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안티오키아 주둔군 자체도 기병으로만 조직되었을 거라는 가정 또한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원 기병인 다른 많은 테마들에 대한 관할권이 있는 둑스가 직접 명령하는 부대원이 대부분 보병이라는 상황은 부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렇게 될 경우 그가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군인들이 그가 이끄는 군사 활동에서 부차적인 역할 밖에는 수행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잔티움인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우리한테 둑스 관할구들의 주둔군들이 기병으로 업그레이드된 여부를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안티오키아 둑스 휘하의 테마들 대부분이 기병인 반면 다른 둑스들 아래의 테마들 대부분은 기보 혼성 조합이 보통이었다는 사실에서는 이런 가설도 제시될 수 있을 법하다.
보병은 바실리우스 2세 치하에서도 여전히 중요성을 유지했다. 아마 그가 저술한 것으로 보이는 학술 논문 On Campaign Organization은, 보병 2,000~16,000과 기병 9,000~9,200의 군세를 상정한다. 이 작업물은 중장 보병 400명과 창병-Pikeman-100명이 아닌 아닌 중장 보병 500명을 말하는 것 외에는, 니케포루스 2세의 그것과 같은 탁시아키아들을 서술한다.83
주80. 이것은 Escorial Tacticon, 263, 269쪽에서 메소포타미아 둑스, 서방의 메소포타미아 카테 파노 그리고 서방의 메소포타미아 스트라티고스 순으로 목록화한 것에 대한 유일한 충분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이는 Oikonomides, Listes, 354쪽에서 설명되기 어렵다.(그는 “서방의 메소포타미아”란 용어를 도나우 삼각주라 일컫는 것으로 여겨진다. Oikonomides, Listes, 363과 n. 409쪽과 비교하라.) Escorial Tacticon, 263, 265쪽의 테살로니카, 칼디아 그리고 동부 메소포타미아 둑스와 스트라티고스들에 대한 언급은, 새 둑스들이 추가되었을 때 옛 스트라티고스들이 계속 존속했을 거라는 추측으로 설명될 수 있다.(안티오키아의 둑스와 하드리아노폴리 스 둑스에 의해 대체된 안티오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스트라티고스들과는 달리) 하지만 서방의 메소포타미아는 완전히 새로운 지휘 단위였다. 단, 카테파노들은 훗날 둑스들과 동등하게 되긴 했으며 때문에 최소한 부분적으로 이탈리아의 카테파노도 그랬지만. Ahrweiler, Byzanceet la mer, 110-111쪽과 비교하라.
주81. Kiihn, Byzantinische Armee, 184-185 and n. 5.
주82. See above, pp. 35 - 36 and 80 - 81.
바실리우스 2세의 새 발칸 지역 테마들은 다수 보병과 소수 기병 조합인 보통 형태를 드러낸다. 다른 한편, 바실리우스 2세는 기병 6,000명 부대로 바랑기를 창설했다.
바랑기는 외국인 용병들로 이뤄졌지만, 이것이 비잔티움의 군사 전통에 매우 날카로운 금이 가게 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음은 틀림없다.
비잔티움은 911년도의 이른 시기의 원정에서도 소규모 러시아인 용병 집단들을 고용했고,84 황제들은 10세기 중반 이래로 하자르인들과 파르가니인들로 이뤄진 외국인 용병 경호원들의 영구 중대들도 유지했다. 바랑기는 확장된 스콜라이 및 엑스쿠비토레스 타그마와 같은 인원수를 보유했고, 애초에는 각 6,000명으로 이뤄진 세 타그마(스콜라이, 엑스쿠비토레스, 바랑기)와 각 4,000명으로 이뤄진 세 타그마(비글라, 이카나티, 아다나티)로 총 기병 30,000명을 만들면서 한 기병 타그마와 동등하게 여겨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랑기는 그렇지 않은 다른 종류의 중대임을 입증했다. 그들에게는 앞서의 다른 부대들이 가지고 난리를 피우게 했던 군사 봉토, 분란 그리고 독립성이 없었고, 바랑기의 군인들은 러시아 및 다른 곳에서 모집한 병력들로 자주 대체되었다.
그 결과 바랑기는 훈련도의 유지가 쉬웠고, 제국과의 유일한 강한 연결을 형성하며 봉급을 지불해주는 존재인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전반적으로 유지했다. 이런 용병들은 다른 나머지 군대가 싫어하는 약한 황제일수록 특별히 더욱, 테마나 심지어는 타그마의 부대들보다도 더 많은 금전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던 것 같다.
11세기의 황제들은 점점 더 많이 노르만인, 게르만인, 투르크인 등의 외국인들을 고용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고유의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고 역시 고유의 장교들 휘하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보통 기병으로 나타나며, 이 당시의 기병은 결국 제국의 주요 전투 세력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었다. 국경 지대로 자주 파견되었던 용병들은, 비잔티움 군대의 단순한 보조로써가 아니라 아예 점점 대체를 하기 시작했다.
비록 테마들은 쇠퇴해 있었지만 다섯 기병 타그마의 비잔티움 군인 24,000명은 여전히 군대의 활동적인 일부였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어떤 가장 큰 규모의 원정에서든 기병을 제공할 능력이 충분했다. 각기 동 그리고 서 도메스티코스의 지휘를 받았던 그들의 서부와 동부 분파들 각 12,000명은, 많은 임무들을 홀로 수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은, 다양한 분견대로 나뉘어 다른 부대들과 함께 쓰인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중 다수는 용병들과 마찬가지로 국경 지대에 파견되었다. 그들과 용병들은 거기서 둑스들의 지휘 아래 놓였고, 둑스들은 11세기 동안에 점점 수효가 늘어나게 되었다.85 타그마 및 용병 부대들은 전적으로, 콘스탄티누스 9세가 해체한 아르메니아나 이베리아의 테마 군인들을 대체했던 것 같다.
타그마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먼 곳에 주둔할 때조차도 여전히 원정에 소환될 수 있었다. 로마누스 4세는 1,071년 같은 늦은 시기에도 만지케르트 전투에 이들 중 다수를 이끌고 나갔으며, 알렉시우스는 1,081년에도 디라키움 전투로 서부 타그마들 중 일부를 이끌고 나갔다.
로마누스 4세는 아나톨리아의 테마 부대들까지도 소환할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나 이베리아 테마의 부대들은 여전히 1,050년까지는 충분히 군역을 수행할 수 있었기에, 콘스탄티누스 9세는 그들을 군역에서 면제시키기 위하여 세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발칸에 있는 불가리아 테마 부대들은 1,065년인 늦은 시기까지 우쩨 족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86
로마누스 4세는 1,069년에 안티오키아와 에데사 둑스들 휘하의 테마 부대들은 그의 훈련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 같으며, 아마 이들이 인근의 투르크족과 아랍인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잘 정돈되고 전투 태세가 되어 있어서 더 이상 훈련시킬 필요가 없었던 게 이유였던 것 같다. 안티오키아와 에데사 둑스들의 부대들은 1,081년 이후에도, 동부 타그마들과 함께 동쪽에서 필라레토스 브라카미오스를 떠받쳤다.
주83. On Campaign Organization, 246 (16,000명에 해당하는 16 탁시아키아들과 함께한 탁시아 키아 조직), 268(보병 12,000명에 해당하는 12개의 탁시아키아), 274 (황제를 수행하는 1,000명 의 기병대를 더한, 8,200명 혹은 8,000명의 기병)
주84. See Treadgold, "Army," 112 .
주85. See Cheynet, “Du stratege du theme au due," 181-194;
and Kuhn, Byzatttinische Armee, 158-242.
나머지 테마들은 동원 해제 및 너무 오랜 평화기에 굴복되었다. 테마는 다가올 세기들 동안 계속 제국의 속주로 기능하게 되며, 반둠은 지형학적인 하위 구분 단위로서 심지어는 최후의 비잔티움 국가인 트레비존드 제국이 1,461년에 망하는 순간에도 살아남았다.87
이런 행정 구분 단위들과 세부 구분 단위들의 우두머리들은 이따금씩 방어 목적으로 주민을 조직화하려는 시도까지도 하였다. 그러나, 테마와 반둠은 11세기 후엔 더 이상 정규 부대의 일원이 아니었다.
테마와 타그마는 4세기 기동군들 그리고 1,100년 전에 사라진 훨씬 옛날의 로마 군단들의 직계 정통 후예였다. 물론 테마와 타그마는 제국 자체가 그랬듯 수 세기 넘게 큰 변화를 거쳤지만, 군인들과 지휘관들은 그들의 부대들이 매우 오래된 확립된 제도 단체-Institution-의 일부였음에 대한 느낌을 계속했던 게 반드시 틀림없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콘스탄티누스 대제 그리고 그 이전의 “보다 오래된 로마”의 영광스러운 나날에 대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어떤 관념을 지녔을 것이다.-Probably had some idea-
비록 그 군대는 패배를 많이 당했지만 그들을 생존시켜오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앎은, 소속 군인들의 자신감이 원천이 되었음 또한 반드시 틀림없다. 더욱이 군역은, 그들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추적이 가능한 동안에는 많은 군인들의 가족들 안에서 세습되었을 것이다. 그런 천 년의 전통은 일단 잃으면 회복할 수 없었다.
주86. Scylitzes Continuatus, 115 .
주87. 반둠의 존속에 대해서는 Bryer, "Rural Society," 53을 참조. 1,432년 경 트레비존 드 제국의 행정적 경계들에 대한 지도는 Bryer와 Winfield의 Byzantine Monuments, I, ii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