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센터 이어 조달청 전산망까지 먹통
정부의 관리 소홀 책임이 가장 큰데도
중소 IT 기업 쪼개기 발주에 원인 돌려
대기업 참여 제한 풀려는 법 개정 추진
행정부 장관은 이 와중에 또 해외 출장
지난 주말 ‘정부24’ 등 행정전산망이 사흘이나 먹통이 된 데 이어 22일에는 조달청 국가종합전자조달시스템인 나라장터에 오류가 발생해 국민은 또 혼란을 겪었다. 24일에는 정부 모바일 신분증을 안내하는 웹사이트와 앱이 작동이 안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가 전산망이 연일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 대규모 국가 전산망 마비 사태가 어느 해보다 자주 발생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법원 전산 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일부 소송 일정이 지연됐고 6월에는 교육부의 4세대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인 나이스(NEIS)가 개통 직후 오작동을 일으키며 일부 학교의 기말고사 문항 정보표가 유출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관리 부실에 대한 책임을 축소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국가 전산망 관리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 이상민 장관은 이 와중에 윤석열 대통령을 수행해 해외 출장을 떠나 빈축을 사고 있다. 그는 지난 17일 행정전산망 마비 사태 때도 포르투갈과 미국을 돌며 한국의 디지털 행정을 홍보하는 중이었다.
국가 전산망은 먹통이 돼 국민 불편이 가중되고 있는데 정작 행정 장관은 외국에서 ‘디지털 정부’를 자랑하고 있었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 장관은 나라장터가 1시간가량 먹통이 됐던 23일에도 영국의 알렉스 버가트 내각부 장관과 ‘한영 디지털 정부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있었다.
행정안전부는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와 공동으로 25일까지 부산에서 ‘2023 대한민국 정부 박람회’를 열고 있다. 국가 전산망이 불안하든 말든 ‘디지털 정부’를 홍보하기 바쁘다. 박람회에는 26개 중앙부처와 13개 자치단체, 30개 공공기관, 30곳의 민간기업 등 99개 기관이 참여했다. 기본적인 디지털 서비스가 연이어 마비 사태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이런 ‘보여주기’ 행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정부는 행정전산망 사고가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났으나 아직도 정확한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2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한 고기동 행정안전부 차관은 “원인 파악 중”이라는 답변만 반복했다. 이처럼 정부의 총체적 관리 부실이 국가 전산망 마비 사태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확실한데 여당과 정부는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에 대기업 참여를 제한하는 규제 탓으로만 돌리고 있다. 기술력이 뛰어난 대기업을 국가 전산망 구축사업에서 배제하고 중소 정보기술(IT) 기업에 쪼개기 발주하는 지금의 시스템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와 한국경제신문 등 보수 신문들도 이런 주장에 적극 동조하고 있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동작구 사당3동 주민센터에서 직원들이 정부 행정전산망 장애 사태 관련 복구 상황 등을 점검하며 비상근무를 하고 있다. 2023.11.19. 연합뉴스
정부는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에서 대기업의 참여 기회를 확대하는 내용으로 소프트웨어진흥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업체를 선정할 때 기술성과 경제성 평가, 중소기업 지분율 등을 조정하고 1000억 원 이상 대규모 사업은 대기업 참여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지난 21일 행정전산망 마비 사태와 관련해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첫 번째 문제는 대기업의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 참여 제한이며 이번 전산망 마비도 모두 중소업체가 개발한 시스템”이라며 “국가기관 전산망의 경우 기술력이 높은 대기업 참여를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의 이 같은 주장은 본질을 외면한 책임 회피일 뿐 아니라 재발 방지대책도 될 수 없다. 공공 전산망 구축에서 대기업 참여를 제한한 법 개정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이루어졌다. 대기업이 사업을 맡으면 중소기업에 하도급을 주는 관행을 시정한다는 취지였다.
대기업 참여가 저조한 것은 정부가 자초한 측면도 있다. 대기업이 고급 IT 인력을 투입하기에는 정부 예산이 턱없이 적다. 정부가 발주한 사업을 맡으면 공신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남는 게 없는 장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사업비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정부가 규제를 풀어도 대기업 참여가 많지 않을 수 있다. 정부가 제출한 내년 예산안에도 공공 전산망 유지보수 예산이 70% 이상 삭감됐다.
대기업이 사업에 참여한다고 해서 전산망 먹통 사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지난해 9월 LG CNS가 주도했던 보건복지부의 차세대 사회보장 정보 시스템이 단적인 예다. 대기업이 맡았으나 서비스 개시 직후 나타난 오작동 문제를 1년 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 5월 우정사업본부의 차세대 금융시스템도 마찬가지다. SK C&C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구축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접속 장애가 발생했다. 국가 전산망 마비 사태를 중소기업 책임만으로 돌리는 주장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뜻이다.
현행법에서도 안전과 보안이 요구되는 국가 전산망 사업에는 대기업 참여가 보장돼 있다. 소프트웨어진흥법 제48조 3항을 보면 국방·외교·치안·전력 같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업 등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이 인정하는 경우에는 공공소프트웨어 구축사업에 대기업 참여를 허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