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동이다. 겨울이 서둘러 가면서 흘린 푸른 전단이다. 유난히 많았던 눈 속에서도 잃지 않은 파릇함을 보노라니 한 뼘 햇살을 향한 마음자리가 사뭇 기울어진다. 사계 중에서 봄은 내게 유독 많은 비유로 읽힌다. 희망적 메시지를 전하는 봄은 인생에 비유되기도 하고 정신과 이데아에 비견되기도 하는데, 봄[春]을 사전적 의미를 넘어 언어유희 차원에서 보면 '바라보다'의 봄[見]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아직은 뾰족한 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잊고 살기에 귀한 인연이라는 듯 봄동 옆 잡초들이 파릇한 언어로 옹알이는 것 같다. 그 곁 텃밭머리에 쪼그려 앉는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풀들의 삶을 들여다보는데 며칠 전 원고 청탁받은 게 떠오른다.
요즘 들어 부쩍 중요한 일들을 놓칠 때가 많다. 심지어 오전에 대장 용종 절제술을 한 걸 가마득히 잊고 촐촐해지는 오후의 습관 때문에 술을 마셔 한동안 고생한 일도 있었으니 가끔은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기억이 쇠해지는 것은 쌓은 것들을 하나씩 놓는 과정이라 위안 삼아보기도 하지만 어쩐지 서글프다.
부산한 텃밭의 풍경을 미루어 놓고 걸음을 옮긴다. 아직은 영글지 않은 볕을 껴안고 줄지어 선 측백나무 울타리 끝에 묶여 사는 동구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허둥대는 나를 바라본다. 십수 년을 함께 살다 간 믹스견 동희를 몇 달 전 가슴에 묻고 새 인연이 된 동구는 동희의 항렬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동희처럼 차분한 성격은 아니어서 그다지 정이 들지는 않았지만, 겉모습은 빼닮은 게 이별의 적요를 상쇄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시절 인연을 지나 골방에 든다. 이메일을 확인한다. 항간의 원고청탁서에서는 볼 수 없는 장문의 편지가 동봉되어 있다. 그중 세 번째 항목의 메시지가 눈에 띈다. "우리는 수필의 정체성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보다 바람직한 미학의 세계를 열기 위해수필텍스트의 구조와 창작기법, 수사학 등을 지속적으로 연구 개발한다"라는 문구가 눈을 부릅뜨게 한다. 『수필 오디세이』 안성수 발행인 겸 주간의 수필 문학 방향성에 대한 제언 같은데, 수필의 지경을 넓히는 봄[見]을 제대로 알아차린 분 같다. 사뭇 책임감 같은 게 느껴진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다가 자판을 채근하여 이어나간다.
'인간을 바라보는 지극함이 있었기에 사랑을 완성하고 자비를 완성한 예수와 석가처럼 봄[春]또한 인간을 향해 있는 양지와도 같은 것 같다. 명나라 사상가이자 교육가이기도 한 왕양명 역시 대상을 바로 봄으로써 주자학을 넘어 치양지致良知의 눈을 뜬 것이니 객체적 입장의 봄[見]과 주체적 입장의 봄[春]은 사유의 잉태이며 완성이지 싶다'라고 쓴다. 다음 문장에는 어떤 이야기를 이어 적을 것인지 고민하는 그 틈을 비집고 마당에서 사람소리가 들려온다. 봄을 향해 엎드려 있던 동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낯선 사람의 방문을 짖지도 않고 조용하다. 저도 나처럼 사람이 그리운 탓이려니 생각하며 자판에서 손을 뗀다. 절 속 같은 공간을 재차 찌렁찌렁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다급해진 현관문을 밀친다.
낯익은 얼굴이다. 전에도 왔던 여인이다. 나보다는 여남은 살 정도 나이가 적은 듯한 그녀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색한 인사를 받으며 그녀를 위아래로 훝어본다. 삶의 무게인 듯 검은색 가방이 어깨를 짓누르고 다른 손에는 파수꾼이라는 굵고 큰 글씨의 전단이 들려 있다. 원고 마감이 되어서야 다급히 자판을 두들기는 것인데 흐름을 끊은 이 여인이 은근 괘씸해진다.
한때는 시도 때도 없이 호객하는 콜센터 여성 판매원들이나 포교지를 들고 찾는 사람들이 싫지 않았다. 온종일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살았던 시절, 그들은 나에게 말벗이자 심리치료사에 버금가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사이 그런 옛 시절은 간데없고 짜증으로 구겨진 나를 내 안의 내가 바라본다. 쏘아붙일 말이 나오려는 걸 심호흡으로 막으며 양지의 마음으로 애쓰신다는 말을 건넨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참으로 알아들은 것인지 그는 이내 화색이 돌며 잠깐 안으로 들어가 전해 줄 말이 있다며 간절한 눈빛을 놓는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마침 어설프나마 마음에 대한 글을 더듬고 있던 터라 갈등은 더했다. 혼자 사는 울안에 여성을, 그것도 야리야리한 여자를 들여 마주 앉는다는 게 쉽지 않았다. 한편으론 손님인데 박절하게 대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방에서 묻어나오는 쾌쾌한 냄새를 가로막으며 다음에 듣기로 하지요, 라는 말을 건넸다. 그 말이 좀 무거웠는지 그녀는 더 매달리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전단을 내 손에 쥐여주곤 돌아섰다.
문을 닫아걸고 찬물 한 그릇을 마신다. 생의 이중성이 어른거린다. 응달진 마음자리를 털어내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헤집고 들어온다 무릇 산다는 게 수면보다는 수심을 살아야 할 일이거늘 지금까지의 날들이 허상만을 좇아 온 건 아닌지, 서성이는 시선을 창밖으로 옮긴다. 마실 간 박새가 들었는지 측백나무 울타리가 부산하다.
박새는 박새의 일을 하고 까치는 까치의 생각대로 살고 포교를 하는 그녀는 자기 일을 하며 살아갈 뿐이다. 하나의 공간을 나누어 각각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자판에 새긴다. 태어나 무엇으로부터 교육된 나는 참 내가 아닐 것이라는 문장으로 이어간다. 그래도 자꾸만 다른 생각들이 틈입한다. 문밖에서 돌려보낸 그녀가 어른거린다. 언젠가 다시 온다면 그때는 꼭 안방으로 들여 '바라보다'의 봄[見]이 되어 그녀의 입술에 귀 기울여 보리라. 푸른 전단 같은 봄[春]으로 맞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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