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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왕 카네기 어머니의 유언
세계 최고 부자 중에 한 사람인 강철왕 카네기는
일생동안 어머니의 유언을
마음에 간직하고 지키며 살았습니다.
어머니의 유언은 이렇습니다.
" 너는 평생 주님의 창고를 부하게 하라.
그러면 네 창고가 항상 넘칠 것이다 "
카네기는 이 유언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의 수입 중에 90%를 하나님께 드리고,
10%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그가 자녀들에게
남긴 유산은 무려 1800억원이나 됩니다.
하나님께 많이 심는 자는
반드시 많이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세계 최고 부자인 석유왕 록펠러도
그의 어머니의 유언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록펠러에게 3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첫째는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매주일 맨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설교에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교회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록펠러는 이 3가지의 유언을
평생동안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특히 그는 평생동안 자기 총 수입에
20%를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심을 수 있는 사람만이 많이 거둘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심지 않은 사람은 거둘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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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는 가난한 과부의 아들입니다.
가난했지만 어려서 어머니가 그를 무릎에 앉혀놓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서
"너는 일생동안 예배당에 가면 뒷자리에 앉지말고 앞자리에만 앉아라,
너는 주의 종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어라,
헌금을 제일 많이 바치는 사람이 되어라, 맡겨진 직분은 죽도록 충성하라" 고
당부하곤 했습니다.
록펠러의 어머니가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날 때에도 그의 아들 록펠러에게
다시 다음과 같은 10가지를 꼭 지켜나가기를 유언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 주일 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4.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5.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7.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8. 아침에는 꼭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10.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에 앉아라.
록펠러는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말을 잊지 않고 그 말에 순종하며 지키고 살았다.
그러다가 결국은 가난한 과부의 아들로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그는 처음 수입이 5불이었는데 거기서부터 십일조를 정확히 해서
나중에는 십일조만 수백만불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의 십일조만 계산하는 사람이 40여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살아생전 십일조는 떼어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의 실업가, 자선가로 유명한 록펠러는
지금도 미국인의 마음 중심에서 살아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뉴욕 중심 맨하탄에 록펠러의 빌딩은
그가 이루어 놓았던 기업가 정신을 우리에게 잘 알려 주고 있다.
미국에 각주마다 모든 도시에 세워진 공공 도서관은
그가 벌어서 기부한 돈으로 세워졌다.
1859년 조그마한 상사를 설립한 후,
미국 석유 정유소의 95%를 지배하는 어마 어마한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돈을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고아원, 장학재단들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을 그는 사회에 기부하였다.
실로 미국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록펠러가 신실한 크리스챤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는 열심과 열정으로 무장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록펠러의 전체 삶의 원리 원칙은 신앙에 기초하였다.
록펠러는 간증하였다.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철저한 신앙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사업을 도우고 인도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매번 가는 곳마다 자신에게 가장 영향력을 미쳤던
자신의 어머니의 유언을 말하며
그 유언을 항상 기억하며 그리고 실천하며 살았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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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석유회사들
매년 《포춘》이 선정하는 세계 500대 기업 가운데
2010년의 경우 월마트에 이어 로열더치쉘과 엑슨모빌, BP,
시노펙 등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매출기준 2∼5위를 차지했었다.
세계 5대 기업 중 네 개를 정유회사들이 차지한 것이다.
2011년에는 엑슨모빌이 월마트를 제치고 세계 1위 기업에 올랐다.
같은 정유회사인 쉐브론, 코노코필립스도 각각 3, 4위에 오르는 등
정유사들의 파워가 여전했다.
엑슨모빌이 전년 대비 28% 증가한 4529억 달러, 쉐브론은 매출액이 25% 증가한 2456억 달러를 기록했고, 코노코필립스는 2373억 달러로 28.3%가 증가했다.
정유사들이 세계 상위 기업을 휩쓰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석유 유통업은 돈방석이 보장된 사업이다.
일반적으로 정유사는 순이익이 매출액의 10%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다.
소년 가장, 록펠러
미국 근대 산업사는 재벌의 역사다.
제이피 모건과 록펠러가 미국 상장 기업을 양분하다시피 했다.
이들이 당시 상장 기업 자산 총액의 70% 이상을 차지했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는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보다 두 살 아래다.
1839년 뉴욕에서 약품 판매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록펠러는
1853년 오하이오로 이사가 거기서 자랐다.
록펠러는 집안이 어려워 어렸을 때부터 칠면조를 키워서 팔거나
사탕을 대량으로 사서 팔아 이윤을 남기면서부터 돈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855년 열다섯 살 때 소년 가장으로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6개월짜리 비즈니스 코스에 들어간 그는 과정을 3개월 만에 마치고 조그만 곡물위탁판매회사의 경리사원 보조로
취직해 돈을 벌었다.
어려서부터 일기 대신 회계장부를 기록했던 그에게는
숫자가 하루하루의 반성이었던 셈이다.
처음 3개월 동안 일하고 받은 급여는 50달러로, 일주일에 3.57달러를 받은 셈이었다.
회사 측은 일 잘하는 그를 정식 사원으로 채용하면서 임금을 한 달에 25달러로 올려주었다. 록펠러는 그렇게 해서 번 돈 1천 달러와
아버지한테서 빌린 돈 1천 달러를 합해 친구와 함께
1859년 열아홉 살 때 아예 곡물중개회사를 하나 차렸다.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회사는 성공을 거둔다.
그는 북군에 소금과 돼지고기를 팔아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같은 해 조지 비셀(George Bissell)이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유 시추에 성공한다.
원래 석유(石油)라는 이름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온 기름이라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석유를 뜻하는 영어 petroleum도 petra(돌)란 말과 oleum(기름)이란
라틴어 단어를 묶어서 만든 말로 ‘돌에서 얻은 기름’ 즉 돌 기름이란 의미에서 붙여졌다. 이렇듯 예전에는 석유는 바위틈에서 흘러나오거나 지표면에 간혹 자연 분출된 것들이
소량 시중에 나왔다.
그러나 처음에는 용도가 없었다.
간혹 약국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데 바르는 연고로 쓰였다.
심지어는 두통, 치통 및 류머티즘 등 만병통치약으로 팔렸다.
석유는 기원전부터 오랫동안 ‘역청’으로 불리며 액체, 고체 또는 기체로 변장을 하며
사람을 현혹시키는 마법의 물질이었다.
《성경》에 보면 역청이 노아의 방주에 방수용으로 쓰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수메르인은 이미 아스팔트를 재료로 조각상을
만들었고, 바빌로니아인도 아스팔트를 건축에 접착제로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비셀, 유전 개발에 성공하다
월가의 주식 전문 변호사인 조지 비셀은 휴식차 방문한 고향에서
석유 샘플을 본 순간 직감적으로 연료로서의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는 ‘약국에서 의약품으로 팔리는 석유를 조명용 기름으로 쓰면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예일대학교 벤저민 실리먼(Benjamin Silliman) 교수에게 석유 성분 분석 및
용도 조사를 의뢰했다.
그는 지하의 소금 광맥을 찾아내 뽑아 올리는 중국의 염정 굴착 기술을 동원하면
석유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1855년 4월, 보고서는 ‘석유는 다양한 물질로 분류될 수 있으며,
값싼 공정으로 램프에 사용할 수 있는 양질의 기름도 얻어낼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 뒤 비셀은 보고서를 들고 투자자들을 모집,
펜실베이니아 석유회사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석유 시추 현장책임자로 에드윈 드레이크(Edwin Laurentine Drake)를 고용했다.
그리고 소금광산 주변부터 찾아보도록 시켰다.
보통 석유가 솟아나는 곳은 염정 부근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1년간의 노력 끝에 1859년 펜실베이니아 주 타이터스빌에서
처음으로 시추 석유가 나왔다.
드레이크가 기계굴착 방법으로 암반 밑 21미터까지 뚫어 유전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그가 타이터스빌에서 최초로 유전 개발에 성공한 것은 그 지역이 예전부터 오일크리크(Oil Creek, 석유가 흐르는 강)라고 불리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유정 발견에 성공한 드레이크는 곧 펌프를 설치해 그날부터 매일 30배럴씩 원유를 퍼 올렸다. 비록 소량이었지만 당시 시장의 수요로 보아서는 충분한 양이었다. 석유는 배럴당 20달러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이것이 근대 석유 산업의 시작이다.
록펠러, 석유의 가능성을 보다
이후 석유로 인해 세상의 많은 부분이 변한다.
우선 비싼 양초와 고래 기름에 의존하던 조명이 등유로 바뀌었다.
당연히 경제사에도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드레이크의 성공을 계기로 석유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곧 석유 발견 소식을 듣고 몰려든 투기꾼들은
드레이크의 유정 근처에 굴착 탑들을 설치하고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타이터스빌은 노다지판으로 둔갑했고 벼락부자들이 속출했다.
드레이크가 석유를 발견한 지 15개월 뒤인 1860년 말에는
약 75개의 유정이 원유를 뿜어냈다.
원유를 등유로 바꾸는 정제시설도 15개나 들어섰다.
나중에는 석유 담는 위스키 통이 부족하게 되었다.
위스키 통의 가격은 곧 석유가격의 두 배에 달하게 되었다.
사용처도 불분명한 석유 개발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던 이유는,
꺼져 가는 골드러시 열풍을 대신할 황금의 기회가 석유에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오일크리크 계곡의 산유량은 최초 연간 2천 배럴에서
10년 동안에 500만 배럴로 크게 늘어났으며,
19세기 말 텍사스 유전지대가 등장하기까지 펜실베이니아 유전지대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산유 지역이었다.
이후 록펠러가 살던 오하이오 주를 비롯한 인근 주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석유 산업 지대가 되었다.
록펠러는 남북전쟁 중에 석유 수요가 급증하는 것을 보고 석유 업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당시 미 서부에서는 수십 미터의 지하 암반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검은 액체 덕분에 수많은 백만장자가 탄생했다.
당연히 석유 탐사와 채굴 붐이 한창이었다.
그 무렵 채굴업자들은 석유 시추 기술을
철도 건설 사업장에서 일하던 중국인들한테 배웠다.
중국인들이 소금을 얻기 위해서 땅을 팠던 기술이
당시 석유 시추 기술보다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시추 기술이 석유시대를 열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땅에서 소금을 파내 썼다.
그들이 쓴 방법은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땅속을 깊이 파면 지하수가 나오고 더 깊이 파면 염수(鹽水)층이 나온다.
소금기 있는 지하수인 염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지하로 1킬로미터 이상을 파고 들어가야 했다.
지하 1킬로미터를 파내려 가는 것은 우물 파듯이 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고도의 시추술이 필요한 것이다.
더구나 1.5킬로미터까지 파내려 가는 것도 예사였다고 한다.
사람이 내려갈 수 없으니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고
마침 제철업의 발달로 대나무 케이블 같은 다양한 도구가 있어 이것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지하에서 소금을 캐낸 것이다.
더구나 중국인들은 그 과정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도 발견했다.
보통 염수층 밑에 가스층과 유전이 있었다.
그래서 연료로 사용하고 대나무로 만든 파이프로
수십 킬로 떨어진 곳까지 이동시키기도 했다.
18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제염업자들이 염수를 찾다가 석유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석유를 쓸데없는 방해물로 취급했다.
염수와 함께 갈색의 기름이 분출되면
기름이 수면에 뜨는 원리를 이용해 저수조 상부에 모아두었다가
근처의 강으로 흘려보냈다.
때로는 기름에 불이 붙어 오하이오 강 유역에서는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강이 불꽃으로 덮이는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당시 중국에서 석유가 나오는 우물을 화정(火井)이라 하고
석유를 석칠(石漆)이라 불렀다.
요즘으로 치면 유전과 석유이며, 대나무 파이프는 송유관이다.
중국은 이 기술로 기원전부터 지하에서 소금과 석유를 파내 쓰고 있었다.
미국은 철도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시추 기술을 배웠다.
등유, 가정의 밤을 밝히다
록펠러는 석유를 찾아내는 일보다는 앞으로 석유가 미칠 파급효과에 관심을 쏟았다.
석유는 채취한 그대로의 광유(鑛油)를 등화에 사용했을 경우 매캐한 연기와 냄새를 발산했으며, 그다지 밝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를 증류해 정제해서 등유를 만들면 고래 기름 못지않게 밝은 빛을 냈다.
그 뒤 텍사스 등 미국 각 주에서 석유 생산이 이루어짐에 따라,
종래 석탄을 원료로 쓰던 정유공장들도 석유로 원료를 전환했다.
오늘날 등유를 케로신(Kerosene, 그리스어로 밀랍을 의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당시 역청질의 석탄으로부터 제조한 등유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신규 정유공장들도 속속 건립되었다.
클리블랜드, 피츠버그, 필라델피아, 뉴욕 및 텍사스 산유지가
정유 산업의 5대 밀집 지역으로 등장했다.
처음에는 석유에서 램프용 등유가 제조되고
그 부산물로 양초를 만들 수 있는 파라핀납이 나왔다.
등유는 재래의 등화연료였던 고래 기름과 식물유, 목랍(옻나무 열매기름) 등에 비해
연기와 냄새가 적을 뿐 아니라 불빛이 밝아 바로 인기를 끌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거리의 가로등에 고래 기름이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포경이 미국의 대표 산업이 된 것이었다.
한번 출항하면 2년 동안은 돌아오지 않는 포경선에 물, 채소, 석탄 등을 공급하는
보급기지가 필요했다.
미국의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일본에 개국을 요청한 것도
포경선에 물품을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래 기름은 쉽게 얻을 수 없어 가격이 비쌌다.
게다가 고래의 남획에 따라 공급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는 동안 석탄을 증류해 조명용 가스를 생산해냈다.
주 용도는 거리의 가로등에 사용되었으며 가정용으로는 거의 쓰이지 못했다.
가스관을 통해 공급되어 고정된 장소에서만 사용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연소시에 소음과 열이 많이 발생해 폭발의 위험성이 있었다.
반면 석유에서 증류한 등유는 달랐다.
가스와 달리 폭발 위험도 없고, 소음도 없을 뿐 아니라 파이프를 설치할 필요도 없었다. 원하는 장소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이후 정유회사들은 검은 액체를 정제해 주로 램프용 등유를 만들었다.
이들 정유공장에서는 저렴한 양질의 등유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시장 수요를 충족시켰다. 이로써 본격적인 ‘정유시대’를 가져왔다.
석유는 미국인들의 생활양식까지 바꾸었다.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던 사람들이 등유 램프 덕에
밤늦게까지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한편 초기의 사업자들은 원유에서
등유만 추출하고 남은 액체를 처리하는 데 골머리를 앓았다.
부산물로 생산된 휘발유는 거의 쓸모가 없어서 갤런당 불과 2센트에 팔렸고 팔리지 못한 휘발유는 찌꺼기라고 생각해 청소업체에게 돈을 주고 치우거나 몰래 내다버렸다.
특히 야간에 몰래 강에 버려지기도 했다.
때문에 당시에 석유라고 하면 등유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중유나 휘발유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다.
록펠러의 선택, 정유 산업
록펠러는 당시 열병처럼 번지던 석유 탐사 흥분에 휩싸이는 대신 다른 미래를 그렸다.
석유 채취 사업은 유가 변동 폭이 크고, 석유 발견에 실패할 확률도 많아
안정적인 산업이 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진짜 돈’은 석유 채굴업이 아니라
운송과 정유를 담당하는 중간상이 번다는 것을 간파했다.
록펠러는 친구와 함께 차린 곡물중개회사를 계속하면서
1863년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정유소(精油所)를 설립했다.
당시의 정제시설이란 뒷마당에 설치된 과학 실험실 정도 규모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게 돈이 되었다.
이후 이것이 번창해 주업이 되었다.
그 무렵 클리블랜드에만 20개의 정유회사들이 있었는데 모두 대박을 쳤다.
석유가 산업용으로 다양하게 쓰일 가능성을 보이자
유전 개발에 뛰어들기보다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재빨리 부가가치가 훨씬 더 높은
정제공장을 차린 것이 적중한 것이다.
솟구쳐 오르는 검은 액체도 정제하지 않으면 끈적끈적한 구정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석유 정제업에 손을 댄 후 검은 액체들이 그의 정유공장을 거쳐 전국으로 팔려 나갔다. 그의 냉철한 판단으로 정유 사업이 돈이 되자 록펠러는 남동생인 윌리엄(William Rockefeller)과 프랭클린(Franklin Rockefeller)과 새뮤얼 앤드루스(Samuel Andrews)와 헨리 플래글러(Henry Flagler) 같은 경험 많은 기업가들을 자기 모험에 끌어들였다. 1867년에 이루어진 이들의 동업은 승승장구했다.
존 록펠러는 1866년 그의 동생 윌리엄 록펠러를 뉴욕에 파견해 록펠러상회를 설립토록 했다. 이는 석유 수출 업무를 하면서 더 중요한 은행 일을 동생이 전담하게 한 것이다.
윌리엄은 뉴욕에서 제이피 모건, 시티은행의 전신 뉴욕내셔널시티은행장 제임스 스틸먼(James Stillman), 철도 왕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등과 교류하며 금융가들과 인맥을 쌓았다. 이것이 록펠러가 석유 왕으로 불리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훗날 막냇동생 프랭클린은 목장 경영자가 되어 두 형과 다른 길을 걸었다.
물류비용을 줄여라!
무분별한 유전 개발로 석유가 쏟아져 나오면서 석유가격이 폭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유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무작정 석유를 캐내지 말고 생산량을 할당해
가격 폭락을 막자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유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난립해 있어 서로 힘을 모으기 힘든데다,
조금이라도 석유 값이 오르는 기미가 보이면 너나없이 채굴량을 늘렸기 때문이다.
철도회사들은 석유 수송이 일정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석유 생산량은 들쑥날쑥해 유통량을 조절하기 힘들었다.
석유 채굴업자들의 치열한 경쟁 때문에 생산이 비조직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주는 정신없이 물량이 쏟아지다가,
다음 주에는 파리를 날리는 상황이 되풀이됐다.
수요가 불규칙해지는 이런 상황은
철도회사들에게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을 의미했다.
록펠러는 정유 사업에서의 관건을 물류비용이라고 보았다.
경쟁자보다 물류비용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사업 성공의 열쇠라고 확신했다.
록펠러는 철도회사에게 일정한 원유 수송량을 보장해주는 대신
운송료를 깎아달라는 협상을 벌인다.
협상 대표는 플래글러였다.
1867년 후반 어느 날, 플래글러는 레이크 쇼어 철도회사를 찾아갔다.
플래글러는 운송료를 할인해준다면
운하를 통한 석유 수송을 중단하고
레이크 쇼어 철도회사에 매일 유조차량 60대 분량의 운송을 보장하겠다고 제의했다.
철도회사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스탠더드오일 설립
록펠러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철도회사와의 운송료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주변 정유공장을 흡수 합병하는 전략을 짠다.
그 시작이 자신의 회사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로써 1870년 1월 1일, ‘스탠더드오일’이라는 회사가 탄생했다.
사장은 록펠러, 부사장은 윌리엄 록펠러였고, 플래글러가 재무담당 이사를 맡았다.
오늘날 시세로 약 11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자본금 100만 달러로 문을 열었다.
스탠더드오일은 정유 사업과 제조공장, 창고, 운송시설, 유조차 등 석유 관련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미국 전체 정유 시장에서 10%의 시장점유율을 갖고 있었다.
스탠더드란 회사이름은 고객 지향적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등유에 불순물이 섞여 폭발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회사 이름을 자기 등유는 균질(스탠더드)한 품질이라는 것을 상징하게 붙였다.
스탠더드오일은 미국 최초의 주식회사였고,
미국 최초로 중역회의 제도를 실시한 회사이기도 했다.
투자자들은 회사 부채에 책임을 지지 않는 주식회사에 거리낌 없이 투자했다.
독점을 향한 인수합병의 시작
록펠러는 석유 산업에 투신한 뒤 기술 개발은 물론 현장 밀착경영을 통해
원가절감 요소를 찾아냈다.
경비를 줄이면서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모든 경영요소를 찾아내어 경쟁력을 키웠다.
그런 방식으로 타사에 비해 경쟁우위를 확보한 뒤 철도운임협상으로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했다.
그 뒤 존과 윌리엄 형제는 차례로 동료 정유업자들을 설득 혹은 협박해 담합 신디케이트를 조직했다. 그 뒤 그는 경쟁력을 바탕으로 아예 경쟁을 회피하는 독점전략을 사용했다. 높아진 자체 경쟁력을 바탕으로 당시 물류를 담당하는 핵심수단인 철도를 장악했다. 그리곤 경쟁자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렇듯 스탠더드오일은 설립한 지 얼마 안 되서 미국 최대의 석유 생산회사가 되었고,
록펠러는 자본력으로 전쟁하듯이 경쟁기업들을 인수하거나 쓰러뜨려 나갔다.
자본주의 병폐 가운데 하나는 자본력이 커진 기업은
돈 되는 사업은 일단 무엇이든지 집어 삼키고,
경쟁상대는 더 커지기 전에 박살내는 것이다.
록펠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전과 정제시설을 아주 싼값에 매입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식으로 재산을 모으는 이른바 ‘금융 비즈니스’로 석유 산업을 거의 송두리째 장악해 석유 트러스트를 결성했다.
그 과정을 보자.
록펠러는 스탠더드오일을 통해 시장 독점을 향한 자신의 꿈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스탠더드오일의 귀찮은 경쟁자들을 인수합병하거나 도태시키는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한다. 경쟁자들에겐 두 가지 선택을 제안했다. 경영권을 그에게 상납하고 주식을 배분받든가, 독자적으로 해 나가려다 파산하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록펠러는 가장 큰 경쟁업체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이 선택 안을 갖고 교섭에 들어갔다.
경쟁자들과의 회동에서 록펠러는 이 계획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실 ‘규모의 경제’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덩치가 커야 철도 협상도 더 수월하게 진척시킬 수 있었다. 이미 절대적인 우위를 누리고 있던 록펠러는 클리블랜드의 주요 은행 간부들에게 스탠더드오일의 주식을 일정액 양도함으로써 쐐기를 박았다. 독립을 지키려는 정유사들은 고독한 싸움에서 버틸 재정적 지원을 차단한 것이다.
록펠러의 인수전은 전격전이었다. 1871년 12월에서 1872년 3월까지 그는 일명 ‘클리블랜드 대학살’로 알려진 기업 인수합병 전쟁을 치렀다. 뉴욕에서 15개, 필라델피아에서 12개, 피츠버그에서 22개, 석유지대에서 27개의 정유사를 인수했다. 그중 6개사는 단 이틀 만에 인수를 끝냈다. 전쟁이 끝나자 스탠더드오일만이 홀로 우뚝 서 있었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의 진화설은 동식물뿐만 아니라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록펠러는 이런 적자생존 세계에 꼭 맞는 사람이었다. 몇몇 회사들은 스탠더드오일의 독점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경쟁사를 매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탠더드오일에 인수돼 록펠러에게만 좋은 일을 해주고 말았다.
미국 최초의 트러스트
이렇게 해서 창업한 지 9년 만에 미국 전체 석유의 95%를 스탠더드오일 회사의 정유탱크 속에 틀어쥘 수 있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독과점 신디케이트의 효시다. 모건이 철도 왕 밴더빌트로부터 거대 철도회사를 넘겨받은 시점이었다. 당시 미국 산업계의 백수의 왕 ‘사자’라고도 불린 제이피 모건에게 필적할 만한 거대한 구렁이 ‘아나콘다’가 나타난 셈이다.
남에게 단 5%만 남겨주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독점력이 아닐 수 없다. 1880년 미국 전체 정유액 3500만 달러 가운데 3300만 달러를 장악하고, 1882년 스탠더드오일의 전 재산을 뉴욕에 집결해 미국 최초의 트러스트를 결성한 것이다. 이렇게 트러스트를 형성하기까지 10여 년간 다른 정유사를 흡수, 합병하고 수송부문과 저장시설을 독점함으로써 근대 석유 산업 체제를 성립했다. 이 유례없는 독점의 이면에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교활한 수법이 숨어 있었다. 스탠더드오일의 독점에 대항하기 위해서 지역의 여러 석유업자들이 다른 회사로 힘을 모아주고 보니 그 회사가 스탠더드오일의 자회사더라는 식이었다.
철제탱커의 등장
대형회사가 아니었던 스탠더드오일이 그렇게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면의 이야기가 있다. 록펠러는 석유를 운반해주는 ‘유니온탱커카’ 회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회사를 확장했다. 미국에서 1800년대 후반까지는 석유를 주로 값비싼 포도주 통이나 위스키 통으로 운반했다. 때문에 중간에 석유가 새거나 증발되어 없어지는 일이 흔했다.
이때 공간이 밀폐된 철제탱크를 처음 개발한 것이 바로 록펠러의 유니온탱커카 회사였다. 1880년 중반, 통으로 실어 나르던 화차를 없애고 탱크로리에 석유를 적재해 화차로 운반한 것이다. 이 회사로 인해 기존의 나무통으로 운반하던 다른 운송업체들이 모두 망했다. 그리고 독점이 된 록펠러 운송회사가 운반 양을 줄여나가자 판매수단을 잃어버리게 된 대부분의 석유업체들도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
록펠러는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미국 전역에서 파산 직전에 이른 회사들을 거의 거저줍다시피 해 회사를 단기간에 급팽창시켰다. 스탠더드오일은 캘리포니아, 텍사스, 아칸서스, 뉴저지, 오하이오 주 등의 거의 모든 유전과 정제소를 소유했고, 미국 에너지 비즈니스의 대부분을 통제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록펠러는 독점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었다. 스탠더드오일이 단단한 독점 체제를 유지하는 동안 등유 가격은 80% 이상 인하되었고 품질 혁신은 물론, 현대 기업의 모델이 되었을 정도로 산업 역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석유가 중요한 수출품이 되다
등유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로 퍼져 나갔다. 석유가 중요한 수출품이 된 것이다. 1861년 12월 세계 최초로 범선 엘리자베스 왓츠호는 타이터스빌의 석유통을 싣고 런던으로 수출한 이후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유럽으로 수출했다. 원유에서 얻어진 등유가 등화용으로 우수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크게 환영을 받아 등유 램프의 사용이 19세기 말에 전 세계에 크게 보급되었다. 그러자 서부 펜실베이니아 전역에 석유 시추공들이 설치되어 갑자기 공급과잉이 되었다. 생산과잉으로 원유 값이 떨어져 20달러였던 원유가격이 1달러 20센트까지 폭락해 많은 석유회사들이 파산했다.
생산과잉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수출밖에 없었다. 1861년 석유 수출이 시작된 이후 1880년대에는 세계적인 수요증가에 힘입어 미국의 석유 수출량이 국내생산량의 60%를 웃돌았다. 내수용보다 수출량이 앞선 것이다. 1882년에는 수출량이 816만 배럴로 전 세계시장을 거의 독점했다. 세계의 등유 수요가 늘어나 미국의 석유 수출이 1900년에는 3140만 배럴로 늘어났다.
한편 석유가 돈이 되자 유럽과 러시아도 석유 사업에 뛰어들었다. 1879년 러시아가 카스피 해 부근 바쿠 유전을 개발했다. 1880년대에는 선박왕 마커스 사무엘(Marcus Samuel) 등 유럽의 유대인들이 러시아 바쿠 지역 유전을 개발하기 위한 회사들을 앞다투어 설립했다. 러시아 석유생산이 1888년에는 미국의 생산량을 앞질렀다.
러시아 황제는 1873년 이후로 외국 자본에 대해서 코카서스 지방의 석유 탐사를 인정하고 있었다. 당시에 이미 미국 펜실베이니아보다 훨씬 많은 매장량이 있다고 여겨졌던 이 지역에는 스웨덴의 다이너마이트 발명가 노벨(Alfred Bernhard Novel)의 두 아들이 이권을 획득했다. 자금 조달 문제에 직면한 노벨 형제는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은행을 이 사업에 끌어들여 러시아산 원유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얼마 후 록펠러의 독점을 위협하게 됐다. 여기서 노벨 형제와 로스차일드 은행은 유럽시장에 대해서는 록펠러의 스탠더드와 타협해서 시장을 양자가 분할하기로 잠정적인 합의를 보았다.
1890년대에는 인도네시아의 석유를 개발하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로열더치’라는 회사가 설립됐다. 그들 모두는 세계 석유시장을 놓고 스탠더드오일과 경쟁했고 이 과정에서 사무엘의 ‘쉘’과 ‘로열더치’ 등은 세계적 규모의 거대 석유회사로 성장했다. 또 1897년에는 영국의 사무엘이 ‘쉘트레딩앤드트랜스포트’사를 설립해 보르네오에서 석유 개발을 시작했다. 이들 두 회사는 1907년에 제휴해 영국과 네덜란드 자본으로 국제적인 거대석유회사 그룹인 ‘로열더치쉘’ 그룹을 이루었다. 그동안 석유는 주로 등화용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등유의 용도가 난방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20세기를 전후해 스탠더드오일, 로스차일드사, 노벨사 및 그 밖의 러시아 석유생산업자 등 사자 간의 경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휘발유와 중유의 시대로
등유를 생산하게 되면 불태우지 않으면 안 되는 ‘잉여제품’
즉 휘발유와 같이 폭발의 위험성이 있는 것과
중질유분(重質溜分)이라고 부르는 검고 끈적끈적한 제품이 부산물로 생산되었다.
석유 부산물로 얻어지는 휘발유와 중유는 용도가 적어
처음에는 귀찮은 존재로 천대받았다.
그러다 1882년 은행가인 제이피 모건이 그의 뉴욕 사무실에서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화력발전소 스위치를 당겼다.
이 순간 지구상에 새로운 산업이 태동했다.
석유를 연료로 전기가 생산되어 가정과 공장에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킨 기술혁신으로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연
역사적 순간이었다.
에디슨이라는 유대인의 창의성과 유대 자본이 밤을 밝혀주는 전기를 인류에게 선사한 것이다.
1882년 ‘중앙발전소’와 ‘에디슨 전등회사’가 뉴욕에 설립됐고
이후 전기의 이용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산업 발전의 토대를 이뤘다.
에디슨 전등회사는
1892년 ‘톰슨휴스턴’ 전기회사와 합병해 현재의 ‘GE(제너럴 일렉트릭)’가 되었다.
그리고 1886년에는 칼 벤츠가 ‘휘발유’ 자동차를 보급하기 시작하자
휘발유의 가치가 치솟았다.
그 뒤 휘발유와 등유의 위치가 점차 바뀌었다.
게다가 1901년 텍사스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굴되고 같은 해
‘올즈모빌’ 자동차가 생산되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어 1903년 에디슨 조명회사의 선임기술자였던 헨리 포드(Henry Ford)가 포드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고,
라이트 형제(Wright brothers)가 12마력의 휘발유 엔진에 프로펠러를 장치한 글라이더로 비행에 성공함으로써 휘발유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특히 1908년 포드자동차에서 ‘T형 포드’의 대량생산을 계기로
휘발유 사용이 극적으로 증가하면서 1911년에는 휘발유 소비가 등유를 웃도는
중요 제품으로 등장했다.
처음에는 가치 없고 귀찮은 부산물로 간주되던 휘발유는 불과 수년 사이에 원유에서 가장 많이 요구되는 석유제품이 된 것이다. 이는 석유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디젤엔진의 출현
한편 석탄 자원이 빈약한 나라에서는
석탄 대신에 등유의 부산물인 중유라고 하는
공짜와 다름없는 연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또한 비중과 끓는점에 따라 등유 바로 다음에 얻어지는 경유를 도시가스의 ‘증열용(增熱用)’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이 디젤 기름을 오늘날에도 ‘가스오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증열용’이란 혼합해 가스의 열량을 높이는 용도란 뜻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1892년에 루돌프 디젤(Rudolf Diesel)은 중질유의 분사작용에 의한 디젤엔진의 특허를 냈다.
디젤 이론은 사실 상당히 간단한 원리다.
공기가 압축이 되면 온도가 올라간다.
20배 정도 압축하면 연료를 태울 수 있을 만큼의 온도를 얻을 수 있다.
이때 연료를 주입해 폭발을 일으켜 그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처음 디젤엔진은 가게에서 동력기계(power machine)로 사용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1910년경에는 배에 올려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개발이 진척되었다.
하지만 작은 승용차에 처음 적용이 된 것은 1927년에 보쉬(Robert Bosch)가
소형 연료주입장치(fuel injection mechanism)를 발명하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질유 가운데 경유(디젤)가 자동차 연료로도 사용되었다.
경유는 현재 대부분 디젤엔진의 원료로 쓰이고 있어 디젤유(Diesel Oil)라고 불린다.
디젤은 값이 쌀 뿐 아니라 연비가 우수해 휘발유 차와 비교하면
같은 연료량으로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어 경제적이었다.
이와 같이 각종 용도의 석유제품이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되어
그것을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기계의 개발이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자동차 · 항공기 · 선박과 같은 거대 산업이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2년에는 원유에 열을 가해 끓는점에 따라 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를 차례로 생산해내는 최초의 현대식 정유공장이 미국에 세워짐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석유제품 공급이 가능해졌다.
중유, 함선의 연료로 채택되다
그런데도 당시는 여전히 증기기관 시대였다. 모든 배의 엔진도 증기기관이었다.
하지만 증기기관은 매우 불편했다. 바로 석탄의 부피 때문이었다. 대기오염 물질을 엄청나게 내뿜는 문제도 있지만 특히 군사적으로는 10킬로미터 거리에서도 육안으로 탐지되는 연기가 문제였다. 즉 군사적 관점에서 증기기관은 전략 전술적으로 약점이 많았다.
이럴 때 석탄을 석유로 바꿔 쓰자는 제안이 나왔다. 쉬운 일이었다. 증기기관은 물을 끓이면 되니 연료를 석유로 바꾸고 연소장치를 석유보일러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연기도 적게 나서 군사 전략상 최적이었다. 이때부터 석유는 전략적 가치가 인정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석유의 지정학이 세계 전략의 핵심이 되었다.
소련은 석탄이 희소해 가격이 비싼 반면, 중유의 입수는 용이했기 때문에
1870년대에 이미 카스피 해를 항해하는 선박에 중유보일러를 채용했다.
따라서 소련함대는 영국 등 주요 강대국의 해군보다 약 25년이나 앞서서 새로운 연료인 중유를 사용했다.
경제성과 편의성에도 불구하고 석유가 모든 나라에서 열렬하게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영국 · 독일과 같이 석탄이 풍부한 유럽의 여러 나라는 딜레마에 빠졌다.
새로운 연료인 석유는 먼 나라에서 구해 와야 하는 대신에 석탄은 자국 내에 풍부하게 존재하고, 광부의 일자리도 마련해줄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나라들은 현존하는 자원과 설비를 이용한다는 방침하에 석유로의 전환을 반대했다. 특히 영국에서 석탄 대 석유의 논쟁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다.
당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국위를 떨치던 영국은 영토 확장을
최강의 해군력에 의지하고 있었다.
해군장관 처칠의 임무는 대영제국의 힘의 상징인 해군을 강력하게 유지해
공해상에서의 독일의 도전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 전함들은 21노트의 속력이었는데
국방대학은 25노트 속력의 새로운 ‘고속 분함대’의 설치로
독일의 신형함대를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다.
즉 영국 해군은 속력을 4노트 향상시키려고 했으며
이는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었다.
석유에 대한 의존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수반했다.
필요한 만큼의 석유가 국내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석유를 먼 지역의 다른 나라로부터 해상수송해야만 했다.
반면 영국 내에는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석탄이 무진장 있었다.
하지만 선박용 연료에서 다른 나라보다 신연료 도입이 지연된다면
해군력의 약화는 필연적이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 해군은 19세기 말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는 안을 처음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신임 해군장관은 ‘석유위원회’를 설치하고 왕립해군에 중유버너를 채용함과 동시에 석유 매장량 확보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이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난 것이 1913년에 해군장관이 된 처칠이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후에 BP로 개칭)의 주식 과반수를 취득해
안정적인 석유 공급원을 확보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영국 해군은 신연료 도입 지연을 만회하는 데 커다란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 뒤 중유가 함선을 움직이는 연료로써 본격 채택된 것은 1차 대전 때였다.
이후 선박용, 공장연료, 디젤기관 등에
중유가 사용되면서부터 석유제품의 주역이 교체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양 문명이 사용하는 화석연료의 주역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었다.
자동차와 항공기의 운행은 석유에 의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1차 대전 이후 군용 항공기의 연료로서 휘발유의 중요성이 재인식되었다.
이때부터 고급 품질의 휘발유가 요구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석유 정제업에도 촉매반응을 포함한 화학반응 공정이 채택되어
고급 휘발유가 보급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