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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년 이후 경제 부흥기동안 베네치아,제노바는 아시아 무역과 재화에 최대한 접근하려고 노력
1190년 상파뉴 지역의 여러도시에서 박람회 열림.
1291년 제노봐는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아시아 항로 개척시도
1236년 실론 갑자기 파국
1403년 말라카 건설
1411년 명, 대운하 계통으로 양쯔강유역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쌀을 멀리 베이징및 변경수비대까지 운반.
1511년 포르투갈 말라카 점령
1560년 일본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은과 구리를 대량 수출시작
1567년 명, 푸젠성등에 대한 통제를 다시 완화시킴.
1580년 값싼 스페인의 은과 페르시아의 주화가 반입.(후에 경쟁력을 상실한 오스만 제국의 조페창이 조업을 중단)
1599년 버마 페구 몰락
1600년 자바 동부지역 미증유의 한발 지속.경제 타격
1603년 마닐라에서 중국인 2만3천~2만5천명 학살됨.
1615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총수출물량 중에서 금액으로 환산하여 6%만이 일반삼품이었고 나머지 94%는 지금이었다.
1630년 동아시아및 남아시아에서 10년간 기상재해 발생.무굴제국 대기근 발생
1632년 일본상인 태국 아유타야에서 대거 학살되고 추방됨.
1635년 일본 동남아시아에 대한 출항 활동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1640년 포르투갈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남.포르투갈은 브라질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네덜란드 자본을 몰아냈다.오스만 조폐창 조업 중단.영국 병사들의 급료 지불에 곤란.
1642년 포르투갈 영국과 최초의 통상조약 체결.
1645년 일본,중국으로부터 도자기 수입량을 80"%줄임
1658년 일본 아시아,페르시아만 유럽시아을 상대로 당당한 도자기 수출국으로 부상.
1694년 영국은행 설립.
1703년 영국과 포르투갈 메수인 조액 체결로 영국은 포르투갈 시장에 합법적으로 진출
1720년 청조 은의 수입 급감~1750년대까지),인도 경제 침체 시작
1722년 러시아 페르시아와 전쟁
1723년 러시아 오스만까지 전쟁에 끌어들여 오스만과 함께 페르시아와 무역로를 분할했다.사파비왕조의 몰락한뒤로는 페르시아 대 신 시리아가 주요 비단 생산국으로 떠올랐다.
1733년 벵골 비단,목화 생산량 감소해짐
1739년 식민지로 인하여 영국과 스페인간의 전쟁 발생(젠킨스의 귀전쟁)
1740년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발생,네덜란드령 바타비아에서 중국인 대량 학살당함.
1757년 플라시 전투 발생
1760년 영국 수입 급감~1763년) ,오스만제국 경제 쇠퇴 시작(면직물을 비록한 공산품의 수출 감소.),청조 은수입 다시 증가시작
1762년 러시아 무역흑자 급감~1763년)
1763년 7년전쟁 종식 파리강화조약체결
1764년 영국 전비 회수를 위해 설탕법,군대숙영법,인지법,타운센드법 제정
1771년 1772년까지에 유럽 전역을 휩쓴 기상이변과 특히 노르웨이와 독일의 기근발생,인도 도 대규모 기근 발생
1772년 영국 수입급감~1773년),러시아 무역흑자 급감
1773년 영국 경기 후퇴지속,동인도 회사 의회에 구제자금 요청했던것에 따라 차법 제정
1774년 보스턴 차 사건발생 이에 영국 퀘벡법,참을수 없는법 제정
1775년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반영전쟁 시작,인도 인구성장률 감소
1776년 아메리카에서 독립선언서 발표
1780년 아메리카 경기후퇴 발생,청조 은이 대거 유입
1785년 아메리카 경기 더욱 심각해짐~86년),네덜란드 경기후퇴로 바타비아 혁명 일어남
1786년 세이스 반란
1787년 연압규약대신 미국 헌법제정
1782년 러시아 무역수지 흑자 급감.
1789년 프랑스 혁명 발생
1816년 인도 면직물 수입국의로 바뀜.
1850년 런던 세계 최대 도시로 등극.
1873년 영국 대공황 발생
해외무역과 거기서 생긴 수익이 18세기말 유럽의 GN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남짓 이었다. (O"Brien)
18세기말엽 카리브산 커피와 아라비아산 커피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카이로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노예로 팔려간 흑인의 숫자는 1,000만에서 최대 1,2000만 남짓이었던것으로 평가된다.
1660년부토 1720년 까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아시아에 수출한 상품가운데평균 87%거 귀금속이었다.
오스만제국의 인구는 16세기에 증가했다가 그다음부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페르시아는 오스만을 경유하지 않는 우회로를 찾아 나섰고 오스만은 기득권을 악착스럽게 지켰다.
무굴제국의 도시 5000여개의 도시에거주하는 인구가 전체인구의 15%에 달했다.
인도인구는 1500년에 약1억,1600년에 1억5000만,1800만 1억8500만~2억으로 추산된다.(Richards)
동남아시아산 후추는 인도산 후추의 3분의1에도 미치치 못하는 가격으로 인도산 후추를 몰아냈다.
말라카도 한때는 인구가 10만을 넘었지만 포르투갈인이 진출한 뒤로는 2만5천~3만5천으로 인구가 많이줄었다.
1632년일본상인 태국 아유타야에서 대거 학살되고 추방됨.
동남아시아의 대유럽 수출은 대중국 수출의 8분의1에 불과하였다.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에서 공급된 화폐의 대폭적인 증대에 의해 금리가 뚝 떨어졌다.
16세기 초반은 마닐라에 거주하는 중국이은 무려 2만 7천으로 급증했다.
일본선박은 중국과 직접 교욕하는 것이 아직 금지돼 있으므로 천상 마닐라 베트남의 호이안(페포)같은 동남아시아 항구에서
일본산 은과 중국산 비단을 교환할수 밖에 없었다.1604년~1635년에는 한해 평균 10척의 일본선박이 남하해서 호가를 받고
무역을 했다. 이 31년동안 몯 124척으 배가 베트남으로 향했다. 필리핀으로 간것은 56척, 시암으로 간것도 56척이었다.
그러다 1635년에 활동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1604년부터 1635년까지 355척의 일본선박이 동남아시아로 공식 출항했다고 기록.
일본의 대외수출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0%에 달했다.
1650년대에도 매년 200척의 중국 선박이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1500년 일본인구 1,600만명, 1750년에 2,600만~3,200만명
일본의 일인당 소득은 18세기 내내 꾸준히 증가했다.
18세기 일본 교토 에도의 인구는 각각 100만을 넘었다.
일본이 은수출도 18세기까지 계속 되었던것 으로 보인다.
17세기초반 난징인구는 100만이었고 베이징인구는 60만을 넘어섰다.1800년 광주와 자매시 포산의 인구를 합치면 모두 150만이었다.
주강델카의 농민들은 비식량작물을 재배하고 자연히 벼농사는 상류지대로 밀려났다.
18세기 초반에는 이지역(광동지역)에 필요한 쌀의 절반밖에 지급할수 없었다.
명은 송조와 원조가 부분적으로 지폐에 의존하던 정책을 폐지했다. 국가 재정이 어려어졌을때 지폐를 마구잡이로 발행하ㅕㄴ
결국인플레이션을 초례하는 폐단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명대 도자기 수출의 80%는 아시아(20%는 일본)가 소화했다. 그리고 양으로 따지면 16%이지만 금액으로 따지면 50%에 해당하는
고급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그러나 명청교체기에는 도자기 수출이 금감하여 1645년이후에는 3분의 2가 줄었다.
17세기말엽에 상하이에만 60만명의 방적공이 있었고 이들이 만든 면사로 20만명의 직공이 옷감을 짯다.(호 추이메이 1959)
닐스스텐스고르(1972)처럼 로사비도 대륙을 횡단하는 카라반 무역은 아시아를 항해하는 해상무역에 완전히 제압당한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해로가 수송비를 크게 떨어뜨리지는 못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요, 상품의 최종
판매가격에서 수송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했다는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Menard) 따라서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도는 프로투갈 선단은 한때 반작했을뿐 얼마 가지 않아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횡단하는 육로에 밀려났다. 스텐스고르에 따르면 유럽에
들어온 아시아 상품은 카라반 무역을 통해 들어온것이 희망봉을 거쳐 해로로 들어온것보다 두배나 되었다.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지대로 향하던 조공무역사절단은 16세기말부터 발길이 뜸해지다가 명조의 위세가 급격히 기울던 1640년 말까
는 교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투르판은 이때를 틈타 타림 분지 북부의 무역로를 장악하려고 애썼다.
무굴제국이 인도대륙 남부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군마를 비롯한 말의 수요가 폭증했다.
17세기 초반 중앙아시아가 해마다 수출한 말은 무려 10만마리에 이르며 그중 1만2천마리는 무굴제국으로 유입되었다.(Burton)
카라반들은 러시아의 수출품을 결재하기 위해 약간의 금은을 싣고와야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중앙아시아의 대 러시아면직물수출이 늘어나면서 무역수지가 균형을 찾더니 얼마후부터는 중앙아시가가 러시아가와의 무역에서 흑자를 보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귀그속으로 수입대금을 결제해야 했다. 러시아 황제들은 귀금속과 주화의 유출을 금하는 칙령을
잇달아 발표했다. 17세기 중엽부터 러시아는 부하라 상인을 비롯하여 중앙아시아 상인을 배제하고 자국상인이게 무역을 전담시키는
정책을 추진했고 18세기에 들어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러시아는 남쪽으로 모피,가죽,금속제품을 수출하고 비단 공단 목화 인디고등을 수입햇다. 이 무역에서 러시아는 적자를 보았기
때문에 발트해 연안국과의 무역에서 벌어들인 금과 은을 남쪽으로 재수출해야 했다.
...아르항켈스크를 통해 외국상인이 장악하던 무역을 발트해를 검점으로 러시아 상인이 장악할수 있도록 밀어 주기 위환 지원책의
일환이었다.(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로 아르항겔스크의 교역량은 90%나 줄어들었다.)
포트르대재 말년 러시아의 무쇠 생산량은 영국을 앞질렀으며 1785년에는 유럽전체 생산량을 능가할만큼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7세기말과 18세기초의 대륙횡단무역은 중앙아시아를 거치는 남쪽무역로에서 러시아를 거치는 북쪽무역로는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는것을 알았다. 이는 러시아인의 시베리아 이주가 본격화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카스피해의 바쿠를 손에 넣었을때 그(표토르대제)는 알렉산드로스 황제가 밟은 길에 들어선것에 대해 기쁨의 축배를 들었는데 그길은 다름아닌인도로 가는 길이었다.
18세기에 들어 유럽 무역의 주축은 발트해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바뀌었다.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송원명을 거치는 동안 은과 동은 주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흘러갔다.
중국에서는 금은비가가 상승하여 1600년에는 1:8이었던것이 17세기 중엽과 말엽에는 1:10이 되었고 18세기 말엽에는 1:20이 되었다.
그러나세계 어느곳과 비교해도 중국의 금은비가는 대체로 낮은 편이었다.
1592년부터 17세기 초반가지 광저우에서 금은비가는 1:5.5에서 1:7이었던 반면, 스페인에서는 1:12.5에서 1:14였다 은값은 중국이 스페인의 정확히 두배였다.
중국의 금은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인도상인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 상인의 주도로 아시아 지역간 지역내 무역및 정화 송금이 늘면서 1640년의 경우 절반에 달았던 유럽의비중은 1700에는 겨우 5분의 1로 줄어들었다.
배럿에 따르면 17세기와 18세기에 아메리카산 은의 70%는 유럽으로 반입되었고 이가운데 다시 40%는 아시아로 유입되었다.
세계전재 금 생산의 30%는 아메리카 대륙이 아닌곳에서 나왔다 1500년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금은 아프리카, 그중에서서도 주로
서아프리카에서 생산되었다. 서아프리카는 16세기에 50톤의 금을 수출했고 17세기에는 100톤가까이 수출했다. 18세기에는 60톤으로감소하더니19세기로 접어들면서 생산이 중단되었다.(배럿)
1740년과 1745년 사이에 영국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수입품에 대해 지급한 결제액 가운데 환어음이 차지하는 비중은
20%(삼품과 귀금속이 80%)에 달했다.
오스만에서 비단가격이 처음에 오른것은 일차적으로 유럽에서 수요가 늘었던 탓으로 이는 유럽이 신대륙에서 들여온 은으로 오스만에서도 비단을 살수 있는 여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것이다.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인구는 14세기에 감소했다가 1400년을 고비로 상승새로 돌아섰다.
1750년대의 전세계 GNP는(1960년 미국달러화기준으로) 1,550억 달러인데 그중 77%인 1,200억 달러가 아시아의 몫이고 350억
달라는 서양의 몫이다.(여기에는 유럽은 물론 아메리카 대륙,러시아 일본까지 포함되어있음)
1800년에도 전세계 GNP 1,830억 달러 중에서 75%애 해당하는 1,370억 달러가 오늘날 저개발국가로 분류되는 지역에서 나왔다.
1860년 전세계 GNP는 2,800억 달러로 늘었는데 이중 약 60%에 해당하는 1,650억 달러는 오늘날의 제3세계에서 나왔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세계통계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낮았고, 그후 아시아의 경제성장에 의해 그 비중이 증가했던것이다.
1800년 중국의 1인단 GNP는 1960년의 환율로 계산하였을 때 228달러인데, 18세기의 여러시기에 산정한 영국과 프랑스의 GNP는
150~200 달러 정도였다.
1850년 중국의 1인당 GNP는 170달러 였다.
메디슨(1991)의 추정에 따르면 1400년경의 1인당 생산량 내지 소득은 중국이나 서유럽이나 대동소이했다.
1800년의 경우 선진세계의 1인당 소득은 198달러였고 저개발 세계는 188달러였다. 그러나 중국은 210달러였다(베오록...)
16세기에만 아시아의 후추생산은 이전의 곱절이상으로 늘었는데 그중 상당량을 중국이 소비했다(피어슨)
1585년 까지도 홍해를 통해 유럽으로 간 향신료의 양이 희망봉을 거쳐 간 향신료의 4배였다(다스 굽타)
포르투갈 정부가 세운 인도무역상사는 당장 벌어들이는 수익보다 운영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 납세자와 정부에 큰 부담이 되는 지경
이었다(Barendse)
1680년과 1720년 사이에 일본 나카사키로 드나드는 중국 선박의 수는 3배로 늘었고 중국의 대 바티비아 무역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1752~1754년에 유럽이 아시아로 보낸 소량의 소출품이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입한 양보다 많았다.(유럽이 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수출한 물량한 아시아로 수출한 물량보다는 많았다.이는 아메키라가 아닌 다른지역, 즉 아시아에서는유럽의 경쟁력이 뒤진데 원인이 있다)
바스코 다가마는 그나마 아랍인 항해사를 고용해야 했다.
원나라가 일본을 침략할때 동원한 함대수는 2,000척이었다.
1588년 영국과 해전을 벌였던 스페인이 동원한 무적함대수는 132척이었다.
인도에서는 원양 항해용 선박에도 갑판을 보호하기 위한 쇠못을 사용하지 않았다.쇠가 부족하거나 비사서 그랬을테지만 아무튼 인도인은 쇠못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외국기술을 도입할대만은 예외였다. 대신 인도 조선업자는 질긴 섬유로 목재를
묶고 아교로 틈새를 메웠다. 덕분에 뛰어난 내구성을 갖게 되어 유럽에서는 인도에서 건조한 선바을 높이 평가 했다.
인도선박에는 포를 많이 탑재할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1619년 기준으로 인도의것은 500톤급 선박의 가격이 유럽에 비해 약 1000파운드 낮았다.
1800년이 되면 영국에서 생산된 면짓 옷감 7필중 4필이 수출되었다.
면직물이 영국의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분의 1로 금방 늘어나더니 1850년에는 절반으로 늘어났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석탄은 연료로 각광받지 못했다 값싼 숯이 지처닌데 숮을 버리고 닶비싼 석탄으로 대체할 이유가 없었다 석탄이
귀한 남아시아ㅏ에서는 특히 그랬다. 영국에서는 18세기 전반기에 숯의 가격이 오르고 석탄의 값은 떨어져 철을 제련하는 데도
숯보다는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것이 점점 싸게 먹였다.
1677년경 영국 동인도회사가 런던 보사에 보낸 보고서에는 "유럽에서 후추가격이 하락하여 이곳의 후추가격도 하락할수 없겠냐는것에 대해 이지역의 인접국들에서 후추는왕성하게 소비되고 있고 데칸 말라바르뿐만 아니라 외지로도 활발히 수출을 하고 있어 본사에서제시한 수준으로 후추가격을인하하는것을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썼다.
인도에서의 이자율은 월 0.5~1% 수준을 유지했다.(Habib)
선박을 만드는데 쓰는 양질의 단단한 목재가격이 중국남부에서 급등하기 시작하자 선박업은 그런 목재를 싼값에 쉽게 구할수 있는
시암이나 말라야로 옮겨 갔다(Marks)
중국에서든 영국에서는 수확공급에 반비례하야 곡물가격이 변했지만 중국 남부가 영국보다 가격의 등락폭이 작았다.
중국은 1900년경에 이르면 중국의 도시인구 비율은 전체인구의 4%대로 떨어진다.
1250년부터 1450년까지 유럽전역에 걸친 하강국면....
13세기말에 대도시 상파뉴의 쇠퇴가 있었다(브로델)
17세기 유럽여러나라가 하강국면일때 네덜란드는 황금기였다.
아시아세는 상승국면이 1400년에 시작되었고 유럽에선 1450년에 시작된다.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동나아시아가 17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수출품 가격의 하락,생산의 감소,마닐라등지의 무역부진으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는다(리드)
자바동부지역의 경우 17세기로 접어들어 처음 75년동안 한발이지속되었고 특히 1645~1672년 강우량은 평균을 계속 크게 밑돌았다(리드)
동남아 대륙부는 18세기 까지 지속적으로 번영을 구가했다(러버먼)
중국과 일본에서는 1630년대와 1640년대에 농업생산 특히 쌀 생산량이 급감했다
러시아는 17세기에도 팽창을 계속 하고 있었다.
중국이 일본에서 수입한 은의 양은 1630년대 전반에는 120톤수준에서 오르내리다가 1637년에는 200톤에 달했고 1639년에는 170톤이었다. 그러다가 1640년대 전반에는 연평균 105톤으로 떨어졌다.(물러프니, 샤)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 세비야에 도착한 스페인령 아메리카산 은의 양이 감소했다고해서 아메키라의 은상샌이 줄어들었다고 볼수 없다.전체의 17%선에 머물렀던 태평양을 횡단하는 선적량이 17세기 초반 30년동안 25%선으로 늘어났고 1640년대에는 무려 40%이상으로 늘어났다
아메리카에서 마닐라로 보내진 은은1621~1630년 10년은 23톤이었던것이 1631~1640년의 10년은 18톤으로 다시 1641~1650년의 10년은 10톤으로 줄었다.중국과 마닐라 사이의 무역이 큰폭으로 감수했다고 말할수 있는 기간은 1636~1641년에 불과하다(물러프니,샤)
1640년대 초반 태평양을 건너온 은은 23톤에서 10톤으로 13톤이 감소했고 인본산 은도 105톤으로 줄었으며 심지어 명이 멸망하기 바로 전해인 1643년에는 70톤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일본산 은은 1630년대 초에는 약 120톤이었다.(물러프니,샤)
전세계적으로 생산된 은은 1610년에는 매년 150톤, 1620년대에는 178톤,1630년대에은 162톤이었다 이은은 거의 다 중국으로집결되었다. 1640년대에는 89톤으로 떨어졌고 1650년대에는 69톤이 되었다가 1660년대에 다시 82톤으로 늘어났다.(리드)
명나라에서 쌀값은 일반인사이에 널리쓰이던 동전을 기준으로 삼았을때 1628년과 1632년 사이에 무려 10배 폭등했고 1642년에는 그이상 으로 뛰어으며 그후에도 높은 수준에서 요동하다가1662년에 가서 약 2배로 진정새로 돌아섰다. 그리고 1689년 부터는 완전히 안정되었다. 은화를 기준으로 삼았을때는 1642년에 5배밖에 오르지 않았으며 1663년 부터는 1630년이전의 가격을 회복했다.
윌킨슨이 강조하듯이 동/은 가격비는 점점상승하여 1642년에는 2배이상으로 벌어졌고 1647에 이르면 무려 9배로 치솟았다. 그이후로는 서서히 하락하여 1662년에는 예전 수준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1680년대까지는 약간 올라간 수준에서 등락을 반복했다.
폰글란에 의하면 중국으로 유입된 은은 1631~1635년에는 436톤,1636~1640년에는 573톤(일본에서 반입된 물량은 209톤)1646~1655년에는186톤이었고 그가음부터는 물량이 서서히 늘었났다고 한다.
1647년에 광둥지방 총독이황제에게 올린 보고서에는"무역이(사실상)중단되었습니다...광둥은 마카오에서 거래하러 오는 사람이 있어야 흥합니다. 그들이 오지 않으면 광둥은 어려워집니다"이는 포르투갈인이 오지 않으면 은도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알트웰)
마닐라 마카오를 통해 거래되던 은의 규모는 1630년대에 43톤이었지만 1640년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난 다음부터 포르투갈상인은
스페인려우마닐라와의 은교역을 중단했다(알트웰)물론 이는 은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프랑크)
은수출분에 대한 과세액은 1636년과 1640년사이에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그이후로 중국에서 마닐라로 오는 선박의수도 123척에서
1641~1645년에는 83척으로 1646~1650년에는 58척으로 1656~1660년에는 겨우 25척으로 점점 줄어들었다(Adshead)
1580년 이후 값싼 스페인의 은과 페르시아의 주화가 반입되면서 경쟁력을 상실한 오스만 제국의 조페창이 조업을 중단해야 했다.
오스만경제의 외국주화에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높아졌고 오스만의 조폐창은 1640년이후 완전히 조업을 중단했다
1640년에는 영국도 병사들의 급료를 지불할 자금을 조달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17세기 전반기에 아메리카와 스페인의 무역량은 3분의 1이 감소했고 지금의 수입은 3분의 2나 줄었다. 이런 감소세는 1640년을 전후하여 더욱 빨라졌다.
스페인의 몰락이 시작된것은 스페인과 스페인의 국제석 위상이 눈에 띄게약화된 1640년 말부터 라고 한다.또한 인도의 고아를 근거로 삼았던 포르투갈의 무역도 바닥을 기다가 1640년에는 음울한 시기로 접어들었다(Ames)
1640년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네덜란드 자본을 몰아냈다. 브라질에서 밀려난 내덜란드는 영국령 바베이도스로 가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건설했다(Harlow, Frank)
1642년 포르투갈 영국과 최초의 통상조약 체결로 포르투갈은 알종헌 댜거룰 차루눈 대신 영국의 확실한 보로를 받을수 있게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아시아에 주로 수출한것은 은이었는데 이 것도 1640년대에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리치,윌슨)
그리고 얼마전까지 은의 주요 수출국이었던 일본은 모든 형태의 은 수출을 금지시키는 극약처방으로 위기에 대처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이론의 반은 즉 저유명한 쇄국정책은 세계의 전지역에 대해 무역적자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1590년부터 1680년 까지 장기간 지속된 유럽 경제의 위축된다.
러시아는 1772녀과 1782년에 무역수지 흑자가 잠시 급감하는데 이는 무기 구매탓으로 보인다(브로델) 또1762~1763에도 무역수지가
큰폭으로 감소하였는데 이 시기는 무기 수입액의 증감과는 무관하게 러시아의 수출이 크게 감소한 시기와 일치한다(프랑크)
도 이세번의 시기는 브로델이 암스테르담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장에서 논의하는 세번의 세계경제 후퇴기와도 일치한다.
브로델이 영국과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무역수지를 정리한것중에 1760~1763년과 1772~1773에 영국의 수입이 뚝떨어졌음을
알수 있다.
1771~1772년에 유럽 전역을 휩쓴 기상이변과 특히 노르웨이와 독일의 기근을 (브로델은) 지적하고 있다.
1772~1772년에는 인도에도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고 동인도 회사의 기능을 혼란에 빠뜨렸다(브로델)
1780년대 초반 아메리카 경기후퇴 발생,1785~86년사이 더심각한 경기체체1786년 세이스 반란1787년 연압규약대신 미국 헌법제정
1760년대에는 오스만 제국의 경제도 가파른 하강세로 돌아선다.
1050~1250년은 유럽에서 팽창의시기였다(십자군원정,식민지 개척)
1250~1450년의 위기 내지는대수축시기는 흑사병도 포함된다(윌레스타인)
1250~1350년에서 전반을 팽창기로 1300년이후는 수축기로 파악한다.
18세기 중반이후 인도에서는 유입되는 지금보다 유축되는 지금이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남.
벵골의 비단및 목화의 생산량 뚝떨어짐.1733~1737년동안 55개에 1만 7천루피에서에서 1748~1750년 36개에 7천루피로 감소
벵골은 봄베이와 마드라스로 중국산 비단이 대거 유입되면서 수요 감소라는 악제 만남.
18세기 초반 인도 서부 구자라트의 대규모 해양무역의 몰락이었다(케임브리지 인도경제사)
18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대외무역은 침체도어 있었으며 프랑스가 영국을 밀어내고 오스만 제국의 최대 교역상대국으로 떠오르고
프랑스를 통해 아메리카 에서 들어온 상품이 오스만 경제에 타격을 입혔다. 값싼 북아메리카산 목화가 아나톨리아산 목화를 몰아
냇으며 값싼 카리브산 커리가 카이로를 통해 수입되던 아라비아산 커피를 몰아냈다.
청조 1720년대부터 은의 수입이 급감하고 18세기 중반까지 감소세가 이어지더니 1760년 이후로 다시 증가세로 들어섰고
1780년대에는 은이 대거 유입되었다(lin)
브로델은 홍해무역이 16세기 와 마찬가지로 18세기 말에 와서도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이 인도로 빠져 들어가는 무역로라고 함.
(18세기경)지중해,레반트,이탈리아,스페인에서는 영국제품은 형편없이 밀려났고 오래전부터 영국이 단단이 입지를 굳혀 두었던 포르투갈,러시아에서만 간신히 우위를 지켰다(브로델)
18세기 후반에 카리브지역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노예무역은 부진상태를 면치 못하였다(프랑크)
영국 1690년 이자율은12%였고 1694년 영국은행 설립이후 8%로 떨어졌다.1752년에는 무려 3%로 떨어졌다,(존먼로)
디킨슨은 1690년대에 이자율은7~14%,1707~1714년에는 6~7%그뒤 1730년대까지 5%그리고 하락세가 계속되어 1750년에는 3%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17세기 및 18세기 중반 사이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임금을 본다면 유럽이 아시아보다 놓은 수준을 유지했다(프랑크)
19세기 청조의 향신 등의 계층이 짜낸 경제잉여의 규모가 적어도 전체 국가 수입의 30%정도였을것으로 추정한다(리피트)
애덤스미스는 중국의 극빈층은 유럽과비교가 안될만큼 열악한 상황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또 노동자의 실질임금과 그 임금으로
구입할수 있는 새왈필수품의 실제양은 중국이나 인도가 유럽보다 작았다고 지적한다.
1700년의 경우 1헥타르당 인구가 중국은 3.6명,인도는 3.8명이었던 바녕 프랑스는 겨우 1.1명, 영국은 11.5명이었다(추정치이지만
1880년 일본은 5.0명)
아시아에서는 1700~1750년까지 인구가 26%증가 했지만 1750~1800년 사이에는 20%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중국은 1700~1750년의 인구증가율은 그앞 50년전시기나 그이후 50년시기보다 오히려 적었다.
인도는 1700~1750년에는 제로 였고1750~1800년에는 0.5%감소했다(클라크)
첫댓글 아, 애써 정리하셨는데 포기하였습니다. 경제사, 재미는 있는데 워낙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는 지라... 대학 다닐 때 [경제사 학습], [경제사 총론]이란 책이 있었는데 사실 경제사는 아니었어요. ^^
오호라 정보를 잘 뽑으셨네.... 감사..
님의 수고에 찬사을 보냅니다 ^*^*
경제사총론 일본인이 쓴 책이던가요? 일월서각에서 나온? 읽은지 한 이십여년 넘었군요.빨간분필님도 그 책을 읽으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