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에 대해 - 6. 윤리학(들뢰즈의 의무론칸트주의 비판)
by 메피스토
6.3.2. 의무론(칸트주의) 비판
의무론의 난점은 옳고 그름의 이분법에 있습니
다. 의무들이 초월적인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 아
니라면 역사적 과정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입니
다. 그러면 역사적 우연성이 의무들의 집합으로
서 규범체계에 반영된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
습니다. 우연은 중구난방이므로, 이를 받아들이
며 진화한 체계는 클루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
시 말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덧붙인 여러 기준
들이 뒤섞인 다기준 체계가 됩니다. 의무들끼리
의 충돌과 모순이 잠재하는데, 상충하는 의무를
모두 행할 순 없으니 일관성을 위해선 어떤 위계
를 정해야 합니다. “위계”의 완전성을 달성하는
전략은 통상 초월성이 아니면 형식성입니다. 초
월성은 자연주의적 존재론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
습니다. 초월적인 완전성을 도대체 누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인식론적 문제도 있습니다. 그 누
구도 확실하게 알 수 없음에도 있다고 상정되는
초월적인 완전성은 당대의 권력에 의해 규정되기
마련이고, 결국 억압의 도구가 되기 딱 좋다는 현
실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월성은 적
합한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의무론은 고도로 형식적인 이론으로 귀결됩니
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의무일수록 상위의 의
무라는 거죠. 그런데 고도로 추상화된 의무는 내
용을 알기 어렵습니다. 추상화란 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을 깎아내고 남은 것이니까요. 그
런데 윤리학은 실천이나 판단을 위한 지침을 제공
해주어야 하기에, 형식으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의무가 최
상위의 의무이기에 이를 위반해서도 안 됩니다.
그 결과 의무론이 도달하는 것은 뭔지도 모르는
데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인데, 이는 명백히
모순입니다. 의무는 가능함을 전제로 하는데 알
수 없는 것을 의식적으로 행할 수는 없기 때문입
니다. 그러나 형식주의적인 의무론은 이 모순을
강요합니다. 들뢰즈는 이를 우울증적 법의식의
강요라고 비판합니다.
형식주의를 택한 의무론의 실천적인 방법론으로
서 절차적 정의도 있기는 합니다. 정의의 내용은
몰라도 형식적인 절차를 마련하여, 그 절차를 통
해 정의가 구현되길 바라는 겁니다. 그러나 현실
에서 형식화된 절차에서는 그 절차에 참여하는 행
위자 또한 절차를 요식행위로 대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그 누구도 책임 있는 판단이나 행동을 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절차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의무론은 그 이론적 본질상 옳고 그름의 판단을
고집해야만 합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위와
같이 의무들끼리의 충돌은 많아질 것이고, 명확
히 옳거나 그른 행위는 가늠하기 어려워집니다.
복잡한 사회에서 의무론적 윤리학은 들뢰즈가 선
악의 도덕이라 불렀고, 니체가 “약자의 도덕”이
라 비판한 것으로 전락할 위험이 대단히 큽니다.
즉 혐오와 증오, 대안에 대한 양비론으로 조금이
라도 더 나은 선택을 포기하게 하는 손쉬운 도구
가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