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측량
곽 흥 렬
아마도 중학생 시절이었지 싶다. 지리 수업 시간 선생님에게서 ‘지적’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을 가리킨다는 뜻으로 쓸 때의 그 ‘지적指摘’인 줄로 알았다. 그만큼 지적地籍은 어린 내게 있어 이방인처럼 낯선 단어였다.
지적이 ‘땅의 호적부’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제법 나이가 들고 난 뒤의 일이다. 어쩌다 내 이름으로 된 산을 하나 가지게 되면서, 그때까지 말로만 들어오던 이른바 경계측량이라는 것을 경험하고부터다.
산은 집터나 논밭 같은 다른 지목의 땅에 비해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흔하다. 그것은 생겼다 하면 보통 작게는 몇만 제곱미터에서부터 크게는 몇십만 혹은 몇백만 제곱미터까지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골짜기에서부터 저 골짜기까지 혹은 이쪽 등성이에서부터 저쪽 등성이까지” 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 버리기 일쑤다. 이를테면 완전히 주먹구구식인 셈이다.
값어치의 높고 낮음을 떠나 자기 이름으로 된 큰 땅덩어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뿌듯한 일이던가. 나는 내 산의 위치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무척 궁금하였다. 게다가 경사도가 낮은 곳에다 유실수라도 심어 보려니 우선 명확한 경계 지점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관할관청에다 경계측량을 신청한 것이다.
지적공사로부터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한 보름 가량 지난 후였다. 어느 날 몇 시에 측량 계획이 잡혔으니 현장으로 좀 나와 달라는 전갈이었다. 나중에 가서 만에 하나 생길지도 모를 말썽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이해당사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하루하루 손을 꼽아 가며 날짜를 기다렸다. 때때옷을 갖추어 놓고 설날이 오기를 고대하는 아이 같은 심정이었다.
기다림은 끝이 있다고 했던가. 마침내 그날은 왔고, 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신이 났다. 오래 궁금해했으면서도 이제껏 말로만 들어왔던 지적측량, 그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측량이 이루어졌다. 한 사람은 연신 측량기를 조작하고, 다른 한 사람은 폴대를 잡고는 박자에 맞춘 듯 능란하게 돌아간다. 측량 기사의 손짓에 따라 폴대가 마치 매미채 움직이듯 쉴 새 없이 춤을 춰대었다.
측량 장면을 유심히 바라다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지난날의 양반과 상민, 상전과 하인의 관계가 그려진다. 양반의 권위에 절대복종해야 했었던 종살이의 아픔이 폴대를 잡은 사람에게서 어리비침을 보았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오로지 상전의 명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하인, 폴대를 잡은 사람 역시 자기주장과는 담을 쌓고 오로지 측량기를 쥔 사람의 지시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야만 하는, 종 아닌 종이었다.
측량기를 잡은 사람이 한자리에 가만히 선 채 조준경을 들여다보며 이쪽저쪽으로 방향 지시를 내릴 때, 폴대를 잡은 사람은 비지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리저리 정신없이 위치를 옮겨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가족이라는 무거운 등짐을 짊어지고 매일같이 저렇게 뙤약볕을 누비는 수고를 그는 마다할 수 없으리라. 그래도 고생한 대가는 기기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에 까마득히 미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로 일을 하는 이가 측량기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폴대를 잡은 사람은 몸으로 뛰는 육체노동자가 아닌가. 그 고단해 보이는 삶에 잠시 연민의 마음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돌려 생각도 해 본다. 설사 그렇더라도 폴대를 잡은 사람이 없다면 당연히 측량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 아니냐. 임금도 물론 있어야 하지만 마땅히 백성도 존재해야 한다. 다만 임금은 임금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할 때 사회는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조화롭게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측량하는 모습을 통해 이러한 세상사의 이치를 다시금 깨친다.
지적은 무엇보다 한 조를 이룬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아야 원활한 업무수행이 가능해 보인다. 측량기를 다루는 사람은 정확한 지점을 지적해 주어야 하고, 폴대를 잡은 사람은 그 지점에다 또 정확히 폴대를 꽂아야 한다. 이 지점을 잘 포착해야만 측량에서 오차가 적게 생긴다. 처음에는 아주 조금밖에 어긋나지 않은 측정점이, 갈수록 간극을 벌여 나중에는 전혀 엉뚱한 결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과 같은 큰 덩어리의 땅일수록 오차는 더욱 극심해진다. 그러기에 경계측량에서의 요체는, 기준점을 어디에 설정하고 폴대를 얼마나 정확한 위치에 꽂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평소 나는, 측량을 하기만 하면 땅의 위치며 면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야말로 자로 잰 듯이 딱 부러지게 나타나는 줄로 알았다. 이번 경험을 통해 그런 단순한 생각이 얼마나 무지에서 나온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확연히 깨달았다. 기사의 기술이랄까 숙련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측량이다. 하기에 측량에서는 항시 오차라는 것이 따른다. 이 오차로 인해 우리는 주변에서 서로 경계한 토지의 소유자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 악감정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비일비재하게 본다. 그 까닭이 여기서 연유한다는 점도 비로소 알았다. 그러면서 그런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방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따라서 이번 일은 측량 기사들이 투철한 소명의식을 갖고 측량에 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새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문득 “땅은 사랑이다”라고 한 어느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그 광고 카피에서처럼, 정녕 땅이 사랑이라면 그 땅의 세부 정보를 제공해 주는 측량도 역시 사랑이어야 하리라. 아니, 세상 그 어떤 일이든 사랑 없이 되는 것이 어디 있을까. 자기 땅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측량 기사들은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러면 자연 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분쟁도 생겨나지 않을 것 아닌가.
우리네 삶인들 무엇이 다르랴. 인생살이도 어쩌면 하나의 측량 같다는 생각이 든다. 측량에서 첫 기준점을 잘못 잡았을 때 좌푯값 전체가 뒤틀려 버리듯, 삶에서도 처음에 저지른 조그마한 실수가 궁극엔 인생 전체를 그르치고 만다. 그나마 땅의 측량은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지만, 한번 해 버리면 아예 수정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인생의 측량 아니던가. 뚜렷한 결과물이 남는 땅의 측량도 그리 만만치 않은 일이거늘, 하물며 맛도 모양도 색깔도 냄새도 없는 인생의 측량에서이랴. 그러기에, 인생의 설계도를 그리고 측량을 할 때는 땅의 측량보다 몇십 배, 몇백 배, 아니 몇천, 몇만 배의 사랑의 마음이 필요하리라. 사랑은 모든 것을 보듬어 주고 감싸 안는 숭고한 가치이므로.
어느새 측량은 끝이 나고 주위는 다시 정적에 싸였다. 쩌렁쩌렁 산천을 울리던 측량 기사의 고함소리만이 이명처럼 귓전에 쟁쟁하다.
<'대구문학' 2021년 3월호>
첫댓글
지적地籍이란 말을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겠습니다.
'인생측량'
굉장히 의미 깊으며
측량을 잘 해야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오차범위가 큰 것이
인생측량이지 않은 가 생각합니다.
민주화된 지금은
갑질한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대신 을질한다는 말은 사용치 않습니다.
세상은 많이도 변하고, 가치기준도 많이 달라지고
또 정답이 없다고도 합니다.
인권에 귀천이 없도록 하는 것,
도덕성에 결여가 없는 사회로 가는 것과
사회복지가 잘 이루어 지는 사회가
바탕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생측량, 그 것 참 어려운 것이네요.
곽흥렬님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지적계에 처음 들어가면 그 폴대를 잡는 과정을 거쳐야만 기사가 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사실 땅은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에게서 우리가 잠시 빌려 쓴다는 공유의 개념이 있다면
지금처럼 천정부지로 치솟는 아파트도 사라지겠죠?
저는 IT 엔지니니어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읽어봤습니다.
측량조와 양반 하인간의 비유는
좀 과한듯 싶고요,
각자의 영역에서 일하기 때문에
그것은 존비의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각자의 역할이죠.
요즈음은
GPS 측량으로
과거 측량법은 유물로나 남게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