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악가 95화

[정 주]

95화 환향(還鄕)-2



송가 가옥의 마당 한편에서 서문 종은 장작을 패면서 투덜거
리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담장밖에서 느껴지는 인기
척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냐?"
서문 종의 말투는 차갑고 나지막했지만 섬뜩했다.
"연 적하입니다. 좌장 어른."
대문이 열고 들어온 중년의 사내의 어조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아 들으면 들을수록 거북한 느낌을 주었다.  
"자네가 웬일인가?"
서문 종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질문했다.
"신녀(神女)께서 찾으십니다." 
"나만 찾는 건가?"
"아닙니다. 우장(右長) 어른도 찾으십니다."
"우장까지!"
"그렇습니다. 어서 사당으로 가십시오."
서문 종은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일 다경이 
지날 동안 하늘만 향했던 서문 종의 시선이 연적하에게 돌려
졌다.  
"무슨 일인가?"
"제 형님께서 돌아 오셨습니다."
연 적하의 대답을 들은 서문 종의  안색은 눈에 뜨일 정도로 
굳어버렸다.   서문 종은 몸을  돌리더니 연적하에게 다가갔
다.   
"자네 형도 사당에 있는가?"
"그렇습니다."
"흠... 알았네. 지금 당장 사당에 가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 적하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서
문 종은 연 적하가 닫고 나간  대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탄식
했다.
"하아~."
서문 종의 안색은 어두웠다.
"좌장 어른. 어서 사당에 가보시구려."
고 노파가 갑자기 주방문을 열고 나타나더니 서문 종에게 말
했다.  
"들었소?"
"내 나이 백이 넘었지만 귀만큼은  젊은이들 보다 좋다는 것
을 좌장도 알고 있지 않소."
"세월을 초월한 고 파파의 청력은 감탄할 만 하오."
"칭찬은 그만 하고 어서 사당이나 가보시구려. 좌장의 손녀딸
은 내가 잘 돌보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부탁하겠소. 고 파파."
서문 종은 고  노파에게 감사의 뜻이  담긴 눈빛을 보내고는 
대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대문을 열고 나가는 서문 종의  등
을 바라보는 고 노파의 시선은 복잡했다.   고 노파는 복잡한 
심사(心思)로 인해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눈동자는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좌장 어른."
고 노파가 고민을 끝내고 결심을 하자 끊임없이 흔들리던 눈
동자는 차갑게 가라 않았다.
"왜, 그러시오?" 
고 노파가 자기를 부르자 서문 종은 몸을 돌렸다.
"신녀가 또 다른 한(恨)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시오. 이 늙
은이의 간절한 부탁이외다."
서문 종은 한참동안 고 노파를 바라보며 침묵하다 입을 열었
다.
"나 역시 신녀가 고통받는 것은 원치 않소." 
서문 종의 음성은 딱딱했지만 격정이 깔려 있었다.  고  노파
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서문  종은 
고 노파의 한숨은 뒤로하고 이원의  북쪽에 위치한 사당으로 
향했다.   고 노파의 한숨이 마음을 어둡게 했지만 서문 종은 
아랑곳하고 않고 걸어갔다.

이원에 유일하게 있는 사당은 세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
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좌우에 두 채의 건물이 있고 그사
이에 제법 넓은 마당이 있다.  그리고 신상을 모신 사당은 마
당 뒤편에 일 장정도 높은 지반(地盤)위에 세워져 있었다.  
서문 종이 송가 가옥을 떠나 사당에  도착한 시간은 일 다경
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당에 들어가지 않고 대문 앞에서 
멈추어 선 채 보낸 시간은 한 식경도 넘었다.  서문 종은  넋
을 잃고 대문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흐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구나."
서문 종은 한숨을 쉬고는 대문을 열었다.   사당 안에 들어간 
서문 종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마당의 중앙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칠층석탑을 감상하고 있는 오척단신의 노인
이었다.  오척단신의 노인도 서문 종이 사당에 들어오자 시선
을 돌렸다. 
두 노인은 싸늘한 시선을 나누더니 강렬한  기세를 뿜어냈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대한 지  거대한 칠층석탑마저 초라하게 
느낄 정도였다.  서문 종과  오척단신의 노인은 서로 상대를 
향해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두 노인이 풍기는 기
세는 강렬해져 주변의 공기를 떨리게 했다.  
"오랜만이네."
오척단신의 노인은 서문 종을 싸늘한 시선을 지우지 않고 차
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군.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동문 보."
서문 종의 응답도 마찬가지로 싸늘했다.  
"자네가 오기를 기다렸네."
"나를 말인가?"
"그렇다네. 자네와 함께 신녀를 만날 생각이네."
"그렇다면 앞장서게."
동문 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당을 가로질렀다.  
스르륵.
동문 보의 등뒤에 매달려 있는 칼집의 끝이 땅바닥에 사선을 
그리며 듣기 거북한 소음을 냈다.  서문 종은 안색을  찌푸리
더니 동문 보의 뒤를 따랐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도
착한 동문 보는 고개를 돌렸다.  
"올라 가세나."
"그렇게 하지."
두 노인은 다시 한번 싸늘한 시선을 나누고는 사당을 향했다.  
서문 종과 동문 보는 이원의좌장과  우장으로 이원을 양분하
는 사이였다.  두 노인은 나이나 무위,  지닌 역량까지 한 치
도 밀리지 않았다.   이원을 창설할 때부터 대립한 두 노인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걸어  현재는 
대면조차 하기 힘든 단계까지 왔다.  
두 노인의 갈등은 이원에서도 많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팽팽
한 대립은 멈추지 않았다.  출신 성분 때문에 시작된  갈등은 
오랜 시간이 지나 엄청난 감정의 골을 만들어 화해가 불가능
한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두 노인은 사당 안에 들어가 신
녀 앞에 도착했음에도 굳은 안색을 풀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신녀의 외모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
다웠다.  깊은 연못을 연상하게 만드는 두 눈동자는 영롱하게 
반짝이고, 새하얀 옷을 가로지르는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랜만이오. 신녀."
두 노인은 동시에 신녀에게 인사를 하고는 서로 노려보며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내용을 동시에 말했다는 점이 
신경이 거슬린 것이다.   
"이리와 앉으세요."
"알았소이다."
두 노인은 신녀가 마련한 자리에 착석했다.  서문 종과  동문 
보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흐르자 신녀는 모호한 미소를 지으
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연세는 아흔을  넘어 곧 백이  가까운데 열화 같은 
성품은 여전하시군요."
"험!"
"이제 그만 화해를 할 정도의 시간은 지나지 않았나요." 
"우리를 화해시키고 싶은 신녀의 마음은 잘 알고  있소. 하지
만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라  어렵
고도 어려운 일이오."
서문 종은 동문 보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빙탄불상용. 흥, 어려운 말을 하는 건 여전하군. 역시 태생이 
군부의 고귀한 장군 출신이라  이건가. 나 같은 천한  낭인은 
너무나 어려워 알지도 못하겠군."
동문 보가 비아냥거리자 서문 종의  눈동자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번뜩였다.  두 노인의 갈등은 출신이  문제였다.   군
부의 장군이었던 서문 종과 강호의 낭인인  동문 보가 한 조
직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문제의 발단인 것이다.   
두 노인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를 백안시했다.  서문  종
은 강호의 떠돌이가 자신과 동격이라는 점이  못마땅했고, 동
문 보는 권문세족의 거들먹거리는 행동을  혐오했으니 두 노
인은 갈등은 당연한 지도 몰랐다.  
"그만하세요."
신녀의 눈동자는 투명하게 변했고 음성에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미안하오. 신녀."
두 노인은 신녀에게 사과했다.
"됐어요. 어차피 오늘 이 모임은 화해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서가 아니니 두 분에게 다른 말을 하지 않겠어요."
"험!"
"제가 두 분을 모신 것은  중요한 사안을 의논하기 위해서입
니다. 두 분은 연 적하가 알려준 내용을 토대로  나름대로 생
각을 가지고 왔으리라 믿습니다."
신녀는 서문 종과 동문 보를 한  번씩 훑어보더니 문가로 시
선을 돌렸다.  사당의 문은 신녀의 시선이 멈추는 순간  소리
도 없이 열렸다.
"연 적심이 신녀 님과  좌, 우장 두  분 어른께 인사  올립니
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구류방주인 연 적심이었다.   연 적심
은 신녀와 두 노인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이군요. 연 방주."
"네. 3년 만에 존안(尊顔)을 뵙습니다."
"그렇군요. 연 방주는 근 3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군요."
신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3년 동안 고향이 그리웠습니다."
"그럴 만 하지요. 사람이란 항상 자기 뿌리를  그리워하는 법
이니까요. 그런데 3년 만에 돌아왔다면 많은 선물을 준비했겠
군요."
"네. 제법 많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연 적심은 두 눈동자에 기묘한 광채가 일렁이자 신녀는 싸늘
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풀어 보세요."
신녀가 양손을 깍지끼고 턱을 괘고 말하자 연 적심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신녀 님의 명령대로 팔마당에 거짓  투항을 한 뒤 투량환주
(偸梁換柱)의 책략에 따라 움직인 결과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
습니다."
"결과를 말하세요."
"팔마당의 3할을 장악했습니다. 게다가 잔마와 곡소쌍마가 사
망한 덕분에 1할 정도의 세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됩습니다."
"그들마저 장악하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죠?"
"앞으로 한달 후면 가능합니다."
서문 종은 신녀와 연 적심이 나누는 대화를 경청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달 뒤에 팔마당의 4할이 본  원의 하부 조직이 된다는 것
인가?"
"그렇습니다. 좌장 어른."
"팔마당이 남해방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할에 가깝지. 그렇다
면 남해방에 우리 입김을 널 수 있게 된 것이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장 어른."
연 적심은 동문 보의 의견에는 고개를 흔들었다.
"남해방의 2할 이상을 움직일 수 있는데도 말인가?"
"그렇습니다. 우장 어른."
"이해할 수 없군."
동문 보는 연 적심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리지요."
"말해 주시오. 신녀."
신녀가 중간에 끼어 들자 동문 보는 시선을 돌렸다.
"팔마당은 남해방의 6할에 달하는 세력이지만 하부조직에 불
과합니다. 하부조직의 일부를  장악한 것으론 전체를  움직일 
수는 없어요."
"그건 나도 알고  있소이다. 신녀. 그러나  밑을 흔들면 위도 
흔들리는 법이오."
"우장 어른의 말씀은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해방주인 조 
덕창을 찾지 못했어요. 조 덕창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모
르는 상황에서 경솔하게 움직이며 지난  수년간 투자해 이룬 
조직만 붕괴됩니다."
"신녀의 의견이 옳소. 쓸데없이  경거망동(輕擧妄動)을 할 필
요는 없소."
서문 종은 동문 보에게 쐐기를 박았다.  
"신녀와 좌장의 생각을 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이
대로 진행한다는 것은 하염없이 시간만 잡아먹는 일이오."
동문 보는 신녀와 서문 종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뜻을 드러냈
다.
"그럼 우장의 생각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오?"
"사실 명확한 계획은 없소. 하지만 이대로 진행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은 알고 있소." 
"멍청한 소리. 최대한 정보를  모아 분석하고 완벽한  계획을 
수립해 일을 진행시켜도  실패할 경우가 허다한데,  즉흥적인 
생각대로 움직이자 이거요."
"멍청한 소리라고!"
서문 종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동문  보는 격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노인이 상대를 쏘아보며 살기를 일으키자 사당 
안의 공기는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그만 하세요."
두 노인의 갈등이 심화돼 격렬한  대립양상이 드러나자 신녀
는 차갑게 외쳤다.
"두 분다 흥분하지 마시고 자리에 않으세요."
"미안하오. 신녀. 그만 흥분해 실수를 하고 말았소."
"알았소. 신녀."
서문 종과 동문 보는 신녀에게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않았다.
"아직 연 방주의 설명이 끝나지 않았으니  좀 더 듣고 난 뒤
에 두 분의 의견을 논하기로 하지요. 두 분 다 제  의견에 동
의하시겠죠." 
"흠... 그렇게 하리다."
"우장 어른은 왜 대답이 없으시죠?"
"신녀의 뜻대로 하겠소."
"고맙습니다."
신녀는 동문 보와  서문 종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나서는 
연 적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 적심은 신녀의 의중을  알아
챘는지 입가에 희미한 고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급히 귀환한 이유는 본 원에도 치명적일 수 있는 중요
한 정보를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난 석 달간 움직이면
서 알아낸 정보의 가치는 십 년 동안 찾아낸 정보들 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사설이 길군."
"알았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첫 번째로 알려
드릴 내용은 남해방주가 수마(睡魔)나 심마(心魔) 둘 중에 하
나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는 사실입니다."
"음... 역시 생각한 대로군."
서문 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沈重)한 말투로 독백했다.
"두 번째는 남해방주 조  덕창의 둘째 동생인  조 덕환이 현 
동창의 수반인 조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건 우리도 알고 있는 내용이네."
동문 보의 음성은 싸늘했다.
"그러나 신녀 님과 두 어른께서 모르는 내용이 있습니다."
"모르는 내용이라니?"
서문 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연 적심을 쳐다보았다.
"조 덕환이 푸른 늑대조각 한 개를  구한 것과 조 덕창과 심
각한 갈등이 생겼다는 겁니다."
"뭐라고!"
신녀와 두 노인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그 정보가 정확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좌장 어른."
"그럼 조 덕환이 천장 별부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다
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좌장 어른."
서문 종은 자리에 털썩 주저 않더니 고뇌에 빠졌는지 안색이 
수시로 변했다.  동문 보는 생각보다 일어난 일의 진행속도가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
했다.  그런데 두 노인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비해  신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연 방주."
"네, 신녀 님. 하명하십시오." 
"조 덕창과 조 덕환이 불화가 있다는 정보의 정황 증거를 말
해 보세요."
"조 덕환은 자신을 환관으로 만든 조 덕창에 대해 격심한 분
노와 증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 느껴 
지금까지 참았었는데 이제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결론
을 내렸는지 이빨을 드러내더군요."
연 적심의 설명을 들은 신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동자
엔 의심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흠... 이해가 가는군요. 하지만 증거가 부족하군요. 단순한 심
증(心證)이라면 나중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요."
"증거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푸른 늑대조각
을 구하고도 비밀로 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남해
방의 하부 세력 중에 하나인  장강수로연맹의 움직임을 황하
수로채에 알려주어 큰 타격을 입게 만든 것입니다."
"장강수로연맹이 받은 타격이 남을 속이기 위한 번어기의 목
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남해방이 그런 큰 피해를 감수하면서 
속여야 할 대상이 없습니다."
연 적심이 자신 있게 말하자 신녀는  두 눈을 감고 심사숙고
(深思熟考)했다.  일 다경이 지나도록 신녀가 눈을 뜰 기미조
차 보이지 않자 연 적심과 두 노인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
거운 침묵이 사당을 지배한지 한 식경이 지나자 신녀는 눈을 
떴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신녀가 결론을  내렸음을 
알게 해주었다.
"좋아요. 연 방주. 다른 정보는 없나요."
"아직 남았습니다."
"말하세요."
"세 번째 정보는 본  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매우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연 적심은 깊게 숨을 들이키며 긴장을 낮추었다.  그러나  이
마와 등뒤에 식은땀이 흐르고 살짝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신녀와 두 노인은 연 적심이 긴장하는 
모습에 신경이 곤두섰다.
"본 원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데  매우 충격적인 내용을 
담은 정보라."
"그렇습니다. 좌장 어른."
"재미있군. 어서 말해 보게."
"본 원에 동해방의 소 방주가 잠입해 있습니다."
연 적심은 굳은 얼굴로 딱딱한 말투가 또박또박 말했다. 
"뭐라고!"
서문 종과 동문 보는 충격적인 정보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더니 동시에 외쳤다.  
"동해방의 소방주라니! 설마 죽었다고 알려진 장 천익을 말하
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우장 어른."
"허! 장 천익이 본 원에 살고 있다... 누군가?"
동문 보는 경악한 얼굴로 연 적심에게 질문했다.  
"송 철방이 장 천익입니다."  
장 천익의 정체를 알려준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신녀
였다.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세 사람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
으며 시선을 신녀에게 돌렸다.
"알고 계셨습니까?"
연 적심은 신녀가 송 철방의 정체를  미리 알고 있다는 사실
을 믿을 수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신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헌도 알고 있습니까?"
"5년 전에 제가 그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서문 종의 궁금함을 신녀는 풀어주었다.   
"그럼 그 동안 몰랐다는 이야기이군요."
"그렇습니다."
"허허, 무섭구나. 무서워. 십 수년간을 지내는 동안 단 한마디
의 진실로 밝히지 않고 살아왔다니 과연 장씨 가문의 인물답
구나."
"송 철방은 옛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직도 본명을 모르고 
있어요."
신녀는 서문 종의 오해를 풀어 주었다.
"옛일을 기억 못한다! 그건 무슨 말이오? 신녀."
"좌장 어른은 장 천익이 마지막에 치른 격전을 들은 적이 있
으시죠?"
"잘 알고 있소. 그 당시 본 원은 사해방의 세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결론을 내려 철저한 감시를 하고  있었소. 덕분에 
장 천익이 단신으로 사해방의 정예  대부분을 쓸어버린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래요. 장 천익은 사해방의 정예와 치른 격전으로  인해 생
명이 위협받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어요. 그 중에 가장  심한 
상처는 후두부에 난 타상으로 두개골 일부에 금이 간 정도로 
심했어요."
신녀는 장 천익을 치료한 사람처럼  명확하게 상황을 설명했
다.
"후두부의 타상이 기억을 상실하게 만들었소?"
"네, 좌장 어른."
"그랬구려... 신녀."
"말씀하세요."
"송 철방의 정체가 장 천익이라는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
었소?"  
서문 종은 굳은 얼굴로  신녀를 쳐다보았다.  신녀는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장 천익을 치료할 때 안 것이오? 아니면 그 이전이오?"
서문 종의 뇌리에 떠오른 추측은 섬뜩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
다. 
"그게 중요한가요?" 
"그렇소. 신녀는 십이년전 송 자헌이 데리고 온  중상자를 직
접 치료했소. 이원의 주민이 사경을 헤매도  손끝하나 까딱하
지 않았던 당신이 이방인을 치료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이
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소. 하지
만."
"이방인이 장 천익이니 문제라는 것인가요?" 
서문 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좌장이 추측한 대로예요. 저는  장 천익과 사해방  정예들의 
격전장소를 미리 알고 있었어요. 시간을 맞추어 송 노사를 일
부로 보냈지요. 하지만 장 천익이 기억을 상실한데다 송 노사
가 그를 양자로 삼을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덕분에 십이년이
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어요."
"하아~, 신녀... 송 자헌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오. 사실 송 
자헌은 우장이나 나보다 한 수 위의 고수요."
"송 노사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신녀의 입술이 미묘한 곡선을 그리며 살짝 올라갔다.
"나는 장 천익과 사해방의 정예들이  벌인 격전에 신녀가 얼
마나 관련됐는지 모르오. 또한 알고  싶지도 않소. 다만 신녀
는 명심해야 할 것이 있소."
"무엇이죠?"
"십이년전의 사건에 신녀의 이름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딱딱하게 굳어버린 서문 종의 얼굴을  쳐다보는 신녀의 입가
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신녀는 서문 종이 자기를  얼
마나 걱정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차갑게 얼었던 마음의  일
부가 녹는 것을 느낀 신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약속한 것으로 알겠소. 그리고 동문 늙은이."
동문 보는 서문 종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하자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신녀에 대한 마음은 서문 종에  못
지 않은 동문 보의 심정이었다.  두 노인은 눈짓을 하며 의견
조율을 끝내자 시선을 연 적심에게 돌렸다.
"염라대왕 앞에서도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좋아. 그럼 다른 정보가 있으면 말해보게."
"세 가지가 남았습니다."
"셋이나 남았다고! 정말 많이도 알아냈군. 구류방의 정보망에 
감탄사가 나오는군."
동문 보는 연 적심을 쏘아보며 말했다.  중요한 것이  아니면 
빨리 설명하라는 뜻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하나는 살막이 북해방과 동해방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이고 다른 것은  오악맹이 정식으로  회동했다는 것입니
다."
"오악맹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우장 어른."
연 적심은 동문 보를 슬쩍 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오악맹
에 대한 이야기가 동문 보에게 아픔이었기 때문이다.
"오악맹의 주축인 다섯 명중에 우리가  아는 세 명을 제외한 
남은 두 명의 정체를 파악했는가?"
"한 명은 파악했습니다만 다른 한  명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
습니다."
"한 명이라도 파악했으니 다행이군. 그 자는 누구였는가?"
"제갈 사입니다."
"제갈 사! 강동오괴 중에 하나인 그 제갈 사를 말하는가?"
동문 보는 생각 밖의 인물이 거론되자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습니다. 뜻밖에도 제갈 사는 멸문한 것으로 알려진 제갈 
세가의 인물이었습니다."
"제갈 세가라... 생각보다 복잡해졌군." 
"그렇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의문의  다섯 번째 인물. 
일단 편의상 그를 제오열(第五列)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제오
열이 오악맹을 구성한 인물이었습니다."
제오열이라고 부르는 의문의 인물이 어둠의 장막으로 등장하
자 신녀와 두 노인은 당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원의 
정보망을 뚫고 암약하는 존재가 있다는  현실을 믿기 힘들었
기 때문이다.
"홍면금살군이 아니라 제오열이 오악맹을 만들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좌장 어른" 
"문제가 복잡해지는군. 좋아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일이니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지."
"그럼 마지막 정보를 보고하겠습니다. 마지막 정보는 좌장 어
른과 연관된 일입니다."
"나!"
서문 종은 자신을 지명한 연 적심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
다.
"묵창 악풍의 제자가 이원에 지금 머물고 있습니다."
"악풍의 제자라고!"
"네. 악삼이라는 청년입니다."
"악삼!" 
황 보영을 통해  들었던 이름이 또다시  거론되자 서문 종은 
기이한 운명의 손길을 느꼈다.   그러나 서문 종의 뇌리에서 
악삼은 금방 사라졌다.  서문  종의 뇌리에서 악삼을 지우고 
나타난 이름은 악풍이었다.   악삼의 사부인 묵창 악풍이라는 
이름이 서문 종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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