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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월은 가도
이 문 열
“아범아, 꿈자리가 몹시 뒤숭숭하더라.”
농장(農場)으로 나가면서 잠시 병석을 들렀을 때 어머니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말이어서 새삼스럽기는 했지만 그 순간의 까닭 모를 섬뜩함은 지난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가 어쩌면 어머니의 그 같은 말이 병세의 악화와 어떤 연관을 가졌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문득 우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젊었을 때 진 어혈(瘀血) 탓일 거라는 자가 진단 외에는 이렇다 할 병명도 모르는 채 어머니는 벌써 몇 달째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다.
“아랫니가 뭉청(몽창) 빠지지를 않나, 안방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지를 않나…….”
변함 없는 꿈 내용도, 역시 오랜만에 듣는 것이었지만 까닭 모를 섬뜩함을 불러일으켰다. 어머니는 언제나 이[齒]에 관한 꿈을 가족들로 바꾸어 풀이했다. 윗니는 손윗사람, 아랫니는 손아랫사람,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들을 때마다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 뒤에 이어진 뱀 꿈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뱀 꿈을 어떤 종류의 특정한 재난을 예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지난날 그것은 신통하리만큼 잘 들어맞곤 했다. 한 가지 일에 강하게 집착하게 되면 그 방면의 육감이 특별하게 발달하는 것 같았다.
“걱정 마세요, 어머님. 이젠 세월이 달라졌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는 짐짓 과장된 목소리로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어머니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한곳에 너무 오래 살았다. 더구나 여긴 외진 산골이나 다를 게 없어…….”
그는 출근을 미루어 가며 간신히 어머니를 진정시키고 집을 나왔지만 아무래도 심상찮은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6·25란 밤하늘에서 어지럽게 교차되던 예광탄의 기억이었다. 다시 말해, 겨우 네 살이었지만 그에게 남은 6·25의 유일한 기억이 그 날카롭고 불길한 꼬리를 가진 예광탄의 탄도곡선이었다.
서기로는 1951년쯤 되는 해 늦겨울의 어느 밤이었다. 천지 모르고 뛰어놀다가 곤한 잠에 빠져 있던 그는 옷을 입히는 할머니의 거친 손길과 볶아치듯 하는 총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마다 빨갛고 파란 빛줄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총소리는 모래주머니로 담을 한 지서(支署)와 그 앞 전투경찰대가 참호를 파고 의지한 방죽 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놀랍기보다 무슨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만난 기분으로 밤하늘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에게 할머니는 때아닌 겨울옷과 ‘보꼬보시’라고 불리던 일본식 방한모를 뒤집어 씌우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아이고, 우짤꼬? 인자는 꼽다시 죽는갑다. 이놈들이 집에 불을 놓고 우릴 태와 쥑일 끼다…….”
그러더니 한여름에 겨울옷을 입고 고깔까지 뒤집어써 후텁텁할 뿐만 아니라 몸놀림까지 거북한 그의 손을 세차게 끌고 사립 쪽으로 달려 나갔다.
“이눔아, 얼른 달라 빼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천장만장(天丈萬丈) 가뿌라.”
느닷없이 어린 그의 등짝을 후려치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외치는 할머니의 고함이었다. 밤하늘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는 그제야 왕,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등짝에 와 닿는 아픔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때 채독 같은 배를 앞세운 어머니가 허둥지둥 달려나와 그를 싸안고 엎드러지며 울먹 였다.
“어머님, 안 돼요.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요. 이 난리 중에 어린게 가 봐야 어딜 가겠어요? 차라리 함께 죽어요.”
“앙이다. 이거 놔라. 야(이 아이)라도 살려 씨를 보존해야 한다. 이 집에 들어와 내 대(代)에 손(孫)을 끊어 놓을 수는 없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모두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옥신각신하는 틈바구니에서 이제는 두려움보다는 정체 모를 슬픔에 젖어 더욱 목을 놓았다.
결국 그 한차례의 소동은 산봉우리에서 솟던 예광탄의 빛줄기가 하나씩 둘씩 줄어지고, 볶아치던 총소리도 어느 정도 잦아든 뒤에야 가라앉았다.
“내앞[川前] 아즈메 진정하소. 아무 일도 아입니더. 야산대(野山豚) 아들이 까부는 기라요. 몇 놈 안 되이 걱정 마소.”
나중에 경찰서장까지 지낸 ‘순사 아재’라고 불리던 친척이 어디선가 나타나 할머니를 달래는 말이었다.
“안 속는다. 그렇게 맘 턱 놓도록 맹글어 놓고 쥑일라꼬? 내 다 안다. 다시 인민군만 내려오면 우릴 한 구딩에 묻고 너그들은 남으로 내뺄 요량이제? 나도 들은 귀가 있다. 그라이 보래, 야만이라도 보내다고. 우리 집 씨나 전하게 해 다고. 야 애비가 빨갱이 짓 했다꼬 큰집 손(孫) 끊어지는 꼴은 니도 보고 싶진 않을 끼다.”
“글쎄, 아즈메 내 말 믿으소. 그건 다 헛소문이라요. 혹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예비 검속을 했을 뿐이제, 죄 없는 가족들이사 뭣 때메 죽이겠능교?”
“10·1 폭동 때도 봤고, 5·10 선거 나불(무렵)에도 봤다. 너그도 눈에 핏기가 도이(도니) 아 어른 안 가리더라. 뻔하다. 쫓기 가민서 우리를 성하게 놔둘 리 없다.”
그러나 순사 아재는 끈질기게 할머니를 달랬다. 그사이 예광탄이 모두 꺼지고 총소리도 멀어지자 할머니도 차츰 진정이 되었다.
“할 수 없제. 잡힌 놈이 벨 수 있나? 야야, 고만 들어가자.”
마침내 할머니가 탄식처럼 내뱉는 말이었다. 그리고 흰자위만의 눈으로 순사 아재와 어머니를 한바탕 흘기더니 미친 듯이 그를 끌어 안았다.
“아이구 불쌍한 내 새끼, 안 놀랬나? 글체(그렇지), 글타, 같이 죽자. 이 난리 통에 니가 가 본들 어딜 가겠노? 지 아도 내삘고 가는 판에 누가 니를 거다 주겠노?”
할머니의 목소리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어머니도 곁에서 가만히 흐느꼈다. 어린 그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 역시 눈물 때문에 어두운 밤하늘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순사 아재의 말은 맞았다 이튿날 그는 조무래기 친구들과 함께 사람이라기보다는 무슨 짐승처럼 죽어 있는 두 구의 시체를 지서 앞마당에서 구경하였다 뒷날 들어서 알게 된 것이지만, 1·4 후퇴 뒤로 북에서 다시 밀고 내려오는 패거리에 호응하기 위해 가까운 산에서 내려온 야산대가 남기고 간 시체였다. 작은 시골 지서만 생각하고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마침 북쪽에서 밀려 내려와 그곳에다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전투경찰대에게 거꾸로 낭패를 당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 일에서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이상한 기억의 고집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두 구의 시체가 훨씬 생생한 기억이 될 수도 있지만, 왠지 그에게 있어서의 6·25는 언제나 밤하늘에 어지럽게 솟아오르던 예광탄으로만 떠올랐다. 그것도 아무런 의미를 동반하지 못한, 몽릉한 유년의 기억으로서만.
농장 관리 사무실과 계사(鷄舍)가 있는 언덕을 오르면서 그는 전에 없이 세밀하게 눈 아래로 펼쳐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제법 오랫동안 한곳에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원(河原) 사업소를 좀 맡아 주게. 생산 관리가 엉망이야. 이럴 바에야 농장이고 목장이고 다 집어치우라는 게 아버님의 말씀이야. 우유고 계란이고 야채고 중간상들로부터 납품(納品)을 받을 때가 차라리 싸게 먹혔다는 계산이거든. 한 3년만 맡아 자기 일처럼 보살펴 줘. 아무리 부자(父子) 사이라 해도 이건 영 위신이 말이 아니야. 절대로 자네를 시골로 쫓는다는 생각은 말게. 가 보면 알겠지만 생활은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결세. 거기다가 자네 고향도 그 부근이지, 아마. 어쨌든…… 내 약속하지. 그곳 일만 제대로 되면 외국 지사(支杜)나 한 1년 돌려 본사로 데려오겠네. 부장 자리 하나쯤 마련해서 말이야.”
그것이 바로 본사의 과장이었던 그가 이 지방 사업소로 내려오게 된 경위였다. 부탁한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가까운 친구로, 머지않아 아버지를 이어 회장이 될 강 전무였다. 식품(食品) 파트의 전무로 실무에 손을 대면서 원가 절감을 위해 첫 번째로 낸 안(案)이 농장과 목장의 직영이었는데, 결과가 신통하지 않자 친구인 그에게 그 관리를 맡겼다.
강 전무의 말대로 그곳의 생활이 별 불편은 없었다. 포장된 국도가 농장 발치를 지나고 있었고, 농어촌 전화(電化) 사업의 혜택으로 갖가지 전기 제품을 쓰는 데도 지장이 없었다. 구획 정리가 잘된 논밭들, 주택 개량으로 도회의 일부를 옮겨 놓은 듯한 마을. ― 아이들 교육 문제가 있었지만, 그것도 터울이 길어 이제 국민학교 5학년인 큰놈만 처가에 맡겨 두는 걸로 충분했다. 작은놈은 내년이나 돼야 취학 연령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덕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에 그 마을이 그날따라 새삼 깊은 산골로 느껴졌다. 늘상 보아 오던 봉우리들은 문득 높게 치솟고, 가까운 계곡들도 검푸르고 깊어 보였다. 개울가에 줄지어 심어 둔 사방용 버드나무들도 무슨 음험한 원시림처럼 느껴졌으며, 군데군데 솟은 텔레비전 안테나도 그 옛날 설 [歲] 무렵이면 농가에 세워지던 솟대 같았다. 자동차로 달리면 한 시간 안에 고속도로로 연결되는 국도도 ― 문득 먼 산마루에서 가는 실처럼 끊어진 듯 보이고, 따라서 그곳이 외부와는 일체 단절된 오지처럼 느껴지게 했다. 이곳이 너무 산골이라고 말한 것이 반드시 당신의 병심(病心)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는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떠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할머니는 휴전이 된 이듬해에 끝내 그리던 외아들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내 죽거든 가슴을 한번 열어 봐라. 시커멓게 문드러져 내려앉았을 끼다.”
할머니는 병석에서 가끔씩 외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표현하시곤 했다. 그리고 한(恨)과도 흡사한 그 그리움은 주검과 함께 땅속으로 가져갔지만, 그 못지않게 할머니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공포와 불안은 고스란히 며느리에게 남겨 주고 가셨다. 바로 그 공비들의 습격이 있던 날 밤 거의 광적인 상태로 드러났던 공포와 불안이었다. 그날 밤은 맹목적인 모성애로 나를 잡아 두었으나 어쩌면 어머니 또한 처음부터 할머니와 같은 크기의 공포와 불안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의 어린 날은 그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이어져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택한 방법은 끊임없는 이사였는데, 심할 때는 1년에도 두세 번씩 이사를 다녔다. 그것도 대개는 동네에서 동네가 아니라 도회에서 도회로의 이주였다.
“뱀 꿈을 꾸었다.”
삯바느질이나 부유한 친지들의 잡일로 늦게 잠자리에 든 어머니가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아침이면 그게 바로 이사의 시작이었다. 이미 말한 대로, 한 가지 일에 깊이 집착하다 보면 거기에 대한 예감이 특히 발달하게 되는 것인지 어머니의 꿈은 신통하게도 들어맞아 그들 일가는 그날 해를 넘기지 않고 어슷어슷한 인상을 가진 중년 남자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대개 어머니를 상대로 이것저것 캐묻고 수첩 같은 데 무언가를 끄적이다 돌아가곤 했지만, 때로는 골목이나 학교 앞 같은 데서 불쑥 나타나 그에게 엉뚱한 것을 물어볼 때도 있었다.
“너희 아버지 어디 계시니?”
“너희 아버지 언제 오신다든?”
“너희 아버지 언제 다녀가셨니?”
그런 그 사람들의 질문은 어린 그에게는 언제나 느닷없고 까닭 모를 공포였다. 아버지, 아버지, 그 생소하면서도 한(恨) 서린 이름, 할머니가 애절하게 부르시다가 숨져 간 이름, 깊은 밤 선잠에서 깨어나면서 어머니의 흐느낌과 함께 듣던 그 이름, 그러나 제대로 사물을 분간하면서부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빛바랜 사진을 가지고도 도무지 상상이 안 되던 그 이름에 대해 묻는 것이 왜 그렇게도 두렵고 싫었던 것일까. 거기다가 때로 그들이 으름장 비슷하게 그 이름의 행방을 추궁할 때면 숨이 막힐 듯한 공포까지 느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인가의 어떤 작문 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싫은 것은 아버지와 형사(刑事)라고 썼다가 그 학년 내내 담임 선생의 의심쩍은 눈초리를 받은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이삿짐을 싸자.”
그 사람들이 그렇게 다녀간 오후면 어머니는 암담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짐이랬자 버들고리짝 하나와 이불 보퉁이, 그리고 부엌 살림을 담은 사과 궤짝 하나가 전부였는데, 대개 버들고리짝과 사과 궤짝은 누나와 어머니가 하나씩 나누어 머리에 이었고, 이불 보퉁이는 그가 메곤 했다. 나중에 그들 삼 남매의 책 보따리가 하나 더 늘었지만, 그때는 유복녀(遺腹女)인 여동생이 자라 그 짐을 맡았다.
그리하여 이삿짐이 챙겨지면 날이 저물기 무섭게 출발이었다. 그들은 무슨 큰 불륜(不倫)을 저질렀거나 끔찍한 죄인들처럼 살던 도시를 버리고 어둠 속에 멀고 낯선 도시로 떠났다. 어머니가 미리부터 보아 둔 곳으로, 대개는 잘사는 피붙이나 성공한 아버지의 친구가 사는 도시였다. 서울, 부산, 대구 목포, 청주, 안동……. 그들이 그런 경위로 떠돈 도시는 열 손가락을 채우고도 남았다.
덕분에 그는 도합 다섯 번 국민학교를 옮겼지만 한 번도 전학증을 가져가 본 적이 없었다. 이따금씩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린 때도 있었지만, 그들의 가구는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사과 궤짝 수준을 넘지 않았으며, 나중에 한곳에 자리 잡고 살게 된 후에도 책상이나 장롱 같은 가구는 그들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았을 정도였다. 집에서 장이나 김장을 담그는 광경도 어린 그의 기억에는 거의 없다.
농장에 나온 것이 좀 늦은 탓인지 관리인들과 용인(用人) 들은 모두 일터로 나가고 늙은 박 씨(朴氏)만 사무실에 남아 무언가를 찾고 있다가 들어서는 그를 맞았다.
“소장님, 오늘은 늦네요. 집에 무신 일이라도 있습니꺼?”
“아, 뭐, 별일은 아닙니다. 모두들 일 나갔는가요?”
“예, 오늘은 목초(牧草) 빈다고 말캉 글로 갔임더. 내하고 김 군만 계사(鷄舍) 소독을 할라꼬 남았는데, 분무기가 고장이 나 새기(새것이) 있는강 찾고 있음더.”
“창고 윤 씨(尹氏) 에게 물어보지 그래요?”
“윤 선생도 초지(草地)에 갔심더. 메칠 전에 사무실에서 얼찐 본 거 같은데…….”
“내가 창고에 넣어 두게 했어요. 김 군 시켜서 창고 열쇠나 받아오게 하시죠.”
그리고 그는 자기 자리에 털썩 앉아 담배를 빼물었다. 목초를 벤다면 그도 초지로 가 보아야 할 것이지만 왠지 나른해지며 움직이기가 싫었다.
잠시 후 김 군을 초지로 보낸 박 씨는 다시 쭈뼛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영감님은 6·25 때 어디 계셨어요?”
그가 갑작스레 묻자 빈 의자를 찾아 앉으려던 박 씨가 멍청한 눈으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엉뚱하다는 느낌은 묻고 있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내사 여기 본토백이 아입니꺼? 중년에 몇 해 도회 물 먹은 걸 빼 놓고는 내처 여기 살았으니께는.”
“그럼 그때는 여기 살았겠군요?”
“그라믄요. 지가 도시로 나간 지는 휴전된 뒤라요.”
“여긴 어땠어요?”
“뭘 말입니까?”
“여기도 사람 많이 죽었지요?”
“말 마이소. 사변 전에도 지서가 두 번이나 불탔심더.”
이미 지나간 얘기니까, 하는 식으로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박 씨의 표정에는 어딘가 정말로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데가 있었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많이 죽었나요?”
“여러 질이라요. 이쪽저쪽, 똑똑한 사람 어리숙한 사람 할 것 없이…….”
“민간인도?”
“총알이 눈이 있능교?”
“아니, 저는 양민을 말했어요. 교전(交戰) 중이 아니라, 끝난 후나 시작되기 전의…….”
“여기라꼬 머 크게 다르겠심꺼? 억울하게 죽은 사람 많지요.”
그러는 박 씨의 얼굴이 드러나게 어두워졌다.
“군경(軍警) 가족들 말입니까?”
“하필 군경 가족뿐이겠임꺼? 조금만 우익(右翼) 했으믄 알라까지 산 채로 땅에 묻고 간 기라요.”
“얘기는 들었지만 믿을 수 없군요.”
“믿을 수 없다꼬? 실은 지도 그때 마누라캉 알라 하나를 생으로 잃었심더.”
거기서 박 씨의 목소리는 격해졌다. 그는 아차, 싶었으나 이미 내친김이었다.
“안됐습니다. 그때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일이라꼬요? 일이라면 젊은 혈기에 족청(族靑) 좀 따라다닌 거 밖에 없임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산빨갱이들이 내려와 죄 없는 그것들을 찔러 쥑이고 간 기라요. 중년에 고향을 떠난 것도 그것들이 당최 눈에 밟혀서.”
“이거 제가 잘못 이야기를 꺼낸 것 같습니다. 공연히 남의 아픈데만 건드렸군요.”
“아프다고사 뭐…… 다 운수 소관이지요.”
“그런데…… 부역자 가족들은 어땠습니까?”
“그쪽이라꼬 우찌 성했겠입니꺼? 말이사 바른 말이지만 지도 처음 기집 자슥을 그 모양으로 잃고 나니 눈이 뒤지배지드만요.”
“그쪽도 여자와 아이들까지……?”
“깨놓고 말하믄 그쪽도 안 당했다꼬는 못칼 낍니더.”
“아무리 빨갱이 가족이라고는 해도 법이 있는데?”
“빨갱이 저그들은 법 따라 이쪽 사람들 쥑였습니꺼? 시상(세상) 무신 법에 인자 막 시집온 천치 같은 마누라와 백 날도 안 된 알라를 한 창(槍)에 꿰 놓으란 법이 있습니까? 한번 피맛을 봐 눈깔이 뒤집히믄 보이는 기 없는 기라요.”
“무서운 세상이군요.”
“평생에 또 올까 겁나는 세상이었지러요.”
“설마 그런 일이야 있겠습니까.”
“아입니더. 장담 못 합니더. 시방 보기에는 모두 양순해 보이지만, 난리가 나고 한번 눈들이 뒤집혀 보이소. 법이 뭔 소용 있는강.”
“그래도…….”
“아메 틀림없을 낍니더. 우야믄 더할지도 몰라요. 하기사 전맨치로 한 마실에서 서로 쥑이고 살리는 일은 없겠지만 남북끼리는 틀림없이 그때보다 더 심할 낍니다. 생각해 보이소. 요새 아들 빨갱이라카믄 이마에 뿔 돋고 입에는 피를 철철 흘리는 괴물로 압니더. 절마들이라고 다를 리 있습니꺼? 몇 십 년 동안 서로 미워할 것만 가르쳐 놨으니, 만약 일이 벌어지믄 그때는 참말로 인정사정 안 볼 낍니더.”
“그래도 양쪽 다 엄연히 법이 있는데…….”
“글쎄…… 도회지라믄 또 몰라도 산골테기에서야 그 법이 글케 큰 힘을 써낼라는강……. 그란데, 소장님, 갑자기 그 일은 와 그리 캐물어 쌓십니꺼?”
“아, 그저 좀…….”
그제야 그는 약간 당황하여 얼버무리며 얘기를 끝맺었다. 따지고 보면, 박 씨에게서 처음 듣는 말도 아니었고, 또 그가 물은 것은 역시 반드시 몰라서 물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절을 직집 체험했음 직한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한 번쯤은 반드시 그때 일을 물어보는 것이, 어머니의 불길한 꿈과 마찬가지로 10년간 잠잠했던 그의 옛 버릇 가운데 하나였다.
어린 날의 그 유랑과도 같았던 삶의 방식을 어머니가 끝맺게 하는 데 결정적인 몫을 한 것은 교회와 5·16이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교회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 중에는 새벽 기도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싸늘한 체온 때문에 선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나 천막 교회의 부흥회에서 철야 기도를 하고 돌아온 어머니의 머리칼에 앉은 서리를 보며 느끼던 신기함 따위가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거의 고통에 가깝던 신앙 강요가 그의 기억 도처에서 나타난다. 주일학교를 빼먹었다고 해서 종아리에 피가 맺히도록 맞은 일이며, 「마태복음」을 단 한 줄도 틀리지 않게 외기 위해 밤낮을 시달리며 보내야 했던 국민학교 상급반 시절의 어느 여름방학, 크리스마스는 설이나 한가위보다 훨씬 중요한 그들의 명절이었고, 수난절(受難節)의 두 주일은 할머니의 기일(忌曰)보다도 더 엄숙하게 보내야 하는 날들이었다. 나중에 그의 대학 진학조차도 어머니는 신학대학을 강요했었다.
기독교에 대한 어머니의 그 같은 몰입은 당시의 일반적인 의심 ― 헌 옷가지나 밀가루 같은 구호품으로 대표되는 어떤 물질적인 보상 ― 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철이 든 후의 추측이긴 하지만, 그때 어머니가 교회에서 구한 것은 언제나 그녀의 영혼을 물어 뜯고 있는 그 공포와 불안으로부터의 둔피처(遁避處) 였으며, 신앙은 바로 땅 위에서의 온전한 삶을 보장하는 일종의 생존 방식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광신적(狂信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몇 년이 지나가고, 교회가 기억 해 주는 사람이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차츰 자신과 그들 어린 삼 남매의 생존에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어린 그에게는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지 않게 느껴지던 고향도 차츰 그들 일가를 신산(辛酸)스러운 삶에서 구해 줄 희망의 땅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 전에도 그들이 고향과 전혀 무관하게 지내 온 것은 아니었다. 어떤 도시에서 기대한 만큼의 도움을 받지 못해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졌을 때나, 그들 삼 남매가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가 되면 어머니는 몇 날 몇 밤이고의 긴 기도 끝에 한동안 집을 비우셨다. 그리고 얼마간 필요한 돈을 마련한 후 돌아왔는데, 그때 어머니의 표정에는 무슨 끔찍한 사지(死地)를 무사히 다녀왔다는 듯한 안도가 서려 있었다. 역시 나중에 안 일이지만, 고향에 남겨 둔 땅을 팔아치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것도 밤중에 몰래 고향에 숨어들어, 누가 그들의 땅을 부치고 있는가를 알아낸 후, 그 주인이 생빚을 지고서라도 사고 싶을 만큼의 헐값을 매겨 떠맡기는 식이었다.
그런데 5·16 후 집권당이 내건 선거 공약이 그런 어머니로 하여금 떳떳이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게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가 중학교 2학년 무렵이던 어느 날 무언가 교회 일로 나갔던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그들 삼 남매를 불러 놓고 말했다. 부역자나 월북자 가족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지난 일을 묻지 않겠다고 한 집권당의 선거 공약을 누구에겐가 들었거나 신문에서 본 것 같았다.
‘이삿짐을 싸자.’고 말하던 때의 그 어둡고 착잡한 표정에 익숙해온 그들 삼 남매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밝고 희망에 찬 어머니의 낯선 얼굴을 쳐다보았다.
“집은 아직 그대로 있다. 마흔 칸이다. 단칸 셋방과는 비교도 안 된다. 땅도 위토(位土)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논만 스무 마지기는 될기다.”
어머니는 주로 그보다 세 살 손위인 누나를 상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였지만 살림이 어려워 그 전해부터 집에서 놀고 있던 누나는 왠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이제서야 돌아가요?”
“이제는 돌아가도 괜찮으니까.”
“그 전에는 누가 잡아먹나요?”
“몇 번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만약 우리가 거기 머물러 있었으면 모두 벌써 죽었을 거다.”
“여기서도 땅이 무너졌거나 하늘이 꺼졌으면 모두 죽었을 거예요.”
“너는 자꾸 비뚤어지는 것 같구나. 네 학교는 그곳에 돌아가서 형편이 펴지는 대로 계속하면 된다.”
“다른 애들은 내년이 졸업이에요. 그만한 재산이 있었으면 왜 진작 돌아가지 않았어요? 도대체 작년과 지금이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어요?”
“대통령이 약속했다. 이제 우리는 어디 있어도 안심할 수 있디.”
“그 대단한 하나님은 어쩌고요?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할 수 없나요?”
“물론 하나님도 우리를 보호하시지. 그러나 정치는 정치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그래서 나는 가이사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싫어요. 늦었어요. 나는 어쨌든 여기 남아 내 힘으로 학교를 마칠 거예요. 더 이상 어며니를 따라다니다가는 나의 삶도 그 괴상하고 끝 모를 공포에 희생되고 말 거예요. 또 이것저것 죄다 헐값으로 팔아먹고 껍질만 남은 그곳에 가 본들 물 긷고 나물하는 일밖에 더 남았겠어요?”
누나는 정말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 도시의 어떤 공장에 남아 야간 학교라도 가겠다고 악착을 떨더니 끝내는 끝 모를 도회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따금씩 그녀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친지들의 전언(傳言)뿐 그 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누나 하지만 그가 모든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차츰 아버지의 일에 흥미를 가지게 된 그가 먼저 어머니에게 물은 것은 봉우리마다 예광탄이 솟아오르던 그 밤이었다.
“네 아버지는 좌익이었다. 해방 전부터 관여하다가 나중에는 숫제 집을 나가서 그 일에 매달렸다. 그런데 6·25가 터졌다. 할머니와 나는 영문도 모르고 집에 있다가 다른 부역자나 좌익 가족들과 국민학교 창고에 갇히게 됐지. 들리는 풍문은 만약 저쪽 군대가 그곳까지 밀고 오면 우리는 모두 퇴각 전에 처형되리라는 것이었어. 산(山)사람들의 끔찍한 행패는 물론, 혼란기의 격앙된 감정이 저지르는 갖가지 불행한 사태를 수없이 보아 온 터라 우리도 그 풍문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다행히도 해산을 오늘내일하는 만삭의 임부여서 우익 청년들의 감시 아래 집으로 돌려보내졌지. 네가 기억하고 있는 밤은 그 무렵의 어떤 밤일 거다.”
어머니는 기억을 더듬어 그렇게 말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셨어요?”
“후퇴 직전에 밀려온 국군 부대의 부대장 하나가 네 아버지와 고보(高普) 동창이었다. 그분은 우리 가족을 군용 트럭에 실어 후방 도회지의 경찰에 인계했지. 그게 그분이 자기를 상하지 않고 우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그곳 경찰서에서 정식 취조와 재판을 거쳐 여섯 달 만에 풀려 나왔다. 그 여섯 달도 아무것도 모르고 여맹(女盟) 위원장이 된 할머니와 위원이었던 나 자신의 죗값이었지.”
“그때 창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정말로 모두 죽었나요?”
“우리가 도시를 떠돌면서 들은 후문은 그랬다. 그리고 그게 할머니나 내가 고향을 언제나 가기만 하면 죽는 땅으로 여기게 된 까닭이지. 고향에 다시 드나들기 시작한 후에야 그게 유엔군의 오폭(誤爆)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두려움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우리는 피맛을 보고 미쳐 뛰는 저쪽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너무 많이 보았던 거야. 저쪽 사람들이 그랬으니 이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우리의 당연한 공포 아니겠니?”
그것이 그의 어린 날을 줄곧 사로잠아 온 의문 ― 도회와 도회로만 떠돈 남다른 생활 방식에 대한 ― 의 해명이었다. 누나는 그걸 어머니 자신의 정신적인 결함으로 여겨 반발하고 떠난 것이었다.
사택에서 아내의 전화가 온 것은 초지(草地)를 둘러보고 돌아온 그가 양계장의 산란율을 건성으로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여보, 경찰서에서 사람이 왔어요. 곧 그리로 갈 거예요.”
“경찰서에서? 왜?”
대단한 일은 아닐 테지만 나쁠 때에 왔구나, 하는 기분으로 그가 되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당신 무슨 짚이는 일 없으세요?”
“없어.”
“몇 번이나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괜히 불안해요.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녜요?”
“없대두. 걱정 마.”
“아시는 대로 전화 주셔야 해요.”
“알았어.”
그러나 그의 가슴에도 까닭 없이 서늘한 바람이 불어 가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경찰은 그로부터 오래잖아 왔다. 말쑥한 사복 차림의 삼십 대 형사였는데 어린 날 언제나 그 사람이 그 사람같이 보이던 중년의 음침한 얼굴이 아니라는 데 우선 마음이 놓였다.
“한영식 씹니까?”
“그렇습니다만…….”
“본서(本署) 에서 왔습니다. 정보 2과 박인수입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신원 조회 의뢰 같습니다. 여권 신청 때 쓰이는 걸로 생각되는데…… 그런 일 없습니까?”
그제야 그는 짚이는 게 있었다. 며칠 전 본사 총무국에서 호적등본 두 통과 크고 작은 사진 여러 장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이유를 묻는 그에게 약간 친분이 있는 총무국 직원은 농담처럼 전화에 대고 말했다.
“몇 년 시골에서 썩었으니 외국 물도 좀 먹으셔야지요. 강 이사님 지십니다.”
아마도 강 전무가 다시 이사가 되고 그를 본사로 불러들이기 전에 외국 바람이나 좀 쐬게 하겠다던 약속을 지킬 모양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처럼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직접 하시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형사가 다시 물었다.
“네, 본사에서 그런 계획을 듣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그 일만으로?”
“실은 저번 연좌제 폐지 때도 선생님을 잠깐 뵈올 일이 있었습니다. 겸사겸사해서…….”
“알겠습니다. 제게 특별히 물으실 일은?”
“아, 예. 대단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무언데요?”
“부친께서 살아 계신다면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일흔셋입니다. 어머니보다 네 살 위 이셨다니 까요.”
“그렇다면 살아 계신다고 쳐도 크게 활동하실 수 있는 연세는 아니시군요?”
“그런…… 셈이죠. 그건 왜…….”
그러나 형사는 새로운 물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광양식품 하원(河源) 사업소장으로 되어 있는데 직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본사로 치면 부장 자리쯤 됩니다.”
“큰 회사이니 봉급도 많으시겠군요?”
“보너스를 나누어 본봉에 더하면 월 팔십만 원 정도 됩니다.”
“재산 정도를 물어봐도 좋겠숩니 까? 동산과 부동산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부동산으로는 서울에 집이 한 채 있습니다. 5년 전에 이천만 원 준 것이니 지금 한 오천 될까요? 고향에 과수원과 논밭이 약간 있습니다만 합쳐도 서울의 집보다 못할 겁니다.”
“팔천 정도로 잡아 두겠습니다. 동산(動産) 저축 기타는?”
“저축과 보험이 약간 있고 나머지는 끌고 다니는 살림살이입니다. 삼천은 넘겠죠.”
그는 약간 과장하는 기분으로 사실을 말했다. 경제력이란 일쑤 사상의 건전성을 재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지 않으신 나이에 우리 같은 말단 공무원이 보기에는 대단한 재산을 장만하셨군요.”
그렇게 말하는 형사의 표정에는 정말로 가벼운 선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나친 속단일지는 모르지만, 그만하면 크게 의심할 바 없지 않겠느냐는 표정이 되어 몇 가지 더 건성으로 묻고는 곧 돌아갔다.
“그냥 뒤로 조사해서 보낼 수도 있지만 뵙고 싶기도 해서……. 행여 지난날의 연좌제가 아직 살아 있다고 오해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건 이제 선생님께서 잊으셔도 좋은 악몽입니다.”
그런데도 처음 아내의 전화를 받았을 때 가슴속을 불어 가던 서늘한 바람은 그 형사가 공손한 인사와 함께 돌아간 뒤에도 종내 그칠 줄 몰랐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됨으로써 10여 년에 걸친 그들의 유랑은 끝났다. 해방 전까지도 천석꾼으로 불리던 그들의 살림은 부친의 소위 그 건국(建國) 사업 때문에 태반이 날아가고 다시 농지개혁과 재 버리듯 헐값으로 팔아 치운 어머니 때문에 그 나머지도 대부분은 남의 손에 넘어가 버렸지만 그래도 고향에는 집과 상당한 논밭이 남아 있었다. 예전처럼 소작을 두거나 머슴을 부릴 처지는 못돼도 그럭저럭 양식 걱정은 안 할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어둡고 괴로웠던 지난 세월도 조금씩 잊히기 시작했다.
이미 전쟁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일생을 두고 아물 것 같지 않던 마음의 상처들도 차츰 아물어 가고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기도하곤 했다.
“하나님 아버지, 시험을 끝내 주셔서 감사하나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 어둡고 괴로운 세월의 꼬리는 그가 어렵게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다시 숨겨져 있던 모습을 드러냈다. 형사 하나가 이번에는 그 자신을 목적으로 하숙집을 찾아온 일이 그랬다. 소재 파악인가 뭔가를 위해 찾아왔노라는 극히 부드러운 형식의 방문이었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실로 컸다. 마치 완전히 깨어난 줄 알았던 악몽 속에 다시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악몽은 그뒤 그가 주소를 옮길 때마다 어김없이 반복됐다. 특히 그가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고학 수단인 가정교사 자리에는 종종 치명적이 되었다. 언젠가 그는 찾아온 형사에게 항의했다.
“그때 저는 겨우 네 살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일에 미쳐 집을 나간 것은 그 이태 전이라니까 결국 그와 나는 두 살 때 헤어진 셈입니다. 나는 그의 얼굴도 모르고, 그의 사상 따위와는 더구나 관련이 없단 말입니다. 그가 내게 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다만 몇 방울의 정액뿐입니다. 내가 그에게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할머니의 한(恨)과 어머니의 고통에 갈음하는 증오와 저주뿐입니다.
거기다가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이 세운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그 뒤 올해로 꼭 15년째 대한민국 정부의 국민형성 교육(國民形成敎育)을 받아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따위 아버지가 도대체 어쨌다는 겁니까? 왜 당신들은 스스로를, 당신들이 힘들여 고안하고 정성껏 베푼 10여 년의 국민 형성 교육을 의심하는 겁니까? 그게 몇 방울의 정액보다 무력(無力)하다는 것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결론입니까?”
그때 담당 형사는 겸연쩍게 얼버무렸다.
“나보고 따져 본들 별수 있나? 어쨌든 자네는 요시찰인(要榥察人) 명부에 들어 있고, 나는 상부의 지시에 따를 뿐이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자네를 해코지하려고 이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이런 일에 너무 민감할 필요는 없어. 때가 오면 다 없어질 테니…….”
그러나 그 ‘때’는 오지 않고 그들과의 악연은 계속됐다. 결국 그들이 찾아와서 하는 일이란 몇 마디 공식적인 질문과 소재 파악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일쑤 돌이킬 수 없는 불리를 입히곤 했다. 우선 그가 많지 않은 나이에 여섯 번이나 직장을 옮기게 된 것은 대개 그들의 방문이 원인 된 것이었다. 신원 조회는 한때 웬만한 공무원 자리를 모두 가로막았고, 일체의 해외 진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멋모르고 사관 생도를 사랑하여 약혼까지 했던 여동생은 결혼 직전에 파혼당했고 자신의 전락을 집에 알리고 싶지 않았던 누나도 끝내는 어떤 항구 도시의 허름한 술집 안주인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알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그가 처한 특별한 상황 때문에 유리했던 일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대학을 다닌 것은 요란하던 1960년대 후반이었지만 그 흔한 데모 대열에 한번 끼어 보지 못한 것도 그 덕분이었으며, 사상이나 이념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와 불신 때문에 젊은 날에는 한 번쯤 있음 직도 한 그런 종류의 시비에 전혀 말려든 적이 없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군대에서는 신원 조회 덕택에 위험한 철책선 근무도 면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런 일이 다소 뜸해진 것은 그가 지금의 회사로 취직이 된 뒤부터였다 자신의 처지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가 선수를 치고 나선 결과였다. 즉, 고등학교 동창인 강 전무의 호의로 스카우트 형식의 입사가 결정되던 날 그는 먼저 그 무렵의 담당 형사를 찾아갔다. 평소 그에게 비교적 호의를 보이던 좀 젊은 형사였다.
“제가 매달 한 번씩 찾아뵈올 테니 제발 이번 회사로는 찾아오시지 마십시오. 꼭 오실 일이 있으면 불러내 주시고 단순한 확인이면 전화로 대신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시면 일생의 은혜로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그 형사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뒤로는 정말로 회사로는 찾아오지 않았고 어쩌다 찾게 되어도 구내 다방 같은 곳으로 불러내 친한 친구처럼 한동안 얘기를 나누다 돌아갈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계장으로 승진하고 집도 장만하여 비교적 유복한 소시민으로 자라 갈 무렵 해서는, 그나마도 완화하여 서너 달에 한 번씩 안부 전화를 하는 것으로 확인을 대신했다. 작년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을 때 가장 먼저 축하를 해 준 것도 이웃 도시의 수사과장으로 와 있던 그의 장거리 전화였다.
“정말 내가 다 가슴이 후련하오. 한(韓) 형은 이 정부와 지도자를 언제나 감사와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오.”
최 경감에게 전화나 한번 내 볼까. ― 그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최 경감은 바로 그 이웃 도시에 수사과장으로 와 있는 옛날의 담당 형사였다. 조금 전에 다녀간 형사에게 또 다른 목적이 있지나 않았는가 의심이 들기도 하였으나, 최 경감에게 공연한 번거로움을 끼치고 싶지 않아 전화는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왠지 일이 손에 찹히지 않아 일도 없이 목장 부근을 서성거리다가 해 질 무렵하여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채 사무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에서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당신 어딜 가셨더랬어요? 벌써 세 번째 거는 전화예요.”
“무슨 일이오?”
“급히 집으로 돌 아오셔야겠어요. 어머님께서 쓰러지셨어요.”
“아니, 갑자기 왜?”
“순희 그 철없는 것이 어머님께 경찰이 다녀갔다고 말했는가 봐요. 갑자기 저희들에게 이삿짐을 꾸리라고 성화를 하시며 당신도 자리를 걷고 일어나셔서 손수 옷가지를 꾸리시다가…….”
낮에 형사가 왔을 때 막연히, 나쁠 때에 왔구나, 싶던 것이 기어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놀라움과 근심보다는 까닭 없이 암울해지는 기분으로 귀가를 서둘렀다. 집 부근에 이르니 여럿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아내가 교회 사람들을 부른 듯했다. 처녀 때도 독실한 신자였던 아내는 결혼 후에는 시어머니와 죽이 맞아 더욱 교회에 열성적이 되었다. 필시 의사보다는 목사에게 먼저 알린 것이리라. ― 그 자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아도 아내의 신앙이 해로울 건 없다 싶어 간섭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은근한 부아 같은 것이 치밀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의사는 벌써 다녀간 후였다. 주사를 두 대나 놓고, 경과를 보자며 돌아갔다는 것인데, 어딘가 가망 없다는 표정이었다고 아내가 문밖에서 근심스레 전했다. 의료 기구도 변변찮은 시골 공의(公醫)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가까운 도시로 옮기는 것이 어떠냐는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했다.
그는 머리맡을 둘러싼 교인들을 가만히 비집고 들어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저승꽃이 거뭇거뭇한 손은 마치 가랑잎처럼 얇고 온기가 없었다. 아침에 마지막으로 본 모습과의 대비가 아니더라도 급속한 병세의 악화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가만히 말했다. 방 가득한 찬송가 소리 사이에서도 용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듯 어머니가 번쩍 눈을 떴다. 몸마저 일으키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아픈 사람답지 않게 크고 뚜렷했다.
“짐을 싸라. 날이 저물면 떠나야 한다.”
“어머님, 오늘 그 사람은 제 여권 때문에 왔어요. 저도 외국 구경을 할 수 있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는 간곡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들으려고도 않고 한층 높게 말했다.
“형사가 다녀갔다. 우리는 이제 그 사람들 손안에 들었다. 짐을 싸라. 빠져나가야 한다. 도시로 가자.”
“글쎄, 그 사람은 그런 형사가 아니란 말이에요. 연좌제는 벌써 작년에 폐지되었단 말입니다.”
그도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그놈들 말 다 못 믿는다. 이눔아, 내 말 들어라. 빨리 짐이나 싸라. 빨리.”
그런 어머니의 눈에는 어느새 광기와도 흡사한 빛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그사이 찬송가를 마친 목사가 그런 어머니를 보더니 교인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 모두 정 집사(執事)님을 위해 기도드립시다.”
그리고 이어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시고 세상 거친 풍파에서 구해 주셨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가 이같이 모여 기도드리는 것은 당신의 귀한 딸이 지금 무거운 병에 신음하고 있음을 고하고자 함이옵니다. 아버지시여, 이 딸을 ㄹ여기시어 크신 사랑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소서. 당신의 권능이면 이 세상 어느 것인들 이루지 못할 바가 있겠나이까…….”
그때 어머니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다시 끼어들었다.
“빨리 짐을 싸란 말이다. 여기서는 죽어, 죽고 말아.”
“……나자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문둥이를 어루만져 낫게 하신 바로 그 손으로 이 가엾은 딸의 병든 육신을 쓸어 주시고…….”
“어쨌든 도시로 가야 한다. 자수를 해도 도회지에 가서 자수해야 한다.”
“……귀신 들린 자를 낫게 하신 그 꾸짖음으로 이 가련한 딸을 침범하고 있는 모진 악귀를 내치소서. 딸은 지금 흉한 꿈과 헛된 두려움에 떨고 있나이다…….”
“거기는 법도 있고, 재판도 있다. 허투루 사람을 죽이지 않아.”
“……세상의 보잘것없는 권세가 아버지의 크나큰 권능 앞에 무엇이겠습니까? 아버님께서 허락하심이 아니면 누구도 풀잎 하나 다치지 못할 것인즉, 하물며 사랑하는 딸의 생명이겠습니까?”
“이놈아, 내 죽는 꼴을 볼 테냐? 기어이 여기서 뭉기작거리다가 식구대로 한 구덩이에 묻힐 테냐?”
가벼운 거품까지 뿜으며 그렇게 꾸짖는 어머니의 눈에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목사가 자신의 아들로 비치는 모양이었다. 평소에 그렇게도 떠받들던 목사였건만 허연 눈으로 흘기며 고함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힘이 닿으면 움키기라도 할 듯 손마저 한 번 가늘게 떨었다
“……아무쪼록 하루속히 이 딸의 심신이 회복되어 당신의 종으로 다시 일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이 모든 것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 읍나이다.”
목사는 마침내 맥없는 목소리로 기도를 마쳤다 그런데 눈치 없는 교인 하나가 갑자기 열렬한 목소리로 찬송가를 선창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머니의 고개가 번쩍 들리더니 노기에 찬 눈길로 그 교인을 흘겼다. 그 바람에 찬송을 따라 부르려던 나머지 교인들이 멈칫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의 어색한 침묵을 이용하여 어머니가 그에게 이번에는 달래듯 말했다
“저것들 말 다 못 믿는다. 가자. 어쨌든 살려면 이곳을 떠나자.”
아마도 어머니는 그 교인도 다른 사람과 혼동한 것일 테지만, 그는 왠지 거기서 어머니의 처절한 진실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초점이 흐려진 표시가 별로 없는 어머니의 두 눈도 그런 그의 느낌을 뒷받침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내부에서는 이상한 감정의 비약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만약 어머니의 이 같은 태도가 임종을 예견한 데서 온 것이라면 나도 어머니를 정직하게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지금 어머님께 필요한 것은 기도나 찬송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만 돌아들 가 주십시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냉담한 목소리로 목사와 교인들에게 요구했다. 아내가 항의 담긴 눈길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것도 냉담하게 묵살했다. 어머니가 당신들을 택한 것은 당신들이 강력한 아버지의 부정(否定)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당신들에게 의지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고 믿어 온 아버지의 또 다른 부정(否定)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삶에서 떠나려고 하는 이제 당신들 중의 하나이고자 하던 어머니의 모든 노력은 의미를 잃었다. 설령 그것이 일종의 피해망상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누가 생존을 위한 그 처절한 진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당신들의 신(神)조차도 어머니의 그런 진실을 용서하실 것이다…….
그사이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그를 향해 간곡하게 되뇌고 있었다.
“아범아, 도회로 가자. 거기는 법도 있고 재판도 있다. 자기 죄 아닌 걸루 죽이지는 않아…….”
드디어 교인들도 어색한 표정으로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내가 한편으로는 무안하고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운 듯한 얼굴로 그들을 말리려 드는 것을 다시 그의 냉담한 인사가 막았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아직도 방 안에서 머뭇거리는 교인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방 한구석에 밀쳐져 있는 어머니의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평소 입지 않는 옷가지들까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낮에 챙기다 쓰러졌다는 그 옷가지들임에 틀림없었다.
널린 옷가지들을 대강 정리한 후 그는 장롱 위에 얹힌 낡은 버들고리 짝을 내렸다. 살림 이 나아진 뒤에도 어머니가 끝내 내버리기를 거부하던 고리짝이었다. 그는 그것을 열어 먼지를 턴 후 정리한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집어넣기 시작했다.
교인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아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당신, 무얼 하시는 거예요?”
묵묵히 짐만 싸고 있는 그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도 빨리 짐을 싸라.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짐을 싸요. 우리는 떠나야 돼.”
그도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덩달아 아내에게 말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떠나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사로잡고 있는 공포와 불안은 당연히 물려받아야 할 무슨 한(恨)처럼 그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신(神) 은 카인을 용서하였지만 인간들은 카인을 용서하지 않았어. 마찬가지로…… 법과 제도가 어떤 불합리한 관례의 폐지를 선언했다고 해서 그 희생자들이 바로 오랜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 이상 당신들의 성경이 말하는 그 카인의 표지가 우리에게도 필요해. 단순한 관용의 제스처로서가 아니라 또다시 우리에게 불리(不利) 를 입히는 자는 그 일곱 배의 보복을 당하리라는 어떤 강력한 보장이 있어야 해…….”
그런 그의 눈시울 속에서는 어린 날의 여름밤을 어지럽게 교차하던 예광탄의 빛줄기들이 마치 처참했던 그 세월의 잔해처럼 수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1982년)
2016년 11월 30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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