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연수원에 근무할 때 단발머리를 한 여직원이 본사에서 전입 왔다." 임ㅇㅇ입니다 "라고 하며 고개를 숙인다.
짙은 곤색 정장에 단발머리라서 그런 건지 단정하긴 해도
왠지 우수가 서린 듯한 낯빛이다.
몇 칠 간 근무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니 책상에 놓인 사무용품도
깔끔하게 해놓고 일도 신입답지 않게 능숙하게 처리한다.
토요일 오후까지 간부 시험 준비를 마쳐야 했기에 임ㅇㅇ와 내가 남아 마무리하기로 했다.
임ㅇㅇ가 수험표를 쓰고 있는 글씨를 보니 선이 곧고 맑으며 단정·아담한 것이 자신의 모습을 빼어 닮았다.
글을 쓰고 있는 임ㅇㅇ의 단발머리가 새삼 향수를 일깨웠다.
"수고 했다, 횟집에 가서 소주나 한잔하자"
둘이서 택시를 타고 일광으로 가서 "난계 오영수"가 쓴 소설 갯마을의 배경이 된 강송정 옆에 있는 내가 아는 횟집의 평상에 자리 잡았다. 손님은 단둘이다.
하늘에는 구름 사이로 쪽 달이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서쪽 나라로 가기도 잘도 가고 있다.
달음산 마루에 걸린 초아흐레 쪽달을 바라보며 걸치는 소주가 둘의 이성을 점점 흐리게 했다.
쪽달인 상현달은 음력 7~8일쯤 해 질 무렵 남쪽 하늘에서 보이고 점점 서쪽으로 움직이며 빈 아랫부분을 채워 음력 15 ~ 16일쯤에 해가 질 때 동쪽 하늘에 뜨는 보름달이 된다.
이와 같이 자연의 이치는 경이롭다.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겸손해야 되는데 榮枯一炊라! 인생이 꽃피고 시드는 것은 한 번 밥짓는 순간인데 어떠하리!
주량이 보통이 아니다."아줌마! 소주 한 병 더 주세요"라고 하니 " 자꾸 주인 귀찮게 하지 말고 댓 병시키세요 " 애교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작정한 듯 내 말을 가로챈다.
이제 이성이 소주 잔에 묻혀 사라지자 뒤죽박죽이다.
"ㅇㅇ야! 해운대 가서 한 잔 더 하자"라고 안 했으면 일어나도
안 했겠다. 미포 오륙도 선착장으로 갔다.
술을 많이 마셨지만 출입구를 무사히 통과하여 승선했다.
둘은 갑판에 서서 바다 위에 노니는 물새를 본다.
맞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들이 내 얼굴을 간지럽히니 치자 꽃향기가 은은하다. 이 향기가 오히려 예의 바른 여고생의 모습을 보게 했다.
"이 회사에 들어 오려고 꽃 가게 하며 공부 피나게 했습니다. 아저씨들도 많아 알았고요"라고 하며 쓸데없는 소리를 해대는
얼굴에는 회한의 눈물을 감추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바닷가의 기슭에 있는 호텔에서 휘항 찬란게 빛나고 있는 네온 사인 불빛과 맞닿은 검푸른 물결 위에 불빛이
거꾸로 번져 흐르고 있는 것을 바라보니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말 갈 데 소 갈 데 가리지 않고 헤매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게 한다.
"ㅇㅇ야! 하고 싶은게 무었냐" 다 해주고 싶었다.
네온사인 불빛으로 물들은 건물을 가리킨다.
건물을 바라보니 5~8층이 호텔로 되어있고 sky lounge가 있었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알쏭달쏭한 마음이었지만
음탕함이나 정욕같은 건 전혀 없었다 .
엘레베이터 안에서 "내가 부하직원과 이렇게 함께 있는 것도 잘못인데 더 이상 나가는 건 悖倫이다" 라는 생각이 스친다.
8층을 지나 sky lounge에 내렸다.
야경이 좋은 자리를 잡아 맥주를 주문하니 마땅찮은 표정이다.
택시를 타고 온천장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에 오니 마누라가 자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다. 어린 토끼가
허허로운 들판을 헤매다 지쳐 겨우 둥지를 찾은 것처럼 편안
하기 이를 데 없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에도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있다. 우정인지 사랑인지 헷갈려 결혼하고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한 영혜가 그런 사람이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다 보면 저절로 생기는 희생과 헌신의 정신이 사랑의 참 면목이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처음 본 이성에서 느낀 상큼 달큼함은 실체가 없는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어설프고 서툴러 상황에 따라 변하며 이루어
지지 않는다, 감정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야 한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숙명적인 동경과 아쉬움도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니 그 감정에 빠져 세월을 낭비하기에는 남은 세월이
그리 많지 않다.
첫댓글 [이제, 이성이 소주 잔에 묻혀 사라지자 뒤죽박죽이다.] 표현이 멋 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