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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1990년~1991년)
Gulf War. 1990년 8월 2일부터 1991년 2월 28일까지 벌어진, 이라크와 다국적군(Coalition Force) 사이의 전쟁. 쿠웨이트를 침략한 이라크군을 다국적군이 섬멸하여 쿠웨이트의 독립을 유지하였다.
걸프(gulf)는 바다의 만(灣, bay)을 의미한다. 전쟁이 벌어진 지역의 이름은 걸프가 아니라 페르시아 만 주변 지역. 그래서 1차 이라크 전쟁 혹은 페르시아 만 사태로 부르기도 한다. 일본, 중국, 북한에서는 각각 '만안전쟁(灣岸戰爭)', '해만전쟁(海灣戰爭)', '페르샤만전쟁(Persia灣戰爭)'이라고 한다. 북한의 경우, 줄여서 '만전쟁'이라고 하는 경우가 잦다. 사실 주변 국가들이 페르시아 만의 이름을 가지고 하도 싸워대서 페르시아 만은 아예 'The Gulf'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도 언론보도 초기에는 페르시아만 사태, 페르시아만 전쟁이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상기의 이유 때문에 걸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반면 걸프(gulf)는 만을 뜻하는 영어 일반명사로서 한국어 명칭으로는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서방 측에서는 서남아시아의 명칭 분쟁을 의식해 중립적 명칭인 'The Gulf'를 쓰므로 이를 한국어로 표기한다면 '걸프’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페르시아만'이란 명칭을 쓰지 않기로 한 후에는 걸프만 전쟁이라 표기했다. 그러나 '걸프만'은 전쟁의 무대가 된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고, 다국적군이 이 전쟁을 부르는 공식 명칭은 걸프 전쟁(The Gulf War)이므로 한국도 '걸프 전쟁'을 채택했다. 한국 역시 다국적군의 일원이기 때문.
스텔스 공격기, MLRS, 패트리어트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AH-64 아파치 등 미군의 하이테크 무기들이 대중에게 처음 선보여 그 위력을 가감없이 보여준 전쟁이며, 전 과정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면서 여러 면에서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은 전쟁이기도 하다 심지어 미군이 발사한 크루즈 미사일에 부착된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 미사일이 목표물을 찾아서 파괴하는 과정까지 선보일 정도였다 흠굉무.
더불어 대중에게 월남전 이후 ACU로 대표되는 디지털 위장패턴, 점점 뭔가를 주렁주렁 달기 시작하는 총, 점점 껴입기 시작하는 미군들, 사막위장을 한 군장비들처럼 현대전이라는 전쟁의 새로운 모습을 각인시키고 이후 모가디슈 전투, 미국-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과 같이 사막에서 싸우는 전쟁의 이미지를 만든 첫번째 전쟁이다. 덤으로 중동은 현실에서도, 가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도 전쟁터가 되었다(...).
2. 전쟁의 원인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전쟁이었던지라 당시 국제정세 전문가들과 해외 언론들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그 배경에 다양한 가설과 주장들을 내놓았다.
1.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중동 지역들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원래 같은 언어, 같은 민족, 같은 이슬람 문화권에 원래 하나의 나라였던 곳을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분할시키면서 영국의 식민유산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설. 하지만 이라크와 쿠웨이트가 영국이 중동을 지배하기 전 원래 한 나라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우선 이라크는 현재까지 '역사적으로도 쿠웨이트는 이라크 고유의 영토'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영국이 이라크를 지배하기 전 역사/문화적으로 이라크와 하등의 관계조차 전혀 없는 나라였고 당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강제 합병을 정당화하려고 지어낸 헛소리라는 주장도 있다. 자세한 건 쿠웨이트 문서 참고.
2. 쿠웨이트의 석유가 탐났던 후세인 대통령이 더 많은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일으켰다는 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국경지대의 유전인 루메일라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개발한 석유 시추 기술이 이라크 영토 내부의 유전까지 캐가는 도둑질이라고 맹비난했고 쿠웨이트의 석유 도매로 유가가 하락하여 이라크 경제에 타격이 크다고 분노했다. 하우스 오브 사담에선 이쪽을 메인으로 밀었다.
3. 협소한 자국의 해안 국경선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라크가 더 넓은 해안선, 영해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설. 실제로 이라크의 해안선은 이란과 쿠웨이트 국경 지역 부분에 약간의 해안가 영토만 있어 진짜 협소하다.
4. 이란-이라크 전쟁 종전 후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채들을 지게 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자국내 불만을 나라 밖으로 돌리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 월드 인 컨플릭트 일본의 임진왜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다.
5. 이란-이라크 전쟁 때처럼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국가들이 뒤를 봐줄 거란 판단하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이는 사담의 전략적 오판을 의미한다. 이란 이라크 전쟁은 문서를 확인하면 알겠지만 당시 회교혁명을 일으킨 호메이니가 말 그대로 전세계적인 어그로를 끌면서 서방, 아랍, 중국, 소련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적으로 돌렸기 때문에 몸빵을 자처한 이라크가 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반면에 쿠웨이트는 당시나 지금이나 친미 걸프 왕정들 중 하나였고, 쿠웨이트 점령을 묵인한다는 것은 중동 지역의 동맹국들에 대한 완벽한 신뢰의 상실을 의미했다. 이는 미국 입장에서 전략적 이익을 심각하게 위협한 것이었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결과였다. 확실한 것은 후세인은 처음부터 미국과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고 자신이 쿠웨이트를 침공해도 미국이 묵인할 것이라고 혼자 망상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과 흡사하다. 하지만 미국이 가만놔둘리가 없어 전쟁불사를 외치자 이번에는 소련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근거없이 믿었지만 소련은 도와줄 처지가 안되었기에... 그래놓고 미국과 소련을 다 비난하는 추태를 보였다.
공식적으론 당시 이란-이라크 전쟁 종전후 전비 조달 등으로 지게된 막대한 차관상환 부담 등 국내외적으로 경색상태인 이라크의 국정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쿠웨이트가 자신들의 석유를 훔쳐가는 건 물론 석유를 과잉 공급하여 이라크 경제를 위협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또한 전쟁의 원인은 전략적 목표와 다르지 않다. 미국의 대 중동정책과도 관련있지만, 미국은 현 상태를 유지해서 안정적인 석유공급을 확보하는 것이 중동문제를 접근하는 시각이다. 여기에서 석유의 시레인(sea lane)이 나오는 것이고 시레인을 유지하기 위해 전세계 바다에 미국의 함대를 파견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 목표를 유지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미국은 지역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예를 들어 팔레비의 몰락 이후 이란 제재를 발동했고,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 무자헤딘을 지원한 것도 설명된다. 아프간 전쟁 내내 미국과 이슬람 수니파에서는 무자헤딘을 지원했고, 소련의 영향력이 중동으로 확장되면 곧바로 시레인이 위협받는다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미국이 중동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고 친소련 정책을 취할까봐 리비아 카다피, 이라크 후세인 같은 독재자들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즉 미국의 목표는 현상태 유지와 석유의 안정적인 수송로 확보였고,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점령하고 시간을 끌면 미국은 시레인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 점령을 인정받으리라는 오판을 한 것이다. 애초에 이란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인구, 면적, 군사력, 경제력 등의 모든 요소를 비교해도 이라크가 이길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8년이나 전쟁이 지속되며 이라크는 1000억 달러에 이르는 부채를 지게 되었다. 이 중 140억 달러 정도가 쿠웨이트의 채권이었고,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점령 또는 친 후세인 정권을 세움으로 부채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전쟁 양상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도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잘 드러난다. 전쟁 이라크 군이 대량으로 학살된 '죽음의 고속도로'에서도 나타났고, CNN 중계 역시 미국의 압도적인 물리력을 선전할 뿐 중동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걸프전에서 승리했음에도 쿠웨이트를 침공한 후세인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않는 결과를 보인 것이다.
3. 전쟁 과정
3.1. 발단: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1990년 8월 2일 오전 2시를 기해, 이라크군은 최정예 공화국수비대를 중심으로 한 30만 대군을 전 국경에 투입하는 총공세를 기습적으로 감행했다.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완벽한 기습이었고, 이라크와의 갈등을 흔한 주변국과의 분쟁 정도로 생각하고 전쟁은 생각치도 않던 쿠웨이트군은 전쟁준비도 안 되어 있었던데다 급작스런 기습에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했다. 물론 전면전 상황이라는 사실을 파악해도 애초부터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력 차를 감안하면 승리할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거나 3만에 불과한 쿠웨이트군은 곳곳에 분산된 채 각개격파당하고,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동시에 이라크군은 헬리콥터 공중강습 부대를 투입하여 전격적으로 쿠웨이트의 주요 공항과 활주로들을 점거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국경을 차단한 데 이어 해군으로 이름뿐인 쿠웨이트 해군을 격파하여 쿠웨이트를 외부와 차단하였다.
그 다음엔 쿠웨이트의 수도 쿠웨이트시를 공격한다. 이 와중에 왕실이 거주하는 다스만 궁으로 이라크군의 맹공이 펼쳐졌다. 개전과 동시에 벌어진 이라크 특수부대의 1차 공격을 격퇴하고, 오전 5시에 감행된 이라크 해군육전부대의 공격까지 막아낸 쿠웨이트군이었으나 결국 시가지를 장악한 이라크군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탱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막아내지 못하고 수비부대 병력 대다수가 죽거나 다쳤다. 이때 쿠웨이트군 사령관인 왕제 셰이크 파우드 알 아마드 알 사바는 국왕과 나머지 왕족들을 피신시킨 후 남아서 수비대를 지휘하다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이라크는 같은해 8월 8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합병을 선포하고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주인 쿠웨이트 주로 삼았다. 그 다음엔 쿠웨이트 국회 해산, 공항과 항구 폐쇄, 무기한 통금령 발동, 왕정 폐지 및 공화정 수립, 화폐 통합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갑자기 모국이 주권을 잃고 타국에 강제 합병이 된 사실을 쿠웨이트인들이 가만있을리가 없어 이라크 점령군에 대항해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물론 이라크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한 진압을 했다. 이와중에 많은 쿠웨이트인들이 이라크군에게 학살당했다.
3.2. 전개: 국제사회의 대응
3.3. 절정: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
좌로 부터 제18공수군단,제7군단, 북부합동군(아랍), 제1해병원정군, 동부합동군(아랍) 순이다.
세부적으로는 보자면 좌로부터 배치순으로
제18공수군단 - 프랑스 제6경기갑사단(미82공수사단 2여단배속), 82공수사단, 101공중강습사단, 24보병사단, 3기갑기병연대
제7군단 - 2기갑기병연대, 1보병사단, 1기병사단
1기갑사단, 3기갑사단, 영1기갑사단
북부합동군 - 이집트군(3기보사단, 4기갑사단, 레인저연대), 사아드군(사우디4기갑여단, 쿠웨이트15보병여단)&무탸안나하군(사우디 20기보여단, 쿠웨이트35기보여단)
시리아군(9기갑사단, 특수전연대)
제1해병원정군 - 2기갑사단1여단(타이거여단), 해병2사단, 해병1사단
동부합동군 - 아브 바클군(사우디2국경경비여단), 오스만군(사우디8기보여단, 알 파타하여단, 오만 자동차화보병대대, 바레인보병중대), 오마르전투단(사우디10기보여단, UAE자동차화보병연대), 타리크 전투단(사우디해병대대, 세네갈보병대대, 모로코6기보연대), 카타르기보대대, 동벵갈1보병대대
사진 최하단의 마크는 미 제5특수전단으로 전반적인 특수작전을 담당 하였다. 참고로 미군의 경우 보병사단은 기계화보병사단을 뜻한다.
여담으로 위의 부대중에서 18공수군단, 82공수사단, 101공중강습사단, 5특수전단은 아프카니스탄 전쟁의 주역이며,
101공중강습사단, 24보병사단(보병3사단으로 명칭 변경), 영1기갑사단, 해병1사단, 82공수사단2여단, 2/3기갑기병연대는 참전하는데, 이들 부대에 제4보병사단이 추가된 5개 사단이 이라크전쟁의 주역이다. 걸프전 참전부대중 이라크전에 불참한 제1기갑사단, 1기병사단, 해병2사단은 이라크 안정화 작전에 참전 하며 유일하게 제2기갑사단만은 걸프전 직후 해체 된다.
주공은 영국 제1기갑사단, 사령부 예비인 제1기병사단까지 배속받아 총 5개 기갑/기계화 사단을 거느린 미 7군단이었으며, 기동력이 강한 제18공수군단이 수차례의 강습작전으로 치고 들어가 좌측방을 엄호했다. 미 육군 제1기갑사단 2여단전투단을 배속받은 해병대는 다국적군이 쿠웨이트 방면으로침공할 것 처럼 기만 목적의 조공작전을 수행하여 이라크군을 끌어 들인다.
전쟁이 발발하여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자 미국의 F-117은 이라크의 심장을 찔렀으며, 곧바로 토마호크 미사일의 대공세, B-52의 폭격, 그 외 다양한 공군기의 공격이 이라크의 중심부를 강타하였다. 39일간의 강력한 미 공군 & 다국적군 공군의 공습으로 이라크는 생화학무기 생산처로 의심받는 공장들, 군의 지휘부, 통신시설, 대공망, 발전소가 무력화 되었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미국과는 또 다른 훨씬 발전된 정교한 화력을 보여주었으며, 베트남 전쟁과 달리 적의 목표물을 계획적으로 착실하게 파괴하며 전쟁을 수행해 나갔다.
이라크군은 스커드 미사일로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등을 보복 공격하여 전쟁을 확대하려 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는 이미 다국적군이 배치되어 카프지 전투에서 이라크군의 진격을 막았고, 스커드 미사일은 상당 부분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요격되거나 특수부대&항공전력에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의 유전들에 불을 질렀고, 걸프전 내내 이러한 풍경이 목격되었다(진화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불타는 쿠웨이트의 유전들.
사막의 폭풍 작전 중 공중 폭격이 주가 된 3단계가 끝나고, 마지막 4단계로 넘어가자 다국적군은 2월 24일부터 본격적으로 지상전에 돌입하였다.
다국적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기하고 있던 30만의 지상병력과 장비를 수백km 기동시켜 이라크를 가로질러 쿠웨이트를 포위하게 했고, 뒤가 막혀 도망치던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성공적으로 포위, 섬멸하였다. 이 데저트 세이버 작전(Operation Desert Saber)의 핵심인 우회기동은 헤일 메리 기동작전(Hail Mary Play)로 이름 붙여졌으며, 고대로부터 이어진 불후의 전술인 망치와 모루 전술이 현대전에서 작전적인 차원으로 적용된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파일:attachment/3_AD_Iraq.jpg
진격하는 미 3기갑사단.
헤일 메리 기동작전 막판에 미군 제1기갑사단과 제3기갑사단은 바스라 서쪽 50마일 근처에서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함무라비 전차사단과 조우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 800대, 이라크군 300대의 전차가 격돌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소련군이 격돌한 쿠르스크의 프로호로프카 대 전차전 이래 최대규모의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양군의 선봉이 접촉하여 벌어진 '73 이스팅 전투'(Battle of 73 Easting)에서 단 9대의 전차만으로 이라크 전차 80여 대를 무찌르는 눈부신 전공을 세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기갑기병중대장이 바로 2017년 현재 백악관 안보보좌관인 허버트 맥매스터 육군중장.
AH-64의 헬파이어 미사일에 피격된 함무라비 사단 소속 T-72. 1991년 3월 2일
당시 미군의 기갑사단은 주로 M1A1(HA) 에이브람스를 운용했는데, 이는 열화우라늄 날탄인 M829A1과 함께 1988년부터 배치되었고 당대 최고의 화력과 방호력을 자랑하였다. 반면 이라크의 T-72는 소련의 것과는 달리 1970년대에 개발된 수출용 날탄을 사용하여 공격력이 T-62 전차의 115mm 활강포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수준이었으며 때문에 에이브람스 전차들에게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그리고 미 공군과 육군의 A-10와 AH-64 등도 전장에 투입되어 함무라비 사단의 전차를 대부분 파괴했으며, 함무라비 외에도 메디나 사단, 타왈카나 사단 등 이라크 공화국수비대 소속 정예사단들을 거의 무력화시켰다. 반면에 이 전투에서 미군 피해는 달랑 전사 2명에 부상 30명.
일명 죽음의 고속도로.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퇴각하면서 이용한 이라크-쿠웨이트 간의 도로로, 모여든 이라크 전차들과 차량으로 인해 병목 현상이 생겨났다. 이곳에 집중적으로 가해진 다국적군의 폭격은 치명적이었다.
사우디 북동부로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가 돈좌된 작전에 투입된 한 이라크 장교는 자기 여단이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8년 동안 입은 피해보다 30분 간 미군 공습으로 입은 것이 더 크다고 말했다.
그후 쿠웨이트를 수복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수도 쿠웨이트 시티를 탈환하게 된다. 이때 쿠웨이트 시티에는 아랍국의 군대가 먼저 진입하게 하여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수만 명의 전사상자를 내는 등 심각한 손실을 입은 이라크군은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지상전 돌입 100시간만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전쟁종결을 선언했다. 전쟁은 더 없이 깔끔하고 신속하게 미군의 의도대로 끝났다.
이라크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으며, 특히 대공망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라크군의 대공망 70%가 전쟁 당일에 파괴되었으며, 이중 남은 30%도 대부분 이라크 북부에 설치된 (즉 침공루트와 전혀 상관이 없는) 대공레이더와 지대공 미사일들이었다. 사실상 하루 만에 전투기와 휴대용 SAM을 제외한 모든 대공망이 마비된 상황. 물론 이는 이라크 방공망이 현대 전쟁에는 걸맞지 않은 구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비슷한 이유로 북한군 역시 개전 초 방공망이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게다가 이라크와 달리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한국 공군이 건재한데다 태평양 지역의 미 공군 전개 전력이 워낙 막강하여 굳이 준비할 시간조차 필요없는 상황이다.
당시 이라크군은 MiG-29 등에 이란-이라크 전쟁 등에서 활약한 베테랑 파일럿들을 탑승시켜 미 공군과 붙어보려고 했지만 장비에서 밀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사 장비가 비슷하다 해도 소련군의 대규모 침공에 대비하여 준비되어 온 미국의 프로 조종사들을 당해낼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이라크군도 전쟁 당시 나름대로 반격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스커드 미사일을 이스라엘에 발사하여 아랍국들이 미국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려는 작전이 실행되었다. 이에 미군은 스커드 미사일 발사대를 추적하여 파괴하거나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요격하였다. 대부분의 스커드 미사일은 요격되어 성과를 못 냈지만, 한발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군 기지로 떨어져 미군 병사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전투로 인해 사망한 150명가량의 미군 전사자 중 30명가량이 이 한발에 희생된 것이다. 이라크가 스커드로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 다만 이마저도 온전한 성공이 아니라 해당 기지의 패트리어트 시스템이 정비에 들어가 작동되지 않는 것과 맞아떨어진 결과라 이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생화학무기 등을 사용할 우려가 있었지만 연합군의 핵보복 등을 우려해서인지 생화학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스커드 공격도 생화학무기가 아닌 통상 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사용했다. 사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및 자국 내 시아파/쿠르드족 학살 때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등 화학무기를 자주 써먹은 전력이 있어, 다국적군 측도 이라크군이 화학무기를 쓸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상당히 조심했다. CS탄 사용요청을 화학탄 사용의 빌미가 될 수 있다며 거절할 정도.
3.4. 결말: 불공평한 결과
이라크군은 그야말로 개박살났다. 특히 이 전쟁에서 60만에 달하는 이라크군의 장비와 지휘 체계를 초토화하고 사상자를 7만 명이나 내는 동안 미군은 단 294명만 전사한다. 그나마 그중 145명은 사고사이고 실제 전투 희생은 149명이며, 이중 35명이 아군 오인사격 희생자였다. 그나마 이 오인사격의 숫자도 절대 많은 게 아니다. 이런 적은 사망자를 낸 미군과 달리 이라크군의 전사자는 약 2만으로 추정되며, 부상자와 포로를 합치면 7만에 달한다.
중국은 이 결과를 보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불타는 이라크 무기 상당수가 메이드 인 차이나였던 것. 과거 마오쩌둥의 교시를 받들어 게릴라전을 통해 전쟁을 이기는 전략을 생각하던 중국은 베트남과의 중국-베트남 전쟁 이후 군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걸프전의 결과를 보고 앞으로 전쟁이 나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과학 병기에 밀려서 정규전에서는 100% 진다며 군 현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벌써 20년 전으로, 중국의 경제 성장과 맞물린 오늘날에 이르러선 중국군의 질적 팽창이 엄청나게 강화되는 중이며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의 군사력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군에게 열세라서 러시아군과 군사 협력을 하며 미군을 견제하는 중이다.
미국은 신속대응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쿠웨이트가 점령당한 근 몇 달간 느려터진 해상 수송부대가 주요 군사 장비를 옮기기까지 미군은 고작 급히 공수되어 온 M551 셰리든으로 눈치를 보는 것이 끝이었다. 결국 나온 결과는 스트라이커 장갑차.
걸프전은 최첨단 병기와 공군의 힘을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승전군 사상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전쟁이었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에 발생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한획을 그었고 또한 미래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언론의 역사에 있어서도 한 획을 그었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전쟁 전 과정이 전세계의 안방에 보도된 전쟁이기 때문이다. 다만 2000년대 이후 매스미디어가 전쟁에 관한 여론을 좌지우지하게 됨에 따라, 특히 민주국가의 전쟁 수행에 있어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측면도 가지게 되었다. 예컨대 미군 몇 명만 잡아다가 TV 앞에서 무릎을 꿇리거나 시체를 끌고 돌아다니거나 하면 반전 여론이 비등하게 된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건 현장과 일반 사회의 괴리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전장에 배치된 군대는 전장의 격렬함을 잘 아니 병력 수백, 수천 명 정도 죽는 건 어쩔 수 없으며 최악의 경우 사상자가 수십만에 달해도 필요하다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반 사회는 그런 엽기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 사실 이 문제는 베트남 전쟁이 먼저다. 게다가 단순한 현장과 일반 사회의 괴리 말고도 일반 시민을 비롯한 정치가들이 생각하는 목표와 수단이 군대가 생각하는 목표와 수단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 당시 다국적군은 종군기자단을 통해 언론플레이를 실시했으며 민간인들에게 작전명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사막의 폭풍). 이는 이라크도 마찬가지였고 재미있는 사실은 이라크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한 언론 중 하나가 CNN이었다는 사실.
4. 전쟁이 끝난 후
4.1. 패배한 이라크. 그리고…
전쟁 후 이라크는 경제제재 조치를 받게 되었고, 1500억 달러라는 거액의 배상금까지 강제로 물게되었다. 특히 이라크가 조금이라도 미국에 대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면 페르시아 만에 항시 대기 중이던 미 함대가 토마호크나 F/A-18, F-14 등을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공습을 해 대놓고 반미를 표출하지 못했다. 결국 이라크는 그때 망가진 군대를 다시 재건하지 못한 채 10여 년 후 다시 벌어진 이라크 전쟁 당시 너무나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지 본국에서 치르는 방어전이라 미군과의 격차가 더 커졌음에도 미군에게 걸프전 못지않은 손실을 강요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는 전 세계적으로 협조를 받았던지라 전비 부담을 상당히 덜었다.
이라크군은 군사력 면에도 열세였으며 전쟁의 정당성이나 명분은 다국적군에게(이라기보다 주로 미군이다.) 있었고, 주변의 아랍국들과 소련, 중국도 이라크에게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참혹한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이집트와, 이라크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바트당이 일당 집권하는 시리아까지 쿠웨이트 구원을 외치며 참전했다. 그나마 이라크에게 동정적이었던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종전 후 페르시아 만 연안 아랍국가들의 지원이 단절되면서 꽤나 고생해야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 얼마 후 지원은 다시 재개된다.
언론 역시 패배자의 반열에 들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언론을 자유롭게 풀어두면 전쟁에 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군은 철저하게 기자들을 통제했고, 그 덕에 기자들은 취재에 많은 제한을 받았으며 다국적군의 언론플레이도 그만큼 용이해졌다. 다국적군이 상륙 작전을 연습하는 것을 기자들이 열심히 보도한 덕에 이라크군 상당수가 쿠웨이트 해안가에 머물렀고, 그 덕에 다국적군의 우회 기동이 수월해진 것이 그 예이다. 베트남전에서도 미군의 가장 큰 적은 반전 여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쟁에 반대하는 언론사에서 대놓고 반전 여론 조성하는 감성 기사로 선동하였고 북베트남도 이를 적극 활용하여 미국 정부를 참으로 곤란에 빠트린 적이 있었기에 걸프전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여 피해를 최소화했다. 베트남전이 미국에게 흑역사이자 삽질이라고 하지만, 그 베트남전으로 인해 얻은 교훈으로 미국은 한 단계 성장해 있었다. 미국이 무서운게, 실수를 안 한다는 게 아니고 한 번 실수를 하면 철저히 원인과 대책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보완하여 같은 실수 반복을 최소화한다는 점이다.
군사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처럼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1980년대까지의 전쟁 양상 자체가 소모전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제대로 미래를 볼 수 없었다. 미군의 막강한 공격력과 기동력이 1990년대부터 전쟁 교리 자체를 바꿔놓은 셈이기 때문. 사실 미군 자신조차도 이 전쟁은 소모전이 될 거라고 예상했으니
그러나 미군 역시 입장이 개선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유는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기대치를 너무 높여 놓았다는 것. 지나치게 낮은 전투 사상자 비율로 인해 이제 미군은 희생자가 조금만 나오면 큰 비판 여론에 시달리게 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은 이후 벌어진 이라크/아프간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국은 이 때문에 PMC와 계약하고, 우방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또한 미군의 허술한 전후 처리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던 적이 있다. 어느 정도 정치적 목적(쿠웨이트 해방)을 달성한 뒤로 백악관은 더 이상 확전을 원치 않았고, 이 참에 확실히 이라크군을 제압하고 후세인을 처단하려던 군과 의견을 달리하게 된다. 하지만 군의 원칙은 문민통제와 상명하복이니 슈워츠코프 장군은 휴전을 원하는 백악관의 지시에 따르는 수 밖에 없어 가능하면 빠르게 미군을 그곳에서 빼내는 데만 급급하게 된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라크측 휴전 협상단이 헬기를 띄워도 되냐는 질문에 미군 기지 근처에만 안 오면 된다는 식으로 대응할 지경이었다. 이로 인해 이라크는 맘놓고 헬기를 띄워 자국내 봉기 세력들을 처절하게 처단할 수 있었다...결과적으로 후세인 세력을 확실히 제거하지 않고 미래의 화근을 남겨둔 셈이었다.
다만 그 시점에서 후세인을 몰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미국은 베트남전에서의 트라우마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며,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출구전략; Exit Strategy)'는 걸프전 내내 미국 수뇌부의 핵심 화두였다. 그 화두를 잊어먹은 10년 후의 미국은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또한 걸프전은 쿠웨이트의 수복이라는 제한된 목적을 가진 전쟁이었기에 아랍 연합국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미국이 이라크를 정벌하러 들어갔을 때도 그 지지가 이어졌을지는 미지수이다. 당장 10년 후의 이라크전에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낸 다음에 미국 입장에서 뭐가 좋아졌는지를 살펴본다면, 걸프전 당시에 이라크를 물리치는 선에서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조지 부시도 정치적으로는 패배자가 되었다. 전쟁은 승전했고, 지지율은 솟구쳤지만, 근본적인 문제. 즉 경제가 해결되지 않은 게 문제였다. 1970년대부터 베트남전 후유증과 오일 쇼크, 누적된 무역 적자로 인해 전반적인 경제 사정이 많이 나빠진 상태였던 데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강한 미국을 만든다면서 군비를 늘려 재정 적자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이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세금 인상을 강행했고 그 결과 부시의 지지도는 급락. 로스 페로가 갑툭튀, 이어 아칸소의 듣보잡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에게 광탈하면서 12년 만에 지미 카터에 이어 재선에 실패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공화당으로 치면 제럴드 포드 이후 16년 만.
덕택에 94년 북핵위기 당시 전쟁을 부담스러워 했던 미국이 북한 폭격하자는 김영삼의 의견과 의도를 무시하고 여러차례의 회담과 카터를 특사로 보내게 된다.
4.2. 잘못된 교훈
한편, 걸프전 당시의 빛나는 승리를 기억하고 있던 21세기 초의 미국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즈펠드는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어차피 이라크군도 붕괴되었고 희생자도 많이 안 생길텐데 전투 병력은 조금만 데리고 다녀도 되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2~3만에 불과한 규모의 지상전투병력만으로 이라크에 돌입했다가 베트남 전쟁 시즌 2를 찍게 된다. 걸프전의 경우에는 쿠웨이트의 여론이 우호적이었고 테러집단이나 반미세력이 없기도 해서 치안유지에 있어서 일시적으로 병력을 주둔한 후 쿠웨이트 정부에게 지배권을 이양하면 되는 거였지만 이라크전의 경우에는 이라크 정부를 전복시키는 게 전쟁의 목표였고 이라크의 반발, 테러집단의 유입 등으로 치안공백이 오래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정규군과의 전투에서는 기갑사단이나 공군으로 충분했지만 비정규군와의 전투는 공군이나 기갑사단이 아닌 병사와 게릴라들간의 전투가 주인데 럼즈펠드는 걸프전의 전훈만 생각한 거지 베트남 전쟁의 전훈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하다. 물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더군다나 전쟁을 앞두고 설계한 기본 뼈대가 달랐다. 당시 콜린 파월은 전쟁을 단시간에 종결짓고 바로 철수한다는 기본 전략 구상을 그대로 실천해 결과적으로 미군 주둔 및 기동으로 인한 후폭풍이나 부작용이 야기되지 않았지만, 반면 럼즈펠드는 미군의 첨단장비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한 나머지 '정예된 소수의 고기동 부대로 이라크를 일정 기간 점유하고 거기서 또 이를 기반으로 중동 전체를 컨트롤해 보려는 터무니없는 구상을 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식의 소수의 정예 기동부대를 통한 적 방어종심의 붕괴를 노리는 작전술은 전쟁의 목적에 따라서는 상당히 효율적인 방법이며, 특히 이스라엘군이 수 차례의 중동전쟁을 통해 발전시킨 바 있다. 실제 전역의 전개에 있어서도 빠른 종전을 가능케 했고. 다만 이라크 전쟁의 목적은 이라크군을 패배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점령, 나아가서는 과도정부 구성까지의 안정적인 통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목표에 적합하지 않은 접근방식이었다. 아무리 럼즈펠드가 군인 출신이 아니라 해도, 국가의 대전략을 짤 책임이 있는 국방장관이라는 자가 전쟁의 장기적 정치적 목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단을 택했다는 점은 백번 까여도 할말이 없다. 더군다나 베트남 전쟁과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참고해 볼 만한 선례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네오콘이 과신하던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도 민심이 등돌린 지구전에는 어쩔 수 없다는 교훈을 이라크 전쟁 및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비싼 수업료를 치르게 하고 깨우쳐 주었다. 그 때문인지 공화당계 정치인들 조차도 이제는 "독재자는 날려버리는 것보다는 놔두는게 낫다"는 주장으로 미국의 대외개입을 반대하고 있다.
4.3. 이후의 쿠웨이트
그들은 나라를 되찾았고, 다국적군에 참가한 나라에 감사를 표했다. 이때 일본은 130억 달러의 전비를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보내지 않아 감사 인사를 받지 못했다.
전쟁 초기에 왕궁을 수비하다가 전사한 왕제는 쿠웨이트 올림픽 위원회장이자 IOC 위원이었는데, 전쟁 발발 얼마 후 중동국가들의 요구에 따라서 이라크의 아시안 게임 회원자격 박탈과 동시에 왕제의 아들에게 부친의 자리를 계승시켰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쿠웨이트 내에서는 전쟁 전 쿠웨이트의 국정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전쟁 중에는 국내에 잔류한 인사들에게 암살자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미국이 9.11 테러 이후 이라크를 침공하자 그때까지 이라크에 대한 원한이 남아있었던 쿠웨이트는 이라크 전쟁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여담으로 최근 2017년 카타르 단교 사태에서 쿠웨이트가 사우디와 대립하고 있는 카타르의 편을 드는 근본 요인중 하나가 걸프전쟁 당시 이라크에게 모국이 점령, 병합당한 트라우마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다. 사실상 걸프 전 당시 이라크에게 점령당한 쿠웨이트나 현재 진행형으로 사우디에게 외교 보복을 당하고 있는 카타르 모두 성격은 다르지만 이웃 영토 대국들에게 핍박 받는 소국의 처지라는 점에서는 다르지만은 않았던지라
4.4. 이라크 전쟁
사담 후세인과 미국의 악연은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쪽은 걸프전과는 정반대로 미국이 여러 문제로 골머리만 잔뜩 앓고 있는 중. 물론 이라크의 지정학적 특성상 이전부터 알 만한 사람은 다 예상한 일이기는 했다.
5. 이야깃거리
이라크는 종종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인해 시야가 극히 안 좋을 때가 많았고, 이 때문에 전진하던 미국의 브래들리 장갑차가 바로 옆에 매복해 있던 이라크 T-72 전차를 뒤늦게 보고는 기관포로 쏴서 잡은 일이 있다. 이후 2대의 브래들리가 TOW로 4대를 더 잡아서 총 5대를 잡았다. 영상. 물론 영상에도 나오듯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25mm 기관포로 T-72 상대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힘들다. 전차 포탑 위의 얇은 장갑을 기관포로 때릴 수 있는 아주 운 좋은 상황이 펼쳐졌던 것.
전쟁 초반에 이라크군이 다국적군이 상륙작전을 한다는걸 알게 되었는데, 실상은 속이려고 만든 가짜 기사였고, 예상 상륙지점에 미국이 네이비 씰 팀1 대원들을 약 12명 정도 파견해 해변가에 C4를 무더기로 설치한 다음 터트려서 진짜 다국적군이 상륙해서 교전하는 것처럼 속였다. 근데 이라크는 또 여기에 속아서 2개의 사단을 그 해변으로 보내버렸고, 당연히 그후는 이라크군이 탈탈 털렸다.
한편 북한은 백만 대군과 수천대의 탱크를 자랑하던 이라크 군대가 100시간 만에 다 털리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서 미국과의 싸움을 대비해 레이더 탐지기를 교란시키겠답시고 전국에 가짜 포대, 전투기, 전차, 방사포를 배치하고 쓰지도 않는 갱도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소녀시대의 써니가 3살 때 이 전쟁을 쿠웨이트에서 겪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급거 귀국한 것은 물론, 현재도 폭죽 소리가 들리면 심하게 놀란다고 한다. 멤버들이 귀를 막아 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전쟁 와중에 끔찍한 환경 오염이 발생했다. 이라크군은 다국적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쿠웨이트 점령지 및 이라크 국내의 유전지대에 방화하고 페르시아 만에 대량의 원유를 방류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 만의 생태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때 유출된 원유의 양은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1,000만 배럴 이상으로 추정한다.
동네 오락실 요금이 50원에서 100원으로 인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닌텐도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인 초대 게임보이가 이라크에서 발견됐는데, 폭격을 맞아 플라스틱 외장이 불에 타서 녹아내려 일그러진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작동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