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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받으려면
출 19: 1-6
이번 주는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을 하면서 은혜 받으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다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 종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명기 11장 26절에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를 준다고 하는 이 말씀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축복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저주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 오늘 저는 여러분한테 묻습니다. 축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주를 택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마 축복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저는 축복은 싫어요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축복 이야기만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있는데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다 축복을 선택한다고 말할 것이고 축복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저주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됐는데 그 분이 목회 초년 때 전도를 나갔어요. 병원에 가서 전도를 하는데 이제 사형 선고를 받고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당신 예수 믿고 천국 가시오. 당신 예수 믿고 구원 받습니다”라고 복음을 전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당신이나 잘 믿고 천국가시요 나는 지옥가겠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겠냐 하지만 우리가 주변에는 이런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잘 되라고 예수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당신의 인생 망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으라고 권하는 것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당신의 삶이 변화되고 기름지고 축복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안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 너무 많이 있습니다. 또 예수 안 믿고 지옥 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감정이 풍부한 민족이다. 감정이 어느 정도로 풍부하냐 하면 “기분 좋으면 지옥도 가고 기분 나쁘면 천국도 안 간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얼마나 예민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래요.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 한번 잘 보세요. 기분 나쁘면요. 아무리 좋은 것도 안 해요. 기분만 좋잖아요. 그러면 지옥 가는 것도 좋다고 쫓아갑니다. 우리는 냉철한 이성보다는 감성에 많이 치우쳐 살고 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에 속아서 그저 욱하는 기분으로 나는 지옥 간다 그러구요. 욱하는 기분으로 나는 저주 받아도 좋다 그러구요. 욱하는 기분으로 나 축복 안 받아도 된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분 나빠도 받을 것은 받고, 갈 것은 가고, 누릴 것은 누려야지 저주를 선택하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이라고 하는 말을 한문으로 뜻 풀이 한 글을 제가 읽어 봤는데 한문으로 복이라고 하는 뜻은 풀이 하면 따뜻하게 옷 입고 그리고 입에 먹을 것을 넣는다. 그것이 복이다. 그렇게 한문에도 쓰여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생각하면 등 따습고 배 부르면 그것이 행복이다. 축복이다. 그렇게 한자어에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등 따습고 배 부르면 복이다.
모든 것에 하나님이 자족하는 마음을 주시면 그것이 복입니다. 반대로 저주는 무엇입니까? 저주는 헐 벗고 배고픈 것이 저주다. 이렇게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우리가 너무 잘 사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불과 백년 전 만 하더라도 우리 민족이 얼마나 못 살았습니까? 정말 이 민족이 망한 것이 너무 너무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국력이 약해지고 나라가 썩었는데 안 망하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생각이 들잖아요.
우리가 가난을 면한 것은 불과 몇 년이 안 됩니다. 너무 가난했어요. 저 어릴 때도 제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렸냐 하면 보릿고개를 넘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보리 고개 넘기기가 너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는데, 가난이란 저주처럼 무서운 것이 없어요. 지금 이북은 가난의 저주가 왔습니다. 농사도 안되는 거예요. 농사라도 지어 농사가 잘 되면 배고픈 가난은 면할 수 있는데 농사가 잘 되려고 하면 홍수가 나서 안되고 또 비가 너무 않오는 가뭄이 와서 안되고 그래서 가난의 저주가 임해 이북은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머리로 이북은 지금 어렵겠지. 안 보니까 우리에게 이북 현실에 대한 느낌이 안 오는 것입니다. 이북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지옥과 같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되요. 우리나라 몇 십년 전에 가난하던 것은 상상도 안 됩니다. 이제는 이북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은 조금만 더 지나면 전쟁도 안되요. 왜냐하면 지금 이북의 2세들은 성인이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국민학생 같습니다. 그러니 무슨 전쟁이 됩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국민 학생들도 어른 같이 키가 다 컸잖아요. 잘 먹어서 그래요. 똑같은 동양인인데 캐나다에 살다가 온 젊은 청년들을 보니까 우리보다 훨씬 더 키가 크구요. 훨씬 더 성장 상태가 좋아요. 사람은 잘 먹으면 똑같은 동양인이라도 더 크고 더 잘 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난이라고 하는 저주가 너무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둘째,질병의 저주가 있습니다. 병은 저주의 부산물로 생겨난 것입니다. 에덴 동산 안에나 우리가 다시 죽어 갈 천국에는 병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국에서 나는 약재가 있는데 그 약재를 먹으면 무슨 병이든지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약이 없는데요. 천국에는 그런 약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천국에는 한마디로 얘기하면 병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도 없었어요. 셋째, 불통의 저주가 있습니다. 여기도 막히고 저기도 막히고, 이리해도 안 되고 저리해도 안 되는 불통의 저주가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영적인 저주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영적인 저주는 대부분이 우상숭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흘러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 하는 것을 너무 너무 싫어합니다. 우상 숭배하면 영적인 저주가 임해서 하나님과 교제가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 주지를 않아요.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가난의 저주, 질병의 저주, 불통의 저주, 영적인 저주를 풀고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 인생이 되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제일 먼저 복 주시는 일부터 하셨어요. 하나님이 세 가지 복을 주셨습니다. 첫째,“너희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산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자녀를 잘 낳는 축복, 여러분 자녀를 잘 낳는 것, 이것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일 먼저 첫 번째 인간에게 주신 축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너는 땅을 정복하라” 세째, “땅에 있는 모든 생물, 공중에 있는 거나 혹은 바다 속에 있는 거나 땅에 있는 거나 네가 그것을 다스리는 권세를 내가 준다” 그래서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시고 또, 정복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고 그리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의 축복을 인간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그 인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일곱째 날, 날을 하나님께서 복 되게 하셔서 날까지 하나님에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으면 어떻게 되니까?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과 같이 세가지 축복이 나타납니다.
(1)이름이 창대케 하는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면 우리의 이름이 뛰어나게 되는 축복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살면서 하는 일 가운데 가장 바라는 소원이 뭐냐 하면 이름을 남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이름 석 자가 남는 것처럼 명예로운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도 우리에게 복 주신다 그러면서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자자손손 그 이름이 들먹거려지고 그 이름이 귀한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은 축복 가운데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를 우리가 생각할 때 그들이 참으로 축복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지금도 불리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상 이름 가운데 몇 대를 지난 분들의 이름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몇대는 고사하고 바로 윗대 조상들의 이름도 기억이 안나요. 여러분 조상 이름을 알기나 합니까? 이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그 이름이 남는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이고 축복된 일인지 몰라요. 여러분의 이름이 영원히 남는 그런 이름으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빌라도 같은 이름이 되면 안됩니다. 빌라도라는 이름은 매일 우리가 부를 때 마다 빌라도는 못된 인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빌라도는 못 됐다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름은 자꾸 불리어지면서 명예로운 이름이 있습니다.
새벽 기도 때 사무엘상이 다 끝나고 사무엘하로 넘어갔는데 사무엘상 마지막 장면은 사울 가문이 몰락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가문이 다 죽임을 당하고 길보아 산에서 멸망하는 이야기로 끝나고 사무엘상이 끝나고 사무엘하 1장에 넘어 가면 다윗이 조가를 만들어 가지고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서 슬퍼하는 내용의 글이 나옵니다. 오늘 새벽에 다윗이 조가에 대해서 말씀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들이 셋이 있었어요. 그런데 다윗이 조가를 할 때는 두 아들의 이름이 어디로 갔는지 나오지도 않아요. 두 사람 이름만 언급을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 나머지 두 아들의 이름은 죽었는데 다윗이 조가도 안 불렀어요. 왜 그럴까요. 이름을 부를 만한 가치가 없으니까 그 이름을 안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계속 언급하면서 요나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윗이 언급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도 너무 너무 필요한 사람이고 정말 나를 너무 사랑해 준 그런 사람인데 죽어서 너무 아깝고 슬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좀 오래 살았어야 되는데 왜 일찍 갔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슬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죽었을 때 너무 아까운 사람이 갔어, 그러고 울어 줄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자자손손 불리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 훌륭하신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수십 대 몇 대를 내려 가도 그 이름이 불리어지는 이름의 복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2)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는 복을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복을 받을 때는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이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복이 아니에요.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복은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은 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누리는 복을 말합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복입니다. 나 하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것 목표로 인생 살면 안 되요.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것도 아니고 성경에도 그런 내용은 없고, 세상에서도 그런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나로 인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가령, 하나님이 큰 물질의 축복을 여러분에게 주셨다면 그걸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잘 되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에게 나눠 주는 각양 좋은 것들이 어디서부터 내려 옵니까? 하늘에서부터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라는 것입니다. 내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얻고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면 그 복을 받은 것이 누구로부터 왔느냐. 내가 노력하고 애써서 얻은 수확이 아니고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기 1장 21절 “내가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돌아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이 이렇게 고백할 때에는 다 잃어 버렸을 때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욥은 다 잃어 버렸었는데도 불구하고 원망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전에 가지고 있던 것도 하나님의 것이요 또한 그것을 가져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외국 큰 은행 지하실에 가면 줄을 그어 놓고 각 나라의 금덩이를 보관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가령, 미국에서 한국에 돈을 줄 일이 있을 때에 금덩어리로 준다고 하면 이쪽 줄에 있는 금덩어리를 저쪽 줄에 옮겨 놓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또 한국에서 미국에끝 금을 주어야 될 일이 있으면 한국 금덩어리를 미국 줄이 쳐진 곳에 옮겨 놓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같은 공간에서 이쪽 죽에 있는 것을 저쪽 줄로 옮겨다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것이고 저것은 네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것이 어떻게 네것이냐는 것입니다. 내것이지.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게 많은 것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나눠 주라고 내게 주신 것이지 나만 쥐고 있으라고 주신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범사가 잘되는 축복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축복하고 너르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너에게 대적하는 자가 있으면 그 대적을 없애 주고 너에게 승리함을 준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네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잘되게 한다고 하는 보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범사를 축복하시며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받으면 끝까지 잘되게 하시는 축복을 얻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처음에만 반짝 잘되는 사람이 있구요, 어떤 사람은 중간쯤 잘 달리다가 낙마하는 사람도 있구요. 어떤 사람은 끝까지 잘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끝까지 잘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노년에 하나님한테 큰 복을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점점 잘 되어 갖고 끝까지 잘되어 애굽의 총리까지 올라가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시점에 잠깐 반짝 잘되는 그것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 잘되는 것 그리고 언제 잘되느냐 끝까지 잘되어야 되죠. 끝까지 잘되는 사람이 여러분들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끝까지 잘되는 은혜를 주신다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오늘 본문은 이런 축복을 누리는 비결을 세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런 복을 받아서 누릴 수 있느냐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께서 이름을 창대케 하시는 복,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 복, 범사가 잘되게 하시는 복, 끝까지 잘되게 하시는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19:2절,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신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시내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이 산은 시내산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앞에 장막을 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쳤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 앞에 까지 왔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시내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 산까지 이끌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모세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입니다.
시편 73장 28절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를 가까이 하시고 멀리 하는 자는 하나님도 멀리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하는 자하나님과 가까이 오셔서 더 가까이 오시고 하나님께서 멀어지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도 멀어져도 더 멀어지게 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수가 없어요. 이것은 아주 간단한 진리예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을 멀리하면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자꾸 가까이 하려고 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려고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잘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성경에 죄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죄는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것을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그게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다면 성경은 죄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곁에 가까이 있어야 되는데 아버지 곁을 자꾸 벗어나려고 하는 것, 떠나려고 하는 것, 하나님을 떠나 독립을 해서 나 혼자 내 힘으로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적으로 살아야 돼요. 하나님 떠나서 내 마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한번 해 보겠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니까. 아버지 집에서 멀리 가니까 있던 것 다 잃어버리고 또 그리고 이제 쥐엄 열매를 먹고살게 되고 이제는 견디다 견디다 견딜 수가 없어서 내 아버지의 집에 품꾼도 부족함이 없이 먹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죽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제라도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탕자가 돌아오는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멀어지는 것은 복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축복을 얻는 길입니다. 탕자가 돌아오니까 모든 것을 다 회복했다고 그렇잖아요. 오늘 우리의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오면 우리가 설령 잃어버렸던 것도 하나님께서 되찾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왜 저주를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떠나니까 저주를 받은 거예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죄 지으니까 그 결과 저주가 임했습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것입니다. 그랬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돌아오게 하는 법입니다. 율법이 없이는 죄를 깨닫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점점점 멀어지는지 아십니까?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것이 죄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도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렇게 살 수 있다고 얘기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멀어진다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멀리 있어도 그것이 죄가 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멀리 있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시편 84장 4절에서 그래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복되다는 거예요.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 크게 복되다는 거예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가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너희에게 삶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성경은 말하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2.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들으면 너희가 복을 받는다 것입니다. “순종하면 복이 온다” 축복과 순종은 같은 겁니다. 여러분들이 복 받고 있으시면 순종을 잘하시기를 바래요. 저주가 임한 사람들을 보면 전부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저주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하라 할 때 아멘하고 그 길로 갔으면 다 잘되는 거예요. 몇가지만 생각해 볼까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할 때 순종했다면 저주가 왔겠습니까. 에던 동산에서 쫓겨났습니까. 죽음이 왔겠습니까.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수고를 해야 되었겠습니까? 아니면 남자 의존적으로 살아야 됩니까? 남자에게 기대며 살아야 됩니까? 남자들이 밖에 나가 종일토록 수고해도 열매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겠습니까? 이것이 다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불순종해서 온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에서는 그렇게 쉽게 승리했는데 아이성 전투에서 왜 이렇게 패배했습니까? 불순종했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면서 아무 것도 갖지 말아라. 다 없애라. 그렇게 말씀했을 때 그 말씀에 순종했더라고 아간같은 사람이 없었다라면 아이성 전투는 전투도 아니에요. 여리고 성도 무너뜨렸는데 아이성 전투와 같이 조그만 전투에서 넘어질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별스럽지 않은 조그만 아이성 전투에서 넘어졌어요. 우리가 큰 것에는 승리했다가 조그만 아이성 전투와 같은 그런 전투에서 인생이 넘어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것쯤이야 하나님에 불순종하다가 우리가 넘어지게 된다면 겁니다. 이런 것쯤이 없어요.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우리가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승리가 보장됩니다. 왜 이스라엘이 일대 왕이였던 사울이 버림받았습니까? 불순종했다가 버림받은 것입니다. 아주 간단해요. 다윗에서 왜 쓰임 받았습니까? 순종을 다해서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영원히 창제케 하시고 영원히 기름지게 하시고 전쟁할 때마다 승리케 하신 것입니다. 비결은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높여주시는 것이니다. 우리 인생은 그래서 순종을 잘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내 마음대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 내가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귀신도 쫓았습니다. 많은 권능도 행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나님 일을 많이 한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는가하면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거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너희는 순종하고 한 일이 아니다. 너희 마음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성막을 볼 것 같으면 성막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한가지 던져 줍니다. 성막은 “움직이는 교회다” 성막은 교회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움직여 다닙니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여 다녀요. 하나님이 가자 그러면 가야 되요. 가기 싫어도 가야 돼요. 하나님이 여기 있어라. 그러면 있기 싫어도 있어야 되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험하시려고 항상 어려운 곳에 성막을 멈추어 섰습니다. 마라의 쓴 물을 그냥 지치셔서 엘림까지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마름을 채워 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은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성막에 가고 오는 것에 따라서 움직였거든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순종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는 복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1)들으나 마나형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들으나 마나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으면 무엇을 합니까? 들을나 마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신림동에서 부목을 할 때에 신림 교회에 좋은 점이 있어요. 신림 교회의 좋은 점은 말씀을 들으면 반응을 잘하는 것입니다. 가령 저녁 설교 때에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을 전하면 저녁 기도나 새벽 기도에 사람들이 많아 집니다. 즉시 듣고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어려분 들으면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2)듣지 않는 형이 있습니다. 아예 귀를 막아 버리고 듣지도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3)듣고 행하는 형입니다. 들으면 듣는대로 적용해서 행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이런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어떤 세상 풍파가 몰려 오더라고 무너지거나 넘어지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견고한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듣고 행하는 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신명기 28장 2절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첫째, 성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네 소생이 네 몸의 소생과 네 짐승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다. 자녀와 짐승까지 생산의 생산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다. 양식의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네째, 네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다. 들어가며 나가며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섯,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기업에 복을 주리라. 어떤 사람에게 약속하고 있습니까? 순종하는 사람에게 이런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진리의 말씀이십니다.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저 흘려버리는 형이 아니라 듣고 여러분들이 그대로 적용만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축복을 여러분들에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3.언약을 지키면 복을 받습니다.
언약을 지키라는 거예요. 언약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언약을 놓치면 너는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붙들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언약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언약을 붙들면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붙들면 네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은 예수님서 옵니다.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그 언약의 말씀,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흘러가고 있습니다. 네가 너희에게 메시아를 보내준다 이 메시아가 너희를 건져주겠고 이 메시아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 메시아의 그 피가 너희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하는 그 언약을 믿으면 너희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언약에 대한 말씀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그래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이 언약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야를 언약을 하셨습니다.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잊어버리지만 아니하면 그러면 너희가 그 약속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언약을 잊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른 월절을 지키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찾으며 돌아 오다가 성전에서 다시 찾았습니요한계시록 에 보면 소 아시아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는 처음 사랑을 잊었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거기에서 우리의 축복은 끊어집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유를 주시고 저주도 풀어주시고 사망에서 해결주시고 마귀도 떠나가게 하시고 질병도 떠나가게 하시고 이런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누가 다 해결해 주셨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언약을 붙들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기도: 하나님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흘러 오는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 우리의 인생이 잘되고 우리의 인생이 풀려지고 우리의 인생이 기름지고 열려 질 줄 믿사오니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 되게 도와 주시고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순종하는 자 되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드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위대한 백성이 되라
출 19: 1-6 벧전 2: 9-10
I. 내가 이 땅에 더 살아야 할 이유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어느날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천둥 번개를 동반한 무서운 폭우를 만나게 됩니다. 비를 피하려 큰 소나무 밑에 들어갔다가 벼락이 소나무를 치는 바람에 루터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지만 옆에 있던 친구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큰 슬픔 가운데 친구의 장례를 마친 루터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를 더 살려 두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어느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여러분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더 이 세상에 살게 해야될 이유가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나 자신에게,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끊임없이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리빙스톤은 ‘사명을 다하기 전에 죽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사명 끝나면 죽는다는 뜻이겠지요. 사명 다하고 나면 살아야 될 이유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리더십 전문가 죤 맥스웰은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을 네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방황자입니다. 아무런 인생의 목적도 꿈도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추종자입니다. 꿈을 꿔 보지만 이룰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성취자입니다. 분명한 인생의 목적과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삶안에서만 성취하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넷째는 지도자들입니다. 자신의 비전을 이웃들과 나누며 멋진 꿈을 함께 이루어 나가도록 이웃을 설득하는 사람입니다. 맥스웰은 이 사람이 바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짐 콜린스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생은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끝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업도 좋은 기업에 머물지 말고 위대한 기업이 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신앙생활하기에 좋은 교회에서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위대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꿈꾸시던 그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고 그 꿈을 이 땅에 펼쳐가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런 교회가 위대한 교회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느냐 적게 모이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전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땅의 교회를 바꾸는데 어떤 영향력을 미쳤느냐의 문제입니다.
단지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라는 말을 듣는데서 그치면 안됩니다. 우리교회가 위대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재미있고 행복한 셀에서 머물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셀이 위대한 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목사가 되어도 좋은 목사에서 멈추면 안됩니다. 위대한 목사가 되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장로, 위대한 집사, 위대한 성도, 위대한 셀리더가 되는 꿈을 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 사람은 좋지! 이 말은 칭찬이 아닙니다. 욕 일 수 있습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란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열정이 모자란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요.
II. 시내산 언약
하나님은 조그마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대한 백성 삼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은 한 나라의 표상이라기 보다는 교회 그리고 한 성도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지 3개월쯤 되었을 때에 시내 광야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하나님은 떠돌이 유랑 민족, 480년동안 종살이나 하던 민족, 노예근성이 딱지 딱지 붙은 이스라엘 족속을 택하여 위대한 백성을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 영광스런 비전의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구약학자들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제일 중요한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출애굽기 19:1-6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체결한 결혼예식을 거행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왕자가 그 마을 모퉁이에 사는 거지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왕궁을 빠져나와 거지 아가씨와 데이트를 즐기고 밥을 사 주고 옷을 사 입혔습니다. 어느날 이 아가씨를 왕궁으로 초청하여 결혼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가씨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생의 전환점은 바로 결혼 예식장 여기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시내산이 바로 그런 장소입니다. 언약을 체결한 장소가 시내 광야에 솟아있는 시내산. 구약에서 가끔 호렙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이곳을 제벨무사 즉 모세의 산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언약을 시내산 언약이라 학자들은 일컫습니다. 여기 시내산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혼인 예식장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 시내산 언약을 통해, 천덕 꾸러기 백성이 하나님의 보물같은 백성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 버려진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거지 아가씨가 황후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지금까지 너희가 보물같은 백성이었다. 제사장 나라였다. 구별된 백성이었다. 과거형으로 말씀하지 아니하고 되겠고, 되리라 미래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너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시내산 언약이 있기 전까지 그들은 세상 누구로부터 소중히 여김받던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시내산 이전에 그들의 존재는 그들의 가치는 그렇게 남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내산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단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존재 가치가 바뀌어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러한 영적인 시내산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분 앞에 자신의 인생을 드렸던 그 자리, 그분을 만나 나의 취미도 바뀌고 꿈도 비전도 새로워지고 인생의 소원도 목적도 달라졌던 시내산! 이 경험이 우리를 위대한 백성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III. 독수리 날개로 업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위대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만세 전에 택하셨습니다. 그들을 지으셨습니다. 천지창조도 바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냈습니다. 요셉을 통해 그들을 애굽으로 들여보냅니다. 애굽 고센땅 이스라엘 공동체에 자궁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480년동안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이제 모세와 함께 광야로 인도했습니다. 영광의 탈출 - 출애굽을 경험하게 되지요.
여기까지 이스라엘은 참으로 파란 만장한 생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모든 과정을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4절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보았느니라”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너희가 다 보고 경험한 바가 아니더냐. 독수리 날개로 업어 그 새끼를 보호하듯이 너희들을 보호하고 훈련하고 지켜 이곳까지 인도하였느니라.
독수리는 새끼를 위해 높은 절벽에 둥지를 치고 부드러운 털로 새끼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합니다. 알을 낳아 부화시키고 먹이를 나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새끼들을 둥지에서 밀어냅니다. 신명기 표현에 의하면 독수리가 날개를 퍼덕였다고 말합니다. 부드러웠던 깃털은 날아갑니다. 쭈빗쭈빗 가시들이 새끼 독수리들을 찌르기 시작합니다. 깜짝 놀란 독수리 새끼들은 벼랑 둥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꽥꽥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어미 독수리의 힘에 밀려 벼랑 아래로 사정없이 떨어집니다. 새끼 독수리는 연약한 날개를 퍼득이며 살려달라 몸부림칩니다. 아서라히 떨어지는 새끼 독수리를 지켜보던 어미는 새끼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쏜살같이 내려와 날개로 받아 다시 높은 고공으로 올라가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겁에 질린 새끼 독수리는 다시 “나 죽는다” 소리를 지르며 날개를 펄럭입니다. 그러면 벼랑 바위에 떨어지기 전 쏜살같이 내려와 새끼를 날개로 받습니다.
이 장면을 연상하며 본문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인도했다고 말합니다. 다른 새들은 새끼를 옮길 때 부리로 물어서 옮깁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태워 옮기기도 하고 훈련시키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를 등에 업어 여기까지 인도하였느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방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여기까지 인도한 방법이었습니다.
여기 독수리 새끼는 바로 성도를 의미합니다. 어느날 문득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내게 왜 이런 일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한 마리 독수리처럼 깜짝 놀라 심각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내게 왜 이런 건강의 이상이? 내게 왜 이런 사업의 어려움이? 내 자녀들에게 왜 이런 위기가? 내게 왜 이런 잠 못 이루는 아픔과 불안이? 내게 왜 이런 소중한 관계의 파괴가?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날개가 펄럭이며 당신을 보금자리에서 몰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을 고공에서 지금 하나님이 떨어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물어다 주는 먹이만 받아먹던 어린아이 자리에서 나오라는 겁니다. 잘못된 가치관을 떨쳐버리라는 겁니다. 헛된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죄의 자리에서 나오라는 겁니다. 널부러져 주저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겁니다. 꿈도 비전도 없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당신이 위대한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비전을 이루는 영광스런 사역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단지 세상적 꿈을 이루고 만족해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비전을 이루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요. 새끼를 벼랑에 집어던졌지만 어미 독수리는 절대 그 새끼가 땅에 떨어져 다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큰일났구나. 놀라시겠지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멸망의 자리에 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그 새끼 독수리는 반드시 푸른 창공을 나르는 하늘의 위대한 왕자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두더지처럼 땅이나 파고 땅에서만 바둥대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의 비전을 품고 시련의 폭풍우를 헤치고 승리의 날개를 펴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하늘의 왕자 독수리는 세찬 바람 폭풍이 몰아치면 칠수록 날개의 각도를 잘 조절하여 폭풍이 미치지 못하는 저 푸른 하늘을 날게 될 것입니다.
문득 위기에 부딪힐 때도 있을 것이고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못내 당황할 때도 있을 것이며 시련과 환란의 모진 바람에 울부짖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믿음의 날개를 달고 소망과 꿈과 비전의 날개를 달고 저 푸른 믿음의 세계를 향하여 솟아올라 승리하는 삶을 사는 날이 반드시 여러분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IV. 위대한 백성① - 하나님의 보물
특별 공수훈련을 마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존재로 살아가게 될까요? 하나님의 등에 엎혀 이곳까지 인도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시내산 언약을 경험한 당신! 당신은 위대한 백성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너희는 내 소유가 되겠고” 여기 내 소유란 말은 하나님의 보물같은 백성이란 뜻입니다. 은혜의 동산 영성훈련에 돌아가면 첫날에 큰 포스터 한장이 붙습니다. “You are the apple of His eyes.” 당신은 하나님 눈에 사과다. 우리 말로 의역해 보면 “하나님 눈에 넣어도 안 아플만큼 소중한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고 잠자고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가장 긴급한 문제는 애굽에서 가지고 있던 꼬리표를 떼는 일이었습니다. 노예근성 말입니다. 부정적이고 패배주의에 찌든 의식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위대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노예가 아니라 나의 보물이다. 너는 애굽인의 종,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이다. 너는 존귀한 존재이다. 너는 가치있는 보물이다. 너는 가난을 정복할 위대한 정복자이다.
일제 강점기를 마치고 해방된 우리 민족에게 가장 힘든 일은 “조센징” 꼬리표를 떼는 일이었습니다. 야곱이 위대한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야곱 - 발목잡고 사는 놈, 딴지거는 놈이란 딱지를 떼는 일이었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발목을 잡고 태어난 딴지거는 인생으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날개를 퍼덕이며 고향을 떠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속고 속이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경험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모든 가족이 얍복강을 다 건넌 다음에 하나님은 홀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싸움을 걸어옵니다. 밤새도록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내려칩니다. 지금까지 나는 내 인생에 모든 계획을 네 멋대로 이루면서 살아왔다. 내 재주, 내 꾀면 안 통하는 것이 없었다. 나는 발목거는 인생 야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도뼈가 부러진 지금 그는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 - 딴지거는 인생의 꼬리표를 떼라. 이스라엘. 이제부터 내가 다스려주마. 내가 통치해 주마. 내가 간섭해 주마. 내가 도와주마. 내가 너와 함께 해 주마.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라. 아침햇살이 떠오릅니다. 늘 보던 얼굴이지만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브니엘 - 하나님을 만난 야곱, 이제는 이스라엘이 되어서 절뚝거리며 하나님 잘 치셨어요. 당신이 나를 치지 않았더라면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이제는 당신이 날 도와주기 때문에 나와 함께 하기 때문에 나를 다스리기 때문에 나는 승리의 날개를 펴고 인생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백성이 되려면 자아상의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을 때에 성령이 우리와 충만히 함께 하실 때 우리에게는 위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상의 혁명, 자아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라빈슨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는 책이 있습니다.
당신 안에 영적인 거인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 거인을 깨우십시오. 당신은 위대한 영적인 거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 안에 위대한 보물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하여 찾아내어 사용하십시요. 성령이 임하시면 위대한 사역자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날개로 달아서 푸른 창공으로 솟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했던 일 너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당신은 하나님 나라의 보물같은 존재입니다.
V. 위대한 백성② - 제사장 나라
이어지는 6절입니다.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되며” 위대한 백성은 제사장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신약 본문 벧전2:9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이 힘든 세상을 살며 늘 불평하며 원망하며 이 사람 저 사람 비난이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늘 변죽이나 울리며 변방에서 서성이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부정적인 면만 보고 항상 부정적인 말만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 근성입니다. 짜투리 인생, 변방 근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은 중보자 - 제사장 의식으로 살아갑니다. 역사의 구경꾼이 아니라 역사의 중심에 서서 역사의 아픔을 붙들고 살아가는 중보자 제사장 나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한 손으로 이웃의 아픔을 붙들고 또 한 손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뻗어서 이웃의 아픔을 하나님께 아뢰는 복을 비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중보자는 역사의 조연이 아닙니다. 언제나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이웃에게 해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입으로 삶으로 이웃을 저주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축복하며 살아갑니다.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갑니다. 언제나 복을 빌어줍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불평이나 하는 백성들, 기다리지 못하고 걸핏하면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칼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팔에 매달려서 그 칼날을 몸으로 가로막으며 하나님과 배수의 진을 치고 매달리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모세.
“슬프도소이다.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주시옵소서” 백성들의 아픔을 자기의 가슴으로 끌어안습니다. 백성들의 허물과 상처와 실수를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으며 하나님 차라리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 백성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제사장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조국이 분단된 이 현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정치가 비틀거리는 것도, 경제가 어려운 것도 교회가 제 역활을 다 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든지 비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정죄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아니하고 그 상처와 아픔과 연약함을 가슴으로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를 이름하여 우리는 제사장 나라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의 명운을 걸머진 사람들입니다. 나라의 명운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릇된 오만이 아니올시다. 이 땅을 밟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피 묻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 백성에게 던지며 살아가겠습니다. 정의를 하수같이 공의를 생수같이 흘러 보내며 살아가겠습니다. 역사의 아픔을 가슴에 끌어안고 내 책임인양 하나님 앞에 아파하며 울며 기도하며 살아가겠습니다. 하나님 이 백성을 살려 주시옵소서.
이런 제사장 나라로 이 백성이 거듭나게 될 때에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의 마음과 제사장 마음을 가지게 될 때에 저주의 물결이 끝나고 축복의 물결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제사장 나라입니다.
VI. 위대한 백성③ - 구별된 백성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입니다.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백성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무기는 총과 칼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도록 지어진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이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도록 지어진 존재를 말합니다. without God I'm nothing. 난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주 없이 살 수 없네! 이것이 우리의 인생철학입니다. 애굽인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았습니다. 가나안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망하도록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 없이는 절대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거룩한 교통이 없이는 우리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도록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자식의 반란으로 왕궁을 떠났을 때에, 무서운 범죄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에, 다윗은 왕궁을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따스한 이부자리 침대를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나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내게 성령을 거두지 마시옵소서. 주의 성령이 나와 함께 한다고 하면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다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는 존재 바로 그것이 거룩한 백성 당신입니다.
VII. 맺으며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여러분은 당신의 야망을 이루고 끝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비전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보았던 그 비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원했던 사도 바울의 그 비전, 주님께서 세우기 원했던 영광스런 교회에 대한 비전을 안고 살아가십시오. 참 좋은 사람이었다는 얘기만 듣는데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위대한 사람이 되십시오. 당신의 비전을 역사 위에 펼쳐가는 사람 말입니다.
단지 우리가 은혜 받기에 좋고 편안히 교제하기에 좋은 교회, 그것은 진정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아닙니다. 위대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는 교회, 그 주님의 비전을 역사 속에 나누는 교회, 그래서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교회, 그것이 우리는 꿈꾸는 교회입니다.
왜 우리는 위대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나를 더 오래 살도록 내버려두신 이유가 되기 때문에. 그것만이 하나님 앞에 영원히 남겠기 때문에.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입니다.
한 젊은이가 신앙생활 하다가 어느날 모퉁이에서 목사님을 만나 “목사님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데 주머니에서 담뱃갑이 툭 떨어졌습니다. 목사님도 한참이나 담뱃갑을 쳐다보고 이 청년도 담뱃갑을 주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얼른 주워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모퉁이 지푸라기에 무릎을 꿇고 얼마나 창피했던지 얼굴이 불처럼 달아올랐습니다. 그 시간에 결심을 했습니다. 담뱃갑을 쥐어뜯으며 하나님 내 주머니에서 앞으로 담뱃갑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이 떨어지기 원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담뱃갑이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복이 쏟아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담배를 끊기 위하여 그때부터 은단을 씹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담배를 끊기 위해 은단을 만들어야지. 은단 공장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약품을 만들 거야. 비타민 C를 개발하여 비타민 C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바로 고려 은단 회장 조규철 회장입니다. 그의 아들은 조창현 장로님으로 지금 그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복을 세상 가운데, 우리 한민족 가운데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전국 도로명 마다 큰 표지를 달기로 했습니다. "Jesus loves you"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속도로를 이곳저곳 달리다 보면 올림픽 대로를 달리다 보면 이곳 저곳에서 Jesus loves you.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는 곳곳마다 여러분은 위대한 영향력을 나누며 살아가게 될 위대한 백성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복은 한없이 흘러 넘쳐서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지게 될 여러분들은 제사장 백성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바꿀 위대한 백성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면 행복합니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살 게 될 것입니다.
시내 광야에 이르러
출애굽기 19: 1-6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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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생각하며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를 찾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새해를 맞이하며 하나님 앞에 소원하고 기도하는 소든 소원들이며, 이렇게 살아 보겠노라고 다짐하며 결심하는 모든 결심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이 시간 새해를 맞이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출애굽의 이야기의 한 대목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며 새해가 주는 뜻과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이스라엘 자신들도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겠지요. 하나님께서 왜 자기들을 부르셨을까?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 스스로가 생각해 보아도 별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으니까요. 자기들은 단지 이집트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노예였습니다. 바로의 관리들이 자기들을 괴롭히고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고 중노동을 시킬 때에도 선뜻 그들을 위해서 나서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에게 가해진 너무나도 가혹한 형벌... 자기들의 가정에서 태어난 남자아이들은 다 죽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명령 앞에서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종말을 눈에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세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다고 하면서 바로와 담판을 지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감히 바로와 맞설 수가 있을까? 바로와 맞서서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불안한 눈으로 그 과정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지루한 줄다리기가 거듭되는 것 같더니 상황이 점점 더 모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조금씩 생각을 바꾸었고, 모세가 하는 말과 행동을 신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 모세의 배후에는 정말 여호와가 계신가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드디어 그렇게 고집이 세고 자존심 강하던 바로가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집트에서 난 첫 것들이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짐승들까지 하룻밤에 다 죽어 버리는 이런 끔찍한 재앙 앞에서 바로도 두 손을 들고 만 것이지요.
드디어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종살이를 하던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미련 없이 벗어 던지고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다 함께 출발하였습니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홍해바다를 앞에 두고 그들은 정말 가슴이 철렁할만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있고, 뒤에서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바로의 군대가 그들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아 여기까지가 우리의 운명인가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절망하였는데 놀랍게도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그 가운데로 길이 열린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인지... 그들은 이렇게 해서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고, 광야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얼떨결에 광야로 접어들기는 하였지만, 근심과 걱정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던 감동도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자 곧 사라져버렸습니다.
“도대체 양식은 어디서 구하지? 목이마르면 어떻게 하지? 뜨거운 햇볕은 어떻게 피하지? 밤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 올 때에는 어떻게 하지? 혹시 광야를 주름잡고 다니는 나쁜 사람들이라도 만나다면 그 때에는 우리는 어떻게 하지? 이러한 근심과 염려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들의 이러한 모든 근심과 염려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셔서 그들이 배불리 먹게 하여 주셨습니다.
밤이 되어서 내일 먹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더라도 아침이 되어 광야에 나가면 만나가 마치 서리가 내리듯이 덮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을 거두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이 없어서 고생을 하다가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반석에서도 샘물이 솟아나서 곧 목마름을 해결하게 되는 경험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친히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되셔서 낮에 비쳐오는 뜨거운 햇볕과 밤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가끔씩 아주 포악한 적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와중에서도 그들을 보호하여 주셔서, 그들은 적들의 공격 속에서도 자기를 보호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중에 그들은 시내 광야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이집트를 떠날 때에 그들이 가졌던 궁금증... ‘왜 우리들일까? 여호와 하나님은 왜 아무런 자랑할 만한 것들이 없는 우리들을 이토록 사랑하시는 것일까? 이집트같이 강한 나라는 마다하시고 왜 우리들처럼 그 밑에서 종살이 하던 사람들을 이렇게 잘 대해주시는 걸까?’ 하는 궁금증을 풀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는 중에 그들은 시내광야에 도착하게 되었고, 비로소 하나님은 그 곳에서 모세를 통해서 히브리사람들을 여기까지 불러내신 까닭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v.4)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지나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떻게 그들에게 행하셨는지... 그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들을 괴롭히던 이집트사람들에게 한 일이며, 그들이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에 하나님이 하셨던 일들을 한 번 돌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하나님의 질문이 우리가 한해를 보내고, 다시 새로운 한해를 맞으면서 생각해보려하는 중요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보십시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요?
혹시, 이스라엘이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너는 이야기를 할 때에 그것을 들으면서 ‘맞아 그것은 나의 이야기야... 그 때에 내가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되돌아 갈 수도 없고... 막다른 골목에 있는 것 같은 절박한 위기의 순간이 있었는데... 기적처럼 길이 열렸어... 아... 그렇게 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셨구나...’ 이렇게 느껴지는 분들은 없으신가요?
목이 말라서 견딜 수 없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반석에서 물이 솟게 하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그것은 나의 이야기야...’ 또는 하늘에서 만나가 비같이 내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아 맞아 그 때에 나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셔...’ 이런 고백들...
광야를 덮는 구름과 어둠을 밝히는 불기둥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려진다거나... 그들에게 달려들었던 아말렉을 물리칠 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에...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던 기억은 없었는지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빠져나와서 시내광야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겪었던 여러 가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들... 그것을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원형적인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적이거나 문화적이거나 지리적인 배경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느끼고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살면서가지게 되는 많은 고민이나 문제들... 우리들도 여전히 그러한 문제에 직면해서 살 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머물러 있는 광야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적인 세상은 바로 이러한 삶의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분명히 밝히십니다.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마치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 그렇게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하셨던 이 말씀... “나는 너희들을 인도하여 주기를 마치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그 날개로 업어서 나르듯... 인도하였다는 말씀이 우리의 깨달음과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비추어서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아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어.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고 업어주시고, 품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대목의 말씀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도착한 시내광야는 그들이 우연히 지나치는 장소가 아니라 그들의 여정에 있어서 기억할만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나에게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데려오실 때에 이곳으로 그들을 데려오게 하시려는 목적과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긴 안목에서 보자면, 이곳 시내 광야도 그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 위해서 거쳐 가는 여러 장소들 중의 한 곳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일부러 시내광야로 데려 오셨고, 이곳에서 그들과 하려고 하신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려고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 오신 것입니다.
물론 이제 이스라엘은 어렴풋하게나마 하나님이 그들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유별난 관심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특별하게 여기시는 모양이야...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까지 할 수는 없는 것이지...’ 그들도 이제 이 정도는 생각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제 그것만으로는 만족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몰라도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남다르게 살아가기를 바라셨고, 이러한 그들을 향한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그들을 이곳 시내 광야까지 인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들에게 제안하십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들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나라와 왕이라도 대항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셔서, 그들의 앞길과 운명을 인도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제안인 것인지...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면 세상의 그 어떤 강한 나라나 임금들도 감히 이스라엘을 손댈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다른 민족 밑에서 노예로 살거나 비참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물처럼 여기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마치 우리가 보물을 아끼듯... 그렇게 이스라엘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v.5a)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생각과 뜻과 삶의 원칙을 따라 살아갈 때에 오로지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이 정하신 말씀과 뜻을 좇아서 살아가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지요. 만일 그들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잃지 않고 산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언제까지나 그들을 지켜 주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오늘 그들이 도착한 시내광야... 이곳은 그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장소인 것이지요.
“이제까지 마치 독수리가 날개로 자기의 새끼들을 업어서 인도하듯...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손길과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다른 민족들처럼 하나님 없이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단하는 자리가 바로 시내 광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이 서 있는 자리도 바로 시내 광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지나간 시간 동안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 마치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데려 오듯... 그러한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깨달음과 감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는가 하는 일에 있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다시 한 번 결단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삶의 태도를 버리지 않고 살기를 결심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긴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시고... 이전 보다 더 깊은 사랑과 능력의 손길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시고 책임지시는 삶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직면할 미래에 대하여 어떤 걱정이나 염려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세상을 산다는 것...
오늘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하고 풍성하게 하는지... 그것을 일깨워 주는 아름다운 고백이 있습니다.
‘한 영성집회에 참석했던 여성이 신앙 경험을 나누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일어섰습니다. 그는 창녀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가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10대부터 교회학교에 나가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사랑도 깊이 체험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계통의 대학에 진학했고, 거기서 멋진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곧 사랑에 빠졌고 마침내 결혼까지 했습니다. 남편은 멋진 사람이었고 안정적인 직장에 다녔습니다. 사랑스러운 두 아이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생부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는 강박관념적인 생각이 그를 지배하는 순간부터 단란했던 가정의 행복에는 검은 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확인하고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께 간청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9개월 전 엄마의 손님이 누구였는지 기억해 보세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 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부엌 싱크대 앞에서 접시를 닦고 있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가슴이 찢기는 듯한 아픔과 고뇌가 그를 엄습했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렸고, 마침내 크게 소리쳤습니다.
“오 하나님, 누가 나의 아버지입니까?”
그때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그 음성이 너무 또렷해서 혹시 누가 와있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금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너의 아버지였다.”
그 순간 그는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찾으려던 강박적 욕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창조 이전부터 택하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엎드렸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나의 아버지였다...’
오늘 이 시간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시내광야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앞으로 우리에게는 어떤 일을 만날지 모르는 광야가 여전히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면서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나간 모든 시간들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여기까지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삶도 하나님이 보물처럼 우리를 아기시고 소중히 여기시며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가슴에 간직한 채로 앞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 속에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