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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야행(夜行)-3
악삼과 갈운영은 음습하고 싸늘한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있
었다. 계단의 중간까지 걸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환객 4호를 통해 알아낸 사실
을 생각하면서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매."
앞서서 걸어가던 악삼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갈운영을
불렀다.
"네, 말하세요. 악 가가."
갈운영은 앞일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악
삼이 부르자 깜짝 놀래며 대답했다. 악삼은 갈운영의 왼 손
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음시조를 3단계의 수준까지 습득했지."
"네."
갈운영의 대답은 짧고 차분했다. 악삼의 머리라면 지하 감
옥에서 들은 내용만 가지고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야기가 너무 늦게 나왔다고 갈운영은
느꼈다. 악삼은 갈운영의 안색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영매가 언제나 착용하고 있는 검은 장갑을 이상하게
생각했지. 아니 영매가 숨기려고 하는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언제나 시선을 돌렸어."
"악 가가..."
"그러나 지금부터는 이야기를 해야겠어. 아니 단순하게 이야
기를 나누기 보다 닥쳐올 문제부터 해결하자."
악삼의 두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악 가가. 제가 부동심결과 만심진광을 이야기할 때 음시조를
3단계까지 익혔구나 생각하셨죠. 그리고 음시조의 폐해가 내
게 닥칠 가봐 걱정하는 거죠."
악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제게는 부동심결과 만심진광이 있어
요."
"두 가지 수련법이 칠살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니?"
"네, 충분히 가능해요. 사실 그동안 수련하고 있던 오독지련
(五毒之練)을 며칠 전에 완성한 덕분에 모든 무공이 급증했어
요. 특히 1단계에 머물고 있던 음시조는 단번에 3단계에 올랐
어요."
"오독지련?"
악삼은 갈운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오독지련의 수련 법이 마
음에 걸렸다. 오독지련이란 이름 자체가 불길한 느낌을 준
것이다.
"네. 처음 듣는 수련 법이죠."
"그래. 처음 듣는 수련 법이구나. 혹시 운남 오독문의 비전이
니?"
"네. 본 문에서 비밀리에 내려오는 수련 법이에요. 오독지련
은 다섯 가지 극독을 이용해 내공과 역량을 일시에 급증시키
는 방법이에요."
"정통이 아닌 편격한 수련 법이구나."
내공을 일시에 급증시키는 방법은 많은 문제점과 부하(負荷)
를 안는 법이다. 이 점을 악삼은 잘 알고 있었다. 태을진
결에 있는 역기행공을 사용한 적이 있었기에 내공에 있어 편
격한 방법이 얼마나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지 체감하고 있었
다.
갈운영은 오독지련을 이용해 음시조마저 익혔으니 무슨 문제
를 안고 있는지 몰랐다. 게다가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는 갈
운영이 악삼에게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유리 인형처럼 보였
다. 강인하고 냉정한 갈운영의 평소 모습과 다른 행동이 악
삼의 마음에 절실히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통의 내공 수련 법은 아니에요. 하지만 본 문의 조상
님들이 오랜 세월을 연구한 결과물인 만큼 믿을 수 있어요.
설마 조상 님들이 후손에게 피해가 가는 무공을 남기셨을까
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요."
"영매의 말은 맞지만..."
갈운영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할수록 악삼의 불
안감은 가중됐다.
"걱정 마세요. 그런데 오독지련 덕분에 음시조를 3단계까지
습득해 사부님이 남긴 봉서를 열어볼 수 있었어요."
"봉서? 혹시 만심진광과 부동심결의 구결이 들어 있는 봉서
였니?"
"네. 사부님이 자신의 사연과 유언을 같이 남기셨더군요. 덕
분에 악 가가의 원수를 쉽게 찾을 수 있었죠. 음시조를 3단계
까지 익히기 전까지는 절대로 열어 봐서는 안 된다는 유언
때문에 궁금했는데 이번에 확인해서 속이 다 후련해요."
갈운영은 마치 체한 울혈이 풀렸다는 듯 편안한 기색을 드러
냈다. 그러나 악삼은 갈운영이 일부로 대화를 다른 방향으
로 진행하려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영매.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어."
"무슨 부탁인데 그렇게 어렵게 말하세요. 제가 악 가가의 부
탁을 안 들어 주겠어요. 어서 말하세요."
"장갑을 벗어서 맨손을 보여다오."
"......"
악삼의 부탁은 갈운영의 입을 다물게 했다. 갈운영은 굳은
얼굴로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나 악삼도 물러날 생각은 없
었는지 하염없이 갈운영의 왼손을 바라만 보았다.
"알았어요."
갈운영은 항복했다.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염려와
걱정이 가득한 악삼의 눈동자 앞에선 버틸 재간이 없었다.
갈운영은 두 눈을 감고 오른손으로 검은 장갑을 잡아 벗겨버
렸다.
"음~."
악삼은 입술을 비집고 나온 신음성은 무거웠다. 음시조를
익히게 되면 손이 회백색으로 변하는데 갈운영의 손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갈운영의 왼손은 먹물에 담겨져 있다가
나온 것처럼 검은 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보기 흉하죠."
갈운영의 음성은 침울했다. 악삼은 대답할 수 없어 침묵을
지켰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3단계를 이루기 전까지는
울긋불긋한데다 썩은 부위와 진물이 나는 곳도 있었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렴."
"음시조는 시독을 흡수해 익히는 무공이에요. 하지만 저는 여
자라고요. 도저히 시체를 가지고 무공을 연성할 수는 없었어
요."
"그렇다면... 오독지련을 수련한 이유가 음시조 때문이구나."
악삼의 안색은 굳어져 갔다.
"네... 시독을 대신해 오독을 사용했어요. 하지만 오독지련을
수련한 덕분에 내공이 급증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었어요."
"그만큼 위험부담도 커졌겠지. 오독지련과 음시조는 둘 다 독
을 사용해 수련하는 편격지학이다. 하나만 익혀도 폐해가 심
한데 두 개나 익혔으니 위험은 몇 배나 증가하지 않느냐."
갈운영은 침묵했다. 악삼은 갈운영의 침묵이 무겁게 느껴져
안색이 자기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갈운영이 볼까봐 악삼은
급히 고개를 돌리다가 한 가지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
"설마..."
불안한 생각이었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악삼의 마음
은 심하게 흔들렸다.
"만심진광과 부동심결의 효과는 어느 선까지 있는 것이냐?"
"네! 아 그게..."
갈운영은 대답을 회피했다.
"칠대금지무공을 만든 칠리산당에서 칠살기를 만드는 데도
오랜 세월이 걸렸다. 아무리 소림사와 아미산, 보타산이 힘을
합쳤다 해도 그리 쉽게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지."
악삼의 어투는 단정했지만 날카로웠다. 갈운영은 고개를 돌
리며 대답하기를 피했다. 그러나 악삼은 대답이 필요했다.
아무리 갈운영이 대답하기를 회피해도 악삼은 참을성을 가지
고 기다렸다.
반 시진이 지루하게 지나갈 동안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은 달랐다. 대답을 할 수 없다
는 갈운영의 애절한 눈빛과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악삼의 의
지가 깃 든 강렬한 눈빛은 허공을 오가며 무수한 대화를 나
누었다.
"4단계까지만 제어할 수 있어요."
갈운영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악삼은 기쁘지 않았다. 최악의
예상이 맞았기 때문이다.
"시독을 사용해 익힌 음시조일 때 4단계까지 막는다는 이야
기구나. 그럼 오독지련으로 익힌 음시조는 어떤 폐해를 주는
지는 아직 모른다는 것이지."
"네..."
"왜! 왜... 음시조와 오독지련을 수련했니. 분명히 문제가 생긴
다는 것을 알았을 건데..."
악삼은 힘없이 물었다. 갈운영은 아무런 말없이 멍청하게
서서 과거를 회상했다. 꿈꾸는 듯이 빛나는 눈동자는 과거를
추억하는지 흐릿하게 변해버렸고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
오는 음성은 애잔했다.
"사부님은 제게 어떤 고난이 앞에 있어도 피하지 말고 부딪
쳐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죠."
과거를 회상하는 갈운영의 눈동자는 어느새 슬픔에 젖어 있
었다.
"3년 동안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고통을 참으면서 내게 무공
을 전해주는 것에만 매진하셨어요. 하지만 어리석은 나는 그
사실도 모르고 태만했어요."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란다. 자식은 부모가 되 봐야 부모 마
음을 안다고 하지 않더냐."
"네. 하지만 사부님이 돌아가신 날 그 사실을 알게된 저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요. 봉인한 음시조를 꺼내 수련한 것
은 내 자신을 향한 채찍질이었어요. 게다가 사부님의 원혼을
위로하는 길은 복수라고 생각했지요. 저는 강력한 무공은 필
해 했어요."
"네 자신을 망치는 길을 영매의 사부님이 원했을까?"
악삼의 질문은 갈운영이 수없이 자문했던 내용이었다.
"원하지 않으셨을 거 에요."
"흠... 너무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어차피 지난 일이다. 흘러
간 물은 다시 찾을 방법은 없지. 하지만 새로운 물을 찾을 수
는 있다."
"악 가가..."
"밖으로 나가자. 지금부터 우리는 바쁘게 움직여야 해. 강호
전체를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행도와 푸른 늑대를 찾아야
하니까."
악삼의 얼굴은 굳건한 의지가 가득했고 오행도와 푸른 늑대
를 찾아내겠다는 집념이 타올랐다. 오행도와 푸른 늑대를 찾
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가 있으면 산산조각을 내서라도 찾겠
다고 결심한 것이다. 사실 악삼은 가까운 사람에겐 더 없이
호의를 베풀지만 그 외의 존재에 대해서는 눈곱만치도 생각
하지 않는 성격이다.
특히 어머니와 닮은 갈운영과 갈운지에 대한 생각은 각별했
다. 갈운영은 밖을 향해 걸어가는 악삼의 힘찬 걸음을 바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악삼과 첫 만남을 가졌을 때부터 일부
로 시비를 걸며 멀리 하려고 노력했던 자신의 모습을 갈운영
은 기억하며 지은 미소였다.
쌍둥이로 태어난 갈운영과 갈운지는 똑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성격은 전혀 달랐다. 그러나 생각하는 방식이나 취향은 무서
울 정도로 비슷했다. 둘 중에 하나가 어느 물건이나 사람에
대해 애착을 가지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마음이 전
염되는지 나중에 같은 마음을 가졌다. 쌍둥이가 가지는 일
종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갈운지가 악삼을 사랑하듯 갈운영 역시 강한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마음을 알고 있는 갈운영은 자기 마
음을 억지로 봉쇄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갈운지의 투정
으로 악삼을 가가라 호칭하면서 그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장벽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갈운영은 다시 한번 장벽을 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수 년 동안 무공을 습득하며 생긴 고행과 산산이 부셔진 첫
사랑으로 인해 황폐해진 마음이 악삼과 자연스럽게 지내는
동안 사라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를 위해 어려운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남자를 어
느 여인이 싫어하겠는가. 그것도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가
자신의 안위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인다는데...
갈운영은 달콤한 느낌을 즐기며 계단을 올라가다가 악삼의
등을 향해 말했다.
"악 가가. 너무 마음쓰지 마세요. 그래도 봉서를 확인한 덕분
에 척 신명의 정체도 알아냈으니까요."
"척 신명의 정체라니?"
악삼이 알고 있는 척신명의 정체는 자신을 이용해 이익을 챙
기려는 인물로 매우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갈운영
의 말속에는 그 이상의 다른 뜻이 내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네. 척 신명의 진정한 정체를 말하는 것이죠."
갈운영의 두 눈동자에 섬뜩한 기운이 번뜩였다.
"사부님이 남긴 봉서에 한 인물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어요.
만약에 만나게 된다면 상대하지 말고 무조건 피하라고 쓰여
져 있을 만큼 위험한 인물이더군요."
"그 인물이 척 신명이니?"
"네. 척 신명 아니 정확히는 무객 척 소람이죠."
"무객! 환객과 함께 천하2대신비객으로 불리는 무객 척 소람
이 척 신명이라는 것이냐?"
악삼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자 깜짝 놀랐다. 척 신명의 숨
겨진 정체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의외의 인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갈운영은 악삼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
들자 말없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가지고 척 신명이 무객이라고 확신하느냐?"
악삼은 명확한 증거를 확인하고 싶었다.
"사부님이 남긴 봉서에 무객의 무공이나 성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있었어요. 그래서 척 소람이 변장한 이 장도 일행을
제압할 때 사용한 무공을 보고 바로 알아냈어요."
"무공만으로 확신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지 않을까!"
"악 가가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무객의 독문절학
인 무중행(霧中行)과 응혈조(凝血爪)를 최상의 경지까지 사용
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죠. 게다가 환객 4호와 두 부하를 한
꺼번에 제압할 자는 당연히 무객 척 소람밖에 남지 않아요."
"흠... 그렇구나. 그리고 보니 환객 4호의 정체도 그때 알아낸
것이구나."
갈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빠졌다. 척 소람
이 은밀하게 이 장도 일행에게 다가가는 것을 목격하고 인기
척을 죽인 것은 다시 생각해봐도 하늘이 내린 은총이었다.
덕분에 원수의 정체를 파악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닥칠 위험
마저 예측할 수 있었다.
갈운영의 사부는 그녀가 원한을 갚는다고 돌아다니다 다칠까
봐 자세한 언급을 피했다. 그녀 혼자 돌아다녀 봐야 사해방
이나 자기 형제들을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세나 사연. 무객에 대한 것을
남긴 것은 갈운영이 혹시라도 그들과 조우할까봐 염려돼 봉
서에 남긴 것이다.
"허! 강호인들이 평생을 돌아다녀도 만날 기회가 없다는 천하
2대신비객을 나는 모두 만난 셈이군. 이걸 복이라고 해야할지
화라고 해야할지 정말 모르겠구나."
"복이면서 화고 화면서도 복이에요."
"영매의 말이 옳겠구나. 그런데 척 소람이 그들을 제압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은밀히 행동했을 건데 영매에게 들킨 것이냐?
그건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악삼의 의문은 당연했다.
"저는 이 장도 일행이 운문상단의 상선에 승선한 순간부터
그들을 감시했어요."
"승선한 순간부터 감시를 할 이유가 있었니?"
"네. 있었어요. 처음에는 이 장도 일행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
어요."
"그들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갈운영의 대답은 너무나 단순해 악삼은 어이가 없었다.
"네. 그들의 행동은 운문상단의 상선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승선했다는 생각을 들게 했어요. 게다가 이 장도의 얼굴은 어
딘가 부자연스럽더군요."
"인피면구를 파악할 수 있다니 놀랍구나."
"사부님께 변장술을 배울 때 생긴 안목이 무의식적으로 인피
면구를 눈치채게 한 것이죠."
갈운영이 변장술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악삼을 놀라게 했
다. 여인의 몸으로 뛰어난 무공을 소유한 것도 놀라운데 여
러 가지 능력마저 가지고 있는 갈운영의 능력은 대단했다.
특히 인피면구를 간파한 갈운영의 안목은 악삼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역시 사람은 겉으로 본 것만으로 단정지을 수 없구나. 한 사
람을 제대로 알려면 오랜 세월을 겪어봐야 한다는 말을 이해
하겠구나.'
악삼은 사람을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악삼이 자기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며 감탄해 하자
갈운영은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다. 두 볼에 은은한 홍채
가 떠오르자 갈운영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변장한 이 장도를 계속 감시하다가 척 신명이 척 소람이라
는 증거를 잡을 수 있었어요."
"우연은 필연이 가져다 주는 선물이라고 누가 말했지. 영매가
척 소람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야."
"아니에요. 그냥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것과 같은 거 에
요."
악삼의 칭찬은 갈운영을 기쁘게 했다. 그렇지만 칭찬을 받았
다고 생색내기엔 미진함이 느껴져 속담을 인용했다. 악삼은
갈운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다가 운문상단의 상선을 타고
대운하를 운행하던 때를 기억했다. 특히 악삼의 뇌리를 스
치고 지나간 것은 이 장도 일행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던 시
점이었다.
"장강수로연맹의 수적들과 수전을 치르기 전에 그들은 사라
졌어. 그때 척 소람에게 제압을 당해 실종된 것이었군. 다른
사람들은 수전을 치른 후 입은 피해와 충격 때문에 이 장도
일행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지."
"그래요. 악 가가.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 바람에 다들 이
장도 일행에 대해 잊어 버렸어요. 하지만 저는 계속 환객을
추적했어요. 사실 북경에 도착했을 때 척 소람이 운문상회 북
경 지부에 우리의 거처를 만든 것을 무척 반겼어요."
"하하하, 도둑을 위해 제 손으로 문을 열어준 셈이구나. 영매
를 무시하는 바람에 상황이 역전됐다는 것을 안다면 땅을 치
고 후회하겠군."
"그건 아니에요. 척 소람은 악 가가를 감시하느라 정신이 없
어 우리 자매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
렇게 쉽게 척 소람에 대해 파악할 수는 없었지요."
갈운영은 미소를 지었다.
"흠... 그럼 척 소람이 우리를 이용해 어떤 음모를 획책하는지
알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겠군."
"네. 그것만 알면 오히려 역이용할 수도 있어요. 자 이제 그
만 올라가죠."
갈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악삼을 제치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악삼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갈운영의
뒤를 따라 갔다. 두 사람은 얼마 못 가서 밀실 바닥에 설
치된 문 앞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악삼의 귀에 작은 말소리
가 갑자기 들려왔다.
"영매. 잠깐 멈춰."
"네!"
악삼은 찰향적을 운용했다. 작게 들리던 목소리가 자세하게
들려오자 악삼의 안색은 굳어버렸다.
"위에 있는 방에 사람이 있다."
"네! 하아~, 오는 날이 장날이라 더니..."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구나. 음... 척 소람과 척 금방이
군."
"그럼 인기척을 죽여야해요. 척 금방은 모르지만 척 소람의
신경은 엄청 예민해요."
갈운영은 벽에 몸을 부착하더니 숨을 나지막하게 쉬기 시작
했다. 숨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호흡이
멈춰버렸다. 게다가 인간의 신체에서 발생하는 열마저 사라
졌고 붙어 있는 벽에 동화해버려 눈에 보이는데도 단순한 조
각상처럼 보였다.
'이러니 내가 못 찾을 수밖에... 움직이지 않는 한 흔적을 찾
아낼 방법이 없구나. 영매나 석진 선배를 찾지 못한 것은 당
연했군.'
악삼은 갈운영이 인기척을 완벽히 없애버리고 벽과 동화하는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객 홍매의 능력이 얼마나 뛰
어난지 절감했다. 악삼도 인기척을 없애기 위해 태을진결 안
에 있는 귀식대법(龜息大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태을진결에 있는 귀식대법은 여타 알려진 귀식대법이 호흡을
멈추는 수준에 있는 것과 달리 피부호흡을 하는 상승의 기법
이었다. 일반적으로 귀식대법을 사용하면 움직일 수 없고 단
기간밖에 사용 못하는데 비해 태을진결의 귀식대법은 전혀
달랐다.
악삼은 입은 굳게 다물고 피부를 통해 호흡하기 시작했다.
허파를 이용해 공기를 마시지는 못하지만 의식도 또렷했고
신체에 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피부를 통해 공기가
나갔다 들어왔다 할 때마다 악삼이 입고 있던 옷이 부풀어졌
다가 원상 복구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척 신명과 척 금방은 야반 삼경에 밀실에서 만났다. 그들이
기다리던 소식이 한꺼번에 도착했는데 그 내용이 매우 급박
했기 때문에 빠르게 정리를 해야했다. 특히 척 신명이 척
금방을 부른 이유는 그녀가 할 일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자~, 그럼 팔달령에서 벌어진 일을 다 알아들었지."
척 신명은 석진이 보고한 내용을 척 금방에게 알려준 것이다.
"모두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아버지. 이해할 수 없네요."
"무엇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냐?"
"왕씨 삼 형제는 아버지의 충견이잖아요. 그런데 비해 석진은
임시로 와 있는 인물로 믿을 수 없잖아요."
"피식, 왜 충견인 왕씨 삼 형제는 죽음의 길로 보내고 석진에
게 뒤에 일어날 일을 감시했다가 보고하는 중책을 맡겼느냐
이것이냐?"
척 금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요. 아버지."
"닭을 잡을 때와 소를 잡을 때 쓰는 칼은 다르다."
"물론 왕씨 삼 형제는 석진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인물이에
요.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인물인 것도 사실이 아닌가요?"
"당연하다. 언봉운의 명령을 받고 온 석진은 출신성분이 의문
스럽다. 공령문주인 언봉운에게 언가권을 배운 뒤 스스로 개
조했다고 말하지만 그 가공한 권법은 절대로 언가권에서 파
생된 것이 아니다. 언봉운조차 믿지 않는 석진을 내가 믿을
리는 없지."
척 신명의 눈동자는 싸늘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에 석진을 보낸 것이죠?"
"남의 칼이라도 소를 잡으려면 일단 사용해야 하지 않느냐!"
"그렇기는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운문상회에 있는 동안은 제까지 것이
움직여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 행자 신세다. 그것보다
요마나 취마가 북경에 도착한 것이 중요하다."
척 신명은 추적자들이 붙었는데 오히려 좋아하는 표정을 지
었다. 척 금방은 아버지의 행사(行事)나 심사(心思)를 이해할
수 없어 더 이상 반론을 펴는 것을 포기했다.
"지금쯤이면 북경지부 주위엔 구류방과 북풍각의 눈과 귀가
가득할 것이다."
"아버지. 밀정들이 북경지부를 감시하는데 웃음이 나오세요?"
"흐흐흐, 좋은 일이 닥쳤으니 당연히 웃음이 나오지."
"이해할 수 없군요."
척 금방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
지의 생각을 파악할 수 없었고 무엇을 꾸미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해할 필요 없다. 단지 일이 뜻하는 데로 진행되고 있다고
만 알아라.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네게 남았다."
"무슨 일인가요?"
"내일 아침 자은 선생은 황보영과 함께 동구밖에 있는 이원
을 방문할 거다."
"동구 밖에 있는 이원이라고요?"
"그렇다. 이원..."
척 신명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음성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특히 이원을 말하는 동안 척 신명의 눈동자는 심하
게 흔들렸다.
"아버지. 자은 선생이 내일 이원에 갈 것을 어떻게 아셨어
요?"
"자은 선생이 어젯밤 자금성에서 사례태감을 만나 해야할 일
을 다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이원에 가는 길밖에 없
다."
"좀 막연하군요."
"정확한 분석을 의거해서 나온 예측이다. 너는 내일 아침 일
찍 악삼 일행과 함께 동구 밖으로 나가는 길목에 가서 자은
선생과 황보영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척 금방은 황 보영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짜
증이 났다.
"호오~, 또 다시 착하고 순진한 여자를 연기해야 하는군."
"잠시만 참으면 되는 일이다."
"알아요. 하지만 나는 황 보영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매일 언니, 언니하면서 쫓아다니는 바보 연기는 신물이 날 정
도라니까요."
척 금방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 그만 하고 어서 가서 자거라. 새벽에 일어나야 우연한
만남을 만들 수 있다."
"알았어요."
척 신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척 금방은 탁자에
놓여진 등불을 끄고 그 뒤를 따랐다. 척씨 부녀가 밀실에서
나간 지 반 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기괴한 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끼이익~.
밀실 바닥 중에 한 부분이 서서히 열렸다. 지하감옥으로 내
려가는 비밀 문이 열린 것이다.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악삼이 비밀 문에서 뛰쳐나왔다.
밀실에 들어온 악삼은 주변을 훑어보았다. 찰나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 순간을 악삼의 오감이 총 동원됐다.
"영매. 이상 없다. 나와도 되겠다."
"네. 악 가가."
비밀 문에서 갈운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쑤욱.
갈운영은 일체의 파공성도 내지 않고 유령처럼 나타났다.
악삼은 갈운영이 올라오자 천장을 향해 날아 올랐다. 지붕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 보에 올라선 악삼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
다. 밀실을 들어올 때 사용한 구멍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왓장을 조심스럽게 치우자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빛나는 달빛과 별빛이 구멍을 통해 밀실 바닥을 비추
었다. 악삼이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가자 갈운영은 그 뒤를
따랐다. 지붕에 올라선 두 사람은 구멍을 다시 막은 후 기왓
장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악 가가. 빨리 거처로 돌아가야 해요."
"그렇게 해야할 것 같구나."
악삼은 갈운영의 의견에 동조했다. 특히 석진이 되돌아 왔
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상 빨리 움직여야 했다. 흔적을 남긴
다면 야행을 해서 얻은 수확을 역으로 사용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저 먼저 갈게요. 내일 아침에 뵈어요."
갈운영은 자기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그런데 열 걸음을 걷
기도 전에 갈운영은 형체가 사라져 버렸다. 마치 유령을 방
불케 하는 움직임이었다.
"허... 저런 은신잠행술을 사용한다면 과연 누가 찾아낼 수 있
겠는가? 정녕 자객 홍매가 남긴 운신법은 경이롭구나."
악삼은 갈운영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감탄했다.
"한번 은신하면 주변과 동화(同化)해 인기척을 찾을 수 없고
움직이면 유령처럼 사라지니 찾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무리구
나. 그나마 움직인다면 감각으로 찾아 낼수 있는 게 다행이구
나."
악삼은 자신을 감시하던 석진을 찾지 못한 이유는 알 수 있
었다.
"나도 가봐야겠군."
퍽.
악삼의 종적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공령의 제 1단계인
망량( )이 보여주는 신기였다. 악삼이 불철주야(不撤晝
夜) 무공에 매달린 결과 이론상의 무예인 공령의 초입 단계
에 들어 선 것이다.
악삼과 갈운영이 같이 움직이지 않고 따로 움직인 이유는 두
사람의 거처가 정 반대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밀실이
있던 건물은 두 사람의 거처 한 중간에 있었다. 갈운영이
무사히 도착했으리라 생각한 악삼은 마음놓고 자기 거처로
날아갔다.
파바박.
악삼은 담장을 넘어 가면서 주위에 쓰러져 있던 간자들의 혈
도를 가볍게 때리고 지나갔다. 화원에 쓰러진 인물과 지붕에
엎어져 기절한 자의 혈도를 동시에 가격하고 방안으로 들어
갔다. 방안에 도착한 악삼은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다가 바닥
을 향해 태을지의 투결을 사용했다.
"헉!"
악삼은 미약한 신음 소리를 들으며 야행 복을 숨기고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누운 악삼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을 자
려고 눈을 감은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인시를 지나 묘시가
다되어 잠을 푹 잘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 태을진결에 있는
와선대법(臥仙大法)을 운용해 피곤을 풀기로 한 것이다.
와선대법은 누워서 운공조식을 하는 독특한 수련 법으로 청
각과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가
느다란 호흡은 마치 잠든 사람의 호흡과 차이가 없었다. 그
러나 악삼은 잠든 것이 아니었다. 음양오행 칠종의 태을진기
가 전신을 돌면서 피곤을 풀어주고 새로운 활력을 심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와선대법의 효과로 예민해진 청각에 간자들의 움직임
이 포착됐다. 악삼이 침대에 자고 있으며 별다른 이상은 없
다고 말을 전달했다. 그들 전원은 임무 도중에 잠시 졸았다
고 결론을 내린 후 다른 사람에게 혹시 다른 변화가 없었냐
고 문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 모두 졸았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고 이상 없
다는 이야기만 나누다가 잠잠해졌다. 악삼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척 신명이 부하들에
게 생명을 가차없이 버리게 만들 정도로 혹독하게 다루고 있
을 것이라고 악삼은 생각했다.
악삼의 판단은 정확했다. 간자들이 혹독한 처벌이 두려워 거
짓을 말할 것이라 예상한 데로 움직인 것이다. 악삼은 와선
대법을 운용하면서 새벽에 방문하러 올 척 금방을 기다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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