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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야행(夜行)-2
갈운영은 악삼을 바라보다가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과거
를 회상하는 갈운영의 눈동자는 아련하게 변했다.
"악 가가는 음자(陰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객이나 밀정을 말하는 것이냐? 갑자기 음자를 말하는 이
유는 무엇이니?"
갈운영의 난데없는 질문에 악삼은 의아한 안색을 지으며 반
문하고 말았다. 자기 비밀을 밝힌다고 하더니 갑자기 음자를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들도 음자에 속하지요. 하지만 내가 말하는 음자는 포괄적
인 뜻을 가진 존재를 말해요."
"음자의 진정한 뜻을 말하는 것이니?"
"네, 맞았어요. 이름을 가진 채 밝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
들과 달리 이름도 없이 망자처럼 사는 존재들이죠. 죽어도 묘
하나 없고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슬픈 인생들을 말하는 것이
에요."
"어둠 속에서 살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존재들이라..."
갈운영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악삼은 자기 신세가 떠올라 마
음은 아렸다. 그나마 이름은 있지만 음자의 삶과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제가 사부로 모신 그 분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자기 신
상에 대해 말해 주셨어요. 그때 자신을 음자라고 칭하더군
요."
"사연이 있나 보군."
"네, 기막힌 사연이지요. 그 분은 자기가 태어난 날짜도 부모
도 모른 채 자랐다고 말씀하셨어요. 태어난 순간부터 어느 조
직의 부속품으로 길러졌지요. 그나마 위안이라곤 쌍둥이로 태
어난 형제들과 같이 자랐다는 것이었다고 하더군요."
"쌍둥이로 형제들?"
악삼은 갈운영이 잘못 말했나 싶어 반문했다.
"사부님은 네 쌍둥이였어요."
"네 쌍둥이라... 허! 정신 사나왔겠군."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 조직은 네 쌍둥이를 모두를 적
등영이라고 불렀어요."
"사람은 네 명인데 이름은 하나라니 어이없는 일이로군."
하나의 이름으로 네 명을 불렀다는 기사(奇事)는 악삼을 황당
하게 만들었다.
"네. 그런데 나중에 적등영이라는 사람이 상관으로 나타났을
때 사부님은 그 이유를 알게 됐지요. 조직의 우두머리인 적등
영의 부친이 사부님과 그 쌍둥이 형제들은 키운 것은 자기
아들의 그림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죠."
"그래서 영매의 사부님이 자신을 음자라고 말한 것이군."
"네. 사부님이 말한 음자의 진정한 의미가 그것이에요."
악삼이 눈을 감고 이야기 속에 빠져 들어가자 갈운영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부님의 무위가 다른 형제들의 수준을 넘어 상관인
적등영을 위협할 수준이 되자 문제가 발생했어요. 사실 사부
님은 강호를 종횡하면서 수 차례의 기연을 얻어 높은 경지에
도달했어요. 그림자로 살아야 하는 삶 때문에 항상 진정한 무
위는 숨겼어요. 그러나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숨겨도 알려질 것은 드러나는 법이죠."
"상관인 적등영에게 공격당했군."
"네, 하지만 사부님을 더욱 슬픈 게 만든 일은 쌍둥이 형제
들이 선봉에 섰다는 것이죠."
악삼은 갈운영의 사부 이야기를 들을수록 동병상련(同病相憐)
을 느꼈다. 태을궁 수련시절 악삼은 악비영보다 뛰어난 성
취를 이루자 공격을 당했다. 가문의 차기 주인보다 더 강한
자를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당
하는 입장은 억울한 법이다.
악삼이 과거를 회상하며 이를 가는 동안 갈운영도 처참했던
사부의 몰골을 생각하며 타오르는 원한을 주체할 수 없어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갈운영은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눈빛
으로 환객을 싸늘하게 노려보다가 악삼을 불렀다.
"악 가가."
"응! 말해보렴."
"이 자를 깨울 수 있나요? 제 정신을 가진 상태로 말이에요."
갈운영은 손가락으로 환객을 가리키며 물었다.
"태을지의 요결 중에 잠재력을 폭발시켜 일시적으로 정상으
로 돌리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사용하면 반 시진
을 버티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반 시진이면 충분해요."
"알았다."
악삼은 의식불명에 빠진 환객을 향해 태을지를 사용했다.
파바박.
태을지는 환객의 머리부터 단전 부위까지 무려 마흔 아홉 군
데의 혈도를 일순간에 가격했다. 환객의 신체는 태을지가
가격하는 동안 꿈틀거렸고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을지는 환객의 기를 거꾸로 돌려 체력을 정상에 가깝도록
회복시켰다.
"허억~."
태을지가 환객의 몸에서 역기행공을 하도록 만들었고, 그 효
과는 컸다. 환객이 신음 소리를 내며 의식이 돌아온 것이
다.
"다시 보는군요."
"누구... 요?"
환객은 재견(再見)이라고 말하는 여성의 싸늘한 어투에 무거
운 눈꺼풀을 뜨며 신분을 확인하려고 했다. 오랜만에 눈을
떠서 앞이 희미하게 보이자 환객은 눈을 깜박거렸다. 희미
하게 보이는 사람의 모습이 초점이 맞아지면서 선명하게 드
러나자 환객은 깜짝 놀라버렸다.
"다, 당신은...갈 낭자가 아니오."
"그래요. 갈운영이에요."
"이, 이곳을 어, 어떻게 오셨소?"
"찾았죠."
갈운영의 어투는 싸늘했고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환객에게
갈운영의 싸늘한 음성은 한 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갈 낭자, 나를 구해 주시오. 내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으
리다."
"당신이 누구인데 내가 수고를 합니까?"
"무, 무슨 말이오? 나를 모르시오? 나는 이 장도요."
"이 장도라... 당신의 얼굴을 아무리 보아도 이 장도는 아니에
요."
갈운영의 대답을 들은 환객은 이 장도의 인피면구가 벗겨진
것을 알았다. 인피면구가 벗겨진 것도 모르고 어리석게 본색
을 드러냈다고 생각한 환객은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그
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환객은 이 난국을
어떻게 벗어날까 고민했다.
"머리를 굴려봐야 답은 없어요."
"무, 무슨 말이요?"
"시간이 부족하니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말하죠. 당신은 몇
호라고 부르나요?"
"며, 몇 호라니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환객은 얼버무렸다. 그러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것
을 막지는 못했다.
"거짓말을 가지고 싸울 시간도, 쓸데없는 일로 실랑이를 벌일
시간도 없어요."
"갈 낭자의 이야기를 나는 이해 못하겠소."
"좋아요. 그럼 당신은 누구죠? 그걸 밝히면 구해드리죠."
"그, 그게..."
환객은 갈운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갈운영이 몰아붙
이는 바람에 변명거리와 거짓 신분을 만들 시간을 가지지 못
했던 것이다.
"당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이야기하지요. 내가 열 살 때
운남의 한 숲 속에서 왼 팔과 오른쪽 다리, 두 귀와 오른쪽
눈을 잃어버린 중상을 입은 중년 남자를 만났어요. 그 분은
생명이 위독했어요. 특히 온몸이 난도질을 당한 모습이 어린
내게 두려움을 주었지만 용기를 내어 그 분을 도와 드렸어요.
그분이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겠죠."
"허억! 서, 설마 3호가 살았단 말인가!"
갈운영의 말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환객은 알 수 있었다.
"그래요, 그 분은 그렇게 심한 중상을 입고도 살아나셨어요.
나는 그분의 후계자입니다. 자아~ 그럼 다시 물어 볼까요. 당
신은 몇 호입니까?"
"4호다."
"3호? 4호? 영매 그건 무슨 호칭이냐?"
악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질문했다.
"3호는 사부님을 말하는 것이고 4호는 저 자를 말하는 것이
에요."
"그건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아까 제 사부님에 대해 말할 때 네 쌍둥이 모두를 적등영이
라고 불렀다고 했죠."
"그래. 그렇게 말했지."
악삼은 갈운영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대답했다.
"그럼 네 쌍둥이라 외모도 똑같고 이름마저 같으면 어떻게
구분해서 불렀겠어요?"
"허! 그래서 1호니 2호니 이런 식으로 구분했다는 것이냐?"
"네, 맞아요. 그래서 사부님이 스스로 음자라고 말한 것이죠."
"음자! 허허허... 3호는 항상 우리가 음자라고 말했지..."
환객은 악삼과 갈운영의 대화를 경청하다가 음자라는 그리운
단어가 나오자 과거가 기억나 독백하듯이 말했다.
"그래요. 사부님은 형제들에 대해 각별하게 생각했지요. 그런
데 당신과 당신 형제는 사부님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어요. 당
신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을 가진 짐승이에요."
"어쩔 수 없었다. 3호는 너무 강했어. 그게 문제였지."
"그렇군요. 당신이나 적등영이란 자나 모두 질투에 미쳐버린
한심한 바보들이었군요."
"그래, 우리는 질투에 미쳐버렸지. 3호는 강호를 종횡하면서
환객이라는 별호를 얻었지. 바로 천하2대신비객으로 불리며
전 강호 인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받았지. 하지만 그 때만 하
더라도 우리는 크게 질투하지 않았다. 우리들도 환객 노릇을
하면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꼈으니까!"
환객 4호는 강호를 종횡하며 강호 인들에게 존경과 두려움을
받던 시절을 아련하게 떠올렸다. 그런데 그 모습은 갈운영
에게 역겨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흥, 천하2대신비객으로 불리는 환객은 사부님 뿐이지요. 당
신 형제들은 명성을 도적질한 비겁한 자들에 불과해요."
"크흐흐, 비겁한 자들이라... 그렇게 불려도 할말은 없다. 하지
만 끝까지 그 무위를 숨겼어야지. 그 무위를 드러내 우리 형
제나 원주를 광분하게 만들었으니 3호도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끝까지 치졸하군요."
"치졸하다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그 당시 3호가 보인 역량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악삼은 환객 4호의 말을 들을수록 갈운영의 사부의 강함이
궁금해져 갔다.
"영매의 사부님이 어느 정도 강했기에 그러는 것이오?"
환객 4호는 악삼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히죽거렸다.
"크크크, 너 역시 무공에 미친 광인이구나. 좋다. 좋아. 내가
3호가 얼마나 강하고 위대한지 알려주지. 왜 우리가 질투에
미쳐 혈육인 3호를 공격한 이유를 말이다."
"흥, 끝없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변명뿐이군요."
갈운영은 환객 4호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환객 4호가
내뱉는 말 한 마디마다 역겨움만 주었기 때문이다.
"흐흐흐, 자기 변명이라고 말한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사실
3호는 우리와 다르게 협객의 기풍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약
자를 도우려고 해 우리 형제들과 충돌이 자주 있었지."
"그래서 강호에서 환객의 평판이 반정반사(半正半邪)로 알려
진 것이죠. 사부님이 선행을 베풀면 당신 형제들은 악행을 저
질렀죠. 그래서 강호 인들은 환객을 협객으로 생각하지도 않
았고 악인으로 낙인찍지도 못했지요."
"그 덕분에 환객이 신비객으로 불렸지. 우리 형제들이 아무리
악행을 저질러도 3호의 협행이 너무 커 신비객으로 불렸지.
위선자로 분류가 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어."
"당신 형제들은 너무나 지독한 자들이에요."
갈운영은 환객 4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증오심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흥, 까마귀 속에 백로가 있으니 당연히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냐! 절대로 우리의 잘못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아요. 그런데 백로는 까마귀를 공격할 생각도 없는데, 까
마귀들이 백로를 공격한 이유는 무엇이었죠?"
"크크크, 백로가 단순한 백로였다면 그런 일까지 벌어지지는
않았겠지."
"사부님의 강함 때문이었군."
환객 4호는 갈운영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주와 우리들은 그 날이 오기 전까지 3호의 진정한 역량을
눈치채지 못했다. 3호는 우리 형제가 위험에 빠져 목숨이 잃
는 상황이라도 그 무위를 드러내지 않았어야 했어."
환객 4호는 인상이 일그러졌다.
"사부 님이 당신들을 구하기 위해 진정한 무위를 드러냈군요.
그런데 당신들은 은혜는 생각도 않고 질투와 두려움에 빠져
사부님을 공격한 것이군요."
환객 4호는 갈운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갈운영
은 사부님의 형제들이 이 정도로 추악할 줄은 몰랐는지 질린
얼굴이 되었다.
"사건의 시작은 12년 전 벌어진 대 격전의 현장에서 3호가
진정한 무위를 선보이면서 잉태됐다. 12년 전 동해방의 작은
주인인 장 천익은 자기 부인을 살해한 범인의 덜미를 잡았다.
그 당시 장천익의 무위는 사해방의 네 방주 중에 세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오직 진룡거사 송 자헌만이 장 천익을 능가
했지 어느 누구도 맞설 수가 없었다."
"그런 강자가 동해방에 있었소?"
악삼은 장 천익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흥분했다. 무인에게
있어 강자란 자기를 채찍질할 좋은 동기였다. 특히 강자와
무위를 겨루는 것은 무인의 본능이었다.
"흐흐흐, 장 천익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남해방이나 북해방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당시 무위를 생각해 아직도 살아
있다면 천하제일고수가 됐을 것이니까."
"그럼 장 천익은 죽은 것이오?"
"그렇다. 그 당시 장 천익의 부인을 살해한 사건과 연관된 방
파뿐 아니라 집법원까지 나섰다. 장 천익이 사해방의 방주로
등극한다면 남해와 북해, 서해는 동해방에 흡수될 것이고 집
법원은 하부 조직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다들 예측하고 있었
다."
"그 예측이 만든 공포가 합공을 하도록 만들었겠군."
환객 4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장천익을 공격하는 데 들어간 인원이라면 소림사와
무당산을 하룻밤 안에 불태울 수 있을 정도였지. 남해방은 팔
마당의 팔마와 남해오살(南海五殺), 총 열 세 명이 동원됐고
북해방은 정예인 북해십팔마성(北海十八魔星)이 모두 나섰지.
그리고 서해방은 이십팔숙(二十八宿)을 동원했고 집법원은 원
주와 십대시자(十代侍者) 그리고 우리 네 형제를 포함해 모두
열 다섯 명이 참가했다. 한마디로 동해방을 제외한 사해방의
최고 전력이 모두 동원됐지."
"한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일흔 네 명이나 되는 고수들을 동
원했단 말이오!"
"그렇다. 새벽에 시작된 격전은 서천이 노을지는 저녁에 끝났
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다들 장 천익의 무위를 잘못 알았던
것이다. 단순하게 동해방주의 수준이라고 생각했지. 설마 더
강할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환객 4호는 그 당시 벌어졌던 격전을 회상하자 소름이 끼치
는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온 세상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석양의 붉은 빛보다 장 천익
의 손에 만들어진 대지의 붉은 색이 더 강렬했다. 서해방의
이십팔숙은 정오가 되기도 전에 전멸을 당했고 북해십팔마성
도 그 뒤를 따랐다. 남해오살과 팔마 중에 다섯 명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지. 그나마 온마와 취마, 잔마가 살아 남은 것은
행운이었다."
"팔마 중에 세 명만 살아 남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요?"
악삼은 환객 4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팔마의 다섯 명이
죽었다는 내용이 이상하게 들렸다. 곡소쌍마가 석진의 손에
죽기 전까지 팔마당에는 여덟 명의 마두들이 현존하고 있었
다는 사실을 생각한 것이다.
"크크크, 곡소쌍마와 요마, 수마, 심마는 혈전이 벌어진 후 팔
마당에 가입한 자들이다. 그 전에 팔마당을 결성한 팔마는 다
른 인물들이다. 특히 격전 장에서 죽은 도마, 검마, 혈마, 환
마, 철마는 그 당시 온마 동곽과 별 차이가 나지 않은 진정한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장 천익의 손에 걸려 모두 전신이 박살
나는 죽음을 면치 못했지."
"팔마당에 그런 사연이 있었군. 그럼 집법원의 사정은 어떠했
소?"
"세 방파가 그 꼴을 당했는데 집법원이라고 무사했겠느냐. 십
대시자는 모조리 죽었고 적 원주는 중상을 입은 채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지."
"장 천익은 그때까지 무사했소?"
악삼은 궁금했다. 무려 일흔 네 명이나 되는 고수들의 합공
을 받고도 오히려 그들을 거의 몰살시킬 정도의 강자는 생각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흐흐흐, 장 천익이 아무리 최강의 무공을 소유했다고 하더라
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오른 팔이 날아갔고 온 몸
을 난자 당했지. 게다가 전신에 수많은 병기가 박혀 있어 당
장 죽는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장 천익은 우리를 전
멸시킬 힘은 남아 있었다."
"대단하군. 그야말로 장 천익은 초인적인 무공을 지닌 절대고
수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겠군."
"크크크, 맞다. 장 천익의 공격은 쉬지 않았지. 그 당시 나는
장 천익이 과연 사람인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장 천
익의 공격이 적 원주와 우리 형제들에게 집중되자 상황이 반
전(反轉)됐다. 적 원주와 우리 형제가 장 천익의 공격을 막지
못해 위급해지자 3호가 끼어 든 것이지. 3호는 일흔 네 명이
한 사람을 합공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움직이지 않았
지."
악삼은 갈운영 사부의 성품이 더욱 마음에 들어 자신도 모르
게 미소를 지었다.
"과연 영매의 사부님은 대단한 분이셨군."
"크크크, 대단했지. 장 천익의 공격을 단 혼자서 막아내더군.
아무리 중상을 당한 장 천익이지만 역량만큼은 줄지 않았는
데 3호는 그 가공할 공격을 막으면서 역공까지 가하더군."
"과연 사부님의 역량이 어느 정도 알만하군."
갈운영은 사부의 무용담을 듣게 되자 마음이 뿌듯했다. 그
런데 환객 4호는 갈운영이 뿌듯해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코웃음을 쳤다.
"흥, 3호는 그런 무위를 가졌으면서 처음부터 장 천익을 공격
하지 않고 나중에 나섰으니 비겁한 배신자에 불과해."
"흥, 연작(燕雀)이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알 수 있겠어요!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비겁한 배신자로 몰아! 은혜를 갚을 생
각은 하지도 않고 오히려 은인을 해쳤으니 짐승보다 못하군."
사부를 배신자라고 말하자 갈운영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
꼈다.
"크크크, 우리가 3호를 배신자로 몰아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
는가 보군. 하지만 3호가 장 천익과 격전을 벌이는 동안 우리
모두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흥, 사부님이 처음부터 장 천익을 공격하지 않은 일 때문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군. 과연 당신이나 당신 형제들은 하나같
이 속 좁은 소인배에 불과하군."
"그렇다. 내가 소인배로 몰려도 할 수 없다. 하지만 3호가 처
음부터 나섰다면 그 많은 피해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정예
를 모조리 잃어버린 북해방과 남해방, 서해방, 집법원은 무려
십 년이 넘도록 동해방의 눈치만 보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했다."
"흥, 실력으로 승부를 낼 생각은 못하고 다수가 모여 합공하
는 협잡에 끼지 않았다고 비겁한 배신자로 몰다니 정말 어이
가 없군."
갈운영은 환객 4호의 사고가 어이없었다.
"크크크, 3호는 주제도 모르고 자기가 임협인줄 착각한 멍청
이였어.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줄도 모르고 동료들의 죽음을
방관했으니 당연히 배신자이지. 또한 3호가 사용한 무공이야
말로 배신자라는 증거다."
"역시 소인배였군. 사부님이 개인적으로 얻은 무학을 알려 주
지 않아서라니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군."
갈운영은 사부의 형제들이 보여주는 몰염치에 치를 떨었다.
어떻게 동부동모(同父同母)의 한 핏줄일 뿐 아니라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들이 심성이 이 정도로 큰 차이가 나는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흐흐흐, 소인배라... 물론 3호가 펼친 환상에 가까운 신법이
나 권장법과 도법을 독점하고 알려주지 않은 것이 괘씸하지
만 그것만으로 배신자 취급을 하지는 않지. 문제는 3호가 4단
계의 경지에 이른 음시조를 부작용 없이 사용한 점이 우리에
게 배신감을 주었다. 우리는 음시조의 폐해 때문에 항상 두려
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후우~, 칠대금지무공의 부작용을 막는 방법을 당신 형제들에
게 알려 주지 않은 것 때문에 배신감을 느꼈다면 정녕 당신
형제들은 어리석었어요."
"그건 무슨 말이요? 갈 낭자."
"칠대금지무공의 해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개의 방
법뿐이 없어요. 하나는 칠리산당의 혁씨 일족의 피를 이었거
나, 칠리산당에서 만든 칠살기를 연마하는 방법이죠."
갈운영은 사불상의 비밀동부에서 얻은 정보를 환객 4호에게
알려 주었다. 환객 4호는 처음 듣는 내용을 듣고 어리둥절했
다. 특히 칠리산당 의 혁씨 일족은 그도 금시초문이었다.
"그런데 사부님은 칠살기가 존재하는 것을 모를뿐 아니라 혁
씨 일족도 아니지요. 사부님은 심성이 악랄하게 변하고 광증
이 오는 증세를 부동심결(不動審決)이라는 방법으로 억제했고
감각이 마비되는 것은 만심진광(滿心進廣)으로 막았어요."
"부동심결? 만심진광?"
"불문에서 나온 수련법의 일종이죠. 이 두 가지 방법을 당신
형제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 형제들이라면 사부님이 어떤 성품의 소유자인지 알고
있었잖아요. 어째서 사부님을 믿지 않았죠."
환객 4호는 갈운영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조(自嘲)의 웃음을
띄었다. 갈운영이 말하지 않아도 환객 3호의 성품이 얼마나
호방하며 임협의 기질이 풍부한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더욱 분노가 일어났다.
평소에는 하나를 얻어도 다 알려주며 옳은 길을 가자고 하던
3호가 음시조의 폐해를 생각하며 전전긍긍하던 자신들을 위
해 해결 방안을 알려 주지 않은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갈운영은 환객 4호의 바뀌는 표정을 보다가 말을 이
었다.
"당신 형제들의 품성은 어쩔 수 없군요. 당신 형제들이 그 당
시 음시조를 어느 단계까지 익혔죠?"
"그것을 묻는 이유가 무엇이오?"
"내가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필요해요. 그런데 당신은 이번에
도 의심의 눈초리로 모든 것을 보면서 자신이 이루었던 경지
마저 밝히지 않는군요. 좋아요. 내가 당신 형제들이 이룬 경
지를 추측해 드리죠. 그 당시 모두 2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
았나요!"
"그렇소. 갈 낭자.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오?"
환객 4호는 갈운영에게 반문했다.
"중요하지요. 만심진광과 부동심결은 칠대금지무공의 폐해를
막기 위해 소림사와 아미, 보타산이 힘을 합쳐 만든 수련 법
이에요. 그런데 이 두 가지 수련 법은 칠대금공이 3단계의 경
지에 오른 사람에겐 보배이지만 2단계 이하의 경지에 있는
사람에게 독이나 다름없어요."
"갈 낭자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소."
"만심진광과 부동심결의 구결은 알고만 있어도 자연적으로
습득하는 괴이한 수련 법이에요. 그런데 두 수련 법은 감각과
감성을 극대화시키고 기의 흐름을 막거나 빠르게 해서 무학
을 수련하다간 주화입마를 당합니다. 특히 칠대금공의 2단계
이하의 수련자가 두 가지 수련법을 알고만 있어도 기혈이 뒤
틀려 지옥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게 만들지요."
"그, 그럴 리가..."
환객 4호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당신 형제들은 타고난
품성이 시기와 질투, 잔인함과 음험한 성격이니 음시조의 부
작용을 막는 방법이니 뭐니 하는 것은 단순한 변명에 불과할
뿐. 언젠가 죄악을 저지를 사람이죠. 이제 당신에게 남은 것
은 지은 죄를 참회하며 죽는 것만 남았어요."
"냉정하게 평가하는구려. 갈 낭자."
"당신이 저지른 업보지요. 그럼 이제 내 손에 죽어도 여한은
없겠죠."
갈운영은 싸늘한 시선으로 환객 4호를 노려보며 요대(腰帶)
속에 숨겨진 원앙도(鴛鴦刀)를 뽑았다.
스르륵.
"가, 갈 낭자..."
환객 4호는 갈운영이 칼을 들고 다가오자 말을 잇지 못했다.
"갈 낭자. 살려 주시오. 내가 잘못을 범했다 해도 갈 낭자에
게는 사숙이지 않소. 제발..."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을 하지만 갈운영의 눈동자는 차갑기만
했고 일체의 말 한마디 없었다. 갈운영이 확고한 뜻을 가지
고 있다는 사실을 환객 4호는 뼈저리게 느꼈다. 환객 4호는
살고 싶었다.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살려 주시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소."
"흥, 사부님이 당신 형제들의 목숨을 구해줬지만 보답으로 돌
아온 것은 무엇이었죠. 그런데 이번엔 내게 살려달라... 호호
호, 나중에 나는 사부님과 같은 꼴을 당하고 싶지 않군요."
갈운영은 원앙도를 높이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일격으로
환객 4호의 목을 두 동강내려는 듯 했다.
"아니오. 이번만큼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오."
"당연히 없겠지. 죽은 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환객 4호의 애절한 음성은 갈운영에게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아, 악 협사 살려주시오. 그럼 내가 당신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겠소."
갈운영에게 동정을 구하지 못한 환객 4호는 악삼에게 생명을
구걸했다.
"영매, 잠깐만."
"악 가가..."
악삼은 갈운영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후 환객 4호
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게 유익한 정보가 무엇이오?"
"우선 나를 살려준다고 맹세부터 하면 알려주겠소."
"훗! 맹세란 말로 하는 것이고, 말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 아
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오. 일단 당신이 내게 팔려는 정보가
무엇인지부터 말해보시오."
"그, 그게... 좋소. 알려주리다. 묵창 악풍을 죽인 자가 누구인
지 알려주겠소."
환객 4호는 패를 풀었다.
"사부님의 죽음은 당신 형제 중에 하나가 저질렀다는 건 나
도 알고 있소. 어차피 당신이 죽이고 나머지 두 사람만 죽이
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일이오."
악삼의 차가운 대답은 환객 4호의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환객 4호는 갈운영과 악삼을 바라보며 부르르 떨다가 입을
열었다.
"악 협사의 말은 맞소. 하지만 강호는 끝없이 넓은데 어떻게
찾아낼 생각이오. 악 협사는 산동에 가면 할 일도 많을 것인
데 언제까지 사부의 원한을 갚는다고 천지를 방황할 것이오."
"호오~. 당신의 말을 들어보니 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소."
"사해방은 궁륭산에서 악 협사를 놓친 후 많은 정보와 자료
를 모았소. 악 협사가 산동성 청도(靑島) 출신이고 부모와 두
형이 모두 죽어 천애고아(天涯孤兒)로 태을궁에서 수련해 일
대 고수가 된 일하며, 묵창 악풍을 사부로 모신 것까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소."
"내 고향이 청도였군."
악삼은 환객 4호가 지껄이는 말을 듣다가 자기 고향이 청도
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감회가 새로웠다. 여섯 살 때부터 궁
륭산에 수련을 하는 바람에 자기 고향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악삼이 산동악가로 가려는 이유는 고향을 알기 위해서였다.
"좋소. 나와 영매는 당신에게 일절 손을 대지 않겠소. 그러나
사부님을 해친 자가 누구이며 현재 어디에 있는지 말해야 이
약속은 지켜질 것이오."
"하아~, 고맙소이다. 악 협사."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소."
"알았소. 악풍을 죽인 자는 1호요. 그리고 1호는 지금쯤 집법
원에 있을 것이오."
악삼은 필요한 정보를 얻은 이상 지하 감옥에 있을 필요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갈운영에게 시선을 돌린 후 밖으로
나가자고 신호를 보냈다.
"아니... 어디 가는 거요. 나를 풀어줘야지."
악삼과 갈운영이 아무런 말없이 밖으로 나가자 환객 4호는
깜짝 놀라 외쳤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죠."
"가, 갈 낭자. 방금 전에 악 협사와 내가 한 약속을..."
갈운영의 차가운 대꾸에 환객 4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
다.
"그래요. 당신에게 일절 손을 대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약속
한대로 이행하는데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요."
"나, 나를 속였어."
"속이다니, 우리는 당신을 속인 적 없어요. 오히려 내가 복수
하지 않도록 말린 악 가가에게 감사나 드려요."
갈운영의 음성에는 환객 4호에 대한 비웃음이 숨어 있었다.
"너희가 그냥 간다면 내가 척신명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
컥!"
"드디어 반 시진이 지났군."
악삼은 석문을 열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는 환객 4호를 싸늘
하게 노려보았다.
"그, 그게 무슨 소.. 리... 크억!"
환객 4호는 뼈마디가 뒤틀리는 고통에 말을 잇지 못하고 절
명해 버렸다. 악삼과 갈운영은 환객 4호의 비참한 죽음을 뒤
로하고 밖으로 향했다.
첫댓글 아무리악인도 생에대한애착은...
너무 짧아 아쉬워요
즐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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