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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회동(會同)-1
서문 종의 집 앞에 도착한 송 철방의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
했다. 이원의 좌장인 서문 종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 이원의 주민들은 송씨 일가를 이방
인이라며 차별을 두고 있었다.
송씨 일가에서 뛰어난 도기를 만들어 이원의 주민들에게 공
급하는 덕분에 그나마 친분을 쌓을 수 있어 눈에 뜨이는 차
별은 사라졌다. 그러나 송씨 일가를 이방인으로 보는 시선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원의 최고 어른인 서문 종이 개인적으로 송 철방을
불렀으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송 철방은 심호
흡을 하고 대문을 열었다.
"서문 어른. 철방입니다."
"들어오세요."
송 철방을 반긴 사람은 황 보영이었다.
"아가씨는 누구요?"
서문 종의 집에 아리따운 젊은 아가씨가 있다는 이야기를 송
철방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자연적으로 질문이 나와버렸다.
"제 이름은 황 보영입니다. 어르신은 송가 성에 철방이라는
함자를 쓰시는 분이시죠."
"그렇소이다. 그런데 아가씨는 누군데 나를 아는 것이오?"
"부친께선 자은이라는 호를 사용하십니다."
"자은! 그럼 아가씨가 황 형의 따님인가?"
"네, 그렇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버님께서 기다리고 계
십니다."
송 철방은 황 보영의 안내를 받으며 서문 종의 거처로 들어
갔다. 거실의 중앙에 있는 탁자 앞에 놓여진 의자에 서문
종과 자은 선생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서문 어른,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어서 오시게."
서문 종과 자은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송 철방을 반겼다.
"송 형. 오랜만이오."
"오랜만이오. 황 형. 근 삼년 만에 재회를 하는구려."
"정말 반갑소. 할아버님 덕분에 송 형과 이렇듯 쉽게 재회를
할 수가 있었소."
"황 형과 서문 어른이 관계가 있다니 놀랍구려."
자은 선생이 서문 종을 조부라 호칭하자 송 철방은 깜짝 놀
랐다.
"나 역시 송 형이 이원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소. 하하
하."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놀라게 했으니 피장파장이구려."
서문 종은 두 사람이 반갑게 재회의 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
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있으면 대화를 나누는데 힘들 것이니 나는 이만 나가
마."
"할아버님!"
"서문 어른!"
"두 사람은 그 동안 이야기나 나누거라. 나는 보영이에게 친
구가 될만한 아이들을 소개해 주어야겠다."
서문 종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황급히 일
어섰다.
"보영아."
"네, 할아버지."
"우리는 이만 나가자구나."
"알았어요. 할아버지."
집에 있는 동안 서문 종과 황 보영의 사이에 돈독(敦篤)해 졌
는지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할아버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았다."
자은 선생은 황 보영에게 말했다.
"인사드리거라. 이 아비의 친우이니 앞으로 숙부로 모셔야 한
다."
"알았습니다. 아버님."
황 보영의 대답은 명쾌했다.
"숙부님. 황 보영이 인사드립니다."
"그래, 고맙구나."
황 보영이 절을 하자 송 철방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비
록 흉터가 가득해 흉악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미소만큼은 따
뜻했다.
"그럼 다 된 것이냐?"
"네. 할아버님."
"그럼, 보영아 우리는 이만 나가자구나."
서문 종은 황 보영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자은 선생과 송
철방은 서문 종이 황 보영을 대하는 모습이 손녀를 애지중지
하는 평범한 촌로(村老)와 별반 차이가 없어 실소를 짓게 했
다. 두 사람은 서문 종의 평소 모습을 알고 있어 실소는 더
욱 짙을 수밖에 없었다.
"허! 서문 어른이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참 올해 살아봐야 한
다는 말을 실감하겠네."
"나도 그렇다네. 할아버님이 보영이 앞에서 사족(蛇足)을 못
쓸 줄은 짐작조차 못했네."
"그만큼 서문 어른도 연세가 드셨다는 이야기이네."
송 철방의 의견에 자은 선생도 동의를 하는지 고개를 끄덕이
고 말았다. 그들이 아는 서문 종은 강퍅한 성격과 냉철한 이
성의 소유자로 적을 상대할 때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가진 무인이었다. 절대로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
녀에게 친구를 만나게 해준다며 직접 움직일 노인이 아니었
다.
"인간은 변화무쌍한 존재네. 할아버님도 사람이 아니신가."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서문 어른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산이라고 생각했네. 그러고 보니 내 딸이 서문 어른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잘 따르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원
인이 보영이 때문이었군."
"호오~, 채린이라면 이해가 가네. 참 귀여운 아이더구먼. 나는
할아버님의 성격이 바뀐 원인이 채린이라는 생각이 드네. 그
런 귀여운 아이를 계속 보다보면 마음이 풀어질 것 아닌가."
두 사람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흘렀다.
"이런, 이런 우리도 늙었나 보네. 딸 자랑을 듣고는 이렇게
기쁜 것을 보니 말일세."
"그렇구먼. 하하하."
두 사람은 사소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기쁨을 느꼈다. 나이가
들어 만났지만 두 사람은 강렬한 우정을 느꼈다. 서로 신분
이 틀리고 나이 차도 있지만 두 사람의 우정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특히 자은 선생은 북경에 온 후로 쌓였던
울화가 송 철방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바람에 휩쓸려 날아간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서문 종은 황보영을 이끌고 창고로 갔다. 황 보영에게 지금
까지 모아둔 보물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창고는 조그마한
목조 가옥이었지만 튼튼하게 지어졌다. 두꺼운 통나무를 통
째로 사용해 엇새 걸기로 이어 보는 것만으로도 육중한 느낌
이 들었다.
서문 종은 두꺼운 목재 문을 열고 창고로 들어갔다. 황 보영
은 서문 종의 뒤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
는 수백 자루가 넘는 창들이 보관돼 있었다. 창에 관해 문외
한인 황 보영의 눈에도 하나같이 뛰어난 명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보영아. 이 창들은 내가 평생을 모은 보물들이다."
"무척 많군요. 할아버지."
황 보영은 창고에 보관된 창의 엄청난 양에 놀라버렸다. 서
문 종은 황 보영의 놀라는 표정이 칭찬처럼 느껴져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창고에 온 이유는 네게 친구를 소개시켜 주기 위해서
다."
서문 종이 황 보영에게 소개해준 첫 번째 친구는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었다. 창고의 벽에 걸려 있는 구룡편(九龍鞭)이
라 불리는 무기였다. 일종의 구절봉(九折棒)인 구룡편은 한
자 길이의 검은 색 봉이 연결되어 있었고 끝 부분에 달려있
는 한자 반 길이의 검은 칼날은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압도하는 강렬한 힘이 담겨져 있었다.
"보영아. 어떠냐?"
"무서운 흉기군요."
"그래, 정확히 봤다. 구룡편은 강편과 연편의 특징을 갖추고
있어 타격병기로는 최고의 위력을 자랑한단다. 게다가 구룡편
은 단순한 절편이 아니란다."
서문 종은 구룡편을 집어 들었다. 여덟 개의 봉을 맞추어
조립하더니 마지막으로 한자 반 길이의 칼날을 고정시키자
아홉 자 반 길이의 검은 색 창이 완성되었다.
"창이 되는군요. 할아버지."
"놀랐지."
"네."
황 보영의 눈이 동그래지자 서문 종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는 한 구룡편을 능가하는 창을 본적은 없단다."
서문 종의 음성에는 구룡편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정말 훌륭해요. 그런데 할아버지."
"말해보렴."
"저는 할아버지의 구룡편보다 뛰어난 병기를 본 적이 있어요.
연화불창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한 창이었어요."
"연화불창!"
서문 종은 전율했다. 신창이라는 아호를 가진 만큼 서문 종
은 창에 관해서는 달인이었다. 검객이 명검을 찾듯이 서문
종은 오랜 세월을 창을 찾는데 소모했었다. 수없이 많은 창
들을 찾아내 사용해 봤고 따로 보관해 두었다.
그런데 서문 종을 매혹시킨 몇 자루의 창은 전설로만 전해져
구할 수 없어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연화불창은 그 중에
서도 최고의 창이었다. 하지만 아미파의 비보인 연화불창을
소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연화불창은 아미파에서도 사라진지 이백 년이 지나
전설로만 전해졌기에 서문 종은 구할 생각조차 포기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 보영이 연화불창을 말하자 깜짝 놀라고 말
았다, 서문 종의 눈이 사춘기 소년의 열망을 간직한 눈처럼
변했다.
"보영아. 연화불창을 어디서 보았느냐?"
"용문 석굴의 사불상이 있는 곳에서 봉인된 그 창을 보았어
요."
"그, 그럼 연화불창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느냐?"
"그건 몰라요."
서문 종은 실망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황 보영은 서문 종이 실망한 표정을 짓자 죄를 지은 듯한 얼
굴로 말했다.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이냐. 오히려 주책을 부
린 내가 잘못한 것이지."
"아니에요. 할아버지께서 무슨 주책을..."
황 보영은 말을 하다가 중간에 멈추었다. 주책이란 단어를
할아버지 앞에서 쓰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
문 종은 황 보영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할아버지~."
"껄껄껄.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런데 보영아."
"말씀하세요. 할아버지."
"연화불창에 대해서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다오."
서문 종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연화불창에 대한 열망이 남아
있었다. 황 보영은 서문 종의 눈동자를 보고 그 열망을 읽
어 내렸다.
'할아버지는 연화불창에 대한 욕심이 남아 있구나. 하긴 그
창의 위력이 엄청나기는 했어. 하지만 창의 주인인 악 소협이
연화불창을 잃어 버렸지만 그렇게 아쉬워하지 않던데...'
연화불창을 생각하다가 악삼이 연상되자 황 보영은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런데 악삼이 창을 주무기로 사용한다는 생각
이 나자 창고에 진열된 창의 명품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기
시작헸다. 특히 연화불창에 의해 사부의 유품이 산산조각 났
다며 낙담하던 악삼의 모습이 황 보영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
았다.
'그래, 할아버지에게 죄송한 일이지만 악 소협에게 창을 선물
해 줘야지.'
황 보영은 악삼에게 뛰어난 명품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할아버지. 연화불창에 관한 사연을 말해드릴게요."
"오~, 보영이는 역시 착하구나."
서문 종은 기쁜 얼굴을 하고서 황 보영을 처다 보았다. 황
보영은 서문 종이 싱글벙글하자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
나 마음먹은 일은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선물
한 창을 악삼에 대한 마음의 정리이자 첫 사랑의 증표로 삼
기로 한 것이다.
"대신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세요."
"알았다. 내가 보영이를 위해서라면 하늘에 떠 있는 별이라도
못 따겠느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황 보영은 서문 종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난 후 사불상
에서 발견한 사연과 연화불창에 대해 이야기했다. 게다가 연
화불창을 놓고 악삼과 연화가 벌인 대 격전도 자세하게 말했
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 창술의 달인인 젊은 두 남녀가
연화불창을 사이에 두고 싸운 격전은 마치 전설 같구나."
"네, 보는 저도 신화가 현실로 나타난 것처럼 보였어요."
"그렇겠지... 그런데 연화라는 여승을 한 번 만났으면 좋겠구
나... 아참 보영아. 네 부탁이 무엇이냐?"
서문 종의 입에서 고대하던 말이 떨어지자 황 보영의 안색은
굳어졌다.
"아까 말씀드린 악 소협에게 창을 한 자루만 선물해 주세요."
황 보영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연화불창을 빌미로 서문 종
이 평생을 다 받쳐 모은 보물을 무상으로 내 놓으라는 부탁
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문 종의 애정
을 이용한다는 생각마저 들어 자신이 천박한 여자로 느껴졌
기 때문이다.
"하하하, 걱정 말아라. 내 모든 것이 모두 네 것이란다."
서문 종은 황 보영의 안색이 굳어버리자 한순간에 모든 사실
을 파악했다. 특히 황 보영이 악삼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
고 있다는 사실까지...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너의 물건을 네가 처리하는 것인데 뭐가 고마운 것이냐."
"그럼 할아버지. 하나만 여쭈울게요."
"물어보렴."
"할아버지가 모은 창 중에서 가장 강한 창이 무엇이에요."
황 보영의 눈동자가 뜨겁게 타오르자 서문 종은 기쁜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거야 당연히 이 구룡편이 최강이지."
"그럼 구룡편은 연화불창과 부딪쳐도 부셔지지 않나요."
"글쎄다... 그건 부딪쳐 봐야 알 수 있겠지."
"그럼 할아버지. 악 소협에게 구룡편을 주세요."
서문 종의 안색이 급변했다. 사실 서문 종에게 구룡편은 다
른 창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황
보영이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황 보영의 마음속 깊은 곳에 연화에게 패해 절규하던 악삼이
고통으로 각인돼 있었다. 그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에...
서문 종은 악삼이 궁금했다. 사랑스런 손녀의 마음을 차지
한 사내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그보다 괘씸하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내이기에 착하고 아름다운 손
녀의 마음을 뺏어버렸는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보영아."
"네. 할아버지."
"소뿔은 단숨에 빼라고 했다. 악삼이란 녀석이 어디에 있느
냐?"
"지금쯤이면 송 숙부 집에 있을 거 에요. 아까 채린이와 같이
움직였거든요."
"그래. 그럼 지금 당장 가자구나."
서문 종은 구룡편을 해체하더니 허리에 두른 후 황 보영과
함께 창고에서 나왔다. 처음에는 구룡편을 보여주며 어린아
이의 치기처럼 자랑을 한 뒤 이원에 사는 여인들 중에서 황
보영과 비슷한 나이의 여인들을 소개시켜 주려 했다.
하지만 황 보영의 마음 속에 악삼이라는 괘씸한 사내가 각인
돼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모든 계획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서문 종은 자기 눈으로 악삼을 확인하기로 했다. 만약 마음
에 들지 않는다면 황 보영이 더 이상 빠지게 전에 직접 처단
하기로 결심했다.
요마의 손을 잡고 이원에서 도망 나온 취마의 얼굴은 사색이
었다. 창백하다못해 시퍼렇게 변해 있었고 온 몸이 사시나
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그나마 이원에서 어느 정도 떨어
졌다고 생각했는지 취마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 에요. 둘째 오라버니."
"......"
"오라버니. 말 좀 해보세요."
요마 모용혜는 취마를 채근했다. 그러나 취마는 사시나무
떨 듯 온 몸을 부르르 떨기만 할 뿐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
았다. 아니 공포에 젖어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오라버니..."
요마는 취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취마가 제정신을 차리
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요마가 아무리 기다려도 취
마는 멍하니 땅바닥을 바라보면서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중
얼거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 에요?"
요마는 짜증난 음성으로 취마에게 말했다. 아무리 보아도 취
마가 넋이 나가 광인이 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
마의 짜증이 가득한 음성에도 취마는 반응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요마는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멀리서 강 천리
와 연 적심이 보이자 요마는 끓어오르는 짜증이 누르기 시작
했다. 두 사람이 도착할 때가 다되자 요마의 짜증은 가라 않
았다.
"팔 당주님."
"어서 오세요. 강 호법님."
"무슨 일입니까?"
"나도 모르겠어요. 혹시 연 방주는 둘째 오라버니가 이런 이
상한 일을 벌인 원인이 무엇인지 아시오?"
"죄송합니다.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습니
다."
연 적심은 요마에게 굽실거렸다. 취마의 이상한 행동이 마치
자기 때문에 생겼다는 듯 황송해했다.
"아까 그 가마터에 마지막에 들어온 흉터투성의 외팔이를 본
뒤부터 오라버니가 이상해 졌어요. 그 외팔이가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이 당주님께 물어 보신다면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해봤는데 아무 대꾸도 없었어요."
요마 모용혜는 강 천리가 제시한 방법은 벌써 다해봤으나 아
무런 소용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만 남았군요."
"강 호법님. 그게 무엇이죠?"
"그 외팔이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좋은 방법이에요."
"안 돼!"
취마가 갑자기 땅바닥을 박차고 일어나더니 외쳤다. 제정신
을 차리지 못하던 취마의 귀에 이원으로 되돌아가 외팔이를
만나겠다는 요마의 말이 들려오자 정수리에 얼음물을 퍼부은
것과 같은 효과를 나타냈다.
"둘째 오라버니."
요마 모용혜는 취마가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아 기뻤다.
"이 당주님."
강 천리와 연 적심은 취마의 발언을 이해할 수 없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취마는 두 사람의 시선에는 관심
조차 없었다. 요마가 이원에 간다는 말만이 취마의 뇌를 흔
들고 있었다. 취마는 창백한 얼굴로 요마를 바라보다가 떨리
는 입술을 열었다.
"앞으로 그 마을은 들어갈 생각도 하지 말아라."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요마는 취마의 말투에 두려움이 가득 실렸다는 사실이 짜증
나기 시작했다. 천하의 팔마가 겁을 먹고 도망쳤다는 현실이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취마의 안색은 아직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해 창백했다.
"오라버니. 말씀 좀 해줘요.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이죠?"
"그, 그건..."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천하의 취마가 한 사람이 두려
워 줄행랑을 치다니 정말 어이가 없어요."
"그를 만났다면 나뿐 아니라 천하의 그 누구도 도주해야지.
특히 남해방과 북해방, 서해방의 사람이라면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사해방 중에 동해방을 제외한 세 방파의 인물들은 무조건 도
망쳐야 한다는 취마의 이야기는 세 사람을 어이없게 만들었
다.
"허! 그 외팔이가 염라대왕이라도 되나요? 저는 오라버니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흐흐흐, 차라리 염라대왕이면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느냐?"
"염라대왕보다 무섭다는 이야기로군요. 도대체 그 자가 누군
데 그러는 것이죠?"
요마의 짜증은 한계에 도달했다. 더 이상 취마의 꼴불견을
볼 수가 없었다.
"그자는 죽었다고 알려진 자다."
"죽었다고 알려진 자라고요?"
"그래. 그자는 장천익이다."
취마의 말투는 나직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엄청났다.
"장 천익... 뭐라고요! 장 천익이라고요!"
"커억! 장, 장 천익!"
요마와 강 천리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얼어붙었다. 이제야
취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요마나 강 천리는 장 천익
을 본 적은 없었지만 그 전설과도 같은 대격전을 귀에 딱지
가 생길 정도로 듣고 지냈다.
비록 대격전을 치르면서 장 천익의 공포를 체험한 취마에 비
할 수 없지만 요마나 강 천리도 두려움에 빠졌다. 네 사람의
뇌리에 공포의 그림자가 조용히 깔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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