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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재견(再見)-3
자은 선생이 타고 있는 마차가 갑자기 멈추자 악삼 일행이
타고 있는 마차도 멈추어야 했다. 마차에서 자은 선생이 나
오자 석진이 질문했다.
"왜 갑자기 멈춘 겁니까?"
"여기서부터 걸어가야 하네."
"네! 아니 이렇게 길이 좋은데 걸어야 하다니요?"
"이원의 법칙이네."
"이원이요? 저 마을을 말하는 겁니까?"
석진은 앞에 있는 촌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다네."
"그런데 왜 걸어야 합니까?"
"여기 석비(石碑)가 보이지 않는가?"
"석비요?"
자은 선생이 가리킨 석비를 석진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마(下馬).
석비에 음각(陰刻)된 글자는 간단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
다.
"말에서 내리라고! 허! 대단한 위세로군. 도대체 저 마을에 누
가 살고 있기에 이런 광오한 문구를 새긴 비석을 세울 수 있
는 겁니까?"
"이원에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광대나 복자(卜者), 백정들이
네."
"그런데 이런 문구를 새길 수 있습니까?"
"있네. 충분한 자격이 있지."
자은 선생의 어조는 굳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이해할 필요 없네. 단지 지금부터 걸어서 들어가야 하네."
"그럼 마차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끌고 가면 되네."
석진은 기가 막혔다. 멀쩡한 마차를 나두고 걸어가야 하는
신세가 어이없었고 빈 마차를 끌고 가야 한다는 황당한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나 자은 선생이 이원을 향해 걸음을
옮기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석진 선배님. 자은 선생님 말씀대로 합시다."
"알겠네. 악 아우."
마부 석에서 내린 악삼의 말에 석진은 동의했다. 석진에 이
어 악삼마저 내리자 마차 안에 있던 네 여인은 차례대로 밖
으로 걸어 나왔다.
"마차가 있는데 걸어가야 하다니..."
"운지 동생. 얼마 걷지 않아도 되는 것 같으니까 기분 풀어."
"아니에요. 난 운영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지. 기분 상한
일은 없었어요."
"후후, 그럼 됐어. 어서 걸어가자. 아버님이 벌써 멀리 가셨
어."
황 보영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갈 운지는
황 보영이 걸어가자 더 이상 투정을 부릴 수 없었다. 입을
삐죽이며 뒤따라 갈 방법뿐이 없었다. 그들이 이원의 입구
에 도착한 것은 근 반 시진을 걸은 뒤였다.
"겨우 입구에 도착했군요."
"응, 고생했어. 운지 동생."
"내가 무슨 고생을 해요. 보영 언니가 힘들었지."
추운 한 겨울의 날씨에도 황 보영의 이마와 코에는 땀이 송
글송글 매달려 있었다. 이원은 높이만 백여 장이 넘는 동산
에 위치하고 있어 가파른 언덕길을 지나야 했다. 무공을 익
히지 않은 황 보영에게 이원으로 가는 길은 크나큰 고역이었
다.
그런데 황 보영이 불만은 고사하고 힘들다는 이야기조차 하
지 않으니 갈 운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갈 운지는
자신도 힘든데 웃으면서 다독이는 황 보영을 생각하면 사치
스런 투정을 부린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저 입만 삐
죽이며 이원을 매섭게 노려보며 걷는 방법밖에 없었다.
황 보영이 힘든 기색이 역력한데도 오히려 갈 운지를 다독이
자 곽 도성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그 강한 의지에 감
탄했다. 곽 도성은 황 보영의 아름다움보다 강한 의지력과
우아한 자태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황 보영과 재회하던 날, 곽 도성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집안에서 우연히 만날 때마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에 취했다.
그런데 힘든 상황에 있는데 오히려 동생을 다독이며 길을
걸어가는 황 보영의 의지와 강인함은 곽 도성을 감복시켰다.
곽 도성은 황 보영을 도울 방법이 없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뾰족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곽
도성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황 보영을 바라보며 마음 속
으로 응원하는 길뿐이었다.
"후우~."
"갑자기 웬 한숨입니까?"
"아! 악 형... 아닙니다."
"혹시 아까 본 하마비(下馬碑) 때문입니까?"
악삼은 곽 도성이 갑자기 한숨을 쉬자 이원의 입구에 있던
비석의 문구 때문에 이런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관부에 적
을 둔 곽 도성에게 개인이 마음대로 세운 하마비는 불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은 선생이 가는 마을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으
로 악삼에게 비쳐진 것이다.
"아닙니다. 악 형. 그것 때문이 아니고..."
"그럼 무슨 일 때문에 안색이 안 좋은 겁니까?"
"그, 그게..."
곽 도성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하자 악삼은 미소를
지었다. 관리가 저지르는 비리를 찾아내 처단하는 도찰원에
근무하는 곽 도성에게 순진한 면모가 남은 것이 놀라웠다.
악삼은 곽 도성에게 호감을 느꼈다.
"말씀하기 어려우면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악 형. 사실은 보영 아가씨가 힘들어 괴로운데도
드러내지 않으니까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그런
겁니다."
"도와주고 싶은데 방법을 못 찾아서 그러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악 형."
곽 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 보영에게 향한 곽 도성의 시
선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악삼은 곽 도성의 시선과 황 보
영을 슬쩍 처다 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친구는 보영 아가씨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군.'
곽 도성의 마음은 조금만 신경을 써도 훤히 보일 정도였다.
너무 간단하게 속내가 보이는 곽 도성의 모습은 악삼의 마음
을 편하게 했다. 악삼은 그동안 만나는 인물마다 하나같이
속내를 숨기고 모략을 꾸몄다. 그래서 악삼 역시 항상 속마
음을 숨기며 움직였다.
곽 도성이 편하게 느껴지는 정도만큼 악삼은 호의를 느꼈다.
그건 지옥에서 생활하다 천국에 온 기분과 같았다. 그러나
곽 도성의 본질은 다른 모습이었다. 곽 도성은 도찰원의 귀
신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일 처리 능력을 자랑하는 냉정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황 보영에게 넋이 나간 바람에 나사가 풀린 것이다.
만약 곽 도성이 원래의 모습으로 조우했다면 악삼은 말조차
건네지 않았을 것이다. 악삼은 그동안 살아온 과정이 순탄
치 않았다.
태을궁에서 수련하던 때부터 시작해 강호에 뛰쳐나와 돌아다
니는 동안 수많은 공격을 받으며 살았다. 언제, 어디서, 어떻
게 공격해 올지 모르는 적들에게 휩싸여 살아왔기에 누구도
믿지 않았고 어떠한 상황도 빠져도 냉정하게 계산하며 움직
였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이 있어도 그 속마음과 정체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절대로 친구를 가볍게 만들지 않았고 쉽게 마
음을 놓지도 않았다. 사실 악삼에게 호감을 가져 친구로 사
귀고 싶은 마음이 든 곽 도성에게 나사가 빠진 모습이 좋은
효력을 발휘한 셈이다.
송 채린은 친구들에게 동생이 생겼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
러나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단 한 명의 친구도 밖에 나오지
않고 집에 있었다. 송 채린은 마을 주변을 돌면서 친구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일 각이
지나고 이 각이 넘어 반 시진 동안 기다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자 송 채린은 슬슬 열받기 시작했다.
"아이... 왜 아무도 안 나오는 거야."
삐죽이 튀어나온 입으로 투덜거리며 이리저리 걸어가던 송
채린의 눈에 자은 선생 일행이 보였다. 송 채린은 이원 입구
에 나타난 두 대의 마차와 아홉 사람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원에 나그네가 들어오는 경우는 무척 드문 경우였
기 때문이다.
"아가야. 말 좀 물어보마."
자은 선생은 송 채린에게 말을 건넸다.
"저 말인가요..."
낮선 사람이 말을 걸어오자 송 채린은 수줍은 목소리로 대답
했다.
"그렇단다."
자은 선생은 송 채린이 귀엽게 느껴져 미소를 지었다.
"말씀하세요."
"착한 아이구나."
"고맙습니다."
송 채린은 칭찬을 듣자 기분이 좋아져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
의 인사를 했다.
"다름이 아니라 서문 어른을 찾아뵙고 싶은데 어디에 계시는
지 아느냐?"
자은 선생은 그동안 서문 종을 만나도 이원의 입구나 북경에
서 만났고 이원에는 처음 들어왔다. 서문 종이 어디 사는지
알지 못해 누구든 발견하면 질문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데 마을 전체에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밖에 나온 사람이라곤
어린 소녀만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은 선생에게 남
은 것은 송 채린에게 질문을 할 방법뿐이었다.
"서문 어른? 아하! 좌장 할아버지를 말하는 거군요."
"좌장?"
"네. 저희 마을엔 촌장 님이 두 분이세요. 좌장 어른인 서문
할아버지는 동쪽에 살고, 우장(右長) 어른인 동문 할아버지는
서쪽에 살아요."
"이원은 두 어른이 관장한다는 것이냐?."
"관장? 그건 무슨 뜻이에요?"
처음 듣는 단어가 나오자 송 채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
했다. 자은 선생은 이원이 두 사람이 분할해서 관리하고 있
다는 정보를 듣게돼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뒤에서 조용히 보고만 있던 갈씨 자매의 마음을 뒤흔들어 버
렸다.
"정말 귀엽다. 언니 그렇지."
"그렇구나. 운지야. 강호를 제법 돌아다녔지만 저렇게 귀여운
애는 처음 보는구나."
"와아! 신기하네 어떻게 두 사람이 똑 같네. 게다가 예쁘다.
송 채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갈씨 자매를 처다 보았다.
처음에는 자기 이야기를 해서 시선을 돌렸는데 뜻밖에 쌍둥
이 미녀가 미소를 짓고 있자 탄성을 내지른 것이다.
"호호, 고맙구나.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예쁘니?"
"네. 정말 예뻐요. 언니들처럼 예쁜 사람은 처음 봐요. 그동안
엄마랑 신녀(神女) 언니가 가장 예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언
니들도 만만치 않네요."
팔짱을 끼고 품평을 하는 송 채린의 모습은 갈씨 자매에게
더할 수 없는 귀여움을 느끼게 했다. 갈 운지는 송 채린과
말을 나눌수록 기분이 좋아져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예쁘신가 보네."
"그럼요. 언니들도 예쁘지만 엄마도 예뻐요."
갈 운지는 장난기가 솟아났다.
"그럼 엄마랑 이 언니 중에 누가 더 예쁘니?"
"당연히 우리 엄마가 예쁘죠. 하지만 신녀 언니랑 비교하면
누가 더 예쁘다고 정하기 힘드네요."
"신녀?"
"네. 마을 북쪽에 있는 사당에 사는 언니인데 참 예뻐요."
갈 운지는 방실거리는 송 채린의 얼굴을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글세 이 언니는 세상에 나보다 예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네 말이 맞는지 확인해야겠어."
"네! 그럼..."
"당연히 네가 말한 두 사람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지."
"좋아요."
송 채린은 즐겁게 대답했다. 동생이 태어났다고 자랑하려고
친구들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아 실망해 나빠진 기
분이 풀려진 것이다.
"언니 이름은 갈 운지고 이 언니는 내 쌍둥이 언니인 운영
언니란다."
"내 이름은 송 채린이에요. 그런데 저 두 언니는 요?"
"이 언니는 보영 언니고 저 언니는 금방 언니라고 부르면
돼."
"보영 언니, 금방 언니 만나서 반가워요."
"그래, 만나서 반가워."
송 채린이 귀엽게 인사하자 황 보영과 척 금방은 부드럽게
화답해 주었다.
"자~, 그럼 어서 가자."
"네. 언니."
"갈 소저. 잠깐 실례하겠소."
자은 선생이 갈 운지와 송 채린의 어이없는 대화를 중간에
자르고 끼어 들었다.
"말씀하세요. 자은 선생님."
"서문 어른이 계신 곳을 먼저 알아야 하네."
"앗! 그렇군요."
갈 운지는 이원에 온 목적을 생각해 냈다.
"채린아. 부탁할 게 있는데..."
"좌장 할아버지가 계신 곳이 궁금한 거지요."
"그래. 채린이는 정말 총명하네."
칭찬을 받은 송 채린의 얼굴은 환해졌다.
"따라 오세요. 안내할게요."
모두 송 채린의 뒤를 따라갔다. 이원의 동쪽에 있는 서문
종의 거처로 이동한지 일 각이 지나자 도착했다. 싸리로 만
든 담벼락에, 나무로 만든 아담한 집 한 채가 나오자 송 채린
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집이 좌장 할아버지가 사는 곳이에요."
"고맙다. 채린아. 그런데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느
냐?"
"어! 우리 아빠를 아세요?"
"잘 알고 있단다. 나는 네 아버지의 친구란다."
자은 선생이 송 채린에게 한 이야기는 당사자보다 갈 운영과
악삼을 놀라게 했다. 소주에서 머나먼 북경에 근방에 있는
이원에 친구가 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딸인 황 보영도 처
음 듣는 것이었다. 특히 부친인 자은 선생의 친구라 할만한
사람은 얼마 없었고 그나마 높은 관직에 있거나 높은 학식과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들뿐이었다.
대상인인 척 신명조차 친구라 부르지 않는데 조그만 부락에
사는 촌민을 친구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악
삼이 놀란 이유는 척 신명이 말한 송 도공이 송 채린의 부친
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찾았군. 그럼 송 도공을 만나러 움직여야겠
군.'
악삼은 송 채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송 채린은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자은 선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은 선생
은 송 채린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채린아, 오후에 자은이 찾아간다고 전해주겠니."
"알았어요."
송 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자은 선생은 송 채린
의 대답을 듣더니 악삼 일행을 바라보았다.
"나와 보영이는 서문 어른을 뵙겠네. 그동안 자네들은 채린이
집 앞에서 기다려 주게나."
"알겠습니다."
조 집사만 자은 선생에게 대답했다.
"자네도 조 집사와 같이 있도록 하게나."
"알았습니다. 하지만 좀 아깝군요. 전설로 내려오는 신창 서
문 종 어른의 위용을 뵐 수 있다고 좋아했는데..."
곽 도성은 신창 서문 종을 만날 기회가 없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운지 중간에 말을 끊었다. 자은 선생은 곽 도성의 안
색을 보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 조부님께선 안면이 없는 사람과는 만나려 하시지 않으시
네. 그러니 자네가 이해하게나. 그리고 내가 기회가 되면 말
씀을 드려 한 번 자리를 마련해 보겠네. 그러니 너무 실망하
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사부님."
곽 도성의 대답을 들은 자은 선생은 황 보영에게 시선을 돌
렸다.
"가자꾸나. 이 안에 계신 분은 네게 외 증조부가 되신다. 그
러니 각별히 주의하거라."
"알았습니다. 아버님."
황 보영은 단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은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황 보영의 대답을 받아 들였다. 서문 종의
거처를 향해 두 부녀는 걸어 들어갔다. 자은 선생과 황 보
영이 서문 종의 거처에 들어가자 악삼을 비롯해 모든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송 채린을 향했다. 자기에게 시선이 집중되
자 송 채린은 귀엽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우리 집에 가야할 것 같네요."
"그래야 할 것 같구나. 채린아."
갈 운지는 송 채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송 채린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반짝였다.
"그럼 따라 오세요."
송 채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 집을 향해 걸어갔다. 갈
운지는 송 채린의 뒷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악삼
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요. 악 가가."
악삼은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 운지와 악삼이 송
채린을 따라가자 남은 사람들도 뒤따르기 시작했다.
자은 선생은 문을 열고 들어가 작은 마당에 발을 디밀었다.
작은 목조주택을 향하는 자은 선생의 안색은 굳어져 갔지만
뒤를 따르는 황 보영의 표정은 침착했다. 갑자기 주택의 정
문이 열리더니 백발이 성성했지만 당당한 체격을 가진 노인
이 나타났다.
"어서 오너라."
노인은 자은 선생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자은 선생은 노인
을 보자마자 바로 엎드려 절을 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할아버님."
자은 선생의 어조는 정중했고 태도는 예의가 넘쳐흘렀다. 노
인은 신창 서문 종이었다. 그런데 자은 선생의 예의바른 인
사에도 서문 종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네 이름이 보영이더냐?"
서문 종의 시선은 황 보영에게 가있었다.
"네, 할아버님. 소녀가 보영이에요."
황 보영은 부친 옆에 자리를 잡고 절을 했다.
"아가야 춥단다. 어서 일어나거라."
황 보영을 바라보는 서문 종의 시선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자은 선생을 향한 냉정한 시선과는 천지차이였다.
"너같이 몸이 약한 아이가 이렇게 추운데 밖에 있으면 병이
난단다. 자~, 어서 들어가자. 너를 위해 불을 지펴 방안을 따
뜻하게 해놨단다."
서문 종의 부드러운 어조는 황 보영은 난처했다. 부친인 자
은 선생이 아직도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하, 네 부친 때문에 그러는 구나."
"네, 할아버님."
"하하하, 우리 영아가 이렇게 효녀였구나."
"저, 할아버님..."
서문 종은 선한 황 보영의 마음씨가 마음에 들어 기분이 좋
아졌다. 황 보영을 만난 지 일 다경도 되지 않았지만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특히 딸과 닮은 외모는 서문 종의 마음을 더
욱 기쁘게 했다. 서문 종은 황 보영을 보는 순간 눈에 넣어
도 아프지 않는다는 말이 뇌리에 떠오를 정도였고 천국을 거
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황 보영의 마음은 서문 종과 달리 너무도 불편했다.
부친인 자은 선생이 일어나라는 서문 종의 말이 나올 때까지
땅바닥에서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겨울의 매서운 날씨에 얼어붙은 땅바닥에서...
"일어나게. 자네는 나를 나쁜 할애비로 만들려는가."
서문 종은 자은 선생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늙어도 준치라
했듯이 서문 종은 아흔이 넘어가는 나이였지만 외 증손녀인
황 보영의 안색만 보고도 그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닙니다. 할아버님께서 일어나라는 말씀이 없으셔서 그런
것입니다."
"흥, 헛소리하는군. 어서 들어가세. 자네가 안 들어가면 보영
이도 들어갈 생각을 안 하니 문제 아닌가."
서문 종이 황 보영의 손을 잡고 집안에 들어가자 자은 선생
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황 보영 덕분에 이 정도 박대로
끝났으니 미소가 떠오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서문 종의 집
안에는 특별한 가구는 없었지만 깨끗했다. 방안의 한가운데
있는 탁자에는 다과가 준비돼 있었다. 황 보영을 위해 서문
종이 특별히 준비해 둔 것이다.
"아가야. 네가 차를 좋아한다고 해서 철관음을 준비했다. 입
맛에 맞을는지 모르겠지만 이 할애비의 정성을 생각해서 맛
있게 마셔다오."
"고맙습니다. 할아버님."
"허허허, 그래, 그래. 어서 마시거라."
서문 종의 애정은 황 보영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서문 종이
자은 선생 부녀에게 대하는 태도가 눈에 뜨일 정도로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부친이 냉대로 일관하는데 비해 자신에게 엄
청난 애정을 드러내고 있어 황 보영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네 부친을 위해 한 사람을 불렀다."
"네!"
서문 종을 바라보는 황 보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흥! 네 부친이 이곳에 온 이유는 친구인 송가 놈을 만나기
위해서 지. 나를 보려고 온 것이 아니란다. 결코 너처럼 효도
를 알고 행하는 착한 아이가 아니란다."
"아니에요.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세요. 할아버지."
"쯧쯧, 그래도 지 애비라고 역성을 드는구나."
서문 종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황 보영을 바라보다가 자은 선
생을 노려보았다.
"철방이를 불렀다. 점심을 같이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라."
"고맙습니다. 할아버님."
자은 선생은 서문 종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현했
다.
"됐다. 보영이를 데리고 와준 것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다.
그런데 네가 이원에 직접 온 것을 보니 무슨 부탁을 할 것이
있는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 묻겠다. 조가와 결별하기로 정했느냐?"
"그렇습니다."
자은 선생은 굳은 안색을 하고 딱딱한 어투로 대답했다. 서
문 종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쉰 후 자은 선생의
두 눈을 직시하며 질문했다.
"결심을 굳힌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도대체 무엇이 황가의 가훈과 전통을 버
리게 한 것이냐?"
서문 종의 눈에 의혹이 깃들어 있었다.
"민초들 때문입니다."
자은 선생의 어조는 굳건했다. 서문 종은 자은 선생의 대답
을 듣고는 안색이 환해졌다.
"훌륭하다. 훌륭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대의(大義)라는 것
을 아는 사람은 적다. 설령 알아도 대의를 자기 뜻대로 해석
하는 자가 많지. 그런데 자네는 진정한 대의가 무엇인지를 아
는구나."
서문 종은 자은 선생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닙니다. 할아버님. 단지 고단한 민초
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꿈일 뿐입
니다."
자은 선생은 말투에는 묘한 탄식이 들어 있었다. 서문 종은
자은 선생의 마음을 읽었는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 외손녀가 자네에게 시집간 후부터 제법 여러 번의 만남
이 있었지만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지. 오늘에 와서야 제대로
말을 나눌 때가 온 것 같군."
"오늘에 와서야 할아버님께 인정을 받는군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은 선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법일세. 오랜 시간은 얼어붙
은 마음도 녹일 뿐 아니라 잘못된 생각도 고쳐주네."
"그러나 너무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면 그 또한 잘못된 겁니
다. 저는 지금도 제가 한 결정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모
르겠습니다. 아직도 방황하는 것 같습니다."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자는 여행을 하네. 나는 자네가 현
명하다고 생각하네."
서문 종은 자은 선생을 위로했다.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녹
아 내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서문 종은 손서(孫壻)인
자은 선생이 멸망한 송나라를 재건하려는 점 때문에 괴로워
했다.자은 선생이 집안에서 내려오는 숙원을 버리지 않는 동
안 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상의 유훈을 어긴 것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네."
자은 선생의 안색에 드러나지 않은 고통을 서문 종은 읽어냈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문의 숙원을 내 손으로 망쳐야하는
것은 참기 힘듭니다."
"당연하겠지... 아~, 이런 자세한 이야기는 저녁에 나누기로
하세."
서문 종은 황 보영이 불안한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자 차후에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자고 밀었다. 자은 선생도 황 보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차나 한 잔하게. 그리고 한 시진 정도 있으면 송 철방이 올
것이니 점심이나 준비하라고 해두어야겠네."
"알았습니다. 할아버님."
"보영아."
"네, 외 증조부님."
황 보영은 가지런하게 대답했다.
"네 부친과 대화를 길게 나누는 통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
구나. 그 동안 심심했지."
"아니에요."
"허허허, 네 부친은 잠시 생각할 게 있으니 우리가 이만 일어
서야 할 것 같구나. 그동안 내가 재미난 것을 보여주마."
"네, 알았습니다."
황 보영은 서문 종을 뒤따라 별실로 나갔다. 자은 선생은 탁
자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나간 뒤 바
로 깊은 사색에 빠져 안색이 굳어져 갔다. 서문 종이 황 보
영을 데리고 들어간 별실에는 수많은 책과 기이한 물건들이
진열된 창고였다.
신기한 물품들은 황 보영의 시선을 끌었고 서문 종은 하나
하나의 유래와 효능을 설명했다. 그리고 몇 명 안 되는 서문
종의 하인들은 점심을 준비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 향기가 서문 종의 작은 집안에 진동하기 시작했
다.
송 채린은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가마가 중간에 끼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잠시 집에 왔다가 아기만 보고 다시 되돌아갔다
는 사실이 송 채린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송 노인은 손자의
얼굴을 본 후 가마를 정리하러 간 것이다.
"저기가 집이니?"
"아니에요."
"그렇구나. 아무리 봐도 토굴인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
구나."
"피이~, 저긴 가마터잖아요."
"가마터?"
갈 운지는 도요를 처음으로 봤다. 그래서 가마가 어떻게 생
겼는지 몰랐다. 단지 이상한 움막 한 채와 기묘한 토굴이 언
덕을 따라 뱀처럼 길게 연결된 것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집치고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송 채린에게 질문했다가
가마가 뭔지도 모르냐며 핀잔을 받은 갈 운지는 얼굴이 이그
러졌다.
"요것이!"
"까르르."
갈 운지는 손가락으로 송 채린의 옆구리를 간지럽게 했다.
송 채린은 간지러워 웃음을 터트리며 가마터로 도망갔다.
가마터 안에는 굽던 도자기들이 밖에 나와 찬바람을 맞으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 다됐다."
송 채린의 눈에 도자기가 들어왔다. 도자기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송 채린이 쪼르륵 달려가자 갈씨 자매와 척금방은
그 뒤를 따랐다.
쩍. 쩍...
그런데 도자기를 향해 몸을 트는 순간 도끼로 장작을 패는
노인이 보이자 갈씨 자매와 척 금방은 깜짝 놀랬다. 가마터
에서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노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들과 달리 송 채린은 노인을 보자 함박웃음을 터트렸
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노인은 송 채린의 조부였다. 송 채린은 송 노인에게 인사를
한 후 곧바로 도자기를 향해 직행했다. 어린 소녀인 송 채
린은 도자기를 좋아해 새 작품이 나오면 무조건 만져보고 확
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새 작품이 눈에 띄는 순간 송 채린
은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손님을 모시고 움직였는데도 새 도자기를 보는 순간 모든 것
을 다 잊어버린 송 채린이었다. 송 채린은 하염없이 도자기
를 보면서 만지기도 하고 껴안기도 하면서 즐거워했다. 갈씨
자매와 척 금방이 중간에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난처한 입장
에 처한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송 노인도 마찬가지였
다.
가마터에 손님들이 나타났지만 송 노인은 아무런 말 한마디
도 없이 장작만 패고 있었다. 손녀의 인사에도 대꾸를 하지
않고 오직 장작을 패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갈씨 자매와 척 금방은 송 노인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악삼이 긴장한 얼굴을 한 채 송 노인을 향해 걸어가
자 입을 다물었다. 이상할 정도로 공기가 무거워지고 숨이
막혀 왔기 때문이다. 그 순간 갈씨 자매와 척 금방은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송 노인의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송 채린을 따라
움직이다 발견했다는 점이다. 갈 운지와 척 금방은 자신들이
가진 역량으로도 송 노인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기억해 내면
서 안색이 굳어져 갔다. 하지만 두 여인이 받은 놀라움은 갈
운영이 받은 충격에 비하면 약과였다.
홍매의 자객술을 이어 받아 인기척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의 감각마저 송 노인을 찾아 내지
못한 것이다. 갈 운영은 과연 세상은 넓고 숨은 이인(異人)
들이 많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물론 뒤따라 들어온 석진이나 조 집사, 곽 도성도 송 노인의
인기척을 파악못한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악삼은 송
노인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공기가 무거워
지자 그들이 느끼는 경악은 더 커져버렸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공기의 진동과 파동을 피부로 느끼며 안
색이 굳어져 갔다. 그러나 악삼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긴장은 악삼이 발걸음이 진행할 때마다 고조됐다.
그러나 송 노인은 태연하게 도끼질을 하는데 열중하고 있었
다. 또한 송 채린은 도자기를 만지면서 기뻐하느라 주위의
변화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
재밋게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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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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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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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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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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