뒹굴 대고 있었다. 장시간의 운전과 온천욕 때문에 멀어져 가는 의식을 흔들어 깨우며 오로라가 나오나, 안 나오나 밖을 계속 기웃기웃하고 있었다.
“저거 저거, 오로라 아냐??”
하늘에 희미하게 드리우는 오로라
안개를 피해 오로라가 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왔다. 하늘 위에서 계속 모습을 바꾸는 오로라.
하늘에서 내려온 초록빛 커튼
하늘에 일렁이는 초록 커튼. 미바튼의 안개 때문에 흐릿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우리가 본건 오로라였다. 안개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바로 차의 시동을 걸어 오로라가 잘 보임 직한 곳으로 운전을 해서 나갔다. 호수의 안개가 보이지 않을 때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오로라. 귀를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만이 때때로 지나가는 조용한 밤하늘에 마치 세찬 바람에 일렁이는 커튼 같은 초록색 물결이 일렁이면서 그 모습을 조금씩 조금씩 바꿔갔다.
미바튼에서 본 오로라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그다음 방문한 로거(Laugar)에서도 큰 오로라를 볼 수 있었다. 머문 숙소의 이름에 ‘오로라’라는 단어가 들어가서일까? 저녁에 밥을 먹고 쉬고 있는데 위층에 살고 있던 숙소 주인이 조용히 내려왔다.
“지금 밖에 오로라가 나왔어요.”
머리 바로 위에서 터진 오로라
머리 바로 위에서 터진 오로라를 보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당장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겨 밖으로 나가보니 이번엔 세상에, 오로라가 머리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미바튼에서 본 오로라는 앞에 있었다면 이번 오로라는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것 같이 일렁이는 초록빛 오로라. 바로 머리 위에서 일렁였기 때문인지 사진엔 예쁘게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가, 바로, 오로라 밑에 있었다는 사실은 벅찬 감동으로 남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면 바로 눈앞에서 춤을 출 것만 같은데. 한 번 보고 나니 두 번 보고 싶고, 두 번 보고 나니 계속 보고 싶은 오로라.
소리 없이 다가오기 때문에 언제 오로라가 내려올지 몰라, 계속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해야 하긴 했지만 쨘-하고 나타난 오로라를 보고 있으면 언제 그렇게 번거로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밖의 추위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오로라 효과는 대단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오로라에 이미 익숙해졌는지 아무도 오로라를 보러 나오지 않았고,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적막한 길가에서 우리 둘만 오로라를 보며 껑충껑충 뛰었다.
아이슬란드가 사실 오로라를 관찰하기에 아주 좋은 지역은 아니라고 한다. 겨울철 날씨가 시시각각 바뀌기도 하는 등 장애물이 많아서. 하지만 아이슬란드의 오로라가 특별한 이유를 하나 말하라면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 위로 내려오기 때문이 아닐까? 빙하 위로, 거뭇거뭇 한 화산암 위로 내려오는 초록빛 커튼은 아마도 아이슬란드의 오로라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장치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