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結論
이제 난중일기 중 위덕의 관련 의혹은 속상왕부병서와 상식에서 억측은 해소돼야 한다. 그는 임란이 발발하자 왕의 행재소로 걸어가서 왕을 알현했다. 왕은 평범한 신민이 자신의 안후를 살피려 왔다는 점에 감격, 주부와 좌랑에 제수하고, 운향관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곡식을 주고 벼슬을 샀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국토의 최남단 장흥에서 의주까지 맨몸으로 가기도 어려운데 곡식을 가지고 가서 왕에게 받쳤단 말인가.
운향관의 임무를 맡기자 명나라 장수 여응종과 경상도 선산(善山)까지 동행했다. 그곳에서 부사이자 동향인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로부터 비축해둔 군량을 명나라 군대의 식량으로 여장군에게 인계했다. 그런 연후에 위덕의․정부사․김복흥(金復興)등이 여응종(呂應鍾)의 제의로 연구(聯句)를 짓고, 여장군으로부터 기대 이상의 찬사를 받은 사실이 있었다. 여장군의 위덕의에 대한 찬사는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찾아온 정성과 명나라군의 양식을 조달해준 고마움의 표시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귀향해서 지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든 아내의 안위를 위해 선박을 빌리는 과정과 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의 취임식과 맞물려 만호 민정붕과의 거래(?)로 빚어진 혼란이다. 물론 수군의 전선을 사사로이 빌려 개인의 피난의 도구로 사용한 것은 잘못이다. 그는 명나라 군대의 식량을 조달하라는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따라서 원균과 거래는 천부당만부당하다. 도대체 원균과 무엇을 거래할 수 있었단 얘기인가? 상상의 정도가 여기에 이르면 정상이 아니다.
배상렬은 거래설을 확신한다 했다. 소설「임진왜란 외전」을 보면 원균은 적병의 수급을 챙기고, 충청병사 시절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사복을 챙긴 사례를 들고 있다. 그럼에도 위덕의와 상업적으로 거래한 사실을 단 한건도 밝힌 바 없다. 적어도 거래설이 성립하려면 원균과 위덕의가 언제 어디서 만나 무엇을 했다는 정황이 나와야 한다. 고작 회령만호에게 전선을 얻어 피난갔다는 사실 하나로 원균과의 거래로 비약시킨 것이다.
위덕의는 부인 박씨와 떨어져 있던 기간을 5개월로 적시하고 있다. 그 시간을 마치 삼성(參星)과 상성(商星)에 비유하고 있다. 삼성과 상성은 아침과 저녁에 뜨기에 서로 만나지 못한 별이라 한다. 그는 아내를 그만큼 사랑했던 것이다. 당나라 시성 두보(杜甫․712~770)의 시 증위팔처사(贈衛八處士) 24구 중 앞 4구만 보자. 人生不相見/사람이 서로 만나지 못함은 動如參與商/아침저녁에 따로 떠오르는 삼성과 상성 같구나 今夕復何夕/오늘밤은 다시 어떤 밤인가 共此燈燭光/이 등잔과 촛불이 함께 하였구나.
박교수와 배상렬의 추론을 보면 위덕의를 상재와 협잡의 명수로 규정하고 있다. 박교수는 '전선을 이용할 정도로 규모 있는 상거래'와 '솜씨 있는 장사수완은 여응종의 찬사와 무관치 않다'고 추정한다. 배씨는 '원균과 위덕의의 상거래를 확신한다'라고 했다. 이런 추론은 위덕의가 전쟁기간 내내 장사를 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위덕의는 의주 행재소로 걸어가는데 3개월(90일), 경상도 선산을 거쳐 귀가하는데 2개월 등 5개월간 비웠다고 속상왕부에 적고 있다. 이 기간에 과연 장사가 되겠는가?
「임진왜란 외전」은 작가의 기본을 망각한 작품이다. 저속한 비유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다. 배씨는 남의 조상의 사소한 결점은 침소봉대하거나 날조하면서 정작 자신 조상이라고 볼 수 있는 배설(裵楔)의 추악하고 비열한 대목은 눈을 감고 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최소한 공부도 하지 않고 남의 조상의 휘자(諱字)를 내놓고 난도질했다. 도대체 그가 정상인이라면 이런 소설도 아닌 날조된 억측을 함부로 내놓을 수 있을까? 그 조상에 그 후손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물론 속상왕부병서도 시원찮은 부분이 있다. 우선 피난의 행선지가 없다. 청계공이 1597년 음력 8월 16일 피난길에서 나섰다가 3일째 되던 18일 아내 박씨가 배에서 타계했다. 그 때 위치가 영광(靈光)의 경상(境上)이라고 했다. 경상이 정확히 어디쯤인지 알 수 없으나 현재 함평과 영광의 경계라면 아마도 백수(白岫) 해안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피난에 이용된 선박은 전선이라고는 하나 정상적인 전선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배로 회진포에서 사흘 정도에 목포를 지나 그곳까지 당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수군의 전선(戰船) 종류를 보자. 판옥선(板屋船), 협선(挾船), 포작선(鮑作船), 거북선(龜船), 종선(從船)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배설의 전선은 한 척에 130명의 수군이 승선했다. 이에 대해 배씨는 수군과 격군 등 전선본래의 운영요원들이 그대로 인계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일 그런 크기의 전선이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충무공이 민정붕에게 곤장 20대만 때리고 말았을까? 130명을 수용할 전선이라면 사형을 시키고도 남을 중대한 범죄였다. 그러기에 장형으로 치죄한 것으로 일단락됐다.
청계공에 대한 잘못된 글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네요. 특히 타문중에 대한 사건의 단정은 오류를 낳기쉽습니다. 늘 조심해야할 부분입니다. 저자의 격한 논조가 합리적이고 사실적입니다.
참 안타깝네요.
문중차원에서 대처가 필요할것 갔습니다.
주요 전투를 앞둔 싯점에 전선을 불태우고 지놈만 살겠다고 도망친 부도덕한 천하의 역적 배설 놈이나 제대로 연구하라고 하죠.
좋은 글 보고 갑니다!
바설놈은자기앞가림이나잘할일이지남의일에참견할게무엇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