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총 사공헌 5조 활동 시작
경총 사공헌 5조 21명이 2019년 6월 20일부터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미 활동중에 있는 1,2,3,4조님들보다 많이 늦게 시작했으나 앞으로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1. 기간 6월20일부터∼
2. 장소 봉산문화회관
3. 인원 21명(남16명, 여5명)
4. 연수내용 대구항일학생운동(아래에 내용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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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항일 학생운동
3∙1운동, 광주학생운동(1929년)과 더불어 3대 항일운동이었던 6∙10 만세운동(1926년)의 주역인 권오설과 김단야는 각각 대구고보와 계성학교 출신이다. 권오설은 1918년, 김단야는 1916년에 학교에서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퇴학을 당하였고, 이후 1919년 대구 3∙8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고보 학생들이 실형을 선고(계성학교 학생 35명, 대구고보 학생 7명)받는 등 많은 학생이 민족차별에 항거하다 퇴학이나 정학처분을 당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 대구지역의 항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학교는 어떤 학교이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대구고보의 新友同盟
일제는 경기고보(1900), 평양고보(1909)에 이어 삼남지방(경상∙호남∙충청)에 처음으로 관립학교인 대구고보(1916)를 옛 대구향교에 세웠다.
대구고보는 1919년~1930년까지 입학한 학생의 평균 졸업비율이 30~50%였을 정도로 대구지역 항일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으며, 특히 1928년 9월~11월 3개월간 동맹휴학을 하다 2, 3학년 학생 205명 중 45명이 퇴학을 당했다. 이들이 요구했던 내용은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가르치거나 시간을 연장할 것, 조선인교사를 늘릴 것, 교내∙외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악질 일본인교사 퇴출 등이었다.
대구고보에서 두드러진 사건은 1928년 11월에 발각된 비밀결사사건인 新友同盟(赤友同盟)사건이다. 장적우,박광세와 윤장혁의 지도 아래 대구고보생, 대구상업학교, 대구농업학교 학생들이 모여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목적으로 조직되었는데, 일제는 이 사건을 조선 최초의‘적색(공산주의)학생결사사건’으로 보고 105명을 체포하여 20여명이 수개월에서 3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대구고보의 전통을 간직한 경북고(대구시 수성구 황금동)에는 2∙28 학생의거기념비와 조형물은 있지만 1920년대 항일운동과 관련된 기념비는 없다.
◈ 대구사범의 비밀결사
1906년에 경상도관찰사 신태휴와 광문사 사장이었던 독립지사 김광제가 개교한 사립 대구사범학교는 1923년 경북공립사범학교로 전환됐다가, 다시 1929년 대구사범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경성사범, 평양사범과 함께 3대 사범학교였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1930년 현준혁 교사가‘독서회’조직을 통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계급의식,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든 사회과학연구회를 시작으로 1940년 1월에는 8∙9 기생이 중심이 되어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발간, 1940년 11월에는 박효준의 주도로 이태길 등 8명이 독립 쟁취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체 ‘문예부’를 조직하였고, 이는 1941년 ‘연구회’로 이어져 기관지인 ‘학생’을 발간하게 되었다. 문예부와 연구회는 그해 다혁당(茶革黨)으로 확대 개편되고, 다혁당원은 방학 중 야학을 개설해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공휴일과 일요일을 이용하여 앞산 등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하지만 그해 8월, ‘반딧불’과 ‘학생’이 탄로 나면서 다혁당의 실체가 드러나 무려 300여명이 체포되었고, 34명이 징역 2년 6개월에서 5년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이 가운데 강두안∙박제민∙박찬웅∙장세파∙서진구 등 5명은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옥중 순국하였고, 일제의 패망으로 마지막 5명이 석방되었다.
경북대사범대 부설중∙고에는 1973년 학생의 날(11월3일)을 맞이하여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생존자들이 건립한 순절동지추모비가 있다. 추모비 서문에는 “겨레의 역사 오램이 자랑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 참되이 살았음이 자랑이요”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무우원(無憂園)
대구사범학교 특설강습과에 재학 중이던 학생 조형길∙김병욱∙현영만 등은 1940년 12월 항일비밀결사조직 무우원(無憂園)을 만들었다. 무우원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자는 취지로 불교정신을 통해 정신적 강화와 결합을 도모하였으며, 특히 무력으로 투쟁하기보다 유대인처럼 경제력을 길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43년 6월까지 일본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하였으나 단원 18명이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5년을 선고받았다. 이 중 최수원이 일경의 고문으로 순국하였고 조형길도 1945년 6월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사하고 말았다.
◈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1942년 6월 이상호는 민족차별과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민족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체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였다. 태극단은 인도의 간디, 중국 쑨원의 삼민주의와 관련된 책을 읽으며 독서토론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체력단련을 위해 등산부, 씨름부, 군사부를 두었다. 특히 항공부를 조직해 일제의 패전과 조선독립의 가능성을 알리는 전단을 살포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폭동을 일으키는 전략까지 세웠으나, 결성식을 준비하던 중 조직원의 밀고로 이상호 등 26명이 체포되고 이들 가운데 이상호 등 6명은 2년에서 10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태극단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준윤이 순국하고, 투옥 중이던 이원현이 혹독한 고문을 받아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후유증으로 순국하였고, 10년 형을 선고받은 이상호도 수감 중 석방됐으나 광복 직후에 순국했다.
상원고 야구장 뒤편 학산남로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공원에는 이들의 의거를 기리는 탑이 서있다. 1975년 기념사업회가 교정에 세운 기념탑을 대구상고 출신인 황대현 전 대구달서구청장이 2003년 공원을 조성하면서 옮긴 것이다. 상원고 동창회인 태극단추모사업회에서 매년 5월과 광복절에 추모제를 열고 있다.
첫댓글 우리5조님들 조장님이하 조원림들 활동에 수고많았습니다ㆍ감사합니다ㆍ
일봉 장인호 조장(부회장)님, 경총 5조 회원님들 수고하셨습니다.
경총 5조 선생님 모두 반갑습니다.
"경총 사공5조"도 결성 되었습니까
문지회 원로급 (회원가입년도가 오래 됨)들의 활동 수준이 대량급 입니다. 문지회에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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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가 많으신 분들의 결성인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