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씨 수기를 읽어보면 ‘아름다운 악녀’의 최지희씨를 두고 ‘그녀는 터질 듯이 아름다웠다’고 표현했어요. 여담인데요, 지난달에 신성일씨 인터뷰기사 중에 당시에 최지희씨가 엄앵란씨와 함께 신성일씨를 두고 “네가 청혼 안 하면 내가 청혼하겠다”고 농담삼아 신경전을 벌였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신성일씨 별로 안 좋아했어요. 신성일씨와는 ‘자매의 화원’에서 처음 같이 공연을 했는데 키스마크 찍어 갖고 촬영장에 나타났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놀리곤 했죠. 신성일씨는 연출부 시절부터 알고 지냈어요. 내가 선배죠. 스태프 시절의 인상이 남아 있으니 좋아할 리가 없죠.
나는요, 배우나 연예계 있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그 생활을 잘 아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가난인데 당시 연예인들은 다 가난했단 말이에요. 나 좋다고 따라다니다 내가 싫다고 하니 자살하려고 약을 먹은 감독도 있었어요. 그래도 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거든요. 그 정도였으니 배우와 결혼한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 해봤죠.”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아름다운 악녀’가 대성공을 거둔 후 상당히 많은 작품에 한꺼번에 출연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찍은 영화가 ‘애모’라는 작품이었어요. 황정순씨, 이민자씨, 제가 나오는 세 자매 얘기죠. 저는 막내역을 맡았어요. 기생인 언니가 돈을 벌어 여대생 동생들을 공부시키는 스토리였는데, 그 영화도 꽤 성공했어요. 그 다음 찍은 영화가 구봉서씨 애인으로 나온 ‘오부자’고. 워낙 작품을 일사천리로 찍던 시절이라 출연한 작품수도 많고, 어떻게 찍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요.”
운명의 남자, P
-1961년에 미국에 유학 가셨더군요. 워싱턴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뉴욕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에서 공부를 해 오필리아 역을 맡았다고 돼 있던데요.
“미국을 어떻게 가게 됐는지 이야기하려면 남자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웃음). 누구라고 하면 금방 알 만한 사람이니까 그냥 P씨라고만 해두죠. 그 사람을 1958년 김지미씨 결혼식장에 갔다 오다가 명동에서 만났어요. 당시에 그 사람은 조지타운대 유학생으로 학생회장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만남이 계기가 됐죠.”
-쉽게 말해 사랑을 좇아 미국까지 따라가신 거네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갔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날 더 좋아했으니까. 처음에는 그 사람만 미국 학교로 돌아가고 나는 한국에 있었어요. 연앤지 뭔지도 몰랐죠. 그 사람은 부잣집 아들이고 나는 하찮은 배우였으니, 그 사람이 나를 가르쳐야겠다 싶으니까 선생님도 보내주고 영어공부도 시켜주고 그랬어요. 나를 키워서 자기 부인으로 삼으려고 했던 거죠. 일종의 신부수업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지내다 보니 너무 간섭을 해서 지겹더라고요. 파티를 가도 사람을 꼭 하나 딸려서 보내는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안 그러면 훌쩍 날아갈 것 같아서 그런다’고 하고.
그렇게 한 2년 편지도 쓰고 목소리도 녹음해서 보내주고 왔다갔다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걸로는 성이 안 차니까 결국 유학을 가게 된 거예요. P씨가 초청장도 만들어주고 장학금도 주선해주고 그랬거든요. 워싱턴에 건너가서는 한동안 공무원 하는 가정집에서 하숙하며 영어를 배웠는데, 처음 갔을 때는 신났죠. 그때가 5·16 직후였는데 대사관에서 여는 파티에 가서 호스트 노릇을 하기도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그때 처음 만났고요.
한 달쯤 지내고 나니 ‘내가 연기를 배우러 왔지 영어 배우러 왔나’ 싶더라고요. 고집을 피워서 뉴욕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로 옮겼죠. 갑갑한 워싱턴에 있다가 뉴욕에 가니까 숨이 탁 트이는 게 살 것 같았어요. 거기서 모던 발레부터 시작해 다 배웠어요.”
-행복한 시절이었나 봅니다. 그때 얘기를 하니 눈이 빛나네요.
“그렇게 마냥 잘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사기를 당했다는 거예요. 미국에 건너올 때 믿고 돈을 맡겼던 사람이 사라져버린 거죠. 마음이 급했죠. 내가 소녀가장이었으니 가족들은 쫄쫄 굶을 판이고. 봄방학이 가까워올 무렵에 P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네 문제는 너 스스로 해결해라’ 그러는 거예요. 너는 너 나는 나, 한마디로 미국식이죠. 기가 차잖아요. 이런 남자를 믿고 어떻게 사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그 남자가 비행장에 나와서 우는 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 와버렸어요.”
-그렇게 헤어졌군요.
“아니에요. 그 뒤로도 연락하며 잘 지냈어요, 친구 겸 애인 겸 해서. 헤어진 것은 1966년 내가 결혼하면서예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무슨 관계였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갖기에는 부담스럽지만 남 주기는 아까운 사람이었다고 할까요. 그 사람은 지금까지도 결혼 안 했어요.”
(계속)
주연상과 조연상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말띠 여대생’ ‘성난 능금’ 등의 장르 영화에 주로 출연했습니다.
“귀국해서 사흘 만에 새 영화를 계약했어요. 얼른 출연해서 먹고 사는 게 급했으니 영화 엄청나게 찍었죠. 어찌나 바빴는지 그 유명한 ‘김지미·최무룡 사건’ 때, 내가 옆에 있었는데 눈치도 못 챘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커플 배우들이 많이 나와서 내가 좀 불리해졌어요. 분명 나한테 맞는 역인데 엄앵란씨나 김지미씨 같은 커플 여배우들이 맡기도 하고. 그래서 왜 내 역할을 빼앗아가냐고 대든 적도 있어요(웃음). 미국에서 거의 1년을 있었으니 본 게 많잖아요. 그걸 그대로 영화에서 써먹었죠. 청춘물이라는 청춘물에는 다 나갔어요.”
‘말띠 여대생’과 ‘말띠 신부’는 이형표 감독과 김기덕 감독이 1964년과 1966년에 만든 일련의 코미디물이다. 말띠 사감과 말띠 여대생의 승강이, 그리고 이윽고 말띠 신부가 된 이들의 에피소드를 담은 일종의 시리즈물. 이들 시리즈는 ‘말띠 여자는 팔자가 세고 억척스럽다’는 사회적 편견을 답습하는 세태와 편견을 깨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이중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말띠 해에 여자를 낳지 않으려고 금욕과 거짓 임신으로 남편들을 조정하는 말띠 여자들의 모습은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반복하는 모순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들은 결국 산부인과 의사의 설득에 따라 말띠 딸을 유산하지 않고 낳기로 결정한다. 이 일련의 에피소드에서, 1960년대 여성의 몸이란 산아제한을 권유하는 국가 권력과 개인의 성욕, 사회의 가치관 등이 싸우고 협상하는 일종의 시대적인 테이블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바로 이 영화가 개봉되던 1966년 백말띠 해에 태어났다.
-그러다가 1963년 최지희씨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상을 안겨준 영화 ‘김약국의 딸들’에 출연합니다. 촬영하는 동안에도 이 작품이 그렇듯 훌륭한 성과를 거둘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그때는 제가 워낙 작품을 많이 찍고 있을 때였어요. 처음에 영화사에서 시나리오를 받고 나니 박경리 선생님이 저희 집으로 오셔서 부탁하시던 게 기억나네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니까 잘해달라’는 당부였죠. 몹시 추운 겨울에 촬영했는데, 저 나름대로 무척 열심히 했어요. 한마디로 비극의 주인공 역이었어요. 집안에서는 머슴하고 연애했다고 쫓아내 아편쟁이 성불구자에게 시집을 보내고, 결국은 이 남편이 어머니까지 죽이고…. 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여자였죠.”
-그때 각종 영화제에서 조연상을 휩쓸었어요.
“사실 그 역할이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 챙기느라고 조연상을 많이 탔어요. 한마디로 ‘빽’이 없어서 그랬던 거죠 뭐. 당시 주연상을 받은 사람은 아마 최은희씨였을 거예요. 영화제 주최측에서도 상을 주기는 줘야겠다 싶어 나를 골랐던 모양인데, 왜 주연에게 조연상을 주는지 당시에는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받으러 가지 말까 하다가 결국 받아놓는 게 낫겠다 싶어서 갔죠.”
-그때 사투리 연기는 어떻게 하셨어요. 더빙이었나요.
“아니요, 내가 직접 했어요. 목소리 연기까지 직접 하다 보니 가장 어려운 게 웃는 거였어요. 알고 보면 웃음에는 참 여러 종류가 있는데 상황에 맞는 웃음소리를 표현하는 게 무척 어려웠어요. 그때 목을 심하게 다쳐서 지금까지도 별로 안 좋아요.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계속 밤을 새워가며 녹음을 했으니까요.”
본능의 백치미, 원시적 여성
유현목 감독의 1963년작 ‘김약국의 딸들’은 ‘토지’로 유명한 박경리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다. 대부분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문예영화는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비평적으로 혹은 예술적으로 가장 대접받은 장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군사 쿠데타 이후 영화가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을 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군부와 타협한 산물이기도 했다. 당대의 문예영화 거장으로는 유현목과 김수용 등을 들 수 있는데, ‘김약국의 딸들’은 이범선 원작의 ‘오발탄’(1961), 황순원 원작의 ‘카인의 후예’(1968) 등과 함께 유현목 감독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다.
이 작품의 무대는 일제 개항 시기 경남 통영. 20년간 한약국을 경영해온 아버지에게는 네 딸이 있고, 그 네 딸은 각각 성격이 판이해 통영에서는 ‘김약국집 딸들’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입방아가 자자하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첫째딸(이민자), 신여성이 된 둘째딸(엄앵란), 머슴과 사랑에 빠진 말괄량이 셋째딸(최지희), 기독교 신자인 넷째딸. 한창 잘나갔던 김약국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딸들의 결혼과 사업의 실패로 차츰 수렁에 빠져들어간다는 것이 작품의 큰 줄거리다.
최지희가 맡은 용란은 엄앵란이 맡은 용빈과 많은 면에서 대조적인 여성이다. 서울에 유학한 용빈은 시대의 억압을 뚫고 자유연애를 쟁취하여 고향에 남지만, 계급에 상관없이 자기집 머슴을 육체적으로 사랑한 용란은 결국 아편쟁이와 정략결혼을 해 광기와 죽음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즉 용빈이 영혼의 순결성과 인간 계몽의 낙관성을 보여준 근대적 여성이라면, 용란은 육체 하나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완벽한 본능의 백치미를 보여주는 원시적인 여성을 대변한다.
유현목 감독 특유의 리얼리즘적 연출력이 돋보인 이 영화는, 통영의 바다와 바람을 배경으로 삼대에 걸친 숙명적인 업보와 전근대의 폭압적인 제도가 어떻게 한 집안 여성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는지를 보여주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걸작이자 최지희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계속)
여배우의 결혼이 불행한 까닭
-연기인생의 절정을 달리던 1966년에 결혼을 하셨어요. 딸도 낳으셨죠?
“네. 아이는 딸 하나밖에 없어요. 그냥 결혼할 나이가 돼서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중매가 들어오자 하루아침에 결혼하기로 했어요. 나중에 생각하니 애를 낳고 싶어서 결혼한 게 아니었나 싶어요. 영화배우로 절정에 올랐는데 지금 결혼 안 하면 평생 면사포도 못 써볼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그래서 ‘결혼을 위한 결혼이라도 해보자’고 결단을 내린 거예요. 소식을 들은 P가 전화하더니 ‘너 미쳤니?’ 그러더라고요. ‘결정된 거니까 두 번 얘기할 생각 마라’ 하고 시집을 가버렸죠.”
-신랑이 별로 마음에 안 드셨던가 봐요.
“사람은 얌전하고 순수해서 좋았는데 뭐랄까, 무기력하다고 할까…. 제 딴에는 남편과 함께 성공하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그게 다 빗나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결혼 3년 만에 위기를 맞았어요. 그 동안 영화해서 번 돈이며 집이며 다 날아가버리고 빈털터리가 됐거든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가난을 못 견디는 여자인데, 남편만 바라보고 살기에는 생활고가 심한 거예요. 그래서 각자 다른 길을 찾아가기로 했죠. 전 남편은 일본에 살아요. 지금도 한국에 오면 가끔 만나죠. 좋은 사람인데, 생활고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생각해보면 여배우들이 다 결혼을 잘 못해요. 아마 바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게 이유겠지요. 지금도 그럴 거예요. 남자들은 흔히 자기들이 원하는 시간에 나와서 원하는 만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저도 그 무렵 선을 많이 봤지만 대부분 ‘결혼하면 영화배우 그만둬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런데 반대로 여배우들은 그렇게 해줄 수 있는 남자,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을 찾아요. 그러다 보면 무능력하고 뚜렷한 직업도 없는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죠.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실패하는 거고.
그렇게 이혼을 하고 나서 돈을 벌어야 하니까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왔죠. 그 무렵 찍은 영화가 ‘남대문 출신 용팔이’ 같은 작품들이었어요. 그때 작품을 50개쯤 했는데 대부분이 액션물 아니면 코미디물이었어요. ‘국제간첩’ ‘여자가 더 좋아’ ‘팔도가시나’ ‘여운전사’ 같은 영화들. 오히려 그 무렵에 주연은 더 많이 했어요.”
1960년대까지 청춘물의 히로인이었던 최지희는 1970년대 들어와서 ‘거친 여성’의 역할을 주로 맡는다. 그가 조폭의 딸이나 유력인사의 정부(情婦) 같은 주변부 인물로 등장하는 이런 영화들은 대개 1970년대 액션 코미디 영화의 유행을 타고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 가운데 설태호 감독의 ‘용팔이 시리즈’는 1970년대 초반 박노식을 주연으로 내세운 일종의 B급 컬트영화였다.
‘남대문 출신 용팔이’ ‘운전수 용팔이’ ‘위기일발 용팔이’ 시리즈에서 최지희는 용팔을 함정에 빠뜨리지만 결국 그를 위해 희생하는 연인으로 등장해 박노식과 단짝을 이룬다. 맨주먹 하나로 암흑가를 헤쳐나가는 박노식의 모습은, 비록 연인에게는 무뚝뚝하고 배운 것은 없으나 불의를 보면 분노하고 목숨 걸어서라도 의리를 지켜내는 당대의 액션 영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그 당시 비평가들로부터는 홀대를 받았지만 용팔이 시리즈는 임권택 감독이나 이두용 감독의 액션물과 함께 남성 관객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 무렵 영화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제 경우에는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 같은 영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박노식씨를 두고 최지희씨와 문희씨가 연적으로 나온 영화인데, 박노식씨가 문희씨를 구하기 위해 작두로 자기 팔을 싹둑 자르는 장면이 있어요. 어릴 때 본 영화인데도 그 장면만큼은 똑똑히 기억이 나네요.
“저는 임권택 감독하고 작업했던 시대물이 기억에 남아요.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주로 비원에서 촬영을 했는데, 시대물은 머리채 분장을 해야 하잖아요. 무거운 걸 이고 앉아서 마냥 기다리는 거예요. 달랑 세 커트 남았는데 임 감독님이 안 찍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대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젊은 감독이었으니까. 그 사람이 흥분하면 말을 막 더듬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치치치치치’ 하고 운을 떼는 걸 내가 ‘치고 뭐고 빨리빨리 해요’ 이러면서 덤볐으니 얼마나 미웠겠어요(웃음). 임 감독의 첫 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 제가 출연했지요.”
거꾸로 걸린 간판
-이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진짜 악역, 혹은 어떻게 보면 아주 드센 기질을 가진 여자를 연기하셨지요.
“오히려 ‘진짜배기 악역’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결국은 다 이해가 되는, 혹은 귀여운 악역이죠. 예를 들어 ‘구월산’ 같은 영화에서 맡은 인민군 장교 역은 처음에는 나쁜 역이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국군을 도와주는 인물이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인물로 나온 적이 거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