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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의 광주사태(2)
제2부 광주사태의 초동 진압
광주 전사자 23명
「38420, 1980년 5월 24일 광주에서 전사, 육군하사 이영권의 묘」「육군상사 정관철의 묘」「육군상사 박억순의 묘」「육군중사 최갑규의 묘」「육군병장 이상수의 묘」「육군일병 최필양의 묘」「육군병장 변광열의 묘」. 김용식, 김경손, 권석원. 이관영, 차정환, 김지호, 김인태, 권용문, 손광식, 권성찬, 김명철, 강용래, 이종규, 이병택, 변상진, 최연안, 국립묘지 제29, 30 묘역의 묘비명들에 쓰여진 이름들이다. 이들 23명의 전사일자를 보면 1980년 5월20일에 1명, 21일에 3명, 22일에 3명, 23일에 1명, 24일에 11명, 25일에 1명, 27일에 2명, 28일에 1명이다.
20일의 사망자 육군상사 정관철은 제3여단 16대대 소속으로서 20일밤 10시10분쯤 전남대학교 앞에서 시위대가 몰고 돌진해온 차량에 깔려 죽었다. 공수11여단 이상수 병장등 21일과 22일의 사망자 6명은 3개 공수 여단병력이 광주시내를 철수할 때 무장 시위대의 발포에 걸려 죽은 이들이다. 공수 11여단의 차정환 소령 등 24일과 25일의 사망자 12명은 11공수여단과 광주보병학교 교도대, 제31사단과 광주기갑학교 하사관 생도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오인사격에 의한 피살자들이다.
20사단 소속 병장 이종규 등 27일과 28일의 사망자 3명은 계엄군이 광주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시민군에 의해 사살된 이들이다. 23명의 사망자들을 그렇게 분류해 보면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이 하나의 윤곽으로 드러난다. 23명의 소속부대는 공수부대 18명, 31사단 3명, 보병학교 1명, 20사단 1명이다. 이 숫자로도 광주사태의 주역은 무장시위대와 공수부대였고, 다른 부대는 조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고 하는데, 외 29, 30묘역에 묻힌 군인들 23명은 이데올로기를 같이하는 휴전선 남쪽의 시민들에 의해, 그리고 피아를 구별하지 못했던 동료군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면에서 1980년대에 한국이 겪었던 내부갈등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1988년 5월29일(일요일) 오전 10시, 눈부시게 화창한 늦봄, 화사하고 신선한 공기 속에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 29묘역의 광주사태 전사자 묘비명 앞에 30대 청년 다섯명이 모였다. 김동철(金東哲.32) 김은철(金殷鐵.30) 경기만(慶箕萬.31) 이명규(李明珪.31) 배동환(裵東煥씨.33). 20사단 출신인 李씨는 5월 27일 새벽에 광주로 진입했다가 시민군과의 교전에서 피격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공수 11여단 출신들. 金東哲·慶箕萬씨는 5월24일에 보병학교 교도대의 오인사격으로, 金殷鐵· 裵東煥씨는 5월21일에 광주시내에서 철수할 때 시민군의 총격을 받고 가슴과 팔에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다. 결혼한지 몇달 안 된다는 金殷鐵. 李明珪씨는 아내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들은 동료들의 묘비들을 둘러보면서 『올해는 더욱 쓸쓸한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의 감회를 뒷받침하듯 정오까지 기다려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없고, 해마다 한번씩 열리는 추모회는 다섯 명의 참석자로 그야말로 조촐하게 끝이나고 말았다.
광주사태 전사자들을 국가유공자처럼 대하여 추모행사도 규모있게 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80∼82년쯤까지는 특전사나 육군본부측에서도 신경을 써주고 참배객들도 많았다. 그뒤로 차츰 시들해지더니 요 몇 년간은 군에서 화환하나 보내오는 적이 없고 모이는 사람들도 수백 명에서 수십명 수준으로 줄어들더니 올해에는 한 자리 수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그 11일 전 5월 18일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했었던 수만 인파와 비교 할 때 광주사태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이 국립묘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한때 서로의 가슴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망월동과 동작동으로 갈려 누워 있고, 산 사람들은 화합을 부르짖으며 그 깊은 골을 메워보려고 애쓰고 있으나 양쪽의 생각은 아직도 상대방의 주파수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이날 국립묘지에 나온 진압군측 부상자들은 『요즈음은 우리가 죄인이 된 것 같다』면서 『우리나 광주사람들이나 똑같은 정치의 피해자가 아니겠는가』 라고도 말했다.
부상자에게 돌아간 李世鎬 땅
광주사태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의 숫자는 확실히 공개된 것은 없으나 1백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유증이 남아 원호대상자가 된 사람은 40여 명이다. 이들중 장교들은 전역할 때 약 1천 1백만원, 사병·하사관들은 6백만∼8백만원의 위로금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서울거주자와 월남전 전상자 및 12·12사태 때 다친 공수부대원 등 34명은 지난 81년 5월에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 있던 땅 3천평을 정부 고시가격으로 불하받았다. 趙昌九씨(11여단 63대대장으로 부상)외 33명이 균등하게 분할하기로 하고 공동 매입한 이 땅은 5·17뒤 부정축재한 재산으로 찍혀 국가에 환수된 전 육군 참모총장 李世鎬씨의 소유였다.
1인 당 98평을 약 4백20만원씩에 샀는데 광주사태 부상자들 등 28명은 지난해 토지구획정리가 끝나 1인당 22평으로 줄어든 이 땅을 1인당 약 3천7백만원 씩에 팔았다. 세금과 최초 투자액을 제하고 1인당 약 2천4백만원 씩의 순이익을 보았다고 한다. 부상자들 가운데는 金東哲씨처럼 일찍 퇴원하는 바람에 땅을 못받은 이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광주사태 부상자와는 별도로 12·12 사태 때의 부상자들도 있다. 특전사령관을 연행하다가 일어난 총격전에서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피살)이 쏜 총을 허리에 맞아 하반신 불수가 된 공수 3여단의 나영조(소령예편), 12·12사태 때 국방부를 유혈점령하는 과정에서 수경사병력으로부터 총격을 당해 머리를 다쳐 반신불수가 된 배정선씨(상사) 등 두 사람에게는 정부가 문정동의 땅 이외에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내의 축협공판장 구내식당 운영권을 주었다.
5공화국 비리 폭로에 바쁜 언론사에 가끔 광주사태와 12·12사태 부상자들에게 국가가 특혜를 주었으니 폭로 해달라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취재를 시작하여 하반신을 못쓰는 어느 부상자를 만났더니『제발 전두환 비리와 같이 취급하지 말아달라. 우리의 희생을 딛고 출세하여 이 나라를 말아먹은 이들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눈총을 받는 것이 서럽다. 우리 기질에는 도저히 사회생활을 못하겠다. 병신의 몸으로도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군복을 입고 싶다』 고 내뱉듯 말했다. 1980년대와 5공화국의 그늘인 12·12사태와 광주사태의 뒤안길에서 침몰해 간 것은 민중뿐만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7여단의 투입 배경
1980년 5월에 광주의 육군전투교육사령부 참모장으로 있었던 張師福씨(예비역 준장·현재 중앙고속 관리본부장)는 이렇게 말했다. 1980년 5월16일에 국방부에서 전군 지휘관회의가 열렸고, 여기에 윤흥정 사령관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공수 7여단을 조선대와 전남대에 주둔하게 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학생들을 등교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 여단의 임무였다. 이리 근방에 있던 7여단의 2개 대대는 17일 밤 11시쯤 두 대학에 도착하였다. 2개 대대는 그 즉시 정웅 31사단장의 작전통제하에 들게 되었다』
이날의 전군지휘관 회의는 사실상 5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한 회의였다. 周永福 국방장관의 주재로 열린 이 회의에서 5·17계엄확대조치와 함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가 결의되었던 것이다. 국보위 설치를 제안한 것은 鄭鎬溶 특전사령관이었다고 한다. 당시 공수 7여단장은 육사 13기 출신인 申佑植 준장이었다. 申씨는 예비역 소장인데, 지난 6월 초순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2개 대대를 31사단에 배속시키고는 지휘계통선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31사단장이 직접 우리 여단의 대대장을 지휘하게 되었다. 과잉진압 운운하는데 군인은 명령대로 하는 존재이고 그때의 시위가 불법행동이었음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7여단은 4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이날 밤 31대대는 전주의 전북대학교로, 제32대대는 대전의 충남대학교로 진주했다. 공수부대의 주요대학 점거는 광주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5월 18일 새벽 서울에서는 11여단이 동국대학에. 1여단이 연세대학에 진주했던 것이다. 특전사의 한 장교는 『그때는 일선에서 부대를 뺄 수 없었으므로 지역을 맡지 않고 있는 공수부대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후방 사단의 병력이야 얼마 되지 않았다』 고 했다.
바둑판. 배구공 갖고 가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 7여단 35대대장 김일옥 중령은 대구사람, 33대대장 권성만 중령은 전주사람이었다. 35대대 3중대장 朴炳洙 대위는 전북 김제사람이었다. 지금은 부평에서 한의사로 일하고 있는 朴씨(33세) 는『5월 17일 저녁에 트럭으로 여단본부를 떠났는데, 대학에 진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가지고 갔다. 대학에 진주한다는 것을 놀러가는일 정도로 생각했다』 고 말했다. 朴씨는 또 『우리 부대는 주둔지가 전북이라서 그런지 전라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고 했다. 『실탄은 개인별로 가져가지 않았으며. 소나무로 만든 진압봉을 하나씩 들고 갔다』 는 것이다. 시위진압기구는 진압봉과 사과탄이 전부였고. 방석모·방패·최루탄 발사기는 없었다고 한다.
「특전사의 작전일지」는 5월18일의 상황을 이런 요지로 기록하고 있다. 「18일 새벽에 전남대, 조선대학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있던 40여 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오전 9시쯤 전남대학교에 들어가려던 학생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광주시 중심부 금남로로 이동, 계속 시위를 벌였다. 정오 무렵 33대대는 가톨릭 센터로 출동,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1백3명을 포고령 위반혐의로 체포했다. 33·35대대는 다시 충장로와 금남로로 진출, 시위자 2백83명을 체포했다. 시위대는 블록과 음료수병을 던지며 대항하였다』
군측에선 전남대생의 투석을 광주사태의 시발로 삼아 그 뒤의 진압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전개해 왔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최근의 민화위 증언에서 『전국 31개 대학과 1백36개 보안목표에 계엄군을 배치시켰다. 이 조치로 학생 시위는 중지되고 평정을 되찾았다. 단 하나의 예외가 전남대학이었고 이로써 광주사태가 시작되었다』 고 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대령은 『조기자는 「한국의 군부」란 기사에서 우리 군이 4·19때 시위군중에게 발포하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군대임을 보여주었고 부마 광주사태때는 그러지 못했다고 썼던데 저는 견해가 다릅니다. 4·19때 시위군중은 계엄군에게 돌을 던지지 않고 환영을 했는데 광주에서는 학생쪽에서 먼저 돌을 던졌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광주시민측에선 반역사적이며 사실상의 쿠데타인 5·17 조치를 광주사태의 시발로 보고 이에 저항한 전남대생의 시위를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발상의 출발점부터가 다른 것이다. 군쪽에서는 실정법을, 시민측에선 역사성과 도덕성을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7여단의 박병수(朴炳洙)씨는 『학생 편에서 돌을 던지니까 우리도 강하게 나간 것이다. 시위대가 군인이 나타났는데도 흩어지지 않으니 기분이 상하더라. 특히 동료가 돌을 맞아 다치니 부하들이 흥분하더라. 최근에 광주사태 비디오를 보니까 우리가 너무 심하게 한 면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고 했다.
그러나 시민측에서 본 7여단 진압 상황은 사뭇 달랐다. 당시 ㄷ일보의 광주주재기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18일 오후 4시쯤 나는 광남 로터리 부근에 있는 고층빌딩의 광고탑에 올라가 밑에서 벌어지는 데모 장면을 사진촬영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시내에선 데모대와 경찰이 충돌했을 뿐 군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간, 저쪽 시 외곽 방면에서 군인들이 탄 트럭 수십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로터리 앞에서 전원 하차하더니 대오를 정비했다. 그걸 보고 시위 학생들은 벌써 달아나 버리고 길가에는 구경나온 시민들뿐이었다. 시민들 속에서는 군인들을 환영한다는 뜻에서 멋모르고 박수치는 사람도 있었다. 공수부대 병력은 횡대로 늘어섰다. 장교인 듯한 사람이 핸드마이크로 경고 방송인가를 하더니 그대로 시민들을 향해 돌격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를 시작했다. 수 십명의 시민들이 광고탑이 세워진 건물의 옥상으로 피신해 올라오는 것을 나는 광고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공수부대원들이 뒤따라 올라왔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고 생각했다. 군인들이 꼭대기에 있는 나를 발견하면 당장 요절을 낼 것 같았다. 나는 「하느님, 이번만 저를 살려주시면 성당에 열심히 나가겠습니다」하고 기도했다. 탑 아래 옥상에서는 무지막지한 몽둥이질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인들은 야구 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머리, 어깨 등 가리지 않고 두들겼다. 몽둥이가 머리를 칠 때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르는게 보였다. 군인들은 시민들을 끌고 내려갔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한참 있다가. 광고탑에서 내려왔다. 계단은 온통 피칠갑이었다. 양동이로 핏물을 부어놓은 것처럼 아래 계단에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깥에 나가니 윗몸이 발가벗겨진 청년들이 「원산폭격」을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청년을 붙들면 윗옷을 찢어 머리를 덮어씌우고는 머리를 땅에 박게 하였다가 트럭에 던져 넣듯이 하여 어디론가 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27명이 타박상·자상·두부손상
이 기자가 목격한 상황과 5월17일 오후 영등포 역전 광장에서 벌어졌던 상황은 비슷하여 공수부대의 무차별적 진압행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훈련 때는 진압봉으로 머리를 때리지 말라고 교육을 시키기는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시위자와 행인. 남녀노소, 신체부위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구타로 변질하기가 일쑤였다. 더구나 시위대가 투석 등으로 저항하고, 동료가 다치는 것을 보았을 때 이들이 어떤 행동을 보였을지는 쉽게 추정할 수 있겠다. 당시 전교사 참모장 張師福씨는 『경찰에 의한 시위진압과 군의 진압, 그것도 계엄령하에서 이루어진 군에 의한 진압을 같이 봐서는 안된다』 고 주장했다. 『시위진압교육을 할 때 보여주는 미군의 필름이 있었다. 계엄령 하에서의 진압법을 가리킨 것이다. 이 영화에 따르면 시위자를 일단 붙들면 꿇어앉혀 놓고서, 반항하면 진압봉으로 목 밑에 있는 쇄골을 때려 부러뜨려 행동을 제약하며, 그래도 달아나면 사살한다는 식이다. 광주사태 진압은 영화보다는 훨씬 온건하게 한 것이다』 고 주장했다.
계엄사가 광주사태를 진압한 뒤인 1980년 6월5일에 발표한 민간인 사망자 통계에 따르면 총 1백48명(뒤에 1백48명으로 늘어남)중 총상 1백18명. 타박상 15명. 두부손상 5 명「교통사고 3명. 자상 7명으로 나타나 있다. 소준열(蘇俊烈) 당시 전남북계엄분 소장은 88년 1월의 민화위 증언에서 『검시 결과, 군인이 사용한 M16 총탄으로 죽은 시민은 45명 뿐이었다』 고 말했었다. 나머지 총상사망자는 카빈 등으로서 시민끼리의 오인사격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 증언의 정확성은 일단 젖혀두고라도 계엄사 통계에 나타난 타박상 15, 두부손상 5, 자상 7명 등 모두 27명의 사인은 거의가 몽둥이로 때리고 대검으로 찌른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전교사에 근무했던 한 고위장성도 기자 앞에서 이 통계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20명이 맞아 죽었다」「7명이 찔려 죽었다」는 이 원시사회적 공포가 정글도 아닌 대도시의 대낮에 그것도 중인환시리에 연출되었다는 것이 광주사태가 확대일로로 치달은 기폭제였던 것이다. 27명을 사살하는 것보다 27명을 찌르고 때려죽이는 것이 시민들의 동물적인 분노심을 더 자극하는 법이다. 광주사태의 한 원인은 총구가 아니고 몽둥이와 대검이었다. 공수부대의 야수성은 시민들의 심성 속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야수성을 폭발시키는 뇌관이 되었고, 그 뒤의 사태는 감정과 감정의 대결, 증오와 증오의 대결로 치닫게 되었다. 7여단이 쓴 진압봉은 전주의 목공소에서 만든 소나무 몽둥이었고, 11여단의 진압봉은 물푸레나무로서 길이가 70cm나 되고 아무리 세게 쳐도 부러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것으로 머리를 때리면 뇌손상으로 충분히 사망할 수 있다.
11여단에 출동 명령
18일 새벽에 동국대학에 진주했던 공수 11여단장 최웅(崔雄)준장은 18일 밤 鄭鎬溶특전사령관의 방문을 받았다. 鄭사령관은 『광주사태가 심상치 않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려고 왔다는 등.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서울 사람인 당신이 좀 내려가 주어야겠어』라고 했다고 한다. 그 날밤 11여단의 1개 대대는 비행기편으로, 2개 대대는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열차편으로 광주로 내려갔다. 崔 당시 여단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최대한 자제하여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하라는 충고를 받고 내려 갔다』 고 했다.
광주에 증강 투입된 11여단 3개대대 병력 약1천 명은 19일 새벽에 조선대학교 교정에 집결했다. 그 들은 텐트를 치고 군장을 푼 뒤 오전 10시에 30여대의 트럭에 타고 광주 시내로 「위력시위」를 나갔다. 위력시위란 무장한 군인을 태운 트럭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클랙션을 울리면서 중앙선을 질주하는 것이다. 시위예상자의 기를 꺾어 놓겠다는 계산에서 하는 시위예방책이다. 공수부대원들은 진압 때는 대검을 소총에 꽂지 않지만 위력시위 때는 착검한다. 11여단의 위력시위 대열이 충장로에 이르렀을 때 2백여 명의 학생들이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고 특전사 작전일지는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11여단의 공수부대원들을 자극했다. 군인에게. 그것도 위엄이 대단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던 공수부대에게 민간인이 도전했다는 데 대한 감정이 그 뒤 11여단의 행동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 심리적 동기가 되었다.
당시 11여단 63대대 소속의 김동철 병장은 『돌을 맞고 흥분하지 않을 군인이 어디 있겠는가. 계엄군에 돌던지고 공공건물을 불태우는 사람은 폭도들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김일성이 쳐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 졸병들이야 명령 이외에 무엇을 아는가. 눈앞에 전개된 상황만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쨌든 그때는 시위자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대검으로 찔러라. 머리를 때려라는 지시는 없었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지시는 많았지만, 일단 맞붙으면 자제도 되지 않고, 폭동진압 훈련을 받은 대로도 되지 않더라』 고 했다.
장사복(張師福) 당시 전교사참모장은 『공수 부대가 위력시위 도중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놀랐다. 군중들이 그들에게 둘러싸인 계엄군 장갑차의 잠망경을 부수고 해치를 열려고 해서 안에 있던 소대장이 위협사격을 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도 난다. 18일의 7여단에 이어 19일엔 11여단. 20일엔 3여단, 21일엔 20사단 병력을 잇따라 불러내리게 된 것도 당초에 이런 사태를 예기하지 못해 병력의 축차 투입이라는 나쁜 진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 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대령은 『우리는 시위진압용이라고는 진압봉 하나 밖에 없었다. 방석복, 방패도 없었다. 안면을 보호하는 방석망 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현지에서 철사를 구입하여 손으로 만들어 철모에 매달았다. 하도 엉성하여 작은 돌을 맞아도 찌그러지면서 얼굴을 때리는 한심한 상황이었다』 고 했다. 그는 또 『한 중대의 반 이상이 부상을 당해 진압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고 주장했다. 11 여단참모장이었던 梁大仁씨는 『공수부대원이 돌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왜 사진이나 비디오에 안 나오느냐』 고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 출신의 현역 대령은 『과잉 진압이란 표현에는 불만이다. 이희성씨가 그런 표현을 썼다고 하는데 그 분이 언제 현장에 나와 본 적이 있나. 대대장 위만 돼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나는 흥분된 양쪽이 부딪쳐서 스파크 현상을 일으킨 것이 광주사태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고 주장했다.
당시 11여단의 부지역대장 김태룡(金泰龍)씨(40·회사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곳에서 부상당해 한측 다리를 못쓰고 있다. 광주시민이나 우리나 같은 피해자다. 차라리 진상조사가 철저히 됐으면 좋겠다. 너무 군인들만 몰아붙이는데, 나는 내 부하가 시위대의 APC장갑차 돌진에 의해 치어 죽는 것은 목격했었다. 우리는 광주로 갈 때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어떤 선입견 없이 진압에 임했다. 공공건물을 불태우고, 군인에게 돌을 던지고, 동료가 다치니까. 아무리 부하를 말려도 강경진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더라. 진압봉 하나 밖에 없는데 그런 식으로 진압하지 않으면 우리가 돌에 맞아 죽을 판인데… 우리 부대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지리에 밝아 더 열심히 진압에 나섰다』
11여단 소속 사병이었던 경기만(慶箕萬)씨는『조선대학교 CP에서 광주가 고향인 한 동료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가족이 믿지 않는 것이었다. 전라도 출신이 진압군으로 내려왔을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여단의 김모 소령은 전남사람이었다. 지역대장으로서 진압 일선에서 악전 고투했는데. 동생이 시민측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더라』 고 했다.
실탄은 지급 않아
당시 11여단참모장 양대인(梁大仁)중령은 조선대학교의 여단 사령부에서 시위 현장에 나가 있는 세 대대장들과 무선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상부에서는 절대로 시위대와 부딪치지 마라. 선무하라고 지시가 내려 왔다. 현장 상황을 알기 위해 전남도청쪽으로 나가보았다. 한 중년 남자가 자기집 공사장에 쌓아 둔 벽돌을 시위대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그대로였던 내가 말렸더니. 그 남자가 하는 말이. 내 벽돌 내 마음대로 하는 데 웬 상관이냐는 것이었다. 시위자와 구경꾼이 구별되지 않아 진압이 어려웠고, 시위 가담자가 아닌 시민들에게 구타가 가해지는 원인이 되었다. 우리 여단의 경우, 대대마다 한 상자분의 경계용 실탄밖에 없었고 이 실탄은 대대장이 자기 지프에 봉함하여 싣고 다녔으므로 쏠 실탄이 없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현역대령은 『부하들이 군중 속에서 고립되어 실탄을 달라고 무전으로 수 십번 호소해 왔다. 나는 참모장에게 실탄지급을 허용해 달라고 건의했는데, 참모장이 선무에 주력하여 좀 참아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야이 xx야. 네가 현장을 모르니까 그 따위 소리하는 모양인데… 라고 상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고 말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붙들어 꿇어 앉히고, 옷을 벗긴 뒤. 트럭에 실어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가혹한 행동을 자행하여 시민들을 격분시켰었다.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돼 실려간 시민들이 많아 「그 가운데서는 상당수가 죽었을 것이다」는 추측까지 불러 일으켰었다.
梁大仁씨는 이렇게 말했다. 『시위자 10명을 잡아놓으면 지킬 공수부대원은 한두명 뿐이었다. 달아나지 못하게 하자니 옷과 신발을 벗기고, 허리띠를 풀게한 뒤 거리에 엎드려 있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을 트럭에 태워 조선대 체육관에 수용하였다. 내가 한번 가보니 시위진압 현장에서 막 돌아온 공수부대원이 화풀이를 하는지 연행자들을 구타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중지시키고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한동안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있었다』 당시 11여단의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 현장에서 돌멩이를 맞고 부대로 돌아와서 연행된 이들을 보니 「욱!」 하고 화가 치밀어 올라 저절로 몽둥이 찜질을 하게 되더라. 때리면서도 이렇게 맞아서 병신 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한 구타를 했다』 고 말했다.
梁大仁씨는 『이 연행자들은 경찰에 넘겼다. 경찰에서는 거의가 풀려난 것으로 안다』 고 했고 당시 전교사 참모장 張師福씨는 『일부는 전교사에 수용돼 있었다』 고 말했다. 梁씨는 『나중에는 연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시위자를 붙들어도 트럭으로는 조선대학교까지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 했다. 그는 또 이렇게 주장했다. 「21일에 조선대 체육관에 민간인 한 사람이 머리와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을 채 끌려왔었다. 나는 군의관에게 앰뷸런스를 동원, 후송시키도록 지시했다. 이 앰뷸런스가 민간병원에 환자를 내려놓은 뒤 돌아오다가 시위군중에게 포위돼 군의관과 위생병 등 5명이 3일간 피신해 다니다가 돌아왔다』
공수여단을 정웅(鄭雄)사단장이 지휘
지난 6월7일 일시 귀국한 崔雄대사(주 파키스탄)를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만났다. 崔대사는 광주사태 진상 조사에서 주요 쟁점이 될 지휘체계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5월 19 20일의 작전지휘 계통은 이러했다. 즉, 공수 7여단의 2개 대대와 11여단의 3개 대대를 합쳐서 내가 지휘를 했고. 20일에 도착한 3여단 병력은 崔世昌여단장이 지휘했다. 우리 두 여단장은 31사단장 鄭雄소장의 작전통제 하에 들어 그로부터 명령을 받고 있었다. 鄭鎬溶특전사령관은 전투교육사령부에 내려와 있었으나 지휘권이 없었다. 그러나 21일부터 3. 7. 11여단장이 31사단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교육사령관의 지시를 받는 식으로 지휘체계가 바뀌었다』
19일 현재의 지휘체제는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陳鍾埰 2군사령관―尹興福 전남북계엄분소장 겸 전투교육사령관―鄭雄 31사단장―두 공수여단장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실제 작전에는 陳령관은 거의 간여하지 않았다. 鄭鎬溶특전사령관은 11여단이 추가로 투입된 5월19일에 비행기편으로 전투교육사령부에 도착, 尹사령관·金基石 부사령관 등과 함께 시위진압책을 논의한 것으로 군 기록에 나타나 있다. 육사 11기출신 鄭사령관은 5월25일에 서울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광주사태 기간중 줄곧 전교사에 머물면서 진압작전에 관계하였다. 그의 작전참모 (처장)는 수경사 30단장에서 전보돼 온 張世東대령이었다. 張대령은 全斗煥 공수 1여단장 밑에서 대대장으로 일한 적도 있는 공수맨이었다.
쟁점이 될 鄭鎬溶씨의 역할
鄭鎬溶씨는 내무장관 시절이던 지난해 국회에서 『나는 공수여단 병력을 전남북계엄분소장에게 배속시켰을 뿐 지휘선상에 있지 않아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는 뜻의 발언을 했었다. 「鄭씨의 역할은 광주사태 진상 조사가 진행되면 쟁점 중의 하나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張師福씨는『정사령관은 전교사의 회의실에 있으면서 작전에 대해 조언을 하는 정도였다』고 했다. 5월22일 이후 전교사에 가 있었던 공수 11여단의 당시 참모장 梁大仁씨도 『정사령관이 직접 공수여단장에게 구체적 지시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분의 성격상 월권을 할 사람이 아니다』고 했다.
蘇俊烈 당시 전교사 사령관 (5월22일에 윤흥정.尹興禎장군이 후임이 됨) 도 『중요한 결정은 나의 책임하에 이루어졌고, 정장군은 어디까지나 조언하는 입장에 있었을 뿐이다』고 했다. 이당시 전교사에 있었던 한 장성은『정사령관이 법률적으로는 책임질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책임이 없다고 공언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도의적 입장에서도 혼자서 빠질 수는 없다』고 했다. 鄭鎬溶씨는 육군참모차장으로 있던 지난 81년 초에 12·12사태와 광주사태에 대해서 정부측의 지원을 받으며 취재를 하고 있던 千金成씨(소설가)와의 인터뷰에서「광주사태를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의 나의 역할」에 대해서 10여 시간을 상세히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공수부대의 증파, 광주재진입 등의 주요 대목에서 鄭장군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처럼 적혀 있다.
31사단의 역할 시비
11여단 공수부대는 1개대대(2백 여명)를 4개 지역대(지역대장 소령)로 나누고 1개 지역대를 4기 지대(지대장 대위)로 나누어 지역대 중심의 편제로써 운용하였다. 당시 11여단의 실탄 지급 상황은 대대가 다 달랐다. 대대장이 경계용 실탄(전투용 실탄과 같지만 소량임) 상자를 갖고 다닌 경우. 아예 조선대학교에 두고 다닌 경우. 지역대장(소령) 에게만 30발씩 내 준 경우 등등이었다. 21일 공수부대가 발포할 때까지 지역대장 밑으로 실탄지급이 안 된 것은 분명하다. 11여단 소속 63대대장 조창구(趙昌九) 중령의 전령으로 근무했던 金東哲씨의 증언―. 『나는 대대장 지프를 타고 다녔다. 지프에는 선무방송용 마이크가 달려 있었다. 경계용 실탄상자는 조선대에 두고 싣고 다니지 않았다. 20일부터 대치선에 나가 있는 장교들로부터 실탄을 달라는 요구가 대대장에게 빗발치듯 하였다. APC를 타고 다니던 차정환 소령도 무전으로 실탄 지급을 몇차례 애걸하다시피 했다. 박절하게 거절하는 대대장이 무척 몸을 사리는구나 하고 얄밉게 보였다』
한편 전남지역을 관할하는 31사단의 병력은 광주시내의 주요건물 경비에 주로 투입되었던 것 같다. 31사단 소속 사병이었던 안문영씨(30·한일은행 근무)는 19∼20일 사이 기독교 방송국과 문화방송국의 경비를 서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물려주었다고 증언한다.
『우리 부대는 직접 시위대 진압에 동원되지는 않았다. 시민들도 우리에게는 적대의식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근처의 음식점에서 우리를 불러들여 식사를 대접해 주곤 했다』 張師福씨는『그때 사령부 지휘탑은 정웅 31사단장에게 불만이 많은 편이었다. 초기에 31사단 병력을 적절히 운용하지 못했고. 병력을 분산 운용하여 효율적인 진압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윤흥정 사령관은 예비병력을 빨리 투입하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고 말했다.
당시에 31사단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던 공수 11여단의 한 대대장은 『공수부대를 소규모 단위로 여기저기 흩어놓고서 데모를 진압하도록 하여 31사단장에게 불만이 많았다. 곳곳에서 공수부대가 수적으로 압도적인 시위대에게 포위되었다. 나중에는 시위대에게 밀려 공수부대가 전남도청으로 집결하여 방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 했다. 張師福씨는『윤흥정 장군이 22일에 물러난 것은 31사단장의 우유부단한 대처에 관하여 책임을 진 면도 있다』 고 했다.
張씨는 『그러나 전투교육사령관이 아무리 상관이지만 31사단장에게 부대운용에 관하여 세부적인 지시를 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점을 민간인들이 잘 이해 못하는데, 교육사령관이나 특전사령관이 사단장을 거치지 않고 여단장이나 대대장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 말했다. 張씨는 『초기에 정웅 사단장이 소신을 갖고 단호한 진압을 했더라면 그 뒤의 광주시민들이 겪었을 고통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면서 『그것이 광주시민들을 위해서도 좋았을 것이다』 고 했다.
鄭雄 증언 : 『지휘체계 二元化』
이에 대해 지난 총선에서 평민당의원으로 뽑힌 鄭雄씨는 이렇게 반박했다. 『18, 19, 20일 오전까지는 내가 직접 5개 공수대대를 지휘했었다. 내가 받은 보고에 따르면 18, 19일에는 사망자는 없고 유혈충돌이 있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광주내 친지들을 통해서 공수부대가 토벌식 진압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19일 밤 11시에 무혈 저지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군이 얻어맞더라도 시민이 피를 흘리면 안된다고 지시했었다. 그런데 20일 오후부터 지휘체계가 2원화되었다. 세 공수여단장이 전교사에 위치하여 특전사령관과 의논하고 나를 거치지 않고 직접 대대장에게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공수대대장들도 나에게는 사소한 것만 보고하고 여단장에게 중요한 것을 보고했다.
이때부터는 공수여단이 사실상 나의 통제를 떠났다. 12·12사태 이후에 공수단세력이 군의 실세로 등장했던 분위기를 이해하면 알 것이다. 민화위 증언에서 전교사령관이던 소준열씨가 21일에 공수단병력을 철수시키자고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제의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공수단장성들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어떠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원칙대로 한다면 소준열 계엄분소장은 제의고, 협의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鄭雄의원은 『31사단은 병력이 적어 계림동 부근 등 외곽 경비와 광주교도소 등 중요시설의 경비를 맡았다. MBC에는 1개분대를 보냈는데 시위대에게 총기를 빼앗기고 쫓겨났다』 고 말했다. 한 예비역장성은 『어쨌든 7. 11여단은 과잉진압이 절정에 달했던 사흘간 정웅 사단장의 작전통제하에 있었으므로 법률상의 지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여단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정상참작사유에 불과하다』 고 주장했다.
지역감정에 흔들리지 않아
7여단 35대대 3중대장이었던 박병수(朴炳洙)씨는『그때 시위 현장에 나가 있었던 우리는 식사보급차량이 접근하지 못해 비상특전 식량만 먹었고. 더운 밥을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잠을 거의 못 잔데다가 배도 고프니 앉기만 하면 잠이 오더라』 고 했다. 이런 사정은 11여단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한 장교는 『공수여단 병력을 일부러 굶기고 술을 먹였다는 유언비어도 있는 모양인데. 굶긴 것은 시위대이고, 술을 마신듯 눈이 충혈된 것은 잠을 못 잤기 때문이었다』 고 했다. 전북 김제가 고향인 朴炳洙씨는『경상도 군인들이 씨말리려 왔다는 유언비어에 전라도 출신 공수부대원들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으나 나 개인으로는 이런 식으로 과연 동향의 시민들을 진압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생길 때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도 시위대와 맞부딪치면 강경한 행동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고 했다.
그때 11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현역 대령은 『전라도 출신 부대원들이 동요한다는 보고를 받고 그들을 잠시 뒤로 물린 적이 있었다』 고 했다. 張師福씨는 『전교사의 기간 사병들은 과반수가 호남인이었으나 크게 동요하지는 않더라』 고 했다. 3여단의 경우, 4명의 대대장 가운데 한 명이 전라도 출신, 11여단의 경우, 세명의 대대장은 각각 경상도, 안성, 서울 출신이었고. 7여단의 경우, 한 명은 전주, 다른 한 명은 대구출신이었다(蘇俊烈씨의 민화위 증언에 따르면 7여단 장병의 약 40%는 호남사람이었다고 한다).
추가투입해도 밀리는 공수부대
공수제3여단이 열차편으로 청량리역에서 광주로 떠난 것은 5월20일 새벽1시였다. 崔世昌준장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20일 아침 7시에 광주역에 도착. 바로 전남대학교 교정으로 갔다. 이날 아침과 점심을 비상식량으로 때운 3여단은 4개 대대를. 전남대 입구, 금남로, 광주역에 각각 배치하였다. 오후 6시30분, 제3여단의 치중대 소속 트럭 2대가 주부식을 수령하기 위해 전남대를 나섰다. 5백m 쯤 갔을 때 차량 시위대와 부딪쳤다. 무기가 없던 치중대 병사들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달아났다. 시위대는 트럭을 밀어 넘어뜨렸다. 전남대 입구를 지키던. 3여단 16대대가 출동했다. 차량 시위대가 진중으로 돌진하여 사병 한 명이 깔라 죽었다.
이날 오후 아세아 자동차 광장 앞에 세워두었던 군수차량 3백14대, 민수 차량 82대, 기타 18대 등 모두 4백14대의 차량이 시위대에게 넘어갔다. 기동력을 가진 시위대가 사태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5월20일부터는 엄청난 군중의 절대수 때문에 공수부대는 곳곳에서 고립되고, 밀리면서 기가 죽어갔다. 상부로부터의 지시로 시민들에 대한 가혹한 진압도 수그러졌다. 7여단의 朴炳洙씨는 「20일 밤에는 군중 속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분산. 고립을 면하기 위해 전남도청쪽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우리를 포위한 군중 가운데서 술취한 사람이 바로 가까이까지 다가와, 이런 새끼들 죽여야 한다고 욕설을 해도 가만히 있어야 했다. 진압봉 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잘못하면 작살날 판이었다』 고 했다고 한다. 실탄 없는 M16을 등에 지고 다니는 것이 귀찮아 M16을 반납하게 해달라는 건의도 올라왔으나 묵살되었다. 11여단의 한 대대는 아예 대검을 반납한 뒤 진압에 임했다.
당시 11여단의 한 대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데모 군중은 수십만 명으로 불어나는데. 상부에서는 선무로써 대응하라고만 하고, 부하들은 실탄을 달라고 호소해왔다. 20일부터는 우리 공수부대가 수모를 당해야 했다. 적극적인 진압을 포기하고 방어적인 진압을 할 수밖에 없었고, 시위대와 대치하여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어떤 시위 군중은 공수부대원의 헬미트를 몽둥이로 툭툭 치면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 병사한테 어떻게 참았느냐고 물었더니, 애인 생각만 했다고 하더라. 유방을 우리가 도려냈다고 하는데 대검으로는 찌를 수는 있지만 벨 수는 없다. 한번 실험해 보라』 20일 밤 10시쯤에는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가 장악한 버스가 경찰부대로 돌진. 경찰관 네 명이 깔렸으나 포위한 군중 속에 갇혀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2003-07-16, 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