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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예배실(사진은 기사와 무관). ©에이블뉴스DB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으라 해 놓고 신발 훔쳐 가더라.” 이 노랫말은 어린시절 동네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아무런 의미도 없이 따라 불러보곤 한 가사이다. 착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교회에 가지 않는 아이들, 부모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반대하는 아이들, 교회에 가서 행하는 교리나 의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막연하게나 비꼬고 싶은 마음이 이 가사에 담겨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누군가가 부르니 재미로 한번쯤 따라 부를 수도 있고, 리듬이 입에 익어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렸을 수도 있다. 또한 교회 나오기를 권하는 친구들에게 거부의 의사로 부르기도 하였을 것이다. 교인에 대한 질투심도 포함되어 있다.
어린시절 예배당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성스러운 장소이니 신발을 벗는 것이 예의상 더 어울렸을 것이고, 넓은 장소를 청소하기도 편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내라면 거의 신발을 벗는 것이 당연시되는 그때에는 신발을 벗어야 어떤 공간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주머니를 만들어 나누어 준 것은 한참 후의 일이고, 당시는 비닐이 오히려 귀한 때이니 천으로 된 신주머니는 교회에서 마련하든, 개인적으로 가지고 오든 할 수 있었을 것인데, 흙과 먼지가 묻은 신발을 들고 다니거나 주변에 두는 것이 덜 청결하다고 느꼈다.
아무런 근거가 없지만 심리적으로 지저분한 것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청결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겼다. 특히 자주 세탁하지 않고 몸도 자주 씻지 않는 시절이고 동네를 뛰어다니다 보면 발에 땀이 흘러 고무신에 발의 때자국이 선명하게 묻어있는 시절이라 냄새가 나는 신발이니 소지하고 들어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식당에 가서도 신발을 잃어버릴 경우가 있다. 손님 중에 누군가가 신발이 탐나서 훔쳐 가는 경우는 별로 없겠지만, 비슷하게 생겨서 바꾸어 신고가는 경우는 흔히 있을 수 있다. 식당 주인은 경고문을 벽에 붙여 놓는 경우가 있는데, “신발 분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등의 문구가 가끔 보인다. 요즘은 바닥에 앉는 식당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고, 이로 인해 신발을 벗는 식당도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아이들이니 가난하여 새 신을 사지 못한 아이들이 친구의 신발이 탐나서 훔쳐 갈 수도 있고, 친구를 골려주기 위해 신발을 감출 목적으로 가져갈 수도 있다. 그런데 노랫말에는 눈 감으라고 해 놓고 신발을 훔쳐 간다고 한다.
신발 분실의 책임이 의도적이거나 교회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친구의 책임이나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이다. 눈을 감으라는 것은 기도를 하라는 것인데, 신발을 훔치기 위한 계략이라 폄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일날 풍금소리에 발맞추어 앞으로 나가면 학용품을 주기도 하고, 새로운 친구가 왔다며 성경을 한 권 주기도 한 시절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친구들과 즐거운 게임이나 찬송가 율동을 하며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특히 부끄러움이 많고, 이성 친구를 사귀면 놀림을 받던 시절 가장 합법적으로 이성 친구와 편하게 노래를 같이 부르고 대화할 기회는 예배당이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장애인들은 교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물론 장애인사목을 적극적으로 하는 교회도 있고,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같은 주님의 자녀로서 따뜻한 가족애를 느끼도록 환경을 만들고 있는 교회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지체장애인 A씨와 시각장애인 B씨는 교회에서 만났다. 서로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동질감을 느꼈고, 언니 동생의 사이가 되었다. 보지 못한다는 어려움과 걷기 힘들다는 어려움을 서로 보완하며 채워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만족할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교회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교회는 언덕 위에 있거나 계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인도에서 교회문까지 점자블록이 깔려 있는 교회는 거의 없으며, 점자인쇄물을 제공하거나 계단 위와 아래에 경고용 점자블록을 설치하고 있는 교회도 드물다.
지체장애인이 시각장애인에게 위험물도 알려주고, 글도 봐주며, 시각장애인은 지체장애인에게 힘들면 손을 잡아주고, 물건을 대신 들어주기도 한다. 목발을 짚는 지체장애인에게는 물건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두 사람은 주일이 되면 자신들에게 편한 교회를 찾아 새로운 교회를 방문한다.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것은 다른 곳을 가지 않아도 되는 핑계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교회에 충실하여 다른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니 핑계가 아니냐는 것이다. 십계명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고 하였지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교회에 오는 것이 거룩하게 보내는 것이고, 제사를 지내는 날이니 당연히 와야 하고, 교회법도 성경과 같이 중요하니 주일을 지켜야 하고, 함께 모이는 날을 정해야 친교와 섬김의 역사도 일어나고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어떤 교회는 일요일 교회에 불참하면 자백하고 사제가 주는 벌칙을 수용하여 기도문을 반복하여 외우는 등 면책을 위해 반성 행위를 해야 한다.
교회에서 “가서 복음을 전하라”거나 “교인과의 친교가 매우 중요하다”거나 “서로 평화를 나누라”고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는 말을 권유하지만, 교회에 와서나 갈 때 서로 무표정하고 거리에서 남을 대하듯 스쳐 가는 사람들처럼 서로 타인으로 여기는 경우도 많다.
이런 분위기에 교회에게 장애 문제를 고민해 달라는 것은 상당한 무리일지 모른다. 어떤 교인은 자신들은 주를 보러 교회에 왔지만 장애인들은 교인들을 보러 왔다고 여긴다. 그런 부담이 싫어 외면을 한단다.
위의 두 장애인은 최근 새로운 교회를 찾아갔다. 봉헌 즉 헌금을 내는 시간은 모두가 평등했다. 장애인 앞에도 헌금 바구니가 다가왔고, 시각장애인에게는 바구니를 만지도록 하여 헌금을 내도록 안내까지 했다. 하지만 영성체(성찬식) 시간은 평등하지 않았다.
두 장애인이 성체를 받기 위해 앞으로 나갔다. 손을 내밀고 기다려도 성체를 손바닥에 올려주지 않았다. 계속 가지 않고 기다리자 마지 못해 성체를 주었다. 그리고는 신자가 맞느냐, 세례는 받았는지를 큰 소리로 물었다. 비장애인에게는 단 한 사람도 의심하여 세례를 받았는지 묻는 경우가 없었다. 불편한 몸으로 성체까지 받으러 왔느냐며 귀찮아하는 행동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성찬식을 마치고 마이크를 잡은 사제는 다시 장애인 옆좌석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옆 사람에게 말했다. “받은 성체를 먹었는지 물어봐 주세요.” 혹시 자격이 없음에도 부정으로 받아서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의심을 받는 복지서비스 대상자의 마음이었다. 장애인에게 직접 묻지 않은 것 역시 장애인에게 직접 대화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장애인의 자기주장과 결정권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어린 시절 예배당 노래를 부를 당시 장애인이 거리로 나가면 아이들 중 하나가 장애인이 나타났음을 알리고, 그러면 우르르 몰려와서 장애인을 구경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지금도 시각장애인이 거리 중앙에 서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구경거리로 삼는다. 방송을 통해 주목을 받은 것이니 구경거리가 된 것과 같았고, 신자가 아닐 것인데 잘못 준 것은 아닌지 의심을 받았고, 장애인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를 수 있으니 먹었는지 무시하여 물어본 것이다.
성체 즉 빵을 나누어주면서 정말 의심스럽거나 걱정이 된다면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세레명이 뭔가요?” 하면서 환영의 인사와 세례받았는지 확인을 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표했다면 오히려 관심에 감사해 했을 것이다. 그런 지혜조차도 사제에게는 없었다, 단지 지적질을 하는 권위와 권력자로서의 제사장, 매로 위협하는 목동의 모습만 있었다.
레위기 22장을 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제사장과 교인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구분되었다. 속인은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만약 실수로 먹으면 20퍼센트의 이자를 쳐서 갚아야 한다. 제사장이 제사음식의 특권을 누리기도 하지만 제약도 있다. 이는 제삿밥에만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함이다.
신약에서의 성찬식은 제사와는 다르다. 모두 받아 먹고 마시라고 하였고, 기념하고 행하라고 했으며 이것이 새로운 계약이라고 했다. 제자와 행한 만찬이니 신자만이 누릴 특권일 수 있다. 하지만 몸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것은 인간에게 몸과 피가 새롭게 변하라는 말이다. 상징을 실체로 인식하면 우상이 된다.
두 장애인은 분명 장애인이라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것은 차별이었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하여 더 이상 교회를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바늘구멍을 통과 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재물을 가졌지만 자캐오처럼 은총을 받지 않으면 천국을 가기 어렵다.
어쩌면 사제는 양들을 돌볼 책임이 있음으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희생양으로 인해 천국은 더욱 가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아니면 시행착오나 과오가 있어도 주를 위한 일을 했으니 개국공신 대접을 받을까? 확실한 것은 선교를 하기는 어렵지만, 냉담자를 만들기는 너무나 쉽다는 것이다.
장마철이 되어 비행기를 타자, 구름 위로 올라가 잠시 햇빛을 보여주더니 얼마 있지 않아서 구름 속에서 요란한 빗소리를 내면서 비행기는 잠수함처럼 움직였다. 교회로 갔는데, 왜 들어올림을 받지 못하고 장애인들은 가라앉는 체험을 해야 하는가? 높은 곳으로 오라고 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 찾아온 예수님의 모습이 교회에서 그리고 장애인을 포용한 사회에서 보였으면 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지만 말고 낮은 대로 임해야 하는 교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입으로 사랑만을 가르치지 않고 동등함과 자유를 가르쳐 인간해방을 통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전파를 하늘나라에서 인간의 각 영혼에 내려주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 신발을 훔쳐갈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 신앙심을 훔쳐 가거나 차별로 상처를 주는 것은 아직도 교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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