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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성: 생명... (L'immanence: une vie... 1995)
이 글은 들뢰즈가 죽기 직전 직접 발표한 글로는 마지막 글이다.
이글의 후편은 “L'actuel et le virtuel”(현실적인 거솩 잠재적인 것)은 Dialogues, (avec Claire Oarnet), Paris, Flammarion, coll. "Champs" 1966년 부록에 발표된다.
이 두 텍스트는 “집단과 다양체”(Ensembles et multiplicités)라는 논제의 계획 아래 작성된 글이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철학(Philosophie)』지를 보니 그 때가 언제 인지 모르지만 읽었고 줄도 치고 주도 달아놓았네,
그런데 지금 메모 난을 보니 참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노트 중에서 보면, 원문 3쪽, 첫 문단에 ‘선험적 영역’, 둘째 문단에 ‘선험적 영역과 의식관계’ 셋째 문단에는 ‘선험과
초월’: 선험이란 순수 내재성은 아직 분할되기 이전이다.
원문 4쪽, 첫째문단 순수 내재 생(UNE VIE). 원문 5쪽, 첫째 문단 내재성=특이성, 둘째 문단 무한정한 삶, [다양체로서
일자, 단위]. 원문 6쪽, 삶(une vie)= 잠세력들.
그리고 다른 쪽지로서, 스피노자: 내재 > 실체(속성) > 양태. 플로티누스: 하나 > 누스 > 영혼. 베르그송: 자연 > 두 질서 >
물체와 생명체. 들뢰즈 무한정자 > 일자(실체, 속성) > 양태.
다양체(le multiplicité), 다상체(divers) 다태체(variant) / [이제 보니 다양체는 다질체가 더 나을 것 같다.
다량체(pluralité)가 되고 다양체라는 개념은 다양체(多樣體)이다.
나의 노트(35ULJ): 선험적 영역 = 내재적 도식 = (한) 생명(삶) = 특이성 = 순수사건. 한마디로 의식에 표출되지 않는 상태로 있는 무의식이다.
이 무의식은 잠세적이며 사건을 생산할 수 있으며, 개별성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의식하고 있는 자아에 내재하지만 자아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무의식은 의식의 선험성이다.
그렇다고 초월하지 않는다.
이 무의식은 의식과 연관에서만 실현화된다(actualiser).
/ 무의식의 덩어리로서 실례는 6개월 미만의 살덩어리 일 것이다.
이것이 사건들의 덩어리로서 실체화 된 것은 꼬마들이다.
실체는 내재적 도식에 따른 것일 수 있으며, 선험적 영역으로 발생(생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재적 도식은 하나의 도식이 아니다. 산술적 다수로서 다량체(multiplicité)이며 이 다량체중의 하나가 생성과정
에서 하나의 삶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 (47MLG)
위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제대로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 내재성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삶(생)이라고 한다.
그것은 벩송의 의식, 기억, 생명의 공연성을 다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데 그가 『물질과 기억』을 높이 평가한 것에 비하여 이 글은 『창조적 진화』에 준해서 쓴 것 같다.
즉 내재성의 실질적이고 잠세적인 근거가 심리학적으로 기억이다.
이 논의는 존재론적이라기 보다 심리학적이다.
이것을 발생론적으로 확장하여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으로 풀어가려면 생명에서 다룰 수밖에 없다.
기억은 인간적인 것을 다루는 측면이있는데 비해, 생명은 비인격적이고 보편적이며 실재적이다.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이전, 이것은 내재성이 일자로서 단위이며 또다른 의미에서 자연자체이다.
자연자체서 이 발생론적 근거로서 생명은 모든 생명에게 선험적 영역에 속하며, 불교에서 범아에 속한다.
범아 속에서 자아, 그 자아가 범아의 끈을 놓지 않고, 즉 지속하고 있음을 통각(각성, aperception)이다.
만물에 불성(佛性)이 있기보다 생명있는 곳에 불성이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47MLG)
표면의 외재화와 표면의 내재화 이중적 측면에서 외재성을 잴 수 있고 셀수 있는데 비해 내재성은 그런 것이 아니라
덩어리로 다발로 있다.
어떤이는 외재성처럼 잴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그것의 깊이에는 또한 무한정하기에 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무한정한 내부가 초월성이 아니라, 생명이 오랫동안 경험해온 경험의 총체이다.
이 총체를 다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오성)인식의 무능이 있다.
그러면 다 알 수 있는 이성이 있는가? 직관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곤충이 자신의 삶의 총체를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산다는 점에서 본능과 같은 직관이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또는 척추동물은 지성을 사용하기를 좋아하다가 이 직관능력을 뒤로 밀쳐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성의 노력만큼이 해서 복원했더라면 다는 알 수 없을 지리도 그런 점을 이해하여 탁월성을 형성하고 좋은 삶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탁월성이 멋있는 삶을 좋은 관계가 유쾌하게 사는 것을 만든다.
내재성의 탐구는 멋있고 유쾌하게, 그리고 스스로가 즐겁게 사는 것이다. (47N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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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 선험적인 장(champ transcendantal)이란 무엇인가?
우선 선험적인 장은 그것이 (경험적인 재현의) 대상을 가리키지도 않고, 또 (경험적인 재현의) 주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험과 분명히 구별된다.
또한 선험적 장은 비-주체적(a-subjectif)인 의식의 순수 흐름으로서 선-반성적이며 비인격적인 의식으로서, [피상]
자아가 배제된 의식의 질적 지속으로서 나타난다.
물론 선험적인 것이 이런 식의 직접적인 소여[무매개적 자료](données immédiates)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묘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509-510, 철학, 원 3) [순수흐름과 질적 지속은 벩송의 DI에서 무매개적 자료이다. (47MLF)]
이러한 선험적 경험론에는 야생적인(sauvage) 어떤 것, 강렬한(puissant) 어떤 것이 있다. (510)
하지만 [초월적인 것과] 반대로 의식이 선험적인 장을 무한하지만 도처에 흩어지는 속도로 가로지르는(transverser) 한,
그곳에서 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1).
(510, 철3) - 원주1): Bergson, MM, “마치 우리가 표면 위에서 그 표면으로부터 방사되어 나오는 빛을, 언제나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빛을 숙고하는 것처럼”(MM 34)
[의식이 무한한 속도로 퍼진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선험적인 장에서는 의식으로 드러날 수 있는 무엇인가로서 대상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47MLF)
따라서 선험적인 장이 자기의 의식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
이 자기의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적이며, 모든 계시(toute révelation)에서는 빠져있다.
(510-511, 원3)[기억은 수학처럼 외연이나 동심원처럼 동연적이 아니라, 흩어져있는 흐름으로 같은 위상에 있다는 점
에서 동연적이다.
한 덩어리(mass)이며 한묶음(gerb)이다.
이 동연적의 의미는 의식, 기억, 생명에 속한다.
그런데 밖으로 드러남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중세철학적으로 표현하는 속성도 근대의 양태도 아니다.
실체라기보다 기체(substrat)이다.
그럼에도 이름을 불러야 하니깐 잠세태이다. (47MLF)]
원3 선험적인 것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이 없다면, 선험적인 장은 내재성의 순수 평면(un pur plan d'immanence)으로 정의 되리라.
왜냐하면 선험적인 장은 객체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초월성도 회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511 원3) - 원주2): 사르트르 참조: Sartre, La transc [의식이 없는 혼돈의 세계는 순수평면으로 가정할 수 있다는
조건문이다.
논리의 극한에서 의식이 없는 세계는 0(무)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있는 것에 속한다.
이 논의은 무에서 유의 창조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벩송에서는 무(Zero)가 없다(EC 4장). 무는 있는 것이지만 의식에 의해 결정되지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이며, 생명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는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상태가 순수흐름, 즉 질적 지속이며, 이것이 생명체는 무매적 자료로서 현존하며, 이 자료와 떨어져 있다는 순간에
한편으로 언어 논리상으로 동일성의 개념이 개입하며, 다른 한편으로 생명론과 영혼(심리)론적으로는 이로부터 드러남,
솟아남, 강도를 가짐으로서 동일성이 아니라 정체성을 가질려는 노력(스피노자의 권능)이 있다.
이 솟아남과 강도를 지니려 노력을 지속하는 한 사물이 생명체가 된다. (47MLF)
예를 들어 스피노자에서, 내재성은 실체로(à la substance) 있지 않고, 실체와 양태들이 내재성 안에(dans) 있다.
(원 4) [다른 부분은 잘 썼는데 이 문장이 문제다 실체와 속성들이 내재성 안에 있고 양태는 내재성이 솟아나는 표면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수동적 양태들로거 개별자들은 표면위에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해야 좋았을 것이다.
스피노자와 플로티누스 까지 결합할 수 있다. (47MLG)]
[스피노자의 내재성은 권능인 셈이다.
유동하는 질료자체이며, 즉 운동이라는 점에서 실체라고 하기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작용하는 권능 즉 내재성은 벩송과 스피노자가 공유하는 개념이다. (47NKF)]
내재성은 모든 사물[만물]보다 우월한 단위(comme unité)로서 하나의 그 어떤 것에 연관되어 있지 않고, 사물들의
종합을 행하는 하나의 주체에도 연관되어 있지 않다.
내재성이 더 이상 자신과 다른 어떤 것에 더 이상 내재하지 않을 때[여집합일 때], 사람들이 내재성의 평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선험적인 장이 의식에 의해 더 이상 정의되지 않듯이 내재성의 평면도 자신을 포함할 수 있는 주체 또는 대상에 의해
정의 되지 않는다. (511-512 원4)
원4 우리는 이같은 순수 내재성을 온생명(UNE VIE)이라 말할 것이며, 다른 것이 전혀 아니다.
(원4) [들뢰즈가 인격성이 전에 온생명을 기체로서 인정한 것이다. 사실은 무규정자일 것이다. (47MLG)]
피히테의 『학문의 학설(Docrtine de la science)』 .. 스피노자주의 ... 멘드비랑 『만년의 철학(Dernière philosophie)』(전집, 제10권, 브룅판) ... 선험적 장은 내재성의 평면에 의해 정의 되고, 내재성의 평면은 생명에 의해 정의 된다.
(512-513, 원 4-5) [학문의 학설이란 피히테의 작품 『지식학(Wissenschaftslehre, La Théorie de la science, 1794, 1801, 1804)』을 말할 것이다(47NKF)]
원5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생명... [디킨즈의 소설]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한 못된 주체, 한 불량배(canaille 천민)가 다 죽어가는 채로 실려 온다. .. 모든 사람이 그를 구하기 위해 매달리고 이 비천한자는 가장 깊은 혼수 상태 속에서 포근한 그 무엇이 자신에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그의 생명과 그의 죽음 사이에는, 한 순간(un moment)이, 즉 죽음과 함께 노는[유희하는] 한 생명의 계기(un moment)이 있다.
(513, 원4) - [Charles Dickins, 1812-1870) 『서로 친구(Our Mutual Friend, Ami commun』(1864-1865에 쓴 미완성
수고) ] [들뢰즈가 설명의 한계에 부딪히면 자주 소설과 같은 문학 예술 작품을 자주 인용하는 이유가 있다.
나의 경험, 너의 경험, 그의 경험이 아니지만, 경험들 각각이 있다. 설명상 어찌 배치를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 경험을
묘사하는 이가 소설가 예술가이다. 그것은 새로운 개념의 창조이다. 새로운 사건으로서 인간의 탄생과 마찬가지이다.
(47NKF) ]
그 개인[그 천민]의 생명은 내적 외적 생명의 우발성들(des accidents)들로부터 해방된, 즉 그 어떤 것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 발생의 주관성과 객관성으로부터 해방된 순수사건을 이끌어내는 바로 그 비인격적이지만 특이한 하나의 생명
에게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순수사건으로서]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이 관대하게 대하고, 그리고 일종의 지복에 도달한 “지고한 인간”(Homo tantum)
이다.
이것은 [스콜라철학의] 이것임(hecceité)[이뭣꼬]이며, 이것임은 은 개별화로부터가 더 이상 아니고 특이화로부터이다.
즉 순수 내재성의 생명, 중성, 선과악을 저넘어 이다.
왜냐하면 사물들 한 가운데에서 이것임을 육화하는 유일한 주체가 이것임을 좋게 하거나 또는 나쁘게 해왔다.
... 개별성의 생명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특이성의 본질 즉 하나의 생명... (513-514, 원5) [모든 생명성들의 근원
으로서 온생명은 순수사건이며 특이성이다.
혼수상태의 비천한 자의 것이라고 그를 살리려는 사람들은 공감하는 순수사건, 다양체로서 내재성은 공연성으로 있는
것이다. (47MLG)] ,
원5-2 따라서 우리는 개별적인 생명이 보편적 죽음과 대치하게 되는 그런 단순한 순간[계기] 속에 하나의 생명을 포함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하나의 생명(Une vie)은 도처에 있다. (원5)
레르네트-홀레니아의 소설은 군대를 전체 삼켜버릴 수 있는 사이-시간(un entre-temps) 속에 사건을 들여 놓는다.
(514, 원5)
[알렉산더 레르네트-홀레니아(Alexander Lernet-Holenia, 본명 Alexander Marie Norbert Lernet, 1897-1976) 오스트리아 작가. 1923년 로만카톨릭으로 개종. 1939년 군대에 들어갔다가 부상으로 영화제작에 참여한다.
『Mars im Widder, 1941, fr. Mars en bélier』, 『두 시실리안(Beide Sizilien, fr. Le régiment des deux Siciles, 1942)』 ]
예를 들어 아주 어린애들은 그들 모두 서로가 서로를 닮음으로써 개별성이라는 것을 거의 지니지 않지만,
반면에 그들은 특이성을 지닌다. (515, 원6)
일자(l'Un)는 내재성 자체를 포함할 수 있는 초월이 아니다.
일자는 오히려 선험적인 장 속에서 포함되는 내재적인 것이다.
그리고 일자는 언제나 곱셈[단위체]의 지수(l'indice)[xn 다양체란 n승을 지칭한다.
생명체는 2의 n승의 무한 급수의 총합] 이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특이성, 하나의 생명... [다양체로서 하나라는 의미 이다.
n의 거의 무한 자승이다. 인간의 몸은 20조의 세포가 거의 무한자승으로 조직화한 방식으로 되어 있기에 현재 70억 인구도 지금까지 인간들도 모두 동일한 생산물일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지성으로 알 수 없는 불가사의이지만, 실재이고 구체이며, 그래서 신비라고 한다. 한 인간이 인격성을 나름
으로 가장 열심히 노력하여 만든 자를 영우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가 신비의 일부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데 그 신비를 누구나 다 드러낼 수 있는데, 그 노력을 덜 했기에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뿐이다. (47MLH)] (515-516)
초월성은 항상 내재성의 생산물이다.
(516, 원6) [언어로서의 초월은 내재성의 반영물이다. 즉 초월성은 내재성의 작은 티끌, 먼지같은 것인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전체 또는 완전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단위를 확장한 것이다. (47MLG)]
원주) 후설(Husserl)... 사르트르..
원6 하나의 생명은 오로지 잠재적인 것들(des virtuels)만을 포함한다. 즉 생명은 잠재성들, 사건들,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생명은 인격의 생애이다. (47MLG)]
사건은 (무한정한, indéfini) 비-현실화(non-actualité)로서 생각되었기에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실재성, 내재성은 결함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건을 자신의 동반수반물 연관 속에 시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수반물들이란, 선험적 장, 내재성의 평면, 생명, 특이성들[다양체들]이다.
상처는 분명 사물들의 상태와 체험 속에서 육화되거나 현실화된다. 허지만 상처는 그 자체로 놓고 볼 때, 우리를 생명 속
으로 이끄는 내재성의 평면위에 놓인 하나의 순수한 잠재적인 것이다.
나의 상처는 나 이전에 현존하고 있었다. (517, 원7) [다양체의 분화는 당연히 상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처는 영혼(심리)적으로 분열증이며 사건의 균열이다. 세상을 그렇게 표면이 등장하는 것이다. (47MLG)]
[부스께(Joë Bousquet, 1897-1950) 프랑스 시인 작가,]
선험적인 장의 내재성을 정의하는 잠재적인 것들과, 잠재적인 것들을 현실화하며 선험적인 장을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는 가능한 형식들 사이에는 이와 같이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517 원 7: 마지작 문장)(47MLG)
박정태, in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509-517. (P. 606)
서지: “L'immanence: une vie...” Philosophie, n. 47, septembre 1995, pp. 3-7.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고대 그리스에서 아이스테시스(aisthesis)는 이데아 세계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그 세계를 바라보는 지적 직관에 비해서는
인식론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중세에 아이스테시스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죄로 이끄는 쾌락과 결합된 것이라 하여 도덕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격하되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아이스테시스는 합리주의 철학에 의해 인식론적, 윤리학적으로 폄하되었다.
18세기 독일의 바움가르텐(A. G. Baumgarten)에 이르러 비로소 '감성론'(aesthetica)의 이름으로 아이스테시스가 복권이 되나,
이때조차 그것은 여전히 추상적 사유, 이성적 판단, 합리적 추론의 아래에 놓인 '저급한 인식'이었다.
이러한 합리주의 에피스테메는 헤겔의 <미학>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거기서 예술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으로 개념적 인식의 하위에 배치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6~95)의 {감각의 논리}(La logique de la Sensation, 1981)는 '아이스테시스에 대한 이성의 우위'라는 이 수천 년 묵은 전통적인 도식을 뒤집는 반전이라 할 수 있다.
감각의 존재론
들뢰즈에게서 아이스테시스는 이성과 합리성에 선행하여, 그 바탕에서 그것을 비로소 가능케 해주는 어떤 근원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감각의 논리}라는 표현은 그 안에 들어 있는 '논리'라는 말 때문에 감각적인 바로크와 로코코를 배경으로 탄생한 바움가르텐의 {아에스테티카}(Aesthetica)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들뢰즈의 감각론은 바움가르텐의 감성론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후자가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감각을 이성의 아래에 포섭해 인식론적으로 구원하려 했다면,
들뢰즈는 포스트-프로이트적 유물론이라는 관점에서 감각을 존재론적으로 복권한다.
들뢰즈에게 '감각'(sensation)이란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인식론적 의미의 '지각'(perception)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각'이 감관을 통해 들어온 것을 정신으로 올릴 때에 발생하는 인식론적 현상이라면, '감각'은 그보다 원초적인 것
즉 감관에서 정신을 거치지 않고 바로 몸으로 내려가는 존재론적 현상이다.
들뢰즈에게 감각은 유기체의 몸과 바깥의 환경이 접하는 삼투막에서 진동처럼 발생하는 어떤 유물론적 사건을 가리킨다.
그 사건이란 단지 생리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감각'이란 곧 세계가 주어지는 방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세계가 '세계'로서 주어지는 방식, 후썰(E. Husserl)의 표현을 빌리면 '사상 자체'가 주어지는 근원적
사건을 말한다.
들뢰즈의 감각론은 메를로-뽕띠(M. Merleau-Ponty)의 {지각의 현상학}(Ph nom nologie de la perception)의 영향 아래
그것을 포스트-프로이트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메를로-뽕띠는 주객 이분법에 기초한 데까르뜨적 코기토(cogito)를 비판하며 거기에 '신체의 코기토'를 대립시킨 바
있다.
그는 주객의 분리를 전제하는 '관조'라는 시각적 모델에 근거한 전통적인 지각론의 정학(Statik)을 비판하며, 거기에
'살'(chair)이라는 신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촉각적 지각의 동학(Kinetik)을 대립시킨다.
뽕띠의 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형상과 질료라는 고전적인 구분을 지각에 적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지각하는 주체를 그것이
소유하고 있는 관념의 법칙에 따라 감각적 질료를 '해석'하거나 '해독'하거나 혹은 '질서부여'를 하는 의식으로서 받아
들일 수 없게 되었다.
질료가 형상과 함께 '잉태'되는 것이라는 말은 결국 모든 지각은 어떤 지평 안에서 일어나며,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세계' 속에서 일어난다 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각과 지각의 지평을 '문제로 설정'하거나 '인식'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행동 속에서'
체험한다.
결국 지각하는 주관과 세계와의 의사 유기적 관계는 원칙적으로 내재성과 초월성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관계다.
(메를로 뽕띠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옮김, 서광사 1989, 55~56면)
뽕띠의 '지각' 속에는 "내재성과 초월성의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말하자면 내가 지각을 하는 순간 '내가 눈앞에 보고 있는 꽃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의식이 주관적으로
구성해낸 것인가' 하는 질문은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그 지각의 내용을 "문제로 설정"하거나 '인식'으로 끌어올릴 때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지각 속에서 세계는 아직 실재론과 관념론의 해석을 받지 않은 채로 그냥 주어진다.
그리하여 지각 속에는 관념론과 실재론이라는 근대적 안티노미를 극복할 탈근대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
지각과 그 지평을 우리는 "행동 속에서" 체험한다.
하다 못해 시(視)지각도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을 받아들이는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가 아니다.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의 안구(眼球)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그렇게 "행동 속에서" 지각된 세계는 카메라로 찍은 사진의
영상 혹은 르네상스의 원근법에 따라 그린 그림처럼 일목요연한 게 아니다.
한 화면에 초점이 여러 개 들어 있어, 부분과 부분의 아귀가 잘 들어맞지 않는 세잔느의 그림처럼 산만하다.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지각이며, 그렇게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바로 '체험된 원근법'(perspective v cue)이다.
움직이지 않는 정신의 눈이 아니라 끝없이 움직이는 육체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세잔느의 '지각'이다.
감각을 육체와 연관시킴에도 불구하고 뽕띠는 아직 거기에 '지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것이 뽕띠에게 남은 근대철학의 요소다.
어쨌든 뽕띠가 자신의 지각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세잔느를 원용한다면,
들뢰즈는 자신의 감각론을 위해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 프랜씨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작품세계에 의뢰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베이컨의 작품 속에는 종종 17세기 바로크 정물화 속의 푸줏간을 연상시키는 고깃덩어리가 무정형의 형상을 띠고 등장
한다. 이 고깃덩어리는 뽕띠가 말하는 '신체의 코기토'의 주체로서 '살'(chair)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들뢰즈가 말하는 감각의 주체는 이 '살'을 포스트-프로이트적인 리비도(libido)적
욕망의 '힘'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재현의 붕괴
{감각의 논리}의 바탕에 깔려 있는 철학적 기획은 '거울'이라는 사유의 이미지로 구축된 근대 재현적 인식론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현대회화에서 구상(=대상성)의 파괴는 오늘날 철학에서 일어나는 재현적 인식모델 파괴의 예술적 선취였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작품 속에서 이 근대적 인식모델의 파괴를 본다.
회화에서 대상성을 파괴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추상을 통해 순수한 형태를 지향하는 것,
다른 하나는 추출 혹은 고립을 통해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으로 향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중 전자와 거리를 둔다. 추상은 "두뇌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정형과 무정형이 섞인 기괴한 순수 형상을 통해 구상성(le figuratif)을 파괴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업에 의뢰한다.
베이컨의 형상(le figural)은 "두뇌를 통과"하지 않고 "신경 시스템에 직접 작용"한다는 것이다.
회화에서 재현은 필연적으로 서사(=이야기)를 포함한다.
그러나 오늘날 "회화란 재현할 모델도, 재현해주어야 할 스토리도 없다."
그리하여 회화의 재현성, 즉 회화의 "구상적, 삽화적, 서술적 성격을 피하기 위해" 베이컨은 동그라미, 입방체 혹은 트랙을
이용해 그림 속의 형상을 격리시킨다.
"재현이란 한 이미지가 보여준다고 여기는 대상과 그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내포"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들과 맺고 있는 관계"도 함축한다.
때문에 그는 이미지를 격리시킨다.
'격리'라는 수법은 "재현과 단절하고 서술을 깨뜨리기 위해, 또 삽화성을 방해하고 형상을 해방하기 위해 충분하지는
않아도 필요한 가장 단순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베이컨의 작품 속에도 가끔은 한 작품 안에 두 개의 형상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이 둘 사이에는 어떠한 서사적 연관도 없다.
둘은 너무나 고독해 보인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주관이 바라본 대상을 그리지 않는다.
의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가시적 사물을 재현하기를 포기한다.
재현을 포기한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감각' 그 자체다.
재현을 파괴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세계를, 들뢰즈는 동시에 근대의 재현적 인식모델의 파괴로 해석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감각'(sensation)은 근대미학에서 말하는 '지각'(perception)과는 그 함의가 전혀 다르다.
즉 '지각'이 주객 이원론에 근거한 관념론적 인식론을 전제한다면, '감각'은 이와는 전혀 다른 유물론적 존재론을 함축한다.
가령 지각의 대상은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진 후 추상적 인식을 위해 곧 사상되어야 할 어떤 현상학적 질(qualia)을 말한다면,
감각은 주객의 이분법에 기초한 인식론적 사건이 아니라 그것에 선행하는 어떤 존재론적 사건이다.
들뢰즈는 말한다.
감각은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에 있음이다. 나는 감각 속에서 되어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하여, 하나가 다른 것 속에서 일어난다.
결국은 동일한 신체가 감각을 주고 다시 그 감각을 받는다.
이 신체는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이다. ({감각의 논리}, 하태환 옮김, 민음사 1995, 63면)
한마디로 '감각'은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가 되는 현상,
뽕띠의 표현을 빌리면 "내재성과 초월성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현상이다.
들뢰즈의 감각은 주객의 이분법에 선행하고, 그 바탕에서 그것을 비로소 가능케 해주는 어떤 원초적인 사건을 가리킨다.
감각은 "세상에 있음" 즉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이다.
기관 없는 신체
프랜시스 베이컨은 무정형에서 정형으로, 정형에서 무정형으로 이행하는 중에 있는 기괴한 형상, 푸줏간의 살덩어리와
같은 형상을 즐겨 그렸다.
베이컨의 이 기괴한 형상을 들뢰즈는 감각의 주체로서의 신체로 읽는다.
"신체는 형상이다. 아니 형상의 물적 재료다."
근대의 인식론에서 지각을 인식작용, 그리하여 두뇌와 연결시켰다면, 들뢰즈의 감각은 신체와 연결된다.
베이컨은 종종 몸에서 얼굴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얼굴 없는 머리가 솟아나게 한다.
"신체는 형상이기에 얼굴이 아니며 얼굴도 없다."
그 대신 "형상은 머리를" 갖는다.
들뢰즈에게서 '얼굴'을 지우고 그 자리에 (얼굴 없는) 머리가 솟아나게 만드는 것은 곧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지우고
그 자리에 신체의 코기토를 솟아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감각은 모든 것을 '구분'하여 '명확히'하는 이성적 사유에 앞선 어떤 원초적인 존재론적 사건으로 부활한다.
형상에서 인간의 얼굴을 지울 때 그 아래로 인간과 동물이 아직 구분되지 않는 순수감각의 주체, 즉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고기(=살)가 등장한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종종 동물과 인간은 하나가 된다.
그의 작품 속의 형상은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할 수 없고 명확히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여기서 인간은 동물이 된다.
이때의 동물은 "형태로서의 동물이 아니라 특색으로서의 동물"이며, 그 특색은 "동물적 형태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기(氣)로
부터 온 것이다."
베이컨이 표현하는 인간의 동물되기는 "인간과 동물의 형태의 결합이 아니라 차라리 둘 사이의 공통의 사실이다."
베이컨은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라고 말한다.
"고기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영역이고 그들 사이를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이다."
베이컨은 푸주간에 들어가 도살된 짐승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저기에 걸려 있는 것이 왜 내가 아닐까?"하고
의아스럽게 여겼다.
얼굴이 지워진 머리, 즉 신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동물은 '물리적 기'를 통하여 근원적으로 하나가 된다.
이로써 '이성'을 근거로 인간을 다른 동물의 위에 올려놓는 인간중심주의는 무효가 된다.
도살장과 정육점, 그리고 살이 찢겨지는 바로크 시대의 살이 찢어지는 잔인한 고문과 처형장면에서 묘한 동일성을 보는
들뢰즈는 데카르트를 대신하여 말에게 사죄를 했다던 니체(F. W. Nietzsche)를 연상시킨다.
인간과 동물의 교감, 인간과 동물 형태의 결합은 가령 샤걀에게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베이컨이 말하는 인간의 동물되기는 "짐승에 대한 연민"도, "인간과 동물의 화해"도 아니다.
둘 사이의 "닮음"도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동일화며, 모든 감정적인 동화보다 훨씬 깊은 비구분의 영역이다.
고통받는 인간은 동물이고, 고통받는 동물은 인간이다."
공감각(synaesthesia)
들뢰즈는 '기관이 없는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를 막 부화하고 있는 달걀의 내부상태에 비유한다.
각 신체부위로 분화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관들의 겹침과 횡단이 존재한다.
감각의 주체로서의 신체는 바로 이 부화중인 달걀과 같다.
물론 우리의 몸은 이미 기관을 갖추고 있으나, 감각을 하는 순간 우리의 몸은 아직 기관으로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신체이다. 베이컨이 형상에서 '얼굴'을 지울 때 이는 이미 각 기관으로 분화를 마친 유기체의 몸에서 그 분화의 흔적을 지우고, 그것을
원초적인 감각의 주체, 즉 "기관 없는 신체"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회화는 선과 색을 재현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동시에 그 눈을 그 유기체적 종속에서 해방시키고, 고정되고 규정된 기관의
성격으로부터 해방시킨다 (…)
회화는 우리의 눈을 어디에나 놓는다. 귓속에, 뱃속에, 허파 속에 아무 데나 놓는다 (회화는 숨쉰다)."(84면)
들뢰즈에 따르면 회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하는 데에 있다.
이 힘을 그는 "시각이나 청각 등보다 더 깊은 것으로서 리듬"이라 부른다.
그에 의하면 "리듬은 청각적 층리에 투여하면 음악처럼, 시각적 층위에 투여하면 회화처럼 나타난다."
이것이 "합리적이거나 두뇌적인 것이 아닌, 세잔느가 말한 '감각의 논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러 기관으로 분화되기 전에 어떤 미분화된 원초적 감각(=리듬)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청각과 시각 등 다양한
감각이 나타나는 바탕이 되고, 이 미분화된 리듬 속에서는 "하나의 색, 맛, 촉각, 냄새, 소리, 무게 사이에 (…) 존재론적인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 "감각의 원초적 통일성을 보게 하여주고 복수감각을 가진 형상을 시각적으로 나타나게" 해준다.
여기에서 들뢰즈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공감각synaesthesia이라는 현상이다.
감각을 오감으로 엄격히 구별하고 위계질서를 지우는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이 감각들이 서로 섞이는 것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19세기에 들어와 하나의 자극을 동시에 둘 이상의 감각으로 지각하는 공감각이라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이 공감각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가령 알파벳에서 색깔을 보는 랭보(J. Rimbaud), 회화에서 음악을 들었던 칸딘스키(V. Kandinskii), 음악에서 색채를 느꼈던
스크랴빈(A. N. Skryabin)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통적인 감각론이 감각을 오감으로 엄격히 구별하고, 이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내려 했다면,
들뢰즈는 미분화된 '기관 없는 신체'에 의해 감지되는 감각의 원초적 통일성으로서의 '리듬' 속에서 감각들의 교차와
횡단을 본다.
들뢰즈에게 "궁극적인 것은 리듬과 감각 사이의 관계"이고,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감각의 논리'다.
힘
들뢰즈에 따르면 회화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하는 데에 있다.
베이컨은 자신의 회화에서 세 가지 근본요소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는 그림의 빈곳을 채우는 물질적인 구조(=아플라), 형상을 고립시키는 데에 사용되는 동그라미-윤곽, 그리고 세워진
이미지로서의 형상이 그것이다.
이 각각의 요소는 자기 고유의 힘을 갖고 있기에, 들뢰즈는 베이컨의 작품을 이 힘들이 만들어내는 벡터(=다이어그램)로
읽는다.
"보이지 않는 첫 번째 힘은 격리의 힘이다.
이 힘은 아플라 속에 들어 있으며 윤곽 주위에서 둥글게 감싸질 때, 그리고 아플라를 형상 주위에 감돌게 할 때 보여진다.
두 번째 힘은 변형의 힘으로 형상의 신체와 머리에 침범하여 머리가 얼굴을 뒤흔들거나 신체가 그 유기적 조직을 뒤흔들
때마다 보인다.
세 번째는 형상이 지워져 아플라에 합쳐질 때 나타나는 흩뜨리는 힘이다." (98면)
베이컨의 회화는 세 시기로 구별된다.
첫 번째는 정밀한 형상과 생생하고 판판한 아플라를 대비시킨 시기,
두 번째는 회화적 형태를 커튼을 가진 구조적인 배경 위에서 처리하는 시기,
세 번째는 생생하고 판판한 배경으로 되돌아오나 부분적으로 줄을 긋거나 솔질을 해 흐릿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시기다.
여기에 들뢰즈는 형상 자체가 사라지는 네 번째 시기를 덧붙인다.
이 네 시기의 운동을 통시적으로 관찰하면, 거기서 힘의 움직임이 드러난다.
먼저 구조에서 형상으로(아플라가 윤곽을 감싼다), 형상에서 구조로(형상은 수축되거나 팽창된다).
이 운동의 결과, 형상은 윤곽을 거쳐 아플라와 결합하면서 구조 속으로 사라진다.
그림 속의 이 모든 움직임들의 공존, 그것이 바로 리듬이다.
이 리듬을 그리는 가운데 회화는 동시에 시간을 묘사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말레비치 역시 언젠가 회화란 장식이 아니라 '리듬 감각의 묘사'라고 한 바 있다.
히스테리
베이컨의 그림 속에는 종종 근육위축, 마비, 과민반응, 감각상실 등 전형적인 히스테리 증상을 보여주는 형상들이 등장한다.
들뢰즈에게 감각이란 삼투압을 하는 식물세포처럼 신경계와 외부의 자극 사이에 벌어지는 운동, 양자의 충돌로 발생하는
진동이다.
들뢰즈는 이를 히스테리로 규정한다.
"신체는 전적으로 살아 있지만 유기적이지 않다. 따라서 감각이 유기체를 통해 신체를 접하면, 감각은 과도하고 발작적인
모습을 띤다."
회화는 이 감각을 그리는 것이기에 "회화와 함께 히스테리는 예술이 된다."
그리고 이는 "화가의 히스테리가 아니라 회화의 히스테리"라고 한다.
그 유명한 베이컨의 {교황 레오 10세}는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지르는 모습으로 '회화와 히스테리의 관계'를 드러내주고 있다.
"유기체가 아니라 신체에 의거할 때, 감각은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이 된다."감각, 즉 히스테리의 현실은 지각과
달리 재현적 인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론적 사실이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말한다.
"도처에서 현재함이 신경 시스템 위에 직접 작용하고, 재현이 자리를 잡거나 재현을 하도록 할 만한 거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히스테리 속에서 나는 '자기 모습을 보는 착란'을 일으킨다.
가령 "나는 나를 거울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신체 속에서 나를 느끼고, 옷을 입고 있는데도 이 벗은 신체
속에서 나를 본다."
베이컨의 작품 속에서 신체는 자기 몸을 이루는 유기체를 빠져나가고, 옷을 입은 형상이 거울이나 화폭 속에서 벌거벗은
자신을 본다.
이렇게 히스테리로서의 감각은 내재성과 초월성의 구별(=주객이원론)과 거울에 비친 영상(=재현적 인식모델)을 파괴한다.
히스테리로서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현재의 집요함, 즉 "유기체 이후까지 남아 있는 신체의 악착성, 성격이 규정된
기관들의 후에까지 남아 있는 전이적 기관들의 악착성"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합리적 사유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회화는 이 두뇌의 회의주의를 신경의 낙관주의로 전환한다."
회화는 히스테리다.
그것은 우리 앞에 신체의 현실을 세우고,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선과 색을 세운다.
신체의 순수한 현전이 일어날 때 눈은 이러한 현전에 걸맞는 기관이 된다.
눈은 더 이상 하나의 기능으로 특화된 유기적 기관이기를 그만두고 다기능적이며 전환적인 기관이 된다.
회화는 바로 이런 눈의 변화, 몸의 변화를 일으킨다.
눈과 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시각'에서 '촉각'으로 지각모델의 변화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이와는 좀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들뢰즈 역시 눈과 손에 대해 이야기한다.
베이컨은 종종 형상을 솔, 비, 스펀지, 헝겊 등으로 문질러서 생기는 '돌발흔적'을 사용한다.
이 흔적들은 "비합리적이고, 비의지적이며, 사고적이고, 자유롭고, 우연에 의한 것", 즉 회화 속에 도입된 알레아토릭
(Aleatorik)의 요소다.
이 혼돈 앞에서 현대회화는 세 가지 길로 나아갔다.
하나는 비의지적인 돌발흔적을 정신화한 시각적 코드로 대체하는 추상회화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액션 페인팅처럼 눈을 손에 종속시키고, 손을 눈에 강요하는 길이다.
베이컨은 추상회화처럼 눈의 길도 아니고 액션페인팅처럼 손의 길도 아닌 제3의 길, 말하자면 '만지는 눈, 눈의 만지는
시각'이라는 '제3의 눈'을 따른다.
회화는 감각을 그린다.
이는 회화가 감각을 '재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이데거에게 예술 감상의 본질이 작품 속에 발생하는 진리에 '참여'하는 데에 있듯이, 관객으로서의 나는 베이컨의 그림
안에서 감각의 재현을 보는 게 아니라 그 그림 안에 들어가 그 감각을 느낀다.
"그려지는 것은 신체이다.
그러나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된 신체이다."
회화, 특히 베이컨의 회화는 "감각의 폭력"(67면)을 행사한다.
이 폭력은 전쟁, 범죄, 테러의 장면과 같은 재현된 폭력이 아니라 신경 시스템 위에 가해지는 색의 폭력이다.
회화는 한갓 '형태의 변형'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폭력을 통해 '신체의 변형'을 이루는 것이다.
즉 '만지는 눈, 눈의 만지는 시각', 즉 '제3의 눈'을 획득하도록 우리의 신체를 변형시키기 위한 활동이다.
들뢰즈에게 미학은 더이상 '예술의 예술'을 다루는 Aesthetik(=미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를 변화시키는 삶의 예술로서의 Aisthetik(=감각론)이다.
벤야민이 대중의 신체에 직접 작용하는 영화예술에서 혁명적 가능성을 보았다면, 들뢰즈는 대중의 신체를 변화시키는
회화에서 그보다 더 깊은 혁명적 의미를 본다.
근대의 리얼리즘 미학이 의식철학의 에피스테메 위에서 의식과 대상의 이분법을 설정하고, 예술과 세계 사이에 반영의
관계를 상정했다면,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는 근대의 리얼리즘 미학의 한계를 넘어서면서도 동시에 사소한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유물론적 리얼리즘 미학의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리얼리즘은 새로 정식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재정식화는 '리얼리티'에 대한 재(再)정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신의 눈을 통해 의식에 주어진 리얼리티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몸에 주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리얼리티가
있을 수 있다.
이 두 리얼리티의 차이를 표상하려면 보통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 속의 세계와 열(熱)감지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사진의
차이를 생각해 보라.
하나는 데카르트가 말한 연장의 세계, 즉 공간적으로 조화롭게 배열된 실루엣의 세계지만,
다른 하나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역동적인 에네르기의 세계다.
하나가 영원의 상(相) 하에서 바라본 존재의 세계라면,
다른 하나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영원히 반복하는 순간적인 생성의 세계다. □
정리: 진중권
80년대 마르크스 수용에서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의 변화와 현대 철학
마르크스의 『자본』은 혁명의 시대였던 80년대 중반에 한국에 들어온다.
당시 대학생들은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었고 그 실천을 모색했었다.
그런데 동구권의 몰락이 시작된 89년 이후 90년대 초반에 이런 분위기는 깨진다.
동구권의 몰락은 당시 사회주의적 기조의 지식인은 물론 지성사 전반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대체할 사람을 찾기 시작한다.
그 대안이 처음에 하버마스와 푸코, 알튀세르 등이었다.
이어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일어났고 현재는 프랑스 철학이 현대철학을 대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90년대 알튀세르와 푸코가 등장하면서부터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졌다.
이른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과거 이데올로기와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모습을 보여준다.
학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불지만 한국 사회현상은 이걸 못 쫓아갔다.
그래서 한국의 학자들은 첨단 현대철학의 본령이라 부르는 프랑스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포스토모더니즘이라는 말은 프랑스에서는 1930~40년대에 사용된 말이었다.
당시 한국은 서양의 첨단 학문을 미국을 통해서 들여오다 보니 미국에서 쓰는 말 그대로를 들여왔던 거다.
그럼 우리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이른바 미래학자는 누가 있을까? 찾아봐도 없었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지금도 헤어 나오지 못한다.
2000년대 들어와서 라캉 이후에 학계 전반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유행하게 된다.
우리의 지성사에서 우리는 프랑스 철학자들을 보면서 도대체 주체가 누군가라는 것을 따지곤 한다.
이 주체는 독일적 관점에서는 선험적 자아로서의 주체로 볼 수도 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사회변혁의 주체이다.
프랑스에서도 따지는 부분이 이거다.
그런데 들뢰즈는 주체가 없다.
그럼 우리는 들뢰즈를 어떻게 봐야할까?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의 마지막 강좌 열두 번째 시간에는 들뢰즈의 철학을 만났다.
특히 이번 강의에서는 니체와 관련된 들뢰즈를 보기로 했다.
들뢰즈의 철학사
들뢰즈는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당시는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던 시기였는데 어린 들뢰즈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던 그의 형이 포로수용소로 가는 길에 불행하게도 총살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그의 삶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총살 사건이 있던 곳에서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수리철학자들이 있었는데, 카바이예스와 로트망과 같은 사람들이 포함
되어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 그는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나중에 소르본느에서 철학을 공부한다.
이 역시 매우 특이한 이력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거의 유일하게 고등사범학교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1948년에는 철학 교수자격시험 아그레가시옹을 통과하게 된다.
이후 들뢰즈는 1956년도에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에 관한 논문을 쓴다. 그리고 60년대 중반까지 철학사를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들뢰즈의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철학자는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스피노자(Spinoza, 1632~1677), 베르그송
(Bergson, 1859~1941)을 들 수 있다.
들뢰즈가 보기에는 이 세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고 이 공통점이 들뢰즈 사상의 핵심이 된다.
여기서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철학에 기반한 철학사의 구분은 1930년대와 그 대척점에서 1960년대 이후의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고 한다.
김범수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1930년대는 문화적인 충격과 과도기의 상황을 가진 시대였다.
이 시대에 프랑스 철학계에서는 어떤 일이 생겼는가? 프랑스 철학계는 1930년대부터 60년까지 ‘3H’의 시대로 요약된다.
‘3H’란 헤겔(Hegel), 후설(Husserl), 하이데거(Heidegger)를 말한다.
이 시기는 나치가 집권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왜 헤겔인가? 프랑스 내에서 이때까지 헤겔 번역이 안 되었다.
20년대와 30년대는 헤겔 번역본이 없었다.
프랑스는 1930년대까지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번역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존철학과 함께 헤겔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행사되었던 시기이다.
이때 코제브(Alexandre Kojeve, 1902~1968)의 강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제브는 헤겔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게 했다.”
반면 60년대에는 실존주의 현상학과 대립되는 방향으로 니체와 노골적으로 변형된 마르크스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60년대 이후는 프랑스에서는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을 새롭게 해석하는 견해가 형성되면서 구조주의 시대를 맞이
하게 된다.
대표적인 학자는 라캉과 알튀세르 등이 있다.
그리고 ‘3H’의 대척점에 있는 철학자로 메를로-퐁티와 사르트르를 들 수 있다.
들뢰즈에 영향을 준 철학자들 :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
30~60년대 : 헤겔, 후설, 하이데거 ↔ 60년대 이후 : 미를로-퐁티, 사르트르
들뢰즈에 영향을 준 철학자 :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
들뢰즈는 스스로 베르그송주의자임을 밝힌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초월성 비판이다.
아울러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 이 세 사람은 초월성에 대해 비판하는데,
초월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고 ‘이념(이데아)’을 넘어선 것이다. 이들은 도덕적 ‘선(善)’의 개념을 넘어서고 비판했다.
서양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점은 확실한 무엇인가를 찾다 보니까 결국 신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헤겔은 ‘절대정신의 자기전개’를 얘기했는데 절대정신은 결국 신으로 귀결된다.
여기에 선한 개념을 더 붙여서 ‘세계정신’, ‘신의 정신’이 발현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이 바로
헤겔 철학의 일면이다. 여기에 대해 비판한 사람이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이다.
니체는 대놓고 ‘비극의 가치’에 대해서 얘기한다. 기존의 가치의 기원을 따져서 ‘가치를 전복’시킨다.
그리고 신을 죽여 버린다.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실체개념’이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실체’는 바탕과 기저에 깔려있는 것으로 이것이 근대에 와서는 ‘자존적인 존재’로 바뀐다.
다른 것에 원인 받지 않고 존재한다는 개념을 두고 보면 인간은 자존적 존재는 아니다.
그럼 자존적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자체일 것이고 실체는 곧 ‘자연자체’이다.
이 실체는 중세 철학에서는 신이었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신적 자연’이라는 말을 한다.
스피노자가 말한 자연에는 초월적인 신이 개입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스피노자는 네덜란드 유태인 공동체에서 퇴출된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를 얘기한다.
생명 자체는 가지고 있는 어떤 목적도 없다는 것인데, 이 얘기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을 붕괴시킬 수 있는
요소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쟁에서 헤겔, 후설, 하이데거는 ‘이성’으로 문제의 해결을 도모한다.
그 해결의 종착점은 ‘초월성’이고, 곧 ‘신’이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광인들을 격리시켰고. 제도권으로 폭력을 통해 감금시켰음을 폭로했다.
이것이 이성의 폭력이었고 광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의 시각이다. 이것은 바깥으로부터의 사유이다.
이 바깥으로부터의 사유를 하는 사람들을 포스트구조주의자라고 얘기한다.
김범수 교수는 이렇게 보면 프랑스 철학의 계보는 엄밀히 얘기하면 30년대부터의 이성적 전통의 부류와 반대편에 있는
부류가 섞여있는 셈이라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 철학은 강단철학과 대중철학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대중철학에는 들뢰즈와 푸코가 자리하고
존재론과 이성적 탐구를 하는 강단철학은 헤겔, 후설, 하이데거가 포함된다고 한다.
이어서 김범수 교수는 “하버마스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하이데거, 아도르노, 푸코, 데리다와 같은 학자들을 니체를
계승한 탈근대 철학자들로 규정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규정은 프랑스 철학의 진영에서 보자면 반가운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헤겔과 반(反)헤겔의 규정으로 나누는 것을 선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베르그송주의와 들뢰즈
데꽁브((Vincent Descombes, 1943년 출생)의 경우 현대철학의 과제를 헤겔 비판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는 하이데거노선에 따르면서 실존주의, 현상학, 해석학 등으로 연결되는 노선과 후기구조주의 노선으로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들뢰즈는 후자의 노선에 서 있는 학자이다.
이 시기 들뢰즈는 「구조주의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를 통해 구조주의를 특징을 밝히면서 자신과의 차이를 정리했다.
들뢰즈는 68혁명 목도 후 국가박사가 되는데 이후 가타리(Felix Guattari, 1930~1992)를 만난다.
들뢰즈는 가타리와 조우하여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공저로 『반-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이 있다. 이후 들뢰즈는 혼자서 몇 권의 책을 출간한다.
문학과 예술에 관한 책이 주류를 이루는데, 마지막 글은 「내재성 : 하나의 생명」이라는 짧은 논문인데, 이 논문은 자신의
존재론을 정리하는 아주 중요한 글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자신의 지적 스승은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임을 밝히고 그 중에서도 베르그송주의를 드러낸다.
들뢰즈는 이 글을 끝으로 1995년 자신이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투신한다.
베르그송은 수학에 천재성이 있었지만 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과학사에서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지는 실증주의는 ‘양화(量化, 이성)’를 통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물리적 양화로 설명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베르그송은 시간이라는 것도 양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자연과학에 대한 비판에는 생물학을 이용했다.
그런데 들뢰즈는 구조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라캉의 노선과 다른 구조주의자로서, 들뢰즈는 변화율을 다루는 미분방정식을
통해 베르그송과는 다른 수학에서 나온 개념을 도입한다.
이를테면 ‘특이점’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특이점’은 다른 것과 교환될 수 없는 독특한 점이다.
김범수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예를 들면 야구를 소재로 한 3D 애니메이션 영화의 모션 캡쳐 촬영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타자의 운동을 모션 캡쳐 한다고 할 때 이 때 센서들은 타자의 방망이나 팔과 다리 등 운동성이 보이는 곳에 부착될
것이다.
이곳에 부착된 센서들은 배우의 머리에 붙여져 있는 센서와 서로 교환될 수 없는 특이한 성격을 가진다.
‘특이점’은 이런 비유와 같다. 들뢰즈는 이것을 가지고 ‘역동적인 생성의 체계’를 설명하려 했다.”
베르그송의 원뿔 도식과 들뢰즈 경우에의 변용
베르그송은 유명한 ‘원뿔 도식’을 통해 ‘지속’을 눈덩이에 비유했다.
우리의 기억은 몸속에 계속 복합적으로 쌓여간다는 것이다.
기억의 만들어짐과 이것이 어떻게 현재화 되었는지를 말한 것이 『물질과 기억』이다. 그런데 김범수 교수는 베르그송의
그림은 반만 그린 그림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들뢰즈의 철학에서 본다면 마치 거울에 비추어져 있는 원뿔의 모습과 같이
변형시킬 수 있다고 한다.
위 그림을 보면, 과거의 시간대 부분이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가 될 것이다.
들뢰즈는 ‘이념(Id?e)’을 무의식의 세계에 가져다 놓는다.
들뢰즈가 여기서 말하는 이념은 무의식 세계에서 말하는 ‘욕구’들을 말하고 이것은 끊임없이 문제를 발생시키는 존재이다.
들뢰즈는 후기에 가면 이념이라는 말 대신에 ‘욕망’이라는 말을 직접 쓴다.
이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인간은 ‘욕망하는 기계’가 된다. 이 욕망하는 기계가 제도를 깨부수는 것이 ‘탈영토화’이다.
탈영토화는 정해져 있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탈영토화는 한 번의 ‘역량’으로 만들어진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구조적으로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나누었다.
이 때 충동대로 움직이려는 것은 이드이고 초자아는 나를 억압하는 기제이다.
초자아의 억압이 사회적으로 나타나면 법_제도가 된다.
사회문화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반영하지만 법과 시회적인 제도는 초자아가 양심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
이런 제도적인 가치가 있으면 사회적인 금기가 강해진다.
그런데 이 금기는 깨부수어야 할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는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이것을 관통해서 나오는 인간형이 ‘스키조(Schizo)’라는 인간형이다.
일종의 정신 분열자라고 할까.
여기서 말하는 정신 분열자는 임상에서 말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bermensch)’이 이것이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같은 인간이다.
김범수 교수는 니체의 초인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기존의 인식이 너무 잘못되어 있다고 한다.
“니체의 초인이 단순히 인간을 넘어서는 뭔가가 아니다.
초인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평범한 인간과 같다. 변화를 통해 늘 ‘생성’하려고 했던 존재가 바로 초인이다.
슈퍼맨이 아니다. 스키조도 방향 없이 제도적인 억압을 뚫고 지나려는 사람들이다.”
위의 그림에서 생성되는 원리는 ‘반복’이다. 그런데 우측 원뿔(상에 비친 부분)에서도 반복이 일어난다.
이 경우는 ‘동일성에 의한 반복’이고 좌측 원뿔인 과거는 영역은 ‘차이나는 것들에 의한 반복’이다.
그리고 ‘강도’라는 것은 터지려고 꿈틀거리는 것을 말한다. ‘강도’라는 말은 그 자체로 힘이 들어가 있다.
이 힘들이 응축되어 늘 터져 나오려고 한다.
그리고 현재를 상징하는 가운데의 꼭지점과 비대칭으로 이루어져 늘 ‘생성’되려고 한다.
강도의 차이는 고도차로 인한 기압의 차로 인해 공기가 순환되는 구조에 있을 때 강도의 차이다.
이것은 빅뱅이라는 비유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념’과 ‘차이’가 밖으로 터져나오려하면 ‘생성’이 되고, 분명 사회적으로 억압하는 기제들이 있는데 그것은 ‘초월성’이 된다. 사회적인 것은 또한 인간의 무의식적인 것을 반영하는 것이 된다.
위의 그림은 들뢰즈가 설명하려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김범수 교수는 리처드 도킨스가 유전자는 생존기계라고 말했다는 것을 거론하면서 들뢰즈의 철학에 의거한다면
유전자를 생존기계라고 표현한 것은 탁월한 용어 선택이었다고 한다.
들뢰즈는 ‘초월성의 체계’, ‘재현체계’, ‘표상체계’를 싫어한다. 특히 들뢰즈는 인간에 대해 ‘유기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기계’라는 말을 쓴다. 이는 가타리도 마찬가지다.
가타리는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표현했다.
들뢰즈가 말하는 이념(Id?e)의 의미와 몇 가지 용어들
프랑스어 ‘Id?e’에서 대문자 ‘I’를 쓰는 것은 서양철학의 이데아를 의미한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을 칸트의 철학체계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그대로 대문자를 쓴다.
대신 그 내용과 용어는 완전히 뒤집어서 쓴다.
‘이념(Id?e)’의 구성요소는 ‘강도’와 ‘미분’이다.
강도는 고도차, 위도차, 압력차처럼 힘으로 가득한 것들이고 이것을 설명해주는 역동적인 수학체계로서 미분이 있다.
미분에는 ‘차이를 담고 있는 요소’란 의미가 있다. 또 ‘생물학적 분화의 요소’가 포함되고, ‘나의 창조적 행위’도 포함된다.
이 강도와 미분은 힘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가만있지 못하고 터져 나오려는 상태에 있다.
개체인 인간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나도 모르게 어떤 행동을 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것은 ‘억압’ 때문이다.
그 행동은 일종의 ‘반복 강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거의 무의식 영역이 현재로 터져 나오려고 하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반복’이라고 한다.
반복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과거의 ‘경험과 습관에 의한 반복’이 있고(옷 입은 반복), ‘새로 생겨난 반복’의 경우가 있다.
(헐벗은 반복) ‘옷 입은 반복’이란 풍성하다는 의미이고 ‘헐벗은 반복’은 빈약하다는 의미인데 이 때 한 개체가 가지는
‘욕망’은 ‘자발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비자발적인 면’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를 만들어가는 또 다른 형태로서의 ‘개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들뢰즈의 후기저작으로 가면 ‘강도는 잔존’하지만 ‘미분과 이념’에 대한 얘기는 빠진다.
빠진 그 자리를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라는 말로 대신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가타리의 개념이다.
이것을 뚫고 나가는 힘을 ‘스키조’라고 하고 들뢰즈는 지구 전체를 ‘알’로 표현한다.
‘생명이 분화’되기 때문이다. 생명은 ‘분화’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지구를 ‘기관 없는 신체’에 비유하기도 한다.
들뢰즈는 이런 새로운 개념들이 만들어지면서, 이를 일컬어 ‘새로운 사유의 인지’라고 했다. 또 그것이 구성되는 속성에
대해서는 ‘내재성의 평면’이라고 했다. 우리 ‘경험세계의 응축성’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반대의 지점에는 ‘표상체계’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재현’과 같고 이것은 ‘억압하는 것’이다. 정해져 있는 ‘체계’가 있고 그 체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표상’이다.
어떤 목적이 정해져 있고 그 ‘합목적성’에 의해 맞춰서 형성되는 것, 즉 ‘주체’에 대해서 들뢰즈는 비판하는데 여기서
‘주체’는 ‘초월’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것은 ‘이념(Id?e)’의 정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그림에서 보이는 점선의 영역 미래는 ‘영원회귀’라고 할 수 있다.
영원회귀는 예전에는 자연의 주기에 맞추는 ‘동일성의 반복’이라고 보았지만 들뢰즈는 세계에는 같은 것이 없고 생성만이
이루어지고 ‘생성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개념으로 썼다.
영원히 돌아오는 것은 ‘생성’이다. 동일한 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영원회귀’를 ‘원형의 반복’이라고 보는 관점은 들뢰즈가 보던 관점 이전의 것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사태에 의해 80년에 죽은 누군가와 90년대 죽은 누군가는 원형의 반복이다.
이것은 종교적 제례의 의식이나 역사적 사건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반복하는 대상이 ‘동일’하다.
그림의 꼭지점 부분 현재는 습관적인 체계에서 과거를 끄집어낸다.
그런데 ‘비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되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생성’이다.
미래를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젊었을 때 여행을 간다고 가정해보자.
자유롭다. 자유로운 이유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체계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새로운 뭔가를 시도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내게 된다. 미래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재성의 존재론
김범수 교수는 들뢰즈의 서양철학의 탄생과 그 처음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토스(mythos)에서 로고스(logos)로.
이 말은 서양철학의 탄생과 발전을 압축적으로 담은 문구이다.
다시 말해 서양철학은 ‘확실성’을 추구했고, 이것은 철학의 출발이다.
존재를 연구하는 기본 전제는 변화나 생성이 아니라 ‘정지’였다.
이것임과 저것임이 동시에 주장되는 것은 존재의 규정으로 말할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추방을 선택하지 않고 독배를 선택했던 이유는 결국 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이것과 저것이 공존하는 세계가 아닌 확실성으로, 존재로 충만한 저 세계에 대한 동경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죽음을
선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불변’은 ‘선한 가치’를 담고 있다. 서구 지식인들의 의식에는 불변과 선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봤고,
이를 추구하는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로 가득하고,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이것이 들뢰즈 철학의 문제의식이다.
기존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는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가장 잘 규정 할 수 있는 것. 불변의 것, 정지해 있는 것이 가장 선한 것이고 확실한 것이라고 믿었다.
서양철학은 가장 실체적이라는 정지에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도덕적 의미에서 선(善)이라는 개념이 들어간다.
이 ‘선의 기원’을 따져보자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내재성의 원리’이다.
이것은 니체의 계보학에서 왔다.
‘가치의 기원’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들뢰즈는 내재성의 철학에서 첫 번째로 얘기하는 것이 ‘사유란 어떻게 만들어지는 가’이다.
어떤 장소에 몇 명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식’의 영역이다.
이것은 사유가 아니다.
‘사유’는 충격이 오고, 하나의 사건이 만들어지고, 무언가 생성이 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변화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대해 생각해 내는 창조적 과정이 사유’이다.
기존의 관습체계가 아니란 말이다. 만약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지를 기반으로 말한다면 실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할
수 없다.
그 사유체계는 들뢰즈에게 있어서 일종의 나쁜 것이다.
이것을 니체는 ‘독단적 사유의 이미지’라고 했다.
사유는 사건의 조건과 환경을 따져서 해야 한다.
이것이 푸코가 말한 ‘바깥으로의 사유’이고 들뢰즈는 바깥으로 나가 사유의 전제조건을 봤던 것이다.
들뢰즈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또는 확실성의 확보를 모두 제거하고 이것 없이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경험으로 응축된 새로운 사유를 하고 적극적 생성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들뢰즈의 ‘내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