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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의 광주사태(1)
광주사태는 집권 각본이었나
당시의 지휘체계는?
발포명령과 정웅(鄭雄)사단장의 역할
정호용(鄭鎬溶) 특전사령관은 무얼했나
공수여단과 다른 부대의 오인전투
왜 과잉진압 했나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실려 어디 갔지」에 대한 공수부대 군인들의 답. 여단장에서 지대장·하사관·병까지 23명의 광주진압 경험자들이 처음으로 털어놓은 진압·철수·발포과정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숨겨진 이야기들」의 충격
<1988년 7월 월간조선>
제1부 공수부대의 생리 (일부생략)
왜 쏘았니. 왜 찔렀니
학생운동권 노래인「5월」의 가사에는 「왜 쏘았니/ 왜 찔렀니/ 트럭에 실려 어디 갔니」란 대목이 있다.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쪽은 광주사태에 투입되었던 제3. 7. 11공수여단의 장병들이었다. 그들은 지난 8년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국방부와 계엄사의 무미건조한 발표문 이외에 공수부대의 견해를 표현한 글은 몇 안 되었다. 광주사태에. 대한 정보는 시민들을 폭도라고 표현한 정부 쪽의 것이 선행하더니 1985년을 기점으로 하여 광주시민쪽에서 쏟아져 나온 인쇄물과 비디오가 정부쪽 정보를 압도하였다. 지난 5월의 언론도 전폭적으로 광주시민 쪽에 서서 광주사태를 조명하였다.
국회에서 구성될 광주사태 진상조사특위는 군. 특히 공수부대 쪽을 겨냥하게 될 것이다. 시민쪽 이야기는 알려질 만큼 알려졌으니 이제는 군대가 답할 차례가 된 것이다. 특위가 마련 한 도마 위에 올라설 쪽은 공수부대인 것이다. 정부·여당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조사에 대비해 왔다. 당시의 작전일지 등을 정리하고, 사망자 부검 소견서 등을 챙기고, 국방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책위원회를 가동시켜 대응논리를 다듬는 등 다가올 일전에 대비하고 있다. 이 일전은 총과 몽둥이, 그리고 칼로써 진행된 광주사태처럼 피비린내가 나는 것은 아니고, 말로써 하는 것이지만,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는 실전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던질 것이다.
광주사태는 기자 개인으로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순전히 직업적 호기심을 갖고서 광주사태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기자는 이 출장이 꼬투리가 되어 잠시 기자임을 중단해야 하였다. 지난 85년 7월호 월간조선에 광주사태 특집을 싣기 위해 다시 광주로 내려가 그 5년 전의 상황을 재현하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다. 광주사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면서 기자는 한가지 아쉬움과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취재하기 쉽다고 해서 너무 시민 이야기만 소개하다가 보니 진상의 한쪽 만, 즉 「광주시민의 광주사태」를 주로 보여주게 되었다. 그 동안 월간조선에 실린 10여건의 기사들도 모두 광주시민쪽의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었다. 어떤 사물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입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광주사태의 다른 한 면,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 대한 취재 없이는 이 대사건의 윤곽을 그릴 수가 없는 것이다.
기자가 국회특위의 구성과, 시점을 맞추어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를 취재하기로 한 것은 지난 취재활동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한 달간 기자는 공수 3. 7. 11여단. 31사단. 20사단 등 5개 관련부대(부대명은 이미 공개돼버려 그대로 쓰기로 한다. 지휘관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에서 광주사태에 참여하였던 23명의 현·전직 군인들을 만났다. 공수여단장, 계엄분소장, 참모장, 대대장, 지대장, 운전병, 하사관, 부상자 등등…. 연 3백 시간에 걸친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 들이 「인식하고 있는 광주사태」를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그들이 말한 광주사태는「사실로서의 광주사태」가 아니라 그들이「인식하고 있는 광주사태」이다. 객관적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도 많지만 군인들이 광주사태를 어떻게 인식했느냐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 소개할 공수부대원들의 증언에 대해 기자는 찬동하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시민측 증언과의 형평을 위해서. 또 광주사태의 진상을 밝히는 기초자료로서 가능한 한 수정없이 소개하기로 하였다. 피해와 가해의 관계로 엮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객관적 자세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군인이나 시민이나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강조하는. 방향으로 증언하려고 하는 점에선 같다. 지금은 그런 문제점 있는 자료라도 많이 수집하는 일이 중요한 단계인 것 같다.
시민의 논리 대 군인의 논리
군인들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묘한 단절감을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뭔가 주파수가 맞지 않아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듯한 느낌. 심하게 말하면 통역이 필요할 정도로 상대방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답답함, 그런 것들이 있었다. 취재를 끝낼 무렵에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자는 민간인의 논리로써, 군인은 군대의 논리로써 광주사태를 설명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말은 통하나 뜻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전남 고흥이 고향인 한 11여단 사병 출신은 『군복을 입고 있을 때는 우리가 과격한 행동을 했다는 자각이 없었으나 제대한 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런 자각이 새삼 들더라』고 했다.
광주사태를 군복을 입은 쪽에서 보느냐, 벗은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생각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군인들은 계염령하의 시위는 불법이니 이를「군대식」으로 진압한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군대식 진압이란 목표를 수단·방법 안 가리고 달성한다는 것이다. 『진압이면 진압이지 과잉진압이 따로 있느냐. 고지를 공격할 때 소총으로 점령하든 박격포로 하든 목표 달성이란 결과는 같은 것이다』『군대의 작전은 비록 그것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되었다면 군대를 동원한 고위층, 그런 군대를 불러들인 국민쪽이다』『우리가 무얼 잘못 했느냐고』 대어 드는 사람들도 많았고 기자가 지난 6월호「한국의 군부」에서 쓴 광주사태의 기본 성격에 대해 흥분하는 장교들도 있었다. 국회특위의 진상조사는 결국은 양쪽 논리의 공방전이 될 것이다.
정부의 한 고위층 인사는『정치에서는 일단 공방전이 되면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면서 느긋한 자세를 보였다. 공방전을 통해서 많은 자료가 드러날 것이고 노출된 정보를 근거로 하여 국민들이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릴 것이고 이런 낱낱의 평가들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때 비로소 역사적 평가로 굳어질 것이다. 광주사태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의 행동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수 부대란 특수한 조직의 생태에 대한 약간의 역사적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아 공수부대의 과거 행적에서부터 기사의 실마리를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집권자가 써먹기 좋은 부대
한국 육군에 공수단이 창설된 것은 1960년이었다. 그해 6월 全斗煥. 崔世昌. 장기오(張基梧). 차지철(車智澈) 등 네 대위는 미국 포트배닝의 특수전교육 기관에서 6개월 동안 늪지· 산악·생존 훈련 등 이른바 「레인저 트레이닝 코스」를 거쳤다. 이 과정을 마친 네명은 다시 낙하훈련을 받고 귀국하여 공수단 창설요원이 되었다. 공수단이 한국의 현대사에 처음 등장하는 무대는 5·16이다. 1961년 5월15일 밤 朴正熙소장은 쿠데타 지휘본부인 6관구 사령부에 갔으나 부대동원이 제대로 되지 않자 김포의 공수단 사령부로 갔다. 단장인 박치옥(朴致玉)대령을 구슬러 병력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朴致玉대령의 출동지연에 갑갑증을 느끼고 있었던 車智澈대위 등은 그 때 무기고를 때려 부수고 있었다.
이 장면을 朴소장이 목격하였다. 고 朴正熙 대통령이 車智澈을 끝까지 신임하여 무덤까지 동행하게 된 것도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보인 車씨의 충성심을 朴대통령이 평생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강 다리를 넘어 서울로 들어오는데 앞장을 선 것은 김윤근(金潤根)준장이 지휘 한 해병여단이었다. 金준장은 평소에 『해병대가 반란군의 선두에 서면 누가 정권을 잡든지 해병대를 없애버리려 할 것이다』고 생각하여 공수단의 뒤를 따르려고 했으나 이날 공수단의 출동이 늦어지는 바람에 해병대가 선두, 공수단이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金씨의 걱정대로 해병대는 그뒤 해군으로 편입되었고, 공수단은 확장일로를 걷게 되었다.
1969년 특전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제1 공수여단을 모체로 하여 여단이 잇따라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특전사의 모체인 공수1여단은 엘리트 의식도 강하다. 全斗煥. 박희도(朴熙道) 장군이 1여단장 출신이며, 盧泰愚준장은 9여단을, 鄭鎬溶장군은 나중에 광주사태에 최초로 투입되었던 7여단을 창설한 사람이다. 공수 1여단은 1976년 8월에 한반도를 전쟁 일보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도끼만행 사건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때의 여단장 朴熙道씨(전 육군참모총장)는 최근 펴낸「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서다」란 회고록에서 비화를 공개했다.
그 때 한미연합사에서는 문제의 미류나무를 자르기로 하고 병력 1백10명을 보냈는데. 64명은 1여단에서 선발된 특공요원이었다. 당시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은 비무장상태로 들어가 절단작업을 하도록 지시했으나 朴여단장은 朴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무장한 64명을 보내 북한측이 설치한 도로차단 시설물 등을 철거했다. 특공조는 북한측 경비정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중앙선을 넘을 때는 발포해도 좋다는 명령까지 받고 있었다. 기습적인 미류나무 절단작업을 보고 우왕좌왕하던 북한군인들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접근하다가 돌아가버렸다. 이순간이 한반도가 6.25이후 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순간이라고 朴熙道씨는 말하고 있다.
역대 육군참모총장 가운데서는 공수부대에 대해서 못마땅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이들도 있었다. 1979년 초 무장공비가 내륙 깊숙이 침투했다가 공수ㅇ여단 관할지역을 지나 북으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는데. 이로 해서 이세호(李世鎬) 총장은 특전사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8군에서도 朴正熙대통령이 공수단 병력을 증강시키는 데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대했다. 그들은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갖는 것을 경계했을 것이다. 鄭昇和 육군창모총장은 鄭柄宙 특전사령관에게『위컴 사령관에게 공수부대의 증강 필요성을 납득시켜야겠는데 자료를 제시해달라』 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유신시대부터 특전사의 3대 임무는
① 비정규전
② 대(對) 비정규전
③ 충정(忠正) 작전이다.
충정작전이란 폭동진압을 뜻한다. 특전사의 모토는「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라」와 「사나이가 한번 죽지 두번 죽나」이다. 정병주(鄭柄宙) 전 특전사령관은 공수부대가 폭동진압부대나 쿠데타부대로 이용된 데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공수부대는 집권자로서는 아주 써먹기 좋은 부대이다. 기동성이 있고 경량화돼 있어 간편한 부대이다. 전투력은 또 일당 백이 아닌가. 더구나 일선 부대를 빼낼 때처럼 미군과의 절차 문제 등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친위의식 강조되고 국민을 경시
공수부대는 특수부대로서 여러가지 특별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車智澈 경호실장이 특전사 안에 지어준 특전회관은 군 시설로서는 호화로운 편이다. 12·12사태 뒤에는 全斗煥, 盧泰愚씨 부부 등 권력층의 핵심들이 이곳에서 파티를 열기도 했다. 특전사 출신의 두 대통령, 두 참모총장, 다섯 경호실장에다가 대통령 경호원도 많고, 국군의 날에는 가장 화려한 각광을 받는 것이 특전용사들의 무술시범과 공중묘기였다. 5·16과 12·12사태를 통해서 두 번의 군사정권을 창출하는 데 앞장섰던 특전사의 장병들은 그런 이력을 자랑하고 친위부대 의식과 우월감에 차 있더라는 것이 광주사태 직전에 이 부대에 근무했던 한 장교의 이야기다.
군사정권시절에 군이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을 때는 장교들도 계급보다 권력과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서 그 영향력이 달라졌다. 이런 점에서 특전사는 지난 4반세기 동안 집권층과 그야말로 특수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鄭柄宙 전 특전사령관도 『부하중에는 정치에 너무 민감하게 행동하는 이들이 있어 통솔에 신경이 쓰였다』고 말했다. 한 야전군 장성은 이런 말을 했다.『우리처럼 휴전선의 일정한 지역을 맡으면 이곳이 뚫렸을 때 국가가 위태롭게 된다는 생각이 저절로 난다. 땅에 대한 애착심이 생기고 그것이 애국심으로 승화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공수부대처럼 어떤 지역도 맡지 않고, 서울 근교에 있으면서 수도권의 정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부대의 성격이 프로페셔널해질 때 과연 국토와 국민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집권자를 향한 충성심이 강조되고 대국민관계가 소홀히 되는 조직은「국민의 군대」 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였다.
한때 군에서는 보안사, 특전사, 수경사를 3사(司)라 하여 권력핵심부와 가까운 인물들이 거치는 필수 코스로 보기도 하였다. 5공화국이 들어선 뒤로는 특전사 인맥의 전개가 다른 2사(司)를 압도했다.
全斗煥. 盧泰愚 두 현·전직 대통령과 국방장관을 거쳐 13대 민정당의원이 된 鄭鎬溶씨는 준장시절(1970년대 후반)에 동시에 1. 7. 9 공수여단장을 지냈던 이들이다. 車智澈, 정동호(鄭東鎬), 장세동(張世東), 안현태(安賢泰), 이현우(李賢雨)씨 등 전·현직 대통령 경호실장 다섯 명이 공수부대 출신이다. 鄭東鎬씨는 全斗煥 공수 1여단장 밑에서 부여단장, 張世東씨는 鄭鎬溶 특전사령관 밑에서 작전참모를 하다가 3여단장과 사단장을 거친 뒤 경호실장이 되었었다. 安賢泰씨는 全斗煥 여단장, 李賢雨씨도 盧泰愚 여단장의 직속부하였다. 鄭鎬溶, 朴熙道 두 전 육군참모총장도 공수여단장 출신이다. 이밖에도 李모 군단장, 鄭모 군단장, 李모 사령관, 참모차장, 沈모 중장, 육본의 李모 핵심참모부장 등 현직 군수뇌부의 많은 사람들이 공수단 출신이다. 崔世昌 합참의장과 張基梧 전 총무처장관은 공수단 창설 요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프로집단
공수부대는 일반 군부대와는 구별되는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 최소 단위인 팀(지대. 중대라고도 함)은 전문화돼 있다. 작전·정보기능, 화기전문, 폭약전문, 의무, 통신 등등. 의무전문은 침술을 배워 비상시에 응급처치를 하도록 훈련받고 있다. 호남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모 여단에서는 대민봉사 사업의 일환으로서 주민들에게 침술 치료를 해주고 있다. 공수부대는 계급구조가 매우 높은 부대이다. 분대규모인 1개 지대(팀)는 두 명의 장교와 하사관 및 병으로 구성되는데, 지대장은 대위다. 이 대위는 일반 부대의 대위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훈련때는 직접 텐트치고 호를 파는 등 사병들과 같이 생활해야 한다. 공수부대의 기간 조직은 하사관이다. 이들은 거의가 5년 이상의 장기복무의무자들이다. 이런 하사관들은 고된 훈련을 통해서 사고의 단순화, 행동의 자동화를 강요받는다. 이들을 이끌고 있는 장교집단은 엘리트 의식과 정치에 대한 민감한 관심을 갖고 있어 일반부대와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수부대의 평소훈련은 ①낙하준비 훈련 ②태권도 ③사격훈련이다. 육군의 사격 대회에서는 으례 공수부대가 상위를 독점하다시피 한다. 공수부대는 1년중 약 4개월 동안 낙하훈련과 천리행군으로 해서 부대를 떠나 산야를 누빈다. 천리행군이란 글자 그대로 산속의 천리를 도보로써 주파하면서 갖가지 비정규전 훈련을 받는 것을 말한다. 악전고투의 훈련과 생사를 넘나드는 낙하를 경험하면서 공수부대원 들은 혈연보다도 더 끈적끈적한 인간 관계를 갖게 된다. 이런 단결심은 외부에 대해서는 배타적 증오감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특히 동료가 피해를 당했을 때는 아들 이 얻어맞는 것을 본 부모의 반응처럼 조건반사적으로 나온다. 더구나 이들은 평소의 훈련을 통해서 비상 상황 아래서는 조건 반사적인 기민한 행동을 하도록 끊임없이 단련되고 있다.
조건반사적 행동의 폭력사고
공수부대원들의 훈련 낙하고도는 약 4백m. 착지(着地)할 때까지 약 57초가 걸린다. 착지충격은 3층에서 뛰어내릴 때와 거의 같다. 낙하할 때 공수부대원들은 50kg이 넘는 군장을 지게 된다. 소총을 메고, 2개의 낙하산과 비상식량. 실탄 등을 앞뒤로 메어야 한다. 원래는 한 팀이 1인당 1초 간격으로 뛰어내리도록 돼 있으나 실제로는 4초 사이에 10여 명이 허공으로 빨려나가듯 우르르 뛰어 내린다고 한다. 55회의 낙하 경험을 가진 소령출신 나영조씨(33)는『첫 점프는 꼭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꿈꾸듯 뛰어내렸으니 공포감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조건반사적으로 뛰어 내리다가 보니 한 열 번쯤 점프를 한 뒤부터 비로소 무섬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고 했다.
허공에 몸을 내던진 군인은『일만, 이만, 삼만, 사만…』을 세고 위를 쳐다 본다. 점프 4초 뒤 낙하산이 펴지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다. 펴져 있지 않으면 가슴 앞에 달려 있는 예비 낙하산을 잡아당긴다. 4백m를 낙하산 없이 떨어지면 8초가 걸리므로 낙하산이 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예비낙하산을 펴는 행동에는 4초의 여유밖에 없다. 낙하할 때는 땅을 보지 않도록 돼 있다. 땅 바닥을 보면 미리 생각하고 행동을 준비하기 때문에 다칠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접지하자마자 자동적으로 몸놀림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돼야 다치지 않으며 이런 행동이 가능하도록 반복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하도록 돼 있는 공수부대원은 그 행동이 자동화. 본능화. 조건반사화 되도록 관리된다. 이런 특질을 가진 그들이 과격한 시위대와 부딪쳤을 때 어떤 행동을 즉각적으로 보일 것인가?. 그 답이 부마·광주사태였다.
특전사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민간인이나 다른 군부대원을 상대로 사고를 내어도 자체적으로는 처벌을 하지 않으려 하고 감싸주는 분위기라고 한 법무장교는 말했다. 『특수부대는 사기가 가장 중요한데 상관이 부하를 감싸주지 않으면 통솔이 안 된다』는 것이다. 공수부대의 사고는 주로 폭력을 수반한 것이 많다고 한다. 한 법무부서 제대병은 네 가지 사례를 들었다. 공수부대의 이런 폭력성향에 대해 鄭柄宙 전 특전사령관은『부하들에게 그점에 대하여 주의를 많이 주었다. 전쟁이 터지면 적진에 침투, 민간인들의 협조를 받아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데 민심을 얻으려면 너무 난폭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러 왔었다』고 했다. 한 공수부대출신 장성은 『공수부대는 광주에서 처음에는 마치 적진에서 적을 상대하듯 작전을 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 했다.
부마사태 때 공수단 투입
1979년 10월17일 밤 9시를 넘은 시각이었다. 총장 공관에 있던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은 청와대로 빨리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날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은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 참석하러 서울에 온 미국 국방장관 브라운을 접대하고 있었으므로 鄭총장이 불려간 것이었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朴대통령, 金載圭 정보부장. 金桂元 비서실장, 車智澈 경호실장, 신직수(申稙秀) 법무담당특보가 앉아 있었다. 대통령은 鄭총장에게 앉으라고 하더니 金載圭 정보부장에게 부산상황을 그에게 설명해줄 것을 지시했다.
설명이 끝나자 朴대통령은 침착하게 말했다.『정장군, 현행법에는 육군참모총장이 치안유지를 경찰이 할 수 없다고 감지했을 때 직접 계엄선포를 한 뒤 추인을 받을 수 있게 돼 있소. 지금 각의를 소집하자니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 그러니 정총장이 부산지역에 계엄을 선포한 뒤 추인을 요청해주시오』 대통령은 지역계엄사령관으로는 누가 적당하냐고 물었다. 鄭총장은 박찬경(朴贊競)군수사령관을 추천했다. 車실장이 전화로 朴사령관을 불러내더니 鄭장군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鄭총장이 朴사령관에게 계엄선포 사실을 알리고 병력배치를 지시하려고 하는데, 대통령이 갑자기『정장군, 잠간 기다려요』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시계를 보더니『11시에 국무회의를 할 수 있겠는데… 정장군 계엄준비만 해두시오!』라고 말했다.
朴사령관은 부산에는 실병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鄭총장에게 말했다. 朴대통령은 어느 부대를 신속히 투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鄭총장은 가장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부대는 공수여단이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차실장! 1개 여단을 동원해!』 라고 했다. 깜짝 놀란 鄭총장은『각하! 공수단은 실장이 명령할 수 없습니다』 고 했다. 대통령은『그런가?』라면서 씩 웃었다. 鄭昇和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날 밤 1개 여단이 부산으로 공수되었습니다. 며칠 뒤 공수단이 부산에서 일반시민들에게 과격한 행동을 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시정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공수부대를 동원한 것은 신속한 투입을 생각해서 취한 조치였는데. 나중 광주사태 때도 그런 일이 있었더군요. 특수부대를 시위진압에 동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압봉의 공포
부마사태 때 부산에 투입되었던 공수 3여단(이하 기사에 나오는 부대명과 지휘관 이름은 군당국이 이미 공개했고, 군 당국의 지원하에 출판된 책 등에도 나온 것들이다)의 나영조 당시 대위는 이렇게 말했다.『79년 10월18일 새벽 김해공항에 내리니까 자칫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송부대장이 부하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들었는데, 시위대를 만나면 차를 구할 생각은 하지말고 우선 달아나라고 하지 않는가. 파출소가 불탄 것을 보고, 국민들이 이럴 수가 있는가, 생각했다. 우리보고 과잉 진압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때 몸은 지치고, 신경은 날카로와져 있었다. 구덕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3일간 특전 식량으로 식사를 하면서, 하루에 8∼9시간씩 거리에 나가 부동자세로 서 있으니 악이 받칠 수밖에 없었다』
부마사태에서 공수부대가 한 역할은 과장된 면이 많다. 1979년 10월18일 0시를 기해서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지자 공수 제3여단이 평화시 규모로는 사상 최대의 야간공수 작전 끝에 부산에 도착했고. 이 병력은 18일 저녁 8시쯤에 딱 한번 시위대와 부딪쳤다. 부산시 중구 남포동에서 3백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서자 공수부대 1개 대대는 순식간에 이들을 박살내 버렸다. 그 뒤로 공수부대가 한 일은 시위진압이 아니라 주로 행인들의 구타였다.
부산 동래구 동상동에 사는 신희철씨(회사원·당시 37세)는 18일 밤 8시 50분쯤 서구 충무동 상륙다방 앞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다. 뇌좌상과 뇌경막 손상을 당한 그는 뇌수술까지 받았다. 부산진구 당감동에 사는 금은방 종업원인 전병진씨(당시 32세)는 계엄령 첫날인 10월18일 밤 9시30분쯤 서면 태화극장 앞 택시 타는 곳에서 택시를 먼저 잡으려고 찻길로 조금 나가 서 있었다. 앞당겨진 통행금지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 시민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때 공수부대 한 소대병력이 찻길을 따라 남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 걸리는 사람들을 청소하듯 해버렸다. 술에 조금 취해 있었던 전씨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당했다.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몇 대나 맞았는지 구둣발로 얼마나 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정차한 택시 꽁무니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공수부대 군인 네 명이 다시 그를 끌어내 발길질과 개머리판으로 녹초를 만들었다. 그는 쓰러졌다. 군인들이 다 지나갔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지하도를 건너서 한독병원을 찾았다. 진단을 해보니 앞니 다섯 개가 부러졌고 오른쪽 귀 위의 머리뼈에 분쇄골절이 생겼음이 드러났다.
칠성음료주식회사에 다니는 최홍일씨(25)는 그날 밤 8시쯤 동료 직원 네 명과 함께 영도다리를 걸어서 시청 쪽으로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밀리자 공수부대 군인들은 길을 막고 인도에서 줄을 서서 차례로 걸어가라고 했다. 시민들은 시키는 대로 줄을 서서 시청을 지나 버스정류소 쪽으로 갔다. 상공회의소 앞 육교 밑에서 그들은 군인들에게 붙들렸다. 영도다리 쪽의 군인들이 보내주어서 왔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길바닥에 꿇어앉혀졌다. 군인들은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머리·어깨부터 때리기 시작했다. 최홍일은 얼른 안경을 벗어 호주머니에 넣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얼굴을 숙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군인의, 무릎이 그의 안경 낀 얼굴을 강타했다. 왼쪽 안경알이 깨어지면서 유리조각이 눈 밑에 박혔다. 비명을 질렀지만 진압봉 세례는 사정없이 그의 머리와 허리에 쏟아져내렸다.
공수부대 사회관이 문제
부산시민들을 마구 패는 공수부대 군인들에 대해 다방의 주방장 김석만 군(당시 18)은 순진하게 그 불만을 표현했다. 포항 출신인 이 소년은 1979년 10월20일 밤 8시50분쯤 서면의 부산진세무서 앞길에서 공수부대 군인 옆으로 지나가다가 아무 까닭도 없이 불려가 얻어맞았다. 김군은 서면 로터리의 동국빌딩 앞길을 지날 때 이 번엔 민간인 두 명이 군인들에게 얻어맞는 것을 보았다. 이 두 민간인은 택시를 서로 먼저 타려고 다투다가 군인들에게 붙들려가 폭행을 당했다. 김석만군은 화가 치밀었다. 동국빌딩 계단을 쫓아올라가 5층 옥상에 있던 음료수 공병 3개를 집어 길바닥으로 던졌다. 김군은 누구를 겨냥하여 덜진 것이 아니라 화를 풀려고 아무데나 던진 것이었다.
공병 깨지는 소리를 듣고 공수부대 소령이 즉시 근처의 경비부대 40명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이「불순건물」안으로 쳐들어갔다. 이 5층 건물 안엔 사무실이 많이 있었다. 한 사무실 안에선 여섯 명의 아가씨들이 계엄군 위문 바자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이런저런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사무실 안에 있던 24명의 시민들을 모두 지하실로 몰아넣고 무릎을 꿇리고 두 손을 머리 뒤로 붙이게 했다. 이 젊은 소령은 부산진경찰서 수사과장과 형사계 형사들을 호출했다. 이소령은 아버지뻘 되는 서동백 수사과장을 이끌고 건물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플라스크, 비커, 약품병 따위 실험기구가 많은 공해대책 회사 사무실이 하나 있었다. 소령은 여기서 흥분하고 말았다.
『사제 폭탄을 만드는 비밀공장을 드디어 발견했다』 고 기고만장해 하였다. 30년 동안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서과장은 『이 장교가 돌았구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소령은「비밀 폭탄공장」을 샅샅이 수색케 했다. 자신의 추리를 뒷받침할 아무 단서도 발견하지 못하자 지하실로 몰아넣은 민간인들을 족쳤다. 김석만군은 자기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들 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 견뎌 『내가 했다』 고 나섰다. 소령은 부산진서 상황실에 있던 여단 임시지휘본부로 달려가 이 사실을 여단장에게 보고했다. 여단장은 소령의 흥분된 보고를 차분히 듣더니 싱긋 웃으며 『그것은 경찰에 넘겨 조사시키는 것이 좋겠다』 고 말했다. 이 소령의 경우가 그렇듯 공수부대 군인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특수부대적인 단순사고방식으로 확대 해석하고 거기에 맞추어 자신들의 행동도 과잉반응으로 몰아가는 특징이 있다.
鄭柄宙 당시 특전사령관은『3여단을 부산으로 보낸 뒤 마산에서 시위가 터져 1, 5여단을 추가로 투입하였다. 5여단은 마산에 위수령이 내려 진 직후 들어갔는데 장기오(張基梧) 여단장이 아주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진입할 때 전군이 착검하고 트럭에 타 시내를 질주하는 위력시위를 벌여 기를 죽여 놓은 다음 시위가 사라진 뒤에는 새마을 청소운동에 투입, 선무활동을 벌였다』고 했다. 특전사에선 부마사태의 진압을 성공적으로 평가했고 이런 자신감이 광주사태에서 강경진압으로 나서는 동기를 부여했던 것 같다. 광주사태 때 3여단 장병들은『우리는 부마사태를 진압했던 부대다』 고 시민들에게 겁을 주기도 했었다.
왜 특전사령관을 쐈나?
12·12사태의 주역도 공수부대였다. 全斗煥 합수본부장측의 승리를 결정 지은 것은 朴熙道 준장이 지휘하는 공수1여단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고, 崔世昌 준장의 제3여단이 이웃한 특전사로 들이닥쳐 鄭柄宙 특전사령관을 총격으로 체포한 일이었다. 수도권에 배치되었던 3개 공수여단 이 全장군 편에 섰고, 1개 여단만이 육본측에 섰으나 이마저도 정규 육사 출신 장교단의 작용에 의하여 육본측 명령에 따르지 않게 된 것이 全장군의 승리를 보장하였다. 鄭특전사령관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유혈극은 특전사의 생리를 연구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총격전 속에서 부상당한 당시 3여단 소속 나영조씨(33·식당업)를 만나 얘기를 들어 보았다. 『나의 팀은 그날 5분 대기중이었다. 대대장인 박종규 중령이 나에게 특전사령관을 모시고 오라고 지시했다. 총을 쏘라든지, 납치하라든지 하는 지시는 없었다. 대위인 내가 이 명령의 배경을 알 수도,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권총을, 부하들은 M16 소총을 들고 특전사령관실로 들이닥쳤다. 나와 부하 네 명은 안으로 잠궈진 사령관 집무실 문을 열려고「문열라」고 소리치며. 손잡이를 비틀고, 두드리고, 차기도 했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고 그안에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있는 줄은 더더구나 알 수 없었다. 안에서 사격이 있었다. 박종규 중령은 오른손, 나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과 척추, 김모 대위는 배, 신현수 상사는 목에 총을 맞았다. 총을 맞은 부위의 높낮이가 다른 것으로 봐 안에서 두 사람이 각각 총을 쏜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쓰러졌고, 바깥 복도에서 기다리던 내 부하들이 닫혀진 문을 향해 즉각 집중사격을 했던 것 같다. 왜 발포명령없이 부하들이 사령관을 향해 사격을 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직속 상관 네 명이 총을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공수부대원은 없다.
우리는 비정규전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적 발견!」「사격 개시!」「사격 중지!」식의 명령에 따라 총을 쏘도록 배우지 않았다. 피아의 분간이 어려운 긴박한 상황에서 눈짓 하나로써 즉각 사격을 할 수 있도록. 즉 조건반사적인 행동을 하도록 끊임없는 단련을 받아온 군인들이다. 더구나 한 팀은 혈육과도 같은 인간관계로 엮이어 있다. 동료가 다치면 눈이 확 뒤집어지게 돼 있다. 박종규 중대장이 이웃에 살고. 육사 후배인 김오랑 소령을 보고 사살했다는 이야기는 와전된 것이다. 부하들이 뒷문으로 돌아 들어가 보니 김소령과 정병주 사령관이 쓰러져 있더라고 했다』
명령의 정당성 따질 겨를 없어
박종규 중령은 12·12사태 뒤 그리스 주재 한국대사관의 무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었다. 박중령이 이 사건으로 고민을 많이 했고,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 해외근무를 자원했었다고 한다. 나소령은 자신의 행동이 12·12사태의 전개과정에서 어떤 좌표에 있었는지 당시로선 전혀 몰랐다고 했다. 『일개 팀장이 정치적 상황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군인이 명령을 정치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한다면 군도, 나라도 망하는 것이다. 전두환 비리가 폭로되면서 우리까지 같은 눈으로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공수부대가 정치에 휘말리는 일도, 우리처럼 정치의 희생자가 되는 일도 다시는 없었으면 한다』
당시 鄭특전사령관의 참모였던 金 모씨는 『그때는 피아 구별이 안되었다. 똑같은 특전사 복장을 한 3여단 특공조가 밀어닥쳤을 때 어느 누가 사령관을 납치하러 온 부대로 알았겠는가. 특전사에서는 가상적이 특전사 외부에 있는 줄 알았지 내부의 3여단이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고 했다. 그러나 당시 작전처장 신우식(申佑植) 대령 등 정규육사 출신으로서 全斗煥 장군과 가까왔던 참모들은 3여단 병력이 들이닥치기 전에 미리 연락을 받고 피해버렸다. 적법한 명령과 지휘체계가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을 이들 장교들의 행동은 특전사가 과연 진정으로 국가에, 즉 적법한 명령에 충성할 수 있는 부대인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특전사의 법무참모를 지낸 한 변호사는 『말단 부하들은 명령을 자의로 해석하거나 질문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해서도 안된다. 명령의 정당성 여부는 군 수뇌부의 책임에 속할 뿐이다』 고 했다. 12·12때 육군본부·국방부를 점령했던 공수 1여단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던 鄭모씨(모 방송국 프로듀서)는 『그때 우리 부대가 행주대교를 넘기에 대간첩작전을 하러 가는 줄로만 생각했다. 육군본부를 점령하고서도 우리가 누구 편에 서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고 했다. 군대조직의 특수성 때문에 대부분의 장병들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내려지는 명령의 정당성을 판단할 여유도, 정보도 가질 수 없다는 증거다.
광주사태의 예고편
계엄확대 조치는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발표되었으나 군병력이 시위진압 작전에 나선 것은 17일 오후부터였다. 이날 서울 영등포역 광장에서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전경들을 버스에 태운 채 역 앞 광장에 세워두었다. 이 버스에 타고 있었던 金모 상경(33. 현재 기자)은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공수부대원이 트럭을 타고 나타나더니 한 장교가 핸드 마이크를 잡고 경고를 했다. 「즉시 해산하라, 1분 이내로 해산하지 않지 않으면 강제로 해산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광장에는 시위군중은 없었고 행인들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1분이 지나자 그 대위는 「해치워!」라고 명령했다.
수 십명의 공수부대원들은 진압봉을 휘두르면서 군중 속으로 돌진하더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어느 노인이 대어들자 5∼16명의 군인들이 그 노인에게 몽둥이질를 했다. 이건 진압이 아니고 집단 폭행이었다. 진압봉으로 머리를 안 때리도록 교육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때는 가려서 때리는 것 같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상처가 안 나도록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30초만에 영등포 역전은 무인지경으로 변해버렸다. 이것을 입 벌리고 지켜보던 우리는 소름이 끼쳤다. 며칠 뒤 광주사태 이야기를 듣고 나는 광주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金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해 여름에 불량배 단속과 삼청교육이 있었다. 나는 서울 미아동의 파출소에 배속되었다. 공수부대원과 함께 경찰의 안내를 받아 교육대상자를 잡아오는 일을 했다. 진짜 불량배는 거의 달아나고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과자들이 주로 잡혔다. 경찰관들에게 책임량(검거대상 인원)이 할당돼 있어 무리를 해서라도 머리 수를 채우려고 했다. 파출소로 연행된 사람이 항의하면 그 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의 무지막지한 구타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군화로 짓이기고 얼굴을 걷어차고 몽둥이질을 하고… 바닥에 유혈이 낭자하고, 바깥에서는 가족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나는 저들이 과연 동족인가, 하고 의심을 해보았다.
광주사태가 끝난 뒤 전경들이 특전사령부로 초대되어 그들의 진압 훈련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박력 있는 공세적 진압에 감탄하면서도 과연 저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경들은 방어적 진압에 주력하는 편인데 공수부대원들은 적극적 강공에 의존하고 있었다. 정호용 사령관은 우리들에게 훈시를 했는데 광주사태의 진압을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공수부대의 활약으로 제5공화국의 탄생이 가능했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다』
2003-07-16, 1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