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10일 오전 10시경, 서울에서는 전혀 상치되는 두 개의 큰 집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잠실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열려 전두환 대통령이 육사동기인 노태우의 손을 높이 들어주었다. 민정당 대통령후보에 선출된 노태우는 울먹이면서 전두환의 '배려'에 감격해했다.
같은 시각, 서울 중구 태평로 대한성공회에서는 재야와 야권의 연합기구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및 호헌철폐규탄 국민대회〉가 열렸다. 한쪽에서는 축하와 감격의 꽃다발이 오가고, 다른 쪽에서는 분노와 규탄의 피울음에 무자비하게 쏘아대는 경찰의 최루탄으로 시위자들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되었다.
민주세력은 박군 고문살해와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전두환의 이른바 '4ㆍ13호헌조치'에 반대하여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같은 시각에 맞춰 서울을 비롯, 전국 주요도시에서 일제히 규탄집회에 들어갔다. 각 대학들은 출정식을 갖고 '독재타도', '직선제개헌'을 외치며 도심으로 몰려들었다.
이날 오후 6시 정각, 국민대회가 열리는 대한성공회 종탑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성당의 종이 42번 울리는 것을 신호로 성당 구내에 있던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고 도심을 지나던 차량들도 일제히 따라 경적을 울렸다. 이로써 6ㆍ10대회, 나아가서 6월 민중항쟁이 공식적으로(?) 막을 올린 것이다. 이날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에 시위가 벌어졌다.
민주세력의 대한성공회 6ㆍ10대회는 아침부터 전경들에게 에워싸여 일반시민들이 접근할 수 조차 없었다. 따라서 출정식을 가진 학생들은 각 대학별로 오후 5시경 을지로 2가 로터리, 을지로 네거리를 점거하고 연좌농성을 벌였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경찰은 사과탄을 마구 쏘아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학생들은 소단위로 신세계백화점, 남대문시장, 퇴계로 2가, 을지로 입구 등지에 나타나 시위를 벌였다.
시장상인들도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며 정부를 비난했다.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은 여기저기서 노상 약식규탄대회를 열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등을 외쳤다. 오후 6시가 넘자 학생들의 시위는 점차 격렬해지고 시민들의 합세도 점점 늘어났다. 서울역, 만리동입구, 신세계 앞, 서부역 등에서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했다. 퇴계로 2가 파출소를 지키던 전경들이 시위대의 급습을 받고 무장을 해제당한 채 감금되기도 했다.
가두시위를 벌이던 학생 3천여 명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시위를 벌였다. 명동성당 점거농성은 6월항쟁의 '태풍의 눈'이 되었다. 15일 해산할 때까지 5박 6일 동안 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성당 밖에서는 연일 대학생들과 합세한 인근 사무직 노동자들의 지원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사제단은 6월 10일 명동성당에서 '6ㆍ10 국민대회'에 적극 동참한다는 5개항의 〈선언문〉을 공개했다.
"① 민정당의 전당대회는 80년대 판 유신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② 현 정권은 이미 국민의 도덕적 심판을 받았습니다. ③ 우리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와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④ 우리는 '6ㆍ10국민대회'를 지지하며 적극 동참할 것을 다짐합니다. ⑤ 깨어 일어나 행동하는 국민이 됩시다."
사제단이 이날 오후 6시 30분부터 명동성당에서 정평위와 공동으로 '민주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때 경찰에 쫓긴 시위 학생 3천여 명이 성당 안으로 들어오면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날 아침, 서울시경 국장은 명동성당 농성자들이 성당을 '좌경 공산혁명의 해방구'처럼 만들었다고 비난하면서 이들을 '체제전복적인 국기문란 행위자'로 엄벌하겠다고 특별담화로 경고했다.
낮 12시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성당 밖으로부터 격려금과 지원물품이 산더미처럼 들이닥쳤다. 정부의 '용공 타령'이 오히려 국민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 결과였다. 계속되는 시위로 평소에도 많은 피해를 입었을 근처 가게 주인들과 성당 옆 계성여고 학생들의 눈물겨운 사연이 성금봉투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계성여고생들은 점심 도시락을 걷어 농성대에 전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농성대에는 여간 큰 힘이 아니었다.
언론의 집중 보도가 이어지면서 수천 명의 전경에 에워싸인 명동 일대는 적막에 싸인 채 전 국민이 숨죽여 주시하는 지역으로 급부상했다. 자연스레 12일 낮 12시는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갔고 농성은 계속 이어졌다. 이날 자정 무렵, 기동경찰 1,000여 명이 배치되면서 잠시 비상계엄설과 강제진압설로 긴장감이 돌았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농성대는 해산 여부를 놓고 다시 토론에 들어갔다. 그러나 새벽에 성당 후문에 공수부대가 집결했다는 소문과 함께 계엄설이 다시 흘러나왔다.
'비밀통로를 알고 있으니 살고 싶은 사람은 모두 빠져나가라'는 한 시민의 애원에도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농성대는 이를 프락치를 이용한 경찰의 심리전으로 판단하고 이후부터 비표를 배포해 출입통제에 나섰다. (주석 7)
학생들은 5박 6일 동안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반 전두환 투쟁을 벌이고, 사제단의 중재로 15일 낮 큰 불상사 없이 귀교(귀가)하게 되었다.
"명동성당은 전세계 뉴스의 초점이 되었고 6.10 민중항쟁의 중심이 되었다. 어설픈 표현이었지만 학생들은 명동성당을 해방구라 불렀고 이때부터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다."(…)
전두환 정부가 올림픽 유치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바로 명동성당의 진입을 막는 걸림돌이 된 셈이다. 참으로 묘한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된다. 이 기간 명동의 모습은 전무후무한 한 편의 감동적 대서사극이었다. 청년ㆍ학생ㆍ시민ㆍ상인ㆍ초등학생ㆍ중고교생ㆍ남녀노소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자유를 갈구하며 독재 타도를 외쳤다. (주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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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격 직후의 이한열 |
ⓒ 네이선 밴, 이한열 기념사업회 | 관련사진보기 |
6월 9일 경찰의 직격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 군이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하자 범연세인들의 규탄대회가 전국 각 도시로 확산되었고, 국민운동본부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최루탄 추방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전국 14개 도시에서 2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국민운동본부는 D데이를 6월 26일로 잡고 이날 평화대행진을 강행할 것을 결정했다. 정부의 비상조치설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정부는 부분 계엄령 또는 위수령을 내리기 위해 군부대를 도시 외곽지대로 이동시켰다. 성남시 근방에 출동부대가 집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6월 26일, 드디어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는 학생ㆍ재야ㆍ야당ㆍ시민 등이 국민운동본부의 행동지침에 따라 탑골공원 일대ㆍ신세계백화점ㆍ시청 앞ㆍ광화문 등 7개 집결지로 진출하려 했으나 경찰의 3중제지로 처음에는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오후 7시가 넘자 시민들이 가세하여 대규모 군중 시위가 시작되었다. 전국 33개 시와 4개 군에서 180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날 시위는 밤늦게까지 격렬하게 전개되어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시민 3,467명이 연행되었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ㆍ학생들은 '호헌철폐' 등의 구호에서 '민주쟁취', '독재타도', '군부독재 지원하는 미국은 물러가라' 등으로 격화되었다. 6ㆍ26대행진은 철저히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했다. 최루탄에 쫓기면서도 시위대들은 '질서'를 외쳤다. 일부 방화와 파괴 그리고 투석전 등 과격양상을 띤 것은 경찰의 과잉진압과 최루탄 난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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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태우 6,29선언 호헌철폐에 굴복한 전두환일당의 항복선언 |
ⓒ 김용택 | 관련사진보기 |
제5공화국 이래 최대의 인파가 참가한 6ㆍ26대행진에 정부 여당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고, 막다른 골목에서 돌파구를 찾은 것이 노태우의 6ㆍ29선언이었다. 마침내 6월 민중항쟁이 5공 군부독재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차기대통령 후보에 지명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6월 29일 기자회견을 갖고 대통령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8개항의〈6ㆍ29선언〉을 발표했다.
주석
7> 유시춘 외, 앞의 책(2권), 218~219쪽.
8> 함세웅, 앞의 책,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