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룡산 올라보니
몸통이 쉐퍼드만한 누런 산짐승이 등산로 왼쪽 숲에서 튀어나오며 날 공격했다. 경사진 산길을 오르는 내 목을 겨냥한 것 같았다. 순간 난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훌쩍 뛰어오른 녀석은 내 얼굴을 가볍게 스치곤 길가 숲에 착지했다. 다이빙한 앞발이 바닥에 닿자 녀석은 나를 힐끔 돌아봤다. 갈색 노루였다. 녀석도 나 때문에 놀랐는지 아니면 건망증 때문인지 방금 자신이 한 짓은 잊고 고갤 한번 갸우뚱하더니 후닥닥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처음부터 어흥, 하는 포효하곤 거리가 멀었다. 난 오른손에 카메라를 들고 있었지만 그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노루가 튀어나온 자리 바로 밑은 무룡재 낭떠러지였다. 인기척에 놀란 노루가 낭떠러지 쪽으로 달아나려고 튀어 올랐다가 방향을 반대로 트느라 후닥닥 뛰어올랐을 때 난 처음 놀랐고 나를 향해 돌진했을 땐 영락없이 무룡산 귀신이 되나 했었다. 노년에 건강하고 싶어 울산 남구청이 벌이는 체육교실까지 참여했다가 하마터면 저승을 재촉할 뻔했다. 몸에서 솟은 땀은 바로 식었지만 기분은 묘했다. 교목들과 장마에 무성하게 웃자란 풀들로 등산로는 터널처럼 햇살이 들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만날 수 없으니 벤치 하나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출발지점에서 정상까지 1.7km란 거리만 듣고 들어선 게 잘못이었다. 무룡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군데지만 무룡재에서 오르는 이 코스를 사람들이 기피하는 것은 숲속으로 이어져 전망을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도중에 갈라지는 3거리가 나왔지만 그곳에도 이정표는 세우지 않았다. 통행인이 없다보니 길을 가로지른 거미줄 천지였다. 여러 종의 크고 작은 나비들이 거미줄에 걸리지 않고 평화롭게 나는 게 신기했다. 산에 서식하는 생명체를 유인하고자 고운 자태로 얼굴을 내민 독버섯도 길가에 자주 나타났다. 얼마나 올랐을까, 드디어 하늘이 열렸다.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머리 위로 오래된 노송과 굴참나무들이 등산로를 따라 도열하여 열병식을 하고 있었다. 울산 시내에 위치한 무룡산은 해발 452m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울산의 진산으로 예로부터 수호산으로 추앙받았고 특히 왜구로부터 울산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 역할을 해왔다. 정상에서 조망되는 동해와 연결된 풍광도 일품이다. 특히 석유화학공단 야경은 울산 12경에 들 정도로 절경이어서 사진가들도 즐겨 찾는 편이다. 작년에 업데이트한 차량 네비게이션에 무룡산 안내가 뜨지 않았다. 그래서 정자항으로 차를 모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정자항을 먼저 둘러보고 폰 네비게이션을 이용해 무룡재에 당도했다. 정자항에서의 거리는 1700m로 무룡재에서 정상까지 거리와 같았다. 무룡산 정상에 오르면 우리나라 통신발달사도 볼 수 있다. 바로 한국 최초의 국제통화시설인 무룡산 중계소다. 근대적인 국제통화방식인 지름 19m의 스캐터전파를 바다를 향해 발사하는 통신용 안테나가 있다. 1968년 6월 일본 하마다濱田와 가장 가까운 거리인 무룡산에 중계소를 설치했던 것. 1980년 11월 한일 간 해저케이블이 개통돼 국제통화가 이원화될 때까지 이곳은 우리나라 유일의 국제통화 관문이었다.
1991년 3월 해저 광케이블을 통한 국제통화가 일반화되면서 끝났고 같은 해 11월 한국통신 사적 제5호로 지정됐다. 그런 후 2000년 12월엔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정상 약간 아래엔 KBS와 mbc 그리고 kt 송신탑이 하늘을 향해 우람하게 섰다. kt설비가 한복판에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여 눈길을 끌었다. 각각 디지털TV 6개와 UHD TV 4개, FM라디오 10개로 지상파는 부산MBC와 울산MBC KNN DMB가 이곳에서 송신하는 전파를 이용한다. 등산로 안내판마다 '송신탑'을 '송전탑'으로 표기한 것은 전력회사의 송전탑 관리에도 혼란을 줄 것 같았다.
울산을 대표하는 노래 ‘울산아리랑’에도 무룡산의 기품이 잘 드러나 있다. ‘운무를 품에 안고 사랑 찾는 무룡산아….’로 시작되는 가사가 울산지역 노래방의 단골 레퍼토리가 될 정도로 시민의 가슴 속에 각인돼 있다. 무룡산은 울산에 근무할 때 오른 후 40년 세월이 흘렀지만 다시 찾으니 정겨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산을 내려서서 현직 때의 울산 친구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무룡산을 한마디로 "가벼운 운동으로 오르기엔 약간 벅차고, 산행으로 오르기엔 약간 모자라는 산"이라 했다. 먼저 그에게 묻고서 산을 올랐다면 고생도 덜 했을 텐데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