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해만에 지리산 종주를 했다.
25일 아침 첫차를 타고, 구례로 향했다. 휴일 이른시간이라 그랬는지, 기차안은
한산했다. 감기기운이 있어, 종합감기약을 두알, 맥주와 같이 삼켰다.
약기운인지, 술기운인지 수원쯤에서 잠이 들었다. 장수군 어디쯤을 지날무렵 깨어
났다. 11시가 조금 넘어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역앞 식당에서 맛 없는 재첩국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택시를 타고 성삼재에 오른다. 차에서 내리자 역시 바람이
제법 매섭다. 눈도 제법 쌓여있고... 조금은 따분한 길을 따라 노고단까지 걸었다.
오후 1시쯤 노고단에 도착했다. 산장 예약을 취소하고 뱀사골 산장으로 향했다.
능선에 오르자 바람이 매섭게 몰아친다. 뺨이 얼어붙는 느낌... 오랫만에 묵직한
배낭의 무게도 어깨를 짓누른다. 힘겹게 한걸음,한걸음을 옮긴다.
지리산에 숨어 들었다던 빨지산 생각을 해 보았다. 그들은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보냈을까? 지독한 놈들이라는 생각보다는 인간적인 연민이 앞선다. 그들에게 그렇게
절실했던 것이 무엇 이었을까? 이념...? 그들이 뭘 제대로 알고는 있었던 것 일까?
어둑할 무렵에야 뱀사골 산장에 들어섰다.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벌써 어두워
졌다. 일행들과 식사를 하고 간단히 설거지를 했다. 잠시 산장주위를 걸었다.
어느새 밤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하다. 아홉시에는 소등이라고 해서, 소등후에 다시
나오기로 하고, 산장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산장안에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침낭속에 들어가 누웠다. 일단 침낭속에 들어가니 나오기가 싫어진다.
다시 밤하늘을 보려했지만, 자꾸 미적거리다보니 잠이 들었다. 새벽 두시쯤 깨었던
것 같다. 잠시 밖에 나가보았지만, 별들은 이미 사라지고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휘날리는게 느껴진다. 눈이 내리는 것인지, 쌓였던 눈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매서운 바람을 더 견딜 수 없어 다시 산장안으로 들어
갔다. 다시 침낭속에 들어갔지만 다시 잠이 오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
누군가의 잠꼬대 소리... 하지만, 무엇보다 밖에서 들려오는 거친 바람소리가 자꾸
나를 흔드는 느낌이다. 일생에 몇번 볼 수 없을 그런 밤 하늘을 나는 또 한번 놓쳐
버렸다. 침낭에서 빠져나와 신발을 신고, 단지 몇발짝만 걸어 갔으면 되었다.
어쩌면 그런 밤하늘은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새벽 네시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 했다. 텅 빈 취사장에서 렌턴불을 비춰가며
혼자 앉아 있었다. 조금은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준비가 끝나갈 무렵, 부부인듯한
남녀가 취사장으로 들어왔다. 그들도 부시럭 거리며, 식사준비를 한다.
아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쯤은 까맣게 잠들어 있으리라.
아이들 생각도 났다. 얼음장같이 썰렁한 산장 취사장에서 혼자 쪼그리고 앉아
하얗게 김을 뿜어대는 코펠을 바라보며 가족 생각이라니...
일행들을 깨워 식사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처음엔 휘날리는 듯 하던 눈발이 제법 눈다워 진다.
바람이 불거나, 능선상에 서면, 엄청난 추위가 느껴졌다. 영하20도 이하의 추위를
이렇게 오랫동안 느끼기는 정말 오랫만이다. 그래도 산 등성이로 내려서거나,
바람이 잔잔해지면 다소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힘겨운
여정 이었다. 배낭의 무게가 계속 어깨를 짓 눌렀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배낭이
자꾸 왼쪽으로 쏠려 신경이 쓰였다. 지리산에 있으니 배낭도 좌경화 되는 것인가?
계속 하얀 세계를 걸었다. 나무들은 온통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쓰고 있었고, 이젠
길에도 눈이 제법 쌓여있어 스페츠를 착용해야 했다.
아름다운 광경 이었지만, 그런 것에 감탄하기 보다는 앞으로 빨리 나아가고 싶을 뿐
이었다. 더우기 조금씩 일행들에 뒤쳐지기 시작해서 따라잡기가 힘들어 졌다.
벽소령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선비샘에서 세석평전
으로 나가는 고개길이 매우 힘에 겨웠다. 배낭에게 있던 짐을 일부 덜어서 대수형
배낭으로 옮겼다. 장터목 산장까지 가기로 한 계획을 바꿔서 세석 산장까지만
가기로 했다. 오후5시가 넘어서 세석 산장에 들어섰다. 산장안은 아직 한산 했지만
취사장은 사람들로 북적 거리고 있었다. 좁은 취사장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서
어렵게 식사를 마쳤다. 산장에 들어가 짐을 풀고, 100m쯤 떨어진 샘터에 가서
양치질을 했다. 발도 씻으려 했지만, 엄청난 추위에 신발을 벗을 엄두도 못내고
산장으로 돌아왔다. 산장은 좋은 시설에 매우 따뜻했지만, 건조하고 답답한 분위기
여서 그랬는지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결국 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 네시가 되어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 취사장으로 나갔다. 세석 산장은 뱀사골 산장과 달리 취사장
에 불도 켜져 있어서, 식사준비가 수월했다. 샘이 좀 멀은게 흠이였지만, 전날밤에
쓰고 남은 물이 있어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식사후 아침 7시15분에 천왕봉을 향해 출발했다.
전날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컨디션은 오히려 좋았다.
하늘은 너무도 맑았고, 바람은 거세게 불었지만, 해가 떠 오르면서 추위도 좀
가라 앉는듯 했다. 온통 설화에 덮힌 지리산 능선길의 아름다움이 이제야 비로서,
마음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빨리 산행을 마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이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장터목 산장에 짐을 내려놓고, 약간의 간식과 물병 한개만 달랑들고 천왕봉에 올라
갔다. 생각보다는 긴 오르막 길 이었지만 약 한시간 정도만에 정상에 다 달을 수
있었다. 산위에서 잠시 남해 바다를 보고, 지나온 능선들을 바라 보았다.
다시 장터목 산장으로 돌아와 간단히 라면을 끓여 먹고, 산을 내려왔다.
중산리로 내려오는 하산길은 평이한 내리막 이었지만, 생각보다는 길고 지루했다.
일행들과 멀리 떨어져서 혼자 걸으니, 오히려 마음이 평온하게 느껴졌다.
빨리 내려가고 싶은 마음과 산길이 좀 더 이어졌으면 하는 두가지 마음이 교차했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이젠 그만 산길이 끝났으면 하는 심정이 짙어졌다.
오후 세시쯤 산행을 마쳤다.
버스 정류장앞의 가게에서 맥주를 한캔씩 마시고, 진주행 시외버스를 탓다.
진주를 좀 안다는 어떤 분이 송원 이라는 식당을 추천해서 가보려 했지만,
진양호근처에 있다는 그 식당은 서울서 김서방 찾기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피곤한 몸에 괜한 시간과 택시비만 소비하고, 결국 평거동에 있는 주원 오리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진주엔 "송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당이
네곳이나 있다고 한다.송원식당, 송원, 송원가든,등등...)
제대로 제공되지 않은 정보는 안 듣는 것만 못 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우등고속 버스라는 것을 타 보았다.
좀 편할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답답하고, 무엇보다 공기가 탁하고 건조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우기 첫날부터 말썽이던 감기 기운이 산에서 내려온
후에 갑자기 심해져서, 몹시 짜증 스러웠다.
아주 좋은 여행은 아니었다.
3일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는 그리 완전히 떠나 있지도 못했다.
점액질로 가득한 답답한 코와 미열을 동반한 몸살에 시달리며, 나는 여행을 끝냈다.
새벽 두시쯤 서울에 도착했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까맣게 잠들어 있고, 아이들도 모두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감기를 옮길가 두려워 나는 가족들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한 동안 거실 소파에 누워
신문을 읽었다. 그 짧은 동안의 여행조차 순수하게 즐길 수 없는 걸 보면,
나는 결코 여행자는 못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때가 되면 자꾸 떠나고 싶어지는 것은
무엇인지...
침대로 가서 이불을 덮으니, 이불의 차거운 감촉에서 비로서 돌아 왔다는 기분이
느껴졌다. 잠시 그 차갑고 아늑한 느낌을 즐긴다. 아내는 내가 돌아온 것도 모르고
자고 있고, 우리는 같은 침대에 누워서도, 지리산과 이곳만큼이나 멀찍히 떨어져
누워 있지만, 돌아 왔다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 행복인지...?
자다 깨어난 작은 놈이 무엇을 보았는지 "아빠다!" 하며 안방으로 돌아와 침대로
기어들며 말을 건다. "아빠. 이제 벨은 없어요."
"결혼하러 갔데요."
그러냐 하면서도 나는 감기가 두려워 아이를 안지는 못한다.
하지만, 내가 없는 동안에도 집에는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아내와 아이들은 자기가
할 일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어느새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며칠만에 처음으로 빠져보는 편안한 잠 속에서,다시 송원이란 식당을 찾아 헤메긴
했지만...
첫댓글 아하~ 이겨울에.... 참으로 장하시오~ 하지만 그다지 좋은 여행이 돼지 못했다 허니 이 몸이 더 안타깝소....그래도.... 부럽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