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살 때 아버지 사망→어머니의 재가→할머니 밑에서 성장→고교 2년때 할머니 작고→고아…’
스물넷 ‘부산 빅갈매기’ 롯데 이대호의 인생 유전이다. 이대호는 지난 시절의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1984년 이만수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당시 삼성)에 이어 역대 두 번째 타격 ‘트리플 크라운’(홈런·타점·타율)을 가시권에 두고 있다.
24일 현재 타율(3할3푼5리)와 함께 홈런(25개). 타점(85개) 등에서 1위인 이대호. 그래서 그의 이 기록들이 더 드라마틱하다. ‘야구드림’의 주인공 이대호를 경기도 한 리조트 단지에서 만났다. ▲삶이 그대를…‘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이제 기쁨의 날이 오리라~’ 이대호를 보니 러시아 시인이었던 푸슈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속의 주인공이 나타난 듯 했다. 그의 인생은 이 시처럼 슬프고 고달펐지만 이를 극복해 이젠 ‘기쁨의 날’을 누리고 있다.
그의 유년시절은 불우했다. 그는 스스로 ‘고아’라 밝혔다. “아버지(이봉술)는 세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엄마는 재가했고. 할머닌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 돌아가셨고요. 지금은 형(이차호·28)과 저 둘뿐입니다”
그가 살았던 어린 시절의 환경과 국내 학원 스포츠의 현실을 감안하면 야구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가시권에 들어온 이대호의 ‘트리플크라운’이 더욱 값져 보이는 것은 그의 기록들이 힘겨운 삶을 극복한 후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그가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운명과 인연의 수레 바퀴 때문이다. 그 운명은 팔자요. 인연은 사람과의 만남이다. 불우한 이대호가 야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야구는 운동장에서 공을 던지고 배트로만 치는 것이 아니다.
운동 선수는 잘 먹고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가족들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그는 그런 가족들의 뒷받침 한번 받지 못했다. “할머니는 부산 수영구 팔도시장에서 된장과 야채를 팔았습니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뒷바라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운동장을 뒹굴다 보면 산더미 같은 빨래마저 이대호가 해결해야만 했다.
▲슬픈 날엔 참고 견뎌이대호가 야구에 눈을 뜬 것은 삼촌 덕분이다. 3명의 삼촌들은 롯데 경기가 있으면 이대호를 데리고 경기장으로 갔다. 야구 선수 시킬 목적이 아니었고. 부모없는 그를 가엾게 여긴 삼촌들이 나들이 차원에서 데리고 다녔던 곳이 부산 사직야구장이다.
그 사직 야구장이 지금 이대호의 보금자리요. 꿈을 현실화 시킨 곳이다. 그의 야구 인생을 찬찬히 살펴보면 행운과 인연의 2박자가 따라 다녔다. 신은 어릴적 그에게 시련은 줬지만 행운도 함께 선사했다.
그는 다행히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수영초등학교였다. “야구부 형들이 배트로 치고 달리고 다이빙 캐치하는 것이 그렇게 멋지게 보였습니다” 내심 야구를 하고 싶었지만 집안 환경 때문에 할 수가 없어 저 멀리서 형들이 연습하는 장면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아야만 했다.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3학년 2학기때였다. 누군가 전학을 왔다.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활약중인 추신수였다. “(추)신수가 저를 꼬드겼습니다. 신수가 저보고 ‘넌 월등하게 크고 몸이 좋으니 나랑 야구하자’하지 않습니까. 그때 추신수를 따라 감독에게 갔죠. 그 길로 야구부에 가입했습니다”
야구부 가입은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부모가 없어 하락을 받을 수 없었다. 야구를 몰랐던 할머니는 뒷바라지 해줄 수 가 없어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 때 삼촌 3명이 대호를 뒷바라지 하겠다는 조건하에 야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촌들도 직장생활을 했었던 관계로 적극적인 지원은 하지 못했다. 경기 때마다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했다. “경기장에 부모님이 오셔서 응원하는 것이 가장 가장 부러웠습니다. 전 늘 혼자였죠” 경기가 끝나면 그는 주린 배를 물로 채우고. 홀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식은 밥과 라면을 먹고 잠을 청했다.
▲마음은 내일에 사는 거그는 자신의 환경을 불평하지 않았다. 어린 이대호를 대견스러워한 감독은 그를 대동중학교로 보냈고 학교는 육성회비와 야구용품은 면제해 줬다. 이대호의 자질을 알아본 신용세 감독은 그의 집에서 먹고 자게 했다. 그는 한달간 감독집에 살았다. 이어 대동중학교에 야구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경남고로 진학했다. 역시 육성회비와 야구용품을 면제해주는 조건이었다. 집과 학교의 거리는 버스를 타고 1시간. 이대호는 240번 버스에 몸을 싣고 내일의 야구왕을 꿈꾸며 집과 학교를 오갔다.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었습니다. 한눈을 팔 수가 없었습니다. 야구가 제 인생의 전부였는데요. 반드시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중·고등학교 때 야구 이외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그가 그때 터득한 인생의 철학이 있다. 눈치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눈치만은 빨라야 하지 않습니까.” 선배와 감독들이 자신을 좋아했던 것도 눈치가 빨랐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의 소중한 인연도 그를 성장시킨 힘이다. 초·중·고교때 좋은 감독을 만났고. 또 추신수를 만나고 롯데에 입단한 것도 부산에 연고가 있는 학교를 다닌 인연 때문이다.
투수로 입단. 부상을 당해 자칫 무명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그때 타자로 전향시켰던 사람이 롯데 우용득 전 감독이다. 롯데 코칭스태프는 그에게 야구 철학을 깨우쳐 줬다. 그런 인연에 반드시 좋은 결과로 보답하고 싶었다. “나를 위해 롯데를 위해 팬들을 위해 3관왕을 꼭 달성하겠습니다”
그는 올해 트리플 크라운 외에 또 한가지 목표가 있다.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2006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다. “솔직히 금메달을 딴 후 군대면제도 받고 싶습니다. ”
그는 지금도 군대를 생각하면 가슴에 돌하나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만약 군대를 가면 야구는 둘째치고 당장 경제적 지원이 끊겨 먹고 살기에도 힘들다. 그는 “지금 가장 부러운 것이 뭔지 아느냐”라고 반문했다. 군대 갔다온 사람이다. 남자라면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지만 그에게만은 군대가 인생의 단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아가 아닌가?
▲이젠 기쁨의 날이 그는 군대를 면제받으면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겠다고 밝혔다.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가꾸고 싶다. 여자 친구는 투병중인 롯데 선배 임수혁 봉사 활동 장소에서 만났다. “처음 본 순간 필이 꽂혔습니다. 그때부터 1년간 쫓아다녔는데 결국 교제를 허락받았고. 이제 결혼약속까지 했습니다.”
그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치 않았다. “여자 친구 전화 올까 들고 다닙니다. 하루에 평균 다섯 통화 이상은 합니다” 그는 여자 친구에 대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다. 그 천사와 행복한 가정을 꾸미며 마흔 다섯살까지 야구만 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밑에서 성장한 이대호는 “할머니를 호강 시켜 드리지 못한 게 가슴에 한으로 남는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할머니와 함께 장사했던 팔도시장 상인들에게 소 한마리 잡기로 약속했다.
인생은 희극과 비극의 쌍곡선이라 한다. 이대호는 비극을 희극으로 만든 사나이 같다. 그는 이제 웃고만 살고 싶다고 했다. 더이상 그에게 지난 시절의 좌절과 방황 그리고 아픔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부산 빅갈매기의 꿈을 기대해본다.
화성=글 정병철 기자 [
jbc@ilgan.co.kr]
사진=이호형 기자 [leemario@ilgan.co.kr]
■이대호 프로필▲출생지=부산 민락동
▲생년월일= 1982년 06월 21일
▲신장/체중=192 cm/120 kg
▲혈액형= A 형
▲출신교= 수영초-대동중-경남고
▲롯데 입단년도= 2001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