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연구회((1905.5~1905.11)는 러일전쟁 이후 설립된 애국계몽 운동단체로 입헌정치를 연구하고 국민을 계몽시키기 위해 1905년 5월 24일 설립되었다. 이준(李儁), 윤효정(尹孝定), 양한묵(梁漢默) 등 독립협회- 공진회(共進會) 계열 인사와 심의승(沈宜昇), 이기(李沂) 개신유학자 계열이 참여하였다. 또한 1904년 8월 교육단체로 설립된 비정치적 성격의 국민교육회 계열의 인사들도 참가하였다. 국민교육회 계열의 인사들은 이준을 매개로 결합하였다. 이들은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공진회(共進會)는 1904년 11월 설립된 보부상단체 상민회(商民會)가 개명한 단체이다. 상민회에서 진명회(進明會)로 또 공진회로 바뀌어 총 2회 명칭이 변경되었다. 공진회는 일진회에 대항하는 단체로 결성되었는데 독립협회 계열과 일진회에서 탈퇴한 인물이 결합하였으며 이준을 회장으로 내세웠다. 공진회는 ‘고관착거사건’(高官捉去事件)으로 해산되었다. 〈고관촉거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공진회는 궁정에 출입하거나 관직에 있는 무술(巫術) 복술(卜術) 출신의 ‘잡배’를 축출하자는 상소문을 18명의 숙청대상자 명단과 함께 정부에 제출하였다. 정부의 조치가 없자 공진회원들은 복술로 출세한 관원을 직접 잡아 재판을 청구하였다. 이로 인해 주동자인 윤효정, 이준 등이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공진회의 주도 인물인 윤효정과 이준이 3년간 유배형을 받았으나 1달 만에 사면되었다. 윤효정과 이준은 공진회가 해산되자 보부상 세력과 관계를 끊고 새로운 단체인 헌정연구회를 결성하였다.
헌정연구회 창립총회에서 회장에 장기렴(張基濂) 부회장에 이준, 사무장에 심의성이 선출되었고 윤효정(尹孝定)은 평의장을 맡았다. 헌정연구회를 주도적으로 이끈 이는 이준과 윤효정이었다. 이준(1859~1907)은 1895년 법관양성소 1회 졸업생으로 1896년에서 1898년까지 일본에 망명하면서 동경전문대학 법과에서 수학하였다. 윤효정은 갑오개혁 시 탁지부 주사를 맡았고 1895년 춘생문사건에 관여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회계직을 맡았으며 1898년 안경수와 함께 고종을 폐위하고 황태자를 추대하려는 양위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망명기에 윤효정은 서구 근대정치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1902년 윤효정은 구 독립협회 회원으로 정치 망명객인 고영근에게 민비 살해 사건 용의자 우범선(禹範善)을 죽이도록 사주하였고 우범선을 죽인 공으로 사면을 받아 국내에서 정치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윤효정은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현실을 파악하였고 대한제국이 생존하는 길은 문명화(근대화)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였다. 윤효정은 주권은 민에 있으며 주권에 의하여 국가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근대적인 국가관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관을 기반으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다.
정치 강령과 활동
헌정연구회는 외세의 침략을 막고 국권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입헌군주제라 주장하였다. 헌정연구회는 〈헌정연구회취지서〉에서 입헌정치가 세계적 추세이며 영국과 일본이 흥하고 청나라와 러시아가 쇠퇴한 것이 바로 입헌정치 시행에 달려있다고 주장하였다. 헌정연구회가 지향한 입헌군주제는 흠정험법에 의한 입헌군주정으로 군권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헌정연구회는 강령에서 황실은 흠정헌법 을 통하여 통치권을 가지고, 내각은 관제를 통하여 시정권을 가지고, 국민은 법률을 통하여 의사권(자유)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국가발전에 필요한 것들을 연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①조세징수 방법 ②교육 확대 ③농업·상업·공업·광업의 발달 ④회계와 통계의 방법 ⑤법률의 정도 ⑥호적과 인구조사 ⑦병역 의무 ⑧의회에 관련된 여러 준비의 8개 항목이었다. 입헌군주제를 당장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제시한 연구 세목을 연구하는 등 준비가 필요하므로 10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입헌군주제를 실현하는 형태는 헌법제정을 통해 군주가 군권을 장악하고 통치권을 행사는 것이었지 민권의 확대나 의회 개설 등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러한 점은 개신유학자들이 헌정연구회에 참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헌정의 연구와 사상의 보급 즉 계몽을 주 사업으로 설정한 헌정연구회는 신문 투고를 통하여 계몽에 나섰다. 1905년 6월 12일에서 21일까지 『황성신문』에 〈헌정쇄담〉(憲政瑣談)을 투고하였다. 〈헌정쇄담〉은 헌정 일반을 소개하고 헌법제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05년 7월 15일에서 8월 3일까지 총 10회에 걸쳐 『황성신문』에 〈헌정요의〉(憲政要義)를 연재하였다. 〈헌정요의〉는 서구 국가학과 정치학의 원론을 소개한 것으로 민권의 확대와 입헌군주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헌정요의〉는 1906년에 『국민수지』(國民須知)라는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제국신문》 《신한국보》 등 국내외에서 간행된 신문에도 연재되었다. 헌정연구회는 매달 첫 월요일에 통상회를 개최하였다. 1905년 7월 1일 제1회 통상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준, 이원긍(李源兢), 한계창(韓啓昌) 등이 헌정 연구에 대한 연설을 들었다. 8월에 개최 예정이던 제 2회 통상회는 회원의 참여 저조로 열리지 못하였다. 『황성신문』에 〈헌정요의〉가 연재된 후 개신유학자 층이 이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윤효정은 조직 개선과 회원 모집에 주력하였다. 윤효정은 양반 출신을 포섭하여 조직 강화를 도모하였으며 10월 5일 회장단을 개편하여 회장에 김종한, 부회장에 이중하(李重夏)를 선출하였다. 김종한과 이중한은 현직 관료였다. 이처럼 임원진을 교체한 후인 11월 1일에 임시회를 개최하였고 6일에 통상회를 열었다. 하지만 12월 통상회가 최소되고 더 이상 활동기록이 없다.
을사늑약 체결과 헌정연구회 해체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윤효정은 박정양, 이명근 등 원로대신에게 칠성판을 보내 조약 체결에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음을 비난하였다. 이 일로 윤효정은 체포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황에서 헌정연구회를 주도해 온 윤효정이 체포되자 헌정연구회 해체되었다. 윤효정은 이후 장지연 등과 대한자강회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