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성지순례 7일차
(2022.12.03)
44. 우곡성지
농은 홍유한(?隱 洪儒漢, 1726-1785년)은
서울 아현동에서 홍창보(洪昌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풍산 홍씨(豊山 洪氏) 가문은 정조 임금의 외가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 집안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발휘했던 그는
이미 8, 9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하여
신동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세 때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다.
1750년경부터 이익 선생의 제자들과 교유하며 함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西學)을 연구할 때
홍유한은 유학이나 불교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오묘함이
천주학의 가르침 안에 숨어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했다.
깨달은 바가 남달리 컸던 홍유한은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할 것을 결심하고
서울의 살림을 정리하여 1757년 충청도 예산 여촌(餘村)으로 이주하여
18년간 “칠극”에 따른 천주교의 수계생활(守誡生活)에 정진하였다.
고요한 가운데 참 진리를 따라 살았던 그는
1775년 더 깊은 믿음을 위해 경상북도 소백산(1439m) 밑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九邱里)라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다블뤼(Daveluy) 주교가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했듯이
홍유한은 천주교 서적을 몇 권 읽고, 축일표도 기도서도 없었지만
매월 7 · 14 · 21 · 28일 등 7일째 되는 날을 주일(主日)로 정하고
세속의 모든 일을 접어두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또한 금식재(禁食齋)와 금육재(禁肉齋)를 지키는 정확한 날을 모르는 대신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으로 규칙을 삼았다.
동시에 육욕을 금해 30세 이후에는 정절의 덕을 실천했다.
그가 이렇게 열심히 수덕생활을 실천하는 동안
정조 임금이 두 번이나 스승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사양했다.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낸 그는
1785년 3월 10일(음력 1월 30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 해 4월 문수산 자락에 있는 우곡리에 안장되었다.
비록 그는 세례를 받고 교적에 오른 공식적인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학문 연구를 통해 얻은 진리에의 깨달음을
실제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한 경건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뜻을 이어받아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후손들이 13명이나 된다.
그 중 2명(홍병주, 홍영주)이 1984년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성인으로 시성되었고,
5명(홍낙민, 강완숙, 홍필주, 홍재영, 심조이)이
현재 시복시성을 위한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홍유한 선생의 인척인 홍정호와
재종(再從) 조카인 홍낙민 루카(洪樂敏, 1751-1801년),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한국 최초의 여성회장으로 선교활동에 앞장섰던 강완숙 골룸바
(姜完淑, 1761-1801년)와 그의 아들 홍필주 필립보(洪弼周, 1774-1801년),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 임금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洪樂任, 1741-1801년) 등 5명이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홍낙민의 셋째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
(洪梓榮, 1780-1840년)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그의 며느리 심조이 바르바라(沈召史, 1813-1839년)와 두 살 난 홍[아기]는
전주 감옥에서 옥사하였으며, 홍재영의 부인 정조이(丁召史)도
이때 순교한 것으로 문중에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홍낙민의 손자인 홍병주 베드로(洪秉周, 1798-1840년)와
홍영주 바오로(洪永周, 1801-1840년)가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했는데,
이 두 형제는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홍재영의 아들인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1866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고,
그의 아들 홍 베드로는 1867년 가을 전주 초록바위에서 수장되었다.
45. 홍유한 고택지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의 수덕생활에 정진하신
홍유한 선생님의 자취가 있는 곳
우곡성지에서 40km 거리에 위치
본 정려문은 풍산을 본관으로 홍이상 선생의 현손인 홍중명이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경종4년(1724)에 효자로 정려되고,
영조2년(1726)에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된 효자문이다.
효자문 현판은' 한국 최초 천주교 수덕자' 이며, 홍중명의 손자인
홍유한이 서울 아현동에서 충남 예산으로 낙향할때
그리고 예산에서 경북 영주로 이사할때 가져왔다.
1860년 이 자리에 복원된 효자문은
그동안 노후화로 2014년 전면 해체되어 복원되었다.
46. 여우목 성지
여우목 성지는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인근의 교우촌인 건학(동로면 명전리)과 부럭이(덕산면 억수리)와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래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빈번한 접촉을 갖고
이웃집 드나들 듯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고 도와가며 신앙생활을 했다.
47. 진안리 성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한 곳
소백산맥 자락의 문경 지방과 충청도의 경계지역에 있는
주흘산(1106m), 조령산(1017m), 백화산(1063m), 대미산(1115m) 등은
이 지방에서 최고봉에 속하는 산들이다.
이 산들 사이의 조령(642m), 이화령(548m), 하늘재(525m) 등은
옛날부터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이름난 통로로 숱한 전설과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陳安里)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에 대한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이다.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방문을 다 마친 후,
베르뇌(Berneux, 張, 1814-1866년) 주교에게
성무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새재와 이화령의 갈림길인 문경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가 겹쳐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땀의 순교자인 최양업 신부는 이렇듯 당시 유일한 한국인 신부로서
5개 도(道)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관헌의 눈을 피해 다니다 기진맥진하여 선종한 것이다.
48. 연풍 성지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접하고 있는 문경새재를 넘어서면
괴산군 남동쪽 끝에 연풍면이 나선다.
해발 1,017미터의 험준한 고갯길,
새재의 서쪽 기슭에 연풍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연풍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황석두 루카의 고향이며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돼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49. 마원 성지(박상근 묘)
마원에는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 들면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실, 문경, 여우목, 건학 등과 함께 마원은
교우들이 화전을 일구며 모여 살았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그러던 중 이곳에 박해의 회오리가 불어온 것이 1866년 병인년의 일이다.
서슬 퍼런 탄압은 새재를 넘어 이곳 마원에까지 들이닥치게 되었고,
이때 마을의 교우 40여 명이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
특히 30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1837-1867년)의 묘가 이곳에 남아 있어
생생한 신앙의 숨결을 되새기게 해준다.
숙소가는 길에 상주에서 유명하다는 석쇠구이집에 들렀다.
5시 반경에 도착했는데 재료가 소진되었다며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라며
1시간 후에는 문을 닫는다며 양해를 구했다.
석쇠구이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아쉬워 우렁이 무침 포장을 부탁했다.
숙소는 비즈니스호텔로 잡았는데 호텔이름답게 비즈니스고객에게 편리하게
간단한 빵, 구운계란, 커피 등이 갖추어져 있는 휴게실이 있었다.
아침에 어제 구입한 우렁이무침으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오늘 첫 순례지인 충북 보은 멍에목 성지를 향해 출발했다.
첫댓글
세잎 클로버 님
미소속에 행복이 가득 전해 옵니다
특히 상추가 넘넘 싱싱해 보입니다
남은 더위도 잘 나시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