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前) XelloSs입니다. 존재감이 희박해지고 싶어서 닉네임 바꿨습니다~
오랫만에 쓰는건데 음침한거라서(게다가 평범해서;) 죄송합니다-
그냥 마음 편하게 봐주세요;
이제 소설 그만쓰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소설이 될지도 모르겠네요-_-; 허허.
Erigeron annuus - 개망초
어둠이 천천히 온몸을 침식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둠은 덩어리다. 손에 쥐어질 듯 선명한 어둠이 잔잔히 깔려있었다.
발 밑에서 꿈틀대던 그것은 바닥을 미끄러지듯 달려와 발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자극적인 그 감각에 온몸이 전율하고 있었다. 먼지로 보얗게 물든 유리창 밖에는 그믐달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니, 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벨벳 커튼을 보는 듯한 묵직한 검은 하늘은 묵묵하게 별빛을 쏟아내며, 어둠과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밤의 왈츠.
발끝에는 어두운 슈즈가 신겨지고, 머리에는 금빛 화관이 춤춘다.
손을 들어 어둠을 가르며 드레스 한끝을 우아하게 쥐고, 가벼운 스탭으로 달려나간다.
나는 이 순간,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마돈나가 된다.
귓가에서 경쾌한 리듬이 윙윙댔다. 나는 머리를 두어번 흔들었다. 달콤한 리듬이 메아리치듯 내 주위를 맴돈다. 귓속을 파고드는 그것의 유혹을 이내 무시하며, 떨리는 손을 들어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와 닿았다. 축축하게 달라붙는 그것이 꺼림칙하기도 했지만, 일단은 문을 열어야만 했다.
나는 그를 만난다.
그는 나의 연인이다. 그는 내가 고민이 있으면 언제나 들어주었다. 그의 조언은 언제나 나에게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에게 언제나 받고만 지낸 것 같아, 가끔은 미안해 질 때도 있다. 너무나 자상한 그를 위해 나는 오케스트라에 쓸 악기를 준비한다.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할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이날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래식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그를 위한 작은 오케스트라를 준비했다.
혼자만의 오케스트라. 악사는 전혀 부족하지 않다.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웃고있는 것 같다.
바람은 차가웠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작은 빛줄기가 내려앉는다.
새하얀 눈에 반사된 몽롱한 빛줄기가 반딧불처럼 달큰한 빛을 뿜어낸다.
나는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다. 약간 떨리기도 한다. 나는 연주회 같은 것은 처음이다. 사전에 연습은 많이 해 봤지만, 그것들은 모두 스케일이 작은 것들 뿐이라, 지금의 떨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다시 귓가에 가벼운 왈츠가 울린다.
검은 슈즈가 멋대로 움직인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빨리 그를 만나고 싶다. 내 의지와는 달리 내 발은 달리고 있었다.
마치 ‘빨간 구두 이야기’ 같다.
-춤을 추어라, 빨간 구두야, 춤을 추어라.
내 빨간 구두는 춤을 추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그믐달이 지기 전까지, 나는 그에게 이 세상 최고의 선율을 선사할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의 집 앞의 초인종을 눌렀다.
고요한 가운데 청량감이 맴돌았다.
소프라노의 새소리가 그의 집 안을 울려 퍼진다. 끈적한 어둠은 이미 내 허리부근까지 감겨 있었다. 가쁜 숨소리와 함께 그의 발소리가 들린다. 베이스 톤의 낮은 발소리. 관능적인 리듬을 타고 그것은 내 고막을 진동시켰다.
참으로 가슴이 벅찬 리듬이다. 나는 침을 삼켰다. 나는 그에게 최고의 예술을 보여줄 것이다. 자신은 있었다.
***
익숙한 리듬을 타고, 지휘봉이 높게 드리워진다.
가죽 케이스 속에서 우아하게 잠들어 있던 첼로가 그의 정수리를 집어삼켰다.
첼로의 경쾌한 공명음을 시작으로, 밤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붉은 선율이 기분 좋게 울려 퍼진다.
끊어진 바이올린 현이 그의 목에 팽팽하게 와 닿아 선홍빛 선혈을 내뿜으며 더 깊게 파고든다. 마치 게걸스러운 포식자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바이올린 현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은빛의 기품 있는 몸체를 가진 플롯이 그의 척추를 날카롭게 찍어누르며 휘파람 소리를 만들어 냈다. 아아- 오싹할 정도로 멋진 쾌감이다. 겨울 바람에 차가웠던 플롯이 어느새 열기로 뜨거워져 있었다.
섹시한 금빛 곡선을 자랑하는 트럼펫은 그의 길게 뻗은 다리에 휘감기듯 박혔다.
다리뼈가 으스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멋지게 울려 퍼진다.
확실해졌다. 나는 웃고있었다.
어둠이 가슴 언저리까지 침식해왔다. 밤의 왈츠는 계속되고 있었다.
검은 슈즈가 정신을 잃고 춤을 춘다.
-빨간 구두야, 춤을 추어라.
새카만 클라리넷이 내 손끝에서 역동적인 연주를 계속한다. 클라리넷의 고운 음색은 그의 눈을 짓뭉갰다.
나는 클라리넷을 내팽개치고, 눈을 감았다.
깨끗한 바람 속에 어울리지 못한 이질적인 냄새가 작은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코끝에서 연주되는 멋진 악기들의 향연.
손끝에서 느껴지던 물컹한 감각들, 그의 멋진 호응, 최상의 빛깔을 가진 붉은 핏방울.
그래, 이 정도면 만족한다.
나는 장갑을 벗었다.
첼로가 담겨있던 검은 가죽 케이스에 놓여있는 펜과 원고지를 꺼냈다.
그의 충고는 이번에도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역시 그는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연인이다.
나는 그의 볼에 스치듯 키스하고 여기저기 흩어진 악기의 파편을 주워담았다.
눈으로 뒤덮인 새하얀 대지 위에, 개망초 한 송이가 계절조차 잊은 듯 파리하게 피어있다.
바람이 분다. 개망초는 희미한 그믐의 빛을 받은 채, 잔상인 듯 부옇게 떠올라 흔들렸다.
천박하지 않은, 하지만 우아하지도 않은 담담한 흔들림이다.
***
“이번 작품, 정말 좋아요. 완전 환상이었어! 특히 주인공이 마지막 살인을 하는 장면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섬뜩할 정도였는데, 이야- 혹시 진짜로 사람 죽여본 적 있는 거 아냐?”
오케스트라가 귓가에 울린다.
검은 슈즈는 그때의 스탭을 기억하고 있다.
“아아, 그럴지도 모르죠-”
천천히 슈즈가 움직인다.
“하하하-, 이사람, 아주 유머감각까지 있고, 좋아! 이번에도 베스트 셀러는 문제없습니다. 수고했어요.”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가죽케이스를 꽉 쥐었다.
새 연인이 생겼다. 모던 락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나는 요즘 기타를 배우고 있다.
그는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다.
언제나 내 글을 위해 이것저것 조언을 해 주는 그를, 나는 너무나도 사랑한다.
몇 일 전에 옛 연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눈은 다 녹아 있었지만, 개망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쩌면 내가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Fin
....수고했어요-_-*
첫댓글 아아 약간 섬뜩하면서 묘사가 참 멋진 글이었어요. 아니, 이 실력을 가지고서 왜 글을 안쓰신다는거죠!?!?! 그러시면 안되요 ㅠㅠ 인재 상실 인재 상실!! 즐감했어요~ p.s. 근데 정말 왜 마지막 글이란거죠?!
아니, 글쓴지 몇년째 계속 실력에 진전이 없는것 같아서요[...] 뭔가 의욕상실?:
... 꼬릿말 안 달기 캠페인<-!?을 실패하게 만드셨군요.[중얼] 살인입니까? ...살인이네요.[먼 산] 문제는 무언가를 먹으면서 봤다는 것 정도. 그거 빼고 다 좋습니다.[흑흑흑]
앍 이런걸..이런걸.. OTL 잘읽었습니다! 환상적이군요(털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