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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 서울시 시인고택 탐방
일시:2014년 3월 27일 목요일
탐방장소:한용운고택 심우장, 이태준고택 수연산방, 박인환고택, 유심발행지 만해당, 서정주고택 봉산산방
* 한용운 고택 심우장
서울시청역 5번 출구에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참가자 43명이 오전 10시까지 모여 자료집과 명찰을 배부받고 서울시 시인고택 탐방을 위해 출발했다. 맨 처음 간 곳은 한용운 고택 심우장이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1879~1944) 시인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10년간 살다가 임종하신 집이다. 이곳은 도성 밖의 북장골이라고 불리던 한적한 마을이었다. 만해 한용운은 3.1 운동으로 3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출옥하여 거쳐할 곳도 없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안탑깝게 여긴 승려 벽산 김적음이 지금의 심우장터 52평을 만해를 위한 집터로 기증하였다.심우장의 '심우'는 소처럼 우직하게 불성을 찾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총독부와 마주하기 싫다면서 북향으로 집을 지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곳은 또한 만해의 장편소설 '흑풍'을 집필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하에서 한용운은 민족혼을 잃지 않기 위해 온 몸과 언어로 투쟁했다. 일제의 총칼 아래 신음하는 민족의 혼을 일깨우기 위해 한글로 시를 썼다. '님의 침묵'은 3.1운동 실패 후 3년간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후에 시대상황과 자신의 내면적인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노래한 서정시로 1926년 한글 시집으로 발행했다. 조국해방을 눈앞에 둔 1944년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심우장은 고난의 집이기에 한용운의 상징이다. 총독부 반대 방향으로 집을 지어 살며 우리 국토의 모든 곳이 감옥인데 무슨 불을 피우느냐며 불도 피우지 않았다. 성북동 심우장은 역사가 있는 문학의 귀중한 유산이다.
한용운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 한용운 생가가 있다. 나는 그곳에도 가 보았다. 만해 추모 다례식 행사에 참석했었다. 그때 썼던 시도 있다.
만해 생가
김윤자
세기의 큰 불씨, 님의 출생은 장엄했습니다.
하늘을 울리고, 땅을 울리고
대한을 울리고, 세계를 울리고.
남녘 새는 남쪽에 집을 짓고
북마는 북쪽에 머리 두지 않더냐시며
이순신 사공 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조국의 사공 되고, 조국의 마부 되어
우리 땅 지키자고 불붙는 애국심 꽃 피우시니
그 말씀 먹고 자란 앞마당 감나무, 사지가 휘도록
빛 고운 애국의 열매로 불 밝히고 있습니다.
툇마루 곁 대나무, [님의 침묵] 품고 꼿꼿이 서서
님께서 [님]을 보내지 아니 하셨듯이
내도 정녕 님을 보내지 않았노라
잎사귀마다 푸른 침묵 걸어놓고
장독가 아직 마르지 않은 우물물
님께서 제 곡조 못 이기는 사랑 노래 부르셨듯이
내도 제 곡조 못 이기는 사랑 노래 부르노라
두레박에 슬픈 선율 실어 올립니다.
주인 잃은 부엌 두레상엔 빈 그릇만 엎드리어
소리 없는 통곡으로 님을 부르고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거룩한 눈으로 지켜보는
제 59주기 만해 추모 다례식
홍성 결성면, 75호 기념물 만해 생가지 비문 앞에서
모기도 제 동족의 피는 빨지 않거늘
미와, 너는 어찌 동족의 피를 빠느냐
당찬 시 한 수로 조선인 일본 형사 감화시키고
칼날로 일어서신, 님의 뜨거운 애국 새기고 갑니다.
* 만해의 산책 공원
한용운 고택 심우장에서 내려오니 만해의 산책공원이 있다. 고뇌에 찬 만해 동상이 의자에 앉아 있고 곁에는 그의 대표시 '님의 침묵' 시비가 있다. 우리는 문학과 애국의 표상인 만해 동상 곁에서 같은 문인의 길을 걷는 사람들로서 뜨거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 이태준 고택 수연산방
다음으로 간 곳은 소설가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이다. 이태준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소설을 쓴 사람이다. 이곳 수연산방은 1930년대부터 그가 직접 지어서 살던 집이다. 심우장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서 걸어서 갔다. 지금은 전통찻집이다. 살풋한 그리움과 아담한 기풍이 담긴 집이다. 수연산방은 정지용 시인이 질투를 할 정도로 약간의 호사를 지닌 집이다. 당대에는 아름다운 집의 풍모였다. 이태준은 감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대추나무를 집둘레에 심고 병풍처럼 쳐진 북악을 바라보면서 작품을 썼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작은 우물과 나무로 울창한 정원이 있다. 정원에는 '이태준 문학의 산실'이는 표석도 있다. 왼쪽은 전통찻집이, 오른쪽에는 그의 고택 기와집이 있다. 기와지붕과 처마선의 곡선이 우리 전통한옥 그대로의 멋을 지니고 있다. 그의 외증손녀가 1999년부터 전통찻집을 운영하며 고택을 보존하고 있다. 소설가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14년간 살다간 집 수연산방에서 그의 문학적 향기를 느낀 보람된 시간이었다.
* 북촌 중식 식당
북촌의 한 식당에서 중식을 했다. 넉넉한 인심으로 두툼하게 나온 돈까스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식당 주변에는 봄을 알리는 목련과 개나리가 아름답게 피었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의이상문 이사장님과 김경식 사무총장님, 그리고 여러 문우님들과 아름다운 담화를 나누며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 박인환 고택
박인환은 가난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인간의 진솔한 삶과 사랑의 시를 남기고 간 시인이다. 그의 시는 노래가 되고 낭송시가 되어 아직까지도 가슴을 울리고 있다. 그의 시 속에는 민족을 사랑한 이념과 현실참여의 고뇌가 담겨있다. 1956년 절망의 시대였던 어느 겨울날 당시 명동의 은성주점에서 가수 나애심, 시인 박인환, 작곡가 이진섭, 송지영 등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은성주점은 최불암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다. 무료하던 손님들은 가수인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탁했지만 그녀는 사양했다. 그때 박진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쓴 시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로 시작하는 '세월이 가면'이다. 이 시를 받아 읽은 이진섭은 즉석에서 작곡했고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인제보통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 덕수공립학교로 전학했다. 이곳 고택은 그가 전학 와서 몇 년간 살다 간 집이다. 북촌 원서동 1348번지의 이 집은 위험한 상태지만 아직 존재하고 있다. 일본식의 건축양식인 이 집은 현재 폐허 상태로 언제 무너질지 모를 처지에 있다. 하얀 벽면이 그날을 읊조리는 것 같다. 그의 유년의 추억이 남이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이 집에서 그는 경기중학교를 다녔다. 경기중에 입학하여 학업보다는 영화와 문학에 심취하여 결국 3학년 때 자퇴하고 아버지의 친척이 있던 황해도 재령으로 가서 명신중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했다. 1944년 그의 나이 18세 때는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해방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와 김기림, 오장환, 김광균, 김수영 등과 친하게 지내며 작가활동을 했다. 박인환은 키가 크고 얼굴이 작은 미남형의 당시 문인들 중에서 멋쟁이였다. 그는 1956년 '이상 추모의 밤'을 개최한 후 3월 20일 오후 9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31세의 짧은 생을 살다가 박인환을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대표시인 '목마와 숙녀'다. 그의 시는 노래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있다.
* 북촌 한옥
북촌에는 아직도 한옥들이 많다. 특히 북촌 한옥마을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의 전통한옥 거주 지역이다. 조선왕조의 두 궁궐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현재의가회동, 삼청동, 원서동, 재동, 계동 일대다. 조선시대에는 고위관직자나 왕족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는 개화파와 독립운동가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서민들을 위한 소규모 택지들로 분할되었다. 지금의 한옥들은 주로 1930년대 전후의 집들이다. 주변의 인사동, 삼청동 전통문화 예술거리 영향으로 전통한옥 마을의 명성을 다시 찾고 있다. 조선시대와 구한말의 골목길과 가회동 한씨, 윤보선 가옥, 이준구 가옥 등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우리는 박인화 고택을 중심으로 북촌 한옥을 들러보았다. 문화재로 관리하는 아름다운 한옥에 들어가 마루에 앉아 옛 정취를 느껴보기도 했다. 담장 너머로 박인환 고택의 하얀 벽면이 소슬하게 보인다. 북촌 거리를 거닐며 문인들이 드나들던 싸롱, 엘지 도서관 등을 둘러보았다.
* 북촌 여운형 집터
북촌의 도로변에 여운형 집터라는 표석이 있다. 몽양 여운형(1886~1947)은 해방 이후 정국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한말 교육, 계몽 운동에 참여하다가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금릉대학에서 수학한 뒤, 1917년부터 상해로 와서 이듬해 8월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3ㆍ1운동 직후 상해에서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20년 여름 고려공산당에 가입,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민족 대표의원으로 참석해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1923년 초 임시정부의 재편 문제를 놓고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을 때에는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ㆍ중연대로 민족운동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상해를 주무대로 광동 등지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1929년 체포압송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중앙일보사장 재직 중인 1936년 손기정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하였다. 1944년에는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조국의 독립을 준비하였다. 해방을 맞아 안재홍 등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해방정국을 이끌었고, 이후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을 결성해 우파의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 1947년 7월 19일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극우파 청년 한지근이 쏜 총탄에 맞아 생을 마감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여운형에 대한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훌륭한 선인의 집터 앞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한동안 발걸음을 돌리지 못 했다.
* 만해당 유심 발행 장소
북촌 계동 43번지는 한용운이 살던 집으로 1918년 9월 창간된 잡지 유심 발행 장소다. 이 책은 그해 12월까지 발행하고 중단되었다. 이 집은 최린이 한용운 시인을 찾아 불교계를 3.1운동에 참여하게 만든 곳이다. 최린은 당시 이승훈과의 화합을 통해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운동을 일원화 시켰다. 3.1독입운동 후 법정에서 '서울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만해는 '유심지를 발행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 당시 내설악과 오세암에 머물고 있었다. 만해는 이 '유심' 책을 통하여 세계정세의 흐름을 널리 알려려 했다. 유심에는 현상문예란을 만들어 독자 투고를 계속 홍보하기도 했다. 제3호에는 그 첫번째 현상문예란의 당선작을 발표했다. 당시 견지동 118번지에 살던 방정환이 '고학생'과 '마음' 등 소설로 입선되기도 했다. 다시 부활된 '유심' 책을 나는 지금 받아보고 있다. 만해문학을 중심으로 나오는 책이다. 만해당 내부는 들어가지 못 했지만 좁은 북촌의 골목길에서 만해 한용운 시인의 문학과 애국에 대한 족적을 더듬어 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 북촌에서 본 창덕궁 비원
북촌의 도로변에 창덕궁 비원이 우람한 자태로 솟구쳐 있다. 옛스런 북촌 마을과 함께 비경이다. 긴 담장이 비원을 보호한다. 담장 곁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분주히 왕래한다. 사람들의 걸음도 많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우리 회원들을 태우고 다니는 버스가 그 도로변에 있다. 창덕궁 비원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들려서 버스를 타고 서정주 고택이 있는 관악구 남현동으로 이동했다.
* 서정주 고택 봉산산방
서정주 고택 봉산산방은 관악구 남현동에 있다. 서정주 시인이 30년을 살던 곳이다. 서울시가 10억원을 지원하여 복원했고 2011년부터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시인이 2000년 세상을 떠난 뒤 10여 년 동안 빈 집으로 폐허였다. 마당은 잡초밭이었고, 외부인 출입을 막기 위해 대문은 쇠사슬로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집은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가 되었다는 단군신화의 전설을 바탕으로 서정주 시인이 봉산산방이란 당호를 지었다. 서정주 시인은 이곳에서 1970년부터 2000년까지 살았다. 당시 많은 문인들이 방문하던 한국문학의 명소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그리 넓지 않은 아담한 정원에 봉산산방이라는 표석이 있다. 조금 열린 창문으로는 거실에 놓인 서정주 시인 내외의 다정한 사진이 보인다. 그 앞에는 '내 늙은 아내'라는 시가 애틋하게 시선을 끈다. '국화 옆에서'와 '푸르른 날' 시가 있는 작은 정자에 앉아서 잠시 설명을 들었다. 실내로 들어가 1층과 2층의 전시실에서 유품을 보았다. 국제펜 문인들이 온다고 하여 따뜻하게 지펴놓은 2층 방안에 들러앉아 시인에 대한 회억담을 들었다. 한국 서정시의 대표 시인 서정주님의 체취를 느껴본 보람된 탐방이다.
* 구 벨기에 영사관
서정주 고택에서 사당 전철역으로 내려오는 길에 구 벨기에 영사관을 만났다. 나는 세계여행 중 다녀온 벨기에가 떠오르며 애정이 느껴졌다. 벨기에는 작지만 정이 흐르고 다부진 인상을 주었던 나라다. 이곳 건물은 1903년에 짓기 시작해서 1905년에 완성한 대한제국시기의 벨기에 영사관이다. 1919년 영사관을 충무로로 옮긴 다음, 요꼬하마 생명보험회사 사옥으로 쓰이다가, 다시 일본 해군성 무관부 관저로 이용되었다. 광복 후에는 해군헌병대에서 사용하였다. 1970년 상업은행이 사용하다가 은행측에서 그 자리에 건물을 짓기 위하여, 회현동에 있던 공사관 건물을 서울특별시 관악구의 남부순환도로변에 있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벽돌과 화강암을 적절히 사용하여 지은 건물로, 좌우 대칭의 고전주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20세기 전반기의 중요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잠시 안에도 들어가 보았다. 외관이 매우 아름답다. 정원도 잘 가꾸어 놓았다. 이것으로 오늘의 일정은 모두 마무리되고 해산했다. 우리 부부는 전철 2호선 당산역 서울시청진행방향 스크린도어에 설치된 나의 지하철시 '찔레꽃'을 보고 귀가했다. 아주 의미있고 뜻깊은 문학 나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