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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재견(再見)-2
자은 선생과 척 신명이 대화를 나누자 갈 씨 자매와 악삼, 척
금방, 석진은 식사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셨습니까. 자은 선생님."
"오랜만이오."
악삼 일행이 인사하자 자은 선생은 반가운 얼굴로 화답했다.
자은 선생은 척 신명 일행과 악삼 일행을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히 조우해 기쁨을 금치 못했다. 사례태감인 고신과 어
려운 협상을 하느라 쌓였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척 신명이 미리 갈 길을 파악하고 우연을 가장해 만남을 준
비했음을 자은 선생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이원에 가서 할
일 때문에 고뇌에 빠진 자은 선생은 척 신명과 조우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우연찮은 만남이 즐겁
게 느낀 것이다.
자은 선생은 척 신명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악삼
과 갈 운영은 식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자은 선생일행이
반점에 올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황 보영을 다시 만나자 갈
운지는 기쁨과 반가움이 밀려왔다.
갈 운지는 반가운 얼굴을 하고 황 보영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데 황 보영이 두 눈동자에 투명한 물기를 머금고 멍하니
서있자 갈 운지는 난감해져 버렸다. 황 보영의 태도가 이상
하게 느껴진 것이다.
"운지 동생 오랜만이네."
갈 운지가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 하자 황 보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 보영이 흔들리던 마음을 언제 가
라 안쳤는지 음색이 맑고 고았다.
"네, 보영 언니.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럼. 나는 잘 지냈어. 보영 동생은 어땠니?"
"전 심심했어요. 언니나 악 가가는 뭐가 그리 바쁜지 나랑 말
할 시간조차 할애하지 않았어요. 덕분에 혀가 녹슬 정도였다
니까요."
"두 사람이 할 일이 있었던 게지. 그리고 금방 동생이랑 같이
놀면 되지 않았겠니."
황 보영은 척 금방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흥! 금방 동생은 악 가가나 운영 언니보다 더 바쁜지 코빼기
도 못 봤어요. 운문상회 북경지부에선 겨우 한 번뿐이 보지
못했다니까요."
갈 운지는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금방 동생도 할 일이 있었나 보구나. 착한 운지 동생이 참아
야지."
갈 운지가 혀를 삐죽이 내밀고 말하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
는지 황 보영은 안면에 미소를 가득히 지었다.
"맞아요. 언니. 저는 맡은 업무가 많았어요. 운지 언니처럼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릴 시간이 없었다고요."
척 금방이 입을 삐죽이며 토라진 모습으로 항변했다. 갈 운
지가 황 보영에게 같이 놀아주지 않았다며 고자질하자 기가
막혔던 것이다. 황 보영은 갈 운지와 척 금방의 투정이 귀엽
기 그지없었다. 물론 척 금방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 갈 운
영과 악삼의 눈엔 다시없을 정도로 가증스럽게 보였겠지만...
"그런데, 보영 언니. 저분은 처음 보는 분인데 누구인지 소개
좀 부탁드려요."
척 금방은 황 보영 뒤에 서있는 곽 도성에게 슬쩍 시선을 돌
리며 말했다. 황 보영과 갈 운지의 시선은 곽 도성에게 향
했다. 갈 운지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물들었지만 곽 도성
을 잠시 보다가 외면한 황 보영의 눈동자는 괴로움이 나타났
다가 사라졌다.
"그래요. 보영 언니. 어서 말해 주세요."
갈 운지는 황 보영의 마음도 모르고 곽 도성을 소개해 달라
고 보챘다. 황 보영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너
무나 나지막해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아버님의 죽마고우이신 곽 대인의 아드님이셔. 성함은 곽 도
성이고 도찰원의 경력으로 근무하고 계신단다."
"도찰원의 경력이라고요!"
갈 운지는 깜짝 놀랐다. 도찰원이 핵심 권력기관이라는 사
실은 지나가던 개도 알 수 있을 만큼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게다가 곽 도성 정도의 젊은 나이에 경력의 지위에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곽 도성이 뛰어난 인재라는 반증이었다. 갈 운지가 놀
라는 것은 당연했다. 곽 도성은 척 금방이나 갈 운지의 시선
속에 자신에 대해 놀라움과 호감이 들어있자 기분이 좋아졌
다. 게다가 두 소녀가 황 보영과 친분이 깊다고 느껴 잘 보
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곽 도성입니다. 보영 아가씨와 무척 깊은 교분을 나누고 계
신 것 같은데 앞으로 많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곽 도성은 갈 운지와 척 금방에게 포권을 했다.
"소녀의 이름은 척 금방입니다. 앞으로 많은 부탁을 드리겠습
니다."
"갈 운지라고 합니다."
갈 운지와 척 금방은 곽 도성에게 자기 소개를 했다. 곽 도
성은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두 소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보영 아가씨. 저기 계신 분도 알고 싶습니다만..."
"네!"
곽 도성이 아무런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는 악삼에게 시선을
돌린 것이다. 황 보영의 심장은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갑
자기 곽 도성이 악삼을 가리키자 이상한 죄책감과 불안감이
한꺼번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 보영의 불안과 달리 곽 도성이 악삼에게 시선을
돌린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악삼을 보자마자 곽 도성
은 묘한 호감을 느낀 것이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식사만 하고 있는 악삼이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든 것이다.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친구를 만난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곽 도성이 악삼을 인정한다는 느낌이 들자 황 보영의 마음은
묘해졌다.
"진정한 남자라는 생각이 드니... 이것 참 이상한 일이군요."
곽 도성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자
기분이 이상한지 멋쩍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부친
이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인 곽 도성이 악삼을 높게 평
가하자 황 보영은 공중을 붕붕 뜨는 기분을 느꼈다.
황 보영은 자신이 칭찬을 받는 것보다 악삼에 대한 호평이
더 즐겁게 느껴지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자기 자신보
다 악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
문이다. 악삼에게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호감이 아닌 사랑
이라는 반증에 황 보영의 마음은 아득해져 갔다.
그런데 갈 운지 역시 황 보영의 마음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황 보영처럼 사랑의 감정을 억누룰 필요가 없는 갈 운지는
곽 도성의 의견을 듣고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런데 석진과
조 집사가 악삼의 양옆에 앉아 회포를 푼다고 소란을 피우자
기분이 나빠졌다.
과묵하게 앉아있는 악삼이 두 사람 때문에 수다쟁이처럼 보
였기 때문이다. 갈 운지의 눈에 석진과 조 집사 두 사람이
악삼의 평가를 절하시키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석진 선배님. 조 집사님. 그만 떠드세요. 악 가가까지 수다쟁
이로 보이잖아요."
갈 운지는 두 사람에게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하하하. 갈 소저. 오랜만에 돈형을 만나 반가워서 그러니 그
만 봐 주시구려."
"흥. 그렇다면 다른 곳에 가서 두 분끼리 떠들어요. 괜히 악
가가까지 두 분과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게 해달란 말이
에요."
갈 운지는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악삼의 팔을 잡아 당겼다.
"악 가가. 식사는 나중에 하시고 이리로 오세요."
악삼은 식사를 하다말고 갈 운지에게 이끌려 곽 도성 앞에
다가갔다.
"이분의 성함은 악삼이에요. 악 가가 이분의 성함은 곽 도성
이고 관부의 높은 직위에 계신다고 하는군요."
"어..."
갈 운지의 돌발행동은 악삼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갈 운영은
악삼의 안색을 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자리에서 일
어났다. 갈운지는 갈 운영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다가오자
'아차 실수했구나' 생각하며 어떻게 난관을 벗어날까 고민을
하다가 답을 찾아냈다.
"제 쌍둥이 언니인 갈 운..."
"운지야!"
갈 운지가 찾아낸 답은 간단했다. 다른 쪽에 불을 붙이는 방
법이었다. 갈 운영은 갈 운지가 갑자기 자기 소개를 하자 당
황했다. 갈 운지의 소개를 중간에 막아 버렸다.
"내가 예전에 말했지 않니. 처음 보는 남자에게 이름을 함부
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고!"
"헤헤..."
갈 운영의 차가운 어투를 갈 운지는 혀를 날름거리고 황 보
영의 등뒤에 숨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보영 언니. 운영 언니 좀 말려줘요."
"하아~."
갈 운지의 치기 어린 행동에 갈 운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
는지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황 보영은 갈 운지가 귀
엽기만 보이는지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
지 않았다.
"운영 동생. 운지 동생의 실수를 용서하렴."
"보영 언니..."
황 보영은 갈 운지가 고마웠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
음을 덕분에 숨길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얻을 수 있어서였
다. 황 보영은 갈씨 자매와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을 진정시
키면서 악삼에 대한 감정을 접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되새겼
다.
황 보영이 갈씨 자매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악삼 과 곽 도
성은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갈 운지가 소개를 하다말고
갈 운영과 황 보영 사이에서 장난치며 노는데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멀뚱하게 서서 상대를 바라만 볼뿐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 하하하."
"푸하하."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자
신이 처한 상황이 우습게 느껴져 자연스럽게 웃음을 터져 나
온 것이다.
"만나서 반갑소. 나는 곽 도성이오."
"악삼입니다."
웃음은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 요소 중에 하나였다. 너무도
어이없는 상황에 같이 처해 있다면 웃음이 나오는 법이다.
웃으면서 상대에 대한 경계심은 누그러지고 동질감을 느끼게
돼있다. 특히 호감을 가진 상대와 웃음을 나누었다면 그 효
과는 배가되는 법이다.
악삼과 곽 도성은 자연스럽게 상대에 대해 호의를 간직하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을 복잡한 시선
으로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황 보영이었다. 그리
고 황 보영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갈 운영과 싸늘한 시선의
척 금방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다정한 네 자매처럼 보이는 네 여인의 즐거운
시간은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 여인은 불처럼 격
렬한 마음을 숨기려 애쓰면서, 다른 한 여인은 얼음처럼 싸늘
하게 미소지으며, 그리고 또 다른 여인은 고목이 되어 다가올
파국을 기다렸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깔깔대는 갈 운지를
제외하고는...
식사를 마치고 허름한 반점에서 나오자 척 신명은 자은 선생
에게 이별을 고했다. 약속이 있다며 이만 헤어져야 한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척 신명은 타고 왔던 마차를 타고 북쪽
으로 향했다.
악삼 일행은 황 보영과 같이 동행하기로 했다. 황 보영이
척 금방과 갈씨 자매에게 동행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무슨
수작을 벌여서라도 동행을 해야 하는 척 금방에겐 황 보영의
요청은 알아서 그물을 향해 몸을 던진 꿩과 같았다.
뜻밖인 것은 자은 선생이 악삼 일행이 동행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원을 향해 가는데 외부인인 악삼 일행의
동행을 막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원이 가진 배타적
인 성향으로 볼 때 자은 선생은 당연히 막아야 했다. 아무리
황 보영이 애원한다 해도...
선두에 선 마차에는 자은 선생과 곽 도성이 타고 있었다.
마부 석에는 조 집사가 앉아서 말을 몰고 있었다. 그리고 뒤
따라오는 마차에는 네 여인이 탑승했다. 석진과 악삼은 마
부석에 앉아서 찬바람을 막고 있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여인들은 정답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갈 운영만은 마차에 탄 이후부터 침묵을 지키고 있었
다. 황 보영과 재잘거리던 갈 운지는 더 이상 갈 운영의 침
묵을 참을 수 없었다.
"운영 언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까부터 한마디도
안 하고 있잖아.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생겼어?"
"어! 아, 아니야."
"그래. 운영 동생. 무슨 일인지 말 좀 해주렴. 혹시 내가 동행
을 요청한 게 잘못된 거니?"
"아니에요. 언니."
갈 운지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던 갈 운영은 황 보영의 애처
로운 말투에 깜짝 놀라며 부인했다.
"그럼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거니?"
"흐음~, 특별한 것은 아니에요. 단지 아까 식사를 했던 반점
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무슨 생각을 한 거니?"
"그 반점에 이상한 점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응! 이상한 점?"
갈 운영의 음성은 나지막했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갈 운지
와 황 보영, 척 금방은 의아한 눈빛으로 갈 운영을 주시했다.
음식이 특별히 맛있다는 점과 외진 반점인데도 사람들이 북
적대는 것말고는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갈
운영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운영 언니.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죠? 특별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맞아요. 언니 금방 동생 말대로 이상한 부분은 없었어요."
"그 반점은 흑점(黑店)이야."
"네엣!"
갈 운지와 척 금방은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서, 설마 아까 우리가 먹은 음식이 인육 요리..."
"허억!"
세 여인의 안색은 한꺼번에 하얗게 질려갔다. 그들이 아는
흑점의 대표적인 요리가 인육 만두였다. 그래서 아침 식사로
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창백한 표
정으로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음식은 아무 이상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헤에~. 다행이다."
창백한 세 여인의 안색은 갈 운영의 말이 끝나자 원래로 되
돌아갔다.
"운영 언니. 사람 좀 놀리지 말아요. 깜짝 놀랬잖아요."
"흑점은 무조건 인육 요리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된 거
지.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야."
"그렇기는 하지만...
"금 방 동생. 보통의 흑점은 도둑들이 손님들을 털려고 만든
객점을 말하는 것이야. 그런데 강호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흑점들이 존재하지."
척 금방은 갈 운영이 말하는 흑점이 어떤 것인지 생각했다.
"설마, 강호 방파의 비밀 거점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맞았어."
"하지만, 그 반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강호 방파의 거점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요."
"금방 동생. 그 반점을 머리 속에 떠올려 봐. 그리고 이상한
점을 생각해 보렴."
척 금방은 눈을 감고 기억하고 있는 반점의 정경을 떠올렸다.
반점에 있던 사람들이나 탁자의 배치. 점소이의 움직임, 음식
까지 세세히 점검해 나갔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단 하나도
찾아낼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은 못 찾겠어요. 일하는 사람들이
나 손님 모두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인물들이고 건물에도 특
별한 장치는 없는 것 같고..."
"복잡하게 생각하지마 간단하게 생각해봐."
척 금방은 다시 한번 그 반점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러나 근
일 각이 넘도록 고뇌했지만 특별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좋아. 내가 설명해 줄게. 첫째 한적한 지역에 있는 반점치고
는 손님이 너무 많아."
"그건 음식 맛이 좋아서 많을 수도 있잖아요."
"물론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손님들과 반점의 직원이 모두
일반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이상한 내용이지."
갈 운영의 미소는 눈처럼 순백했다. 그리고 눈처럼 차가웠
다.
"일반인이 아니라고요! 그럴 리가...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었는데..."
척 금방은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안
목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기에 충격은
거세게 느껴졌다.
"석 진 무사님. 운영 언니의 말이 사실인가요?"
척 금방은 갈 운영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석진에게 질문했다.
석진은 말을 몰다가 척 금방의 질문을 받자 고개를 돌렸다.
"운영 아가씨의 말은 옳습니다."
"네! 그럴 수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일반인이라고 속단을 내려서는 안
돼. 오히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 상황에 따라서는 더
무서운 법이지."
척 금방은 갈 운영의 설명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운영 아가씨의 이야기는 저 역시 동감하는 내용이외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석진 무사님. 자세히 설명 좀 해주세
요."
"금방 아가씨. 만약에 외진 곳에서 맹수를 만나게 되면 어떻
게 하실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방비를 하거나 피할 준비를 하죠."
척 금방은 석진을 노려보며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는 투로
대답했다.
"그럼 토끼를 만나면 어쩌실 겁니까?"
"토끼요! 그럼 무슨 걱정을... 아하!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
군요. 상대가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 약자라면 당연히 방심을
하는 법. 그렇군요."
"그래. 정확히 말한다면 제아무리 높은 무공을 지녀도 인간인
이상 칼에 맞거나 독을 복용하면 죽는 법이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상황은 인식하지 못한 사람에게 생각지도 않은 공격
을 받는 것이지."
"그렇군요."
척 금방은 갈 운영의 의견에 동조했다.
"게다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살인에 익숙한 자는 존재하
지. 자객이 무공으로만 장사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 살인
을 하는데 무공보다 더 좋은 방법은 많아."
"그렇죠. 독도 있고, 글이나 말로 사람을 해칠 수 있어요."
"그래. 금방 동생이 이야기한 방식으로 살업을 하는 자객들이
존재해. 단지 문제는 그들의 숫자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그런데 그 반점에 모인 손님이나 종업원은
모두가 그런 자객이었으니 내가 고민하는 거지."
"넷!"
"뭐라고요!"
갈 운영의 설명이 끝나는 순간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세 여인
은 경악하고 말았다. 살인귀들이 득실거린 반점에서 수다를
떨고 우아하게 식사마저 끝내고 나왔다는 생각에 다들 살이
떨린 것이다. 또한 제법 뛰어난 무공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갈 운지와 척 금방이 받은 충격은 남달랐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 그들의 정체는 우리보다 무공이
높은 악 가가나 척 대인, 자은 선생님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니
까!"
"정말이야! 언니."
"그래. 운지야.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동류만 가능해."
갈 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더니 석진의 등을 차갑게 노
려보았다. 석진은 갈 운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움찔했다.
악삼의 눈은 움찔하는 석진을 슬쩍 처다 보더니 시선을 돌렸
다. 갈 운영에게 들었던 석진의 정체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눈을 감아 버렸다.
오고가는 시선 속에 복잡한 갈등의 골이 녹아 있었다. 그리
고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각기 생각에 빠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차 안은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흘러갔지만 어
느 누구도 마차 안에 무거운 침묵을 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악 중악은 의식을 잃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등곡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등곡의 폐에 박힌 작은 비수는 뽑지 못해
방치돼 있었다. 뜻밖에도 비수의 끝 부분이 양날로 갈라져
뽑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폐를 손상시킬 수 없어 살
을 가른 후 비수를 꺼낼 수도 없었다. 악 중악은 비수를 노
려보다가 독백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분명히 환객이라고 주장한 괴한과 등곡은
서로 모의를 했다. 그런데 폐에 박힌 비수를 보면... 과연 생
명을 걸고 연극할 정도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어. 그렇다면
의견 충돌이 일어나 상잔(相殘)을 한 것인가? 생각할수록 알
수가 없군."
팔달령에서 벌어진 의문은 악 중악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
다.
"각주님. 구직입니다."
"들어오게."
구직이 문이 열고 들어왔다. 북풍각의 숨은 실력자였지만
악 중악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실력과 위상을 숨기고 있던
구직은 그동안 엄청난 양의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주군으
로 모신 악 중악을 위해 사소한 것까지 찾아내 분석을 하고
있던 구직은 급한 전언을 받고 북경에 온 것이다.
"오랜만이네."
"주군의 부름이 있는데 제가 늦장을 부릴 수 있습니까."
"하하하, 수고했네. 그런데..."
"모시고 왔습니다."
악 중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데려 오게."
"알겠습니다."
구직은 문밖에 대기하고 있는 두 남자에게 눈짓을 했다. 두
남자는 고개를 숙이더니 밖으로 걸어나갔다. 얼마 지나서 두
남자는 한 남자를 데리고 돌아왔다.
"오랜만이네."
"흥, 아직도 살아있었구나. 이 배신자야."
악 중악의 반가운 인사는 두 남자 사이에 잡혀 있는 남자에
게 향한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증오
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도 살아 있어 미안하네. 기영."
"그 찢어버릴 요망한 혀는 그대로구나."
식지 않는 증오로 가득한 인물은 괴의 공손 찬의 제자인 악
기영이었다.
"내가 자네를 찾은 것은 이 사람 때문이네."
"허, 네 부탁을 내가 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냐? 참으
로 엄청난 착각을 했군."
악 기영은 빈정거리면서 침대에 누워있는 등곡은 싸늘한 시
선으로 처다 보았다. 그런데 빈정대는 악 기영의 어투를 듣
고도 악 중악은 미소를 지울 뿐 화를 내지 않았다.
"치료한다. 너는 의원이니까."
"크크크, 치료를 한다. 내가 말이냐? 그것도 원수를... 푸핫하
하."
악 기영은 미친 듯이 웃었다.
"분명히 한다. 너는 더 이상 무인이 아니라 의원이기 때문이
다. 그리고 여기에 누워 있는 사람은 환자이니 네가 그냥 지
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너부터 치료해야겠구나.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야."
악 기영은 악 중악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사부님을 죽인 원한에다 자신의 내공을 전폐시켜 십오년 간
의 수련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악 중악에게 느끼는 원한
은 천지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글세 네 말대로 미쳤는지 모르지. 세상이 미쳐버렸으니 사람
도 미치는 것이 당연하니 고칠 생각은 없다. 그럼 나는 이만
나가마."
악 중악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놈! 정신 나간 것이냐. 내 눈앞에 원수를 두고 나가다니..."
"어차피 네가 아니면 죽을 사람이다. 필요한 도구는 나누고
갈 것이니 알아서 해라. 그리고 필요한 약재가 있으면 말해
라. 바로 준비하마."
악 중악이 밖으로 나가버리자 그 뒤를 구직이 따라갔다. 악
기영의 불타 오르는 시선은 악 중악의 등을 노려보았다.
"언젠가는 이 원한을 갚을 것이다. 악 중악."
분노와 증오가 가득한 외침이 등뒤에서 들려오는데도 악 중
악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악 중악이 나가버리자 악 기영
은 힘없이 의자에 앉아버렸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간
헐적으로 들려오는 등곡의 신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흥, 인과응보(因果應報)다. 고통 속에서 죽어가라."
악 기영은 차갑게 내뱉었다. 그러나 악 기영의 시선은 벌써
등곡의 폐에 박혀 있는 비수에 멈춰져 있었다.
구직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군. 그냥 나두고 나와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기영이나 괴의 수준의 의원이 아니고는 치료가 불가
능하다. 그것보다 내가 알아보라고 한 것은 다 준비했는가?"
"네, 모두 알아냈습니다."
"과연 자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악 중악의 입가에 스산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어디에 가셨습니까?"
"강 호법과 요마 일행을 말하는 건가?"
"네."
"그들은 악삼을 쫓고 있는 중이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군요. 준비한 자료들을 가지고 오
겠습니다."
구직은 준비한 물품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악 중악은 구
직의 등을 보며 새하얗게 웃다가 자기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경라흉살 강천리는 요마와 취마, 구류방주 연적심과 함께 악
삼의 뒤를 추적하고 있었다. 운문상회 북경 지부를 나서는
악삼 일행을 목격했지만 함부로 공격을 하지는 못하고 뒤만
따랐다. 악삼과 석진이나 척 신명이 같이 있다면 네 사람의
힘으론 급습을 해도 승패를 장담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
문이다.
그들은 일단 뒤를 따르면서 기회를 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중간에 자은 선생과 조 집사, 그리고 만만치 않아 보
이는 무력을 소유한 청년이 합류되자 그들은 절망했다. 자신
들이 가진 힘으로는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들
에게 실날같은 희망이 생긴 것은 왠지 부담스러운 척 신명이
그들과 헤어져 다른 곳으로 간 것이었다.
"오라버니. 척 신명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나두거라. 우리들 힘으로 분산할 여력이 없다."
"그럼 악삼을 쫓아야겠군요."
"그래 야지. 빌어먹을 강남만 돼도 어떻게 전력을 수급 받아
움직이겠는데... 이거야 강북에선 도대체 맘대로 돼는 것이 없
군."
짜증이 난 취마는 호리병을 입가에 대고 술을 연거푸 마셨다.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도 전력의 차이 때문에 공격할 수가 없
다는 현실은 취마의 울화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만 화를 푸세요. 오라버니."
"알았다."
요마의 상냥한 어투는 취마의 노기를 어느 정도 가라 앉혔다.
"팔 당주님. 가기 전에 요기 거리를 가지고 와야겠습니다."
"연 방주의 뜻대로 하세요. 힘이 있어야 추적도 할 수 있고
기회를 만들 수 있는 법이죠."
"그럼 가보겠습니다."
구류방은 강호에서 천대받지만 그래도 엄청난 문도 수를 자
랑하는 방파였다. 그런 방파의 주인이 음식이나 조달한다고
반점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은 그리 보기 좋지 않았다. 하지
만 강천리나 요마, 취마는 아무 것도 아닌 양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헉!"
"무슨 일이오?"
반점에 들어간 구류방주가 놀라자 강 천리는 달려갔다.
"아무도 없습니다."
"뭐라고?"
문을 박차고 들어간 강 천리 눈에 반점 내부의 전경이 한꺼
번에 들어왔다.
"이럴 수가..."
반점 안에는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인기척조차 없었다.
"믿을 수 없군. 분명히 그들이 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우글
거렸는데..."
"점소이는 고사하고 숙수도 없어요."
어느새 후문을 통해 주방에 들어간 요마가 인적을 살피고 나
서 식당 안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강 천리의 뒤따라 온 취마
는 술을 마시며 반점 내부를 훑어보다가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 분명히 사람들이 바글거렸는데 순식간에 모
두 사라졌어. 게다가 반점 밖으로 나간 흔적도 없군."
"오라버니.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지하 통로가 있다는 반증
이죠."
"지하통로! 그럼 찾아 봐야겠군."
"그럴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중요한 것은 악삼을 추적하는
것이지. 이상한 반점의 비밀을 푸는 일이 아니에요. 어서 악
삼의 뒤를 따라 잡아요."
요마는 차갑게 내뱉고 반점 밖으로 나갔다.
"네 말은 맞다. 하지만..."
취마는 반점의 비밀이 마음에 걸려 요마를 잡으려고 했다.
"반점의 비밀은 어차피 나중에 알게될 일이에요. 뭐 몰라도
상관할 일은 아니죠. 일부로 호기심을 충족하려고 아까운 시
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알게 된다고? 혹시 짐작하는 일이라도 있느냐?"
"악삼 일행과 자은 선생 일행이 우연히 조우할 일은 없겠죠.
그렇다면 반점은 그들을 감시하는 제 3세력일 수 있죠."
"제 3세력?"
취마는 요마가 말하는 제 3세력이 어디를 뜻하는지 알 수가
없어 궁금증을 드러냈다.
"악삼을 쫓다보면 다 알게 돼요. 어차피 모든 사건의 중심에
악삼이 있어요. 악삼을 잡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되겠죠. 어서
가자고요."
"알았다. 알았어."
급하게 달려가는 요마의 뒤를 취마는 비틀거리며 쫓아 나갔
다. 요마와 취마가 밖으로 나가자 강 천리 역시 그 뒤를 따
랐다. 그런데 세 사람이 나가자 구류방주 연적심은 아쉬운
눈빛으로 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연적심은 요마와 취마를 따라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연
적심은 밖으로 나가기 전에 반점의 중앙 바닥을 잠시 노려보
고는 입맛을 다셨다. 연 적심이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것
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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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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