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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생모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
옹정원년(1723년) 오월 이십삼일, 옹정제의 생모인 우야씨(烏雅氏)는 곤혹과 우려속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죽음이 가슴아픈 것은 그녀가 죽기 전에 친아들이자 밤낮으로 그리워한 십사아거(十四阿哥)와 만나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더구나 옹정제의 골육상잔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야씨의 죽음에 대하여, 고양(高陽)선생은 <건륭운사>에서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태후는 먼저 절식을 하고, 궁녀들은 옹정의 처벌이 두려워 온갖 방법으로 태후에게 음식을 먹게 하려 했다. 마음이 선량한 태후는 다른 사람까지 연루되게 하지 않으려고 죽 같은 것을 조금씩 먹어서 기력을 회복했다. 하루는 옹정제가 태후에게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한담을 나누는 중에 태후가 돌연 일어나서 머리를 기둥에 부딛쳐갔고….옹정의 눈앞에서 죽었다…
고양선생이 묘사한 것은 허구인 소설이다. 그러나, 역사상 이런 주장은 널리 퍼져 있다. 공식기록에도 있다. 당시의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에서 여러가지로 변명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는 즉위하자마자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회수하도록 명한다. 옹정제의 모친인 효공황후는 아들이 직위한 후 반년만에 죽었고, 이는 다툼없는 사실이다. 건륭제가 <대의각미록>을 회수한 것도 다툼없는 사실이다. 역사의 이 같은 객관적 사실은 옹정제 생모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추측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옹정제의 생모인 우야씨, 즉 강희제의 효공인황후는 만주정황기출신으로 호군참령 위무의 딸이다. 강희제가 살아있을 때의 최고직위는 덕비(德妃)였다. 순치17년(1660년)에 태어나서, 입궁했다. 강희17년(1679년) 십월 삼십일에 황사자, 즉 옹정제를 낳는다. 강희18년 십월 십삼일에 덕빈에 봉해지니 당시 나이 20살이었다. 강희19년에 황육자 윤조를 낳는다. 강희20년 십이월 이십일에 덕비에 봉해진다. 강희21년에 황칠녀를 낳는다. 강희22년에는 황구녀(고륜온헌공주)를 낳는다; 강희25년에는 황십이녀를 낳는다; 강희27년에는 황십사자 윤정을 낳는다. 그는 나중에 무원대장군 순군왕이 되는 인물이다. 강희제가 죽은 후 우야씨는 통곡을 하며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한다. 음식을 모두 폐하고, 순사하여 강희제를 구천까지 따라가고자 한다. 옹정원년(1723년) 오월 이십삼일에 죽으니 향년 64세이다. 옹정원년 구월 초하루, 강희제와 함께 경릉의 지궁에 합장된다. 건륭, 가경제때 시호가 붙어: “효공선혜온숙정유자순흠목찬천승성인황후”가 된다.
사람들은 왜 옹정제의 생모의 죽음에 대하여 의혹을 가지는가?
옹정제에 따르면, 강희제가 죽은 후, 덕비는 매우 비통해 하며, 강희제를 따라죽으려 한다. 그리하여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옹정제가 여러가지로 설득하고, 그가 애타게 애원하여, 덕비는 죽을 생각을 버리고, 음식을 먹고 평안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병으로 사망한다. <청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후는 옹정원년 오월 이십이일에 병이 나서, 오월 이십삼일 새벽 2시에 영화궁에서 사망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청실록>의 기록이 지나치게 간단할 뿐아니라, 너무나 돌연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무슨 병이기에 이렇게 빠르게 죽는단 말인가? <청실록>에서 태후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저 황태후가 ‘애통심절(哀痛深切)’, ‘적애일구(積哀日久)’하여 죽었다고만 되어 있다. 효공황후의 죽음이 너무나 급작스러운데다가 평소 옹정제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에 의심을 품게 된다. 옹정제의 해명대로라면, 사람들은 더더욱 그와 태후의 관계가 긴장되어 있었다는 것을 믿게 된다.
왜 옹정제와 생모의 관계가 이처럼 긴장되었을까?
원래, 강희제가 죽은 후, 우야씨는 강희제를 따라 죽으려고 했다. 즉 자살하여 순사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아들인 황사자 윤진이 이미 황제가 되었다. 윤진이 애타게 사정하여, 순사의 생각은 포기한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되면, 기뻐해야할 일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등급도 ‘비’에서 ‘황태후’로 승격되고, 그녀 친정사람들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원래 기뻐해야할 날에 자살을 결심한다. 이것은 이미 돌아가신 강희제를 그리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아들 윤진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거나, 강희제의 죽음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심지어 아들이 강희제를 죽였다고 의심했을 수도 있다. 혹은 윤진이 강희제의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순사의 생각을 포기한 후, 행동으로도 윤진에 협력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아래의 세 가지 사실로서도 확인된다:
첫째, 예를 행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새로운 황제의 등극대전때, 먼저 황태후에게 예를 행한다. 그 후에 태화전에 올라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다. 예부는 이러한 예의를 우야씨에게 알려주는데, 그는 받기를 거부한다. <영헌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여러 신하가 황태후에게 청하니, (옹정의 생모 효공황후)는 의지를 내려 말하기를 ‘받지 않겠다’고 한다. 다시 간곡히 청하니 응했다. 사람들이 재궁(梓宮)의 앞에서 절을 하여 인사를 한 다음 다시 옛 궁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의지를 내려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 입궁하여 비가 되었다. 돌아가신 황제의 앞에서 힘들 다하여 못지 못했다. 내 아들이 황제가 되는데, 이것은 내가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닐 뿐아니라, 꿈 속에서도 생각지 않은 일이다. 난 원래 선제를 따라 함께 가려고 했으나, 지금 황제가 말하기를 태후성모가 만일 황부를 따라서 가시면, 나도 태후 성모를 따라가겠다고 간절히 애원하여, 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일 비단 옷을 입고 내 아들이 행하는 예를 받는다면 이는 실로 적합하지 않은 일이다.” <청태종실록>에도 옹정생모에 관한 기록이 있다: “황제가 등극한다면 당연히 축하를 받아야 한다. 나에게 예를 올리는 것이 무슨 관계있느냐. 하물며 선제의 상중인데, 조복을 입고, 황제가 행하는 예를 받는다면, 나는 마음이 불안하다. 그러니 예를 행하지 말라. 그날 왕대신등이 간곡하게 청하였으나 황태후는 여전히 응락하지 않았다. 황상(옹정제)이 재삼 간청하자 황태후가 의지를 내려서, ‘왕대신등이 선제가 대례를 행한 선례를 들어서 간절히 요청하므로 나도 djjf 수가 없다. 오늘 밤에 재궁의 앞에서 인사를 받은 후 다시 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둘째, 휘호(徽號)를 거절하다
황태후에게 휘호를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옹정제는 모후에게 ‘인수(仁壽)’라는 휘호를 올리고자 했다. 그러나 우야씨는 선재의 재궁이 아직 매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휘호를 거절한다. 청나라때에 선제의 재궁이 아직 매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휘호를 올리지 못하는 규정은 없었다. 이는 확실하게 자신이 황태후가 되지 않겠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고, 윤진이 황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옹정이 황제가 된 것이 합법적이 아니라는 생각을 깔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사를 가지 않는다.
영수궁은 태후, 태비가 나이 들어 사는 곳이다. 민간에서 말하는 소위 ‘과부원’이다. 강희제가 죽은 후, 규정에 따르면 황제의 생모는 황태후가 되고 중로의 동서12궁에서 자녕궁 혹은 영수궁으로 옮겨서 거주하게 된다. 그러나, 우야씨는 옮기지 않았다. 여전히 덕비시절에 살았던 동육궁중 하나인 영화궁에 거주하다가 영화궁에서 사망한다. 이는 옹정제로 하여금 난감하게 만드는 일이었고, 명확하게 황제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우야씨의 일련의 행동과 말로 보면, 윤진이 황제에 오른 것은 그녀에게 의외의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꿈 속에서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에서 여러가지로 아들인 옹정제와 어긋나게 된다.
우야씨가 왜 몇 개월 후에 돌연 사망하였는지에 관하여 고증에 따르면, 이는 옹정제가 그의 친동생인 황십사자에 대하여 계속하여 타격을 가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옹정제가 막 황제에 올랐을 때, 윤정은 아직 청해에서 무원대장군으로 있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옹정제는 그가 생모와 만나지 못하게 한다. 이뿐아니라 그의 병권도 박탈하고, 그를 동릉으로 보내어 강희제의 경릉을 지키게 한다. 이는 실질적으로 연금이었다. 시시때때로 환관을 보내어 감시했다. 황십사자의 가족들까지도 연금에 처하고, 녹미(祿米)도 영원히 발급을 정지시킨다. 이러한 것들을 보고 아마 옹정의 생모는 막내아들의 안전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옹정제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많은 강희제의 심복대신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윤정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서 보호해주려 하였다. 그러나 옹정제가 이를 막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죽어간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자살일 것같다. 그 이유는 이렇다. 옹정원년 오월 이십이일 오후 미시에 돌연 병이 생겨, 그날 방에 거주하던 용화궁에서 급사한다. 병을 얻은 때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겨우 몇시간이다. 그리고 사후 3일만에, 옹정제는 동생인 황십사자에게 이미 죽은 생모와 만날 수 있도록 해준다. <옹정조기거주>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옹정제는 태후의 죽음을 이렇게 해명한다. “황태후는 지난 일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깊어져서, 병세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슬픔이 쌓인지 오래되었다. 갑자기 몸에 이상이 나타나더니 그냥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런데 7년후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에서 또 다르게 해명한다: “모후는 원래 병세가 있었고, 선황의 대사가 있어, 비통해하며 이를 잊지 못했다. 계묘 오월, 옛병이 다시 도져서, 짐이 탕약을 올려서, 낫기를 기원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병이 위중해졌다.” 연구에 따르면, 태후는 탄금이사(呑金而死)했을 가능성이 크다. 옹정생모의 죽음은 옹정제가 친동생을 대하는 태도에 절망하였고, 거기에 옹정제가 말한대로 ‘황급한 와중에 한 마디로 대계를 정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나이가 들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강희제)가 불분명한 목소리로 ‘넷째아들 윤진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했다는 것은..도대체 어떤 상황일 것인가?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강희유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옹진왕 황사자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짐을 잘 알았으니, 반드시 대통을 능히 이을 수 있으니 짐을 이어 등극하게 하여 황제위에 오르게 하라. 법도에 따라서 하고, 27일에 상복을 벗으라. 천하에 포고하니, 모두 들을 지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강희제가 마지막에 윤진으로 결정한 이유는 윤진의 아들 홍력을 예뻐했기 때문이라고. 봉건사회는 가천하로 황위는 부친에서 아들로 전해진다. 그 이유는 <이조실록. 경종실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당년 십이월, 조선관원이 청나라의 부고를 전하는 사신이 말하는 것을 통역이 말했는데, 강희제는 창춘원에서 그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각로 마제(馬齊)를 불러 말하기를, ‘넷째아들 옹친왕 윤진이 가장 현명하니, 내가 죽은 후 그를 다음 황제로 삼으라. 윤진의 둘째아들에게 영웅의 기상이 있으니 반드시 태자로 삼으라’” 비록 정말 이러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분명한 잘못이 있다. 만일 건륭제의 승계는 옹정제가 강희제가 정해준 바에 따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옹정제의 둘째아들은 홍력이 아니다. 이것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옹정제의 황위승계는 의문점이 너무나 많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옹정제의 생모에 있어서, 그녀의 어느 아들이 황제가 되더라도 그녀에게는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치상으로는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전제는 황제가 된 아들이 합법적이고 정정당당하게 승계하였을 경우이다. 돌아가신 황제의 진정한 뜻에 따라 황제에 올랐을 경우이다. 옹정제의 생모의 마음 속에는 아마도 그녀의 막내아들이야말로 원래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사람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두 아들의 어머니로서, 윤진의 사람됨, 성격을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고, 옹정제의 양면성도 잘 알았을 것이다. 지금의 말로 하자면 겉으로는 후덕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음험한 사람이다. 그는 강희제를 속이고 세상사람을 속인 사람이다.
<황청통지강요>의 기록에 따르면, 윤진은 강희41년 십일월 십일일, 윤잉, 윤지, 윤기, 윤사와 함께 ‘석방’된다. 이는 윤진이 일찍이 연금 또는 구류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당시 황위계승다툼에서 음험한 수단을 쓰다가 강희제에게 발각되어 처벌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윤진은 자신을 숨기고 더욱 음험한 모략을 쓰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한가하게 지내고, 승려와 어울리고 사원을 짓는다. ‘천하제일한인(天下第一閑人)’으로 지내는 것처럼 하면서 시나 짓는다.
옹정제의 이런 가장행위는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모친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 강희제, 옹정제 시기의 황실내부다툼을 친히 목격한 종실구성원인 홍왕(弘旺)이 쓴 <황청통지강요>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사아거의 원래 이름은 윤진이다. 십사아거의 원래 이름은 윤정(胤禎)이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십사아거는 새로운 황제의 명을 받아 이름을 윤제(允?)으로 바꾼다. 강희47년, 강희제는 십사자를 패자로 봉할 때의 상유에서도 ‘윤정’이라고 칭했고, 십사자가 무원대장군으로 부임할 때도 ‘윤정’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왜 현재 황십사자는 ‘윤제’라고 부르는가? 바로 옹정제가 황제에 오른 후 형제들의 명칭에서 윤(胤)은 모조리 윤(允)으로 바꾸게 했는데, 황십사자만 윤정에서 윤제로 이름이 뒷자까지 바뀌게 되었다.
사아거 윤진의 진(?)과 십사아거 윤정의 정(禎)은 발음이 같을 뿐아니라, 형태도 비슷했다. 여기서 필자는 한가지 의문이 든다. 왜 강희제는 두 아들에게 발음이 같은 글자를 사용했을까? 혹시 발음이 같다는 것을 알지 못했단 말인가?
저명한 청나라역사전문가인 왕종한 선생은 옹정제 즉위의 합법성에 의문을 나타내면서, 옹정제는 십사아거의 황위를 빼앗았을 뿐아니라, 그의 이름까지도 한꺼번에 빼앗았다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