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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판 베트남 전쟁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벌어진 전쟁. '소련판 베트남전'이란 말처럼,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많은 인명피해를 내고 전비소모를 한 채 물러나야 했다. 훗날 소련이 해체되는데 일조한 사건으로 꼽힌다. 사실 미국이 소련을 전쟁의 수렁으로 끌어들이려 무자헤딘을 비밀리에 지원해주는 등 많은 공작을 했으며, 이 전쟁은 소련이라는 곰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덫에 가두었다는 의미에서 The Bear Trap이라고도 불린다.
과거부터 아프가니스탄은 교통의 중심지로써 수 많은 세력들이 성장하며 한 두번쯤은 건드려본 지역이다. 19세기 이후 해양진출을 위해서 남하하던 러시아 제국은 인도양으로 나가는 통로인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이에 맞서서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역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무력간섭을 자주 하였다. 이런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19세기 무렵, 무려 3차에 걸쳐서 수십년 동안 계속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1.2. 전조
아프가니스탄은 1960년대만 해도 친소-비동맹 노선을 유지하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폭풍의 전조에 불과했다. 왕정은 점진적인 근대화를 추구했으나, 해외에서 교육받은 관료들은 급진 근대화를 추구했고, 특히 소련에서 연수받은 군인들은 소련식 사회주의를 추구하게 된다. 이런 서구화나 소비에트화에 반발한 이슬람 세력도 향촌에서 점점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973년, 자히르 샤(محمد ظاهر شاه) 국왕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왕의 사촌이었던 무함마드 다우드 칸(محمد داود خان)이 왕이 해외 순방을 하는 틈을 노려 쿠데타를 일으켰고, 결국 왕정이 무너지면서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돌아가던 왕정을 막무가내로 철폐해버리고 들어선 공화국은 개혁정책과 반공정책으로 인해 이슬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미움을 동시에 사는 기염을 토하면서 국가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결국 1978년 좌익계 군인들이 주도한 쿠데타로 다우드 칸 공화국 정권이 무너지고 다우드 칸이 살해되면서, 누르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 등이 이끌던 아프간 내 최대 좌익 정당이었던 인민민주당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해 공산 정권을 수립하자, 이에 지방의 여러 부족들이 반발하였고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집권 공산 세력에 이른바 무자헤딘이라는 이름의 반군 게릴라들이 들고 일어나 공산 정권에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미 소련은 이 이슬람 세력이 자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수많은 KGB 요원을 아프가니스탄에 잠입시켰다.
아프가니스탄은 집권 친소 세력과 친서방 세력, 그리고 향촌의 이슬람 세력로 나눠져 난장판이 되었고, 이슬람 세력은 이때부터 친소 세력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친소 세력뿐만 아니라 소련에 대한 테러를 시작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인도적 목적으로 파견되어 있던 원조단까지도 인질로 잡고 살해함으로써 소련을 격노시킨다. 더구나 집권한 공산주의 세력들은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아민이 타라키 대통령을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친소 성향이었던 아민 대통령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CIA에게 포섭되었다고 아민 반대파가 흘린 거짓 정보가 KGB를 낚았고, 결과적으로 소련 지도부마저 낚아버린다. 이로써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겉으로는 친소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끄나풀이라고 판단된 아민을 제거하고 이슬람 세력을 직접 진압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결정한다. 사실 이 특수작전은 정치국 내에서도 격론이 있었고 가까스로 통과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 아민 정권 전복공작은 전면침공이 아니라 특수부대 및 KGB 요원들에 의한 특수작전에 가까웠고, 사실상 매우 적은 희생(20명 이하)으로 성공적으로 보이긴 했다.
• 하지만 여기에는 반론도 있는데 소련이 단순히 낚여서 아민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아민이 아프가니스탄을 개판으로 운영해서 이대로 가다가는 반 소련파가 확산될 것을 우려해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 아민 정권은 이미 충분히 막장이었다. 아민은 소련마저도 학을 뗄 정도로 공산주의에 집착했는데 그 예로 아민 정권 하에서 모든 공무원과 시민, 학생들은 공산주의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모든 사물들과 벽, 건물을 칠하는 작업에 강제적으로 동원되어야 했다. 집에 사용하는 가정제품이나 장식품마저도 붉은색으로 칠하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구를 넣어야 했다고 한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아프간에 거주하는 소련인들에게도 붉은색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자동차나 자전거 등을 칠하도록 권고를 하기까지 했다. 이는 아프간에 있는 소련 거주민과 고문들을 경악하게 했고, 소련 고문관들은 본국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아민 정권은 오히려 공산주의를 민중들에게 악이 되는 방향으로 주입 중이라 조속히 교정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소련인들에게 내려온 권고문을 증거물로 삼아 보냈다. 즉, 소련은 단순히 아민이 필요없어서 제거한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어서 제거한 것이다.
아민을 제거한 소련은 타라키와 아민에게 밀려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된 바브라크 카르말을 새 대통령 자리에 앉혀 아프가니스탄에 원래 있던 친소정권을 갈아엎고 새로운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소련은 거짓정보에 낚여 친소적인 아민을 살해할 만큼 정보에 혼선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은 소련의 침공을 기회로 여기고 카르말 정권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한 뒤 반란을 일으킨다. 궁지에 몰린 카르말은 소련에게 반란 진압을 위해 "중앙아시아 출신의 소련인들은 아프간인들과 생김새가 유사하니 이들을 투입해달라."며 소련군에게 요청하고, 소련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은 친소정권이 전복될 것을 우려하여 전면개입하게 된다. 그리고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력개입은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군사비 부담으로 소련 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
당시 집권 세력들은 소련으로부터 자주적인 독립국 지위를 얻으려 했지만, 사실 강제적인 독재정치와 국민들의 실정을 무시하는 경향 덕에 자국에서도 욕 먹는 상황이었다. 대내적으론 수천년 역사 동안 수많은 세력들이 거쳐가면서 이 지역은 철저하게 각 부족별로 움직이고 있을 뿐, 바라크자이 왕조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대강 통일국가로서의 아프가니스탄을 이룩한 것은 1930년대였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의 아프가니스탄 국민'이란 개념이 희박하였다. 아니, 애초부터 이 지역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가까운 국가란 개념은 없었다고 봐도 된다. 국토의 80%가 돌무더기뿐인 가파른 산악의 연속이고, 나머지는 사막과 황무지가 대부분. 여기서 어떻게 사람이 사나 싶은 동네인데, 선진 문물 도입을 시도한 것은 좋았다. 하지만 무지하고 먹고 살 만한 물건은 아무 것도 없는 깡촌 사람들에게 갑자기 기계화된 공장과 대도시를 이야기하는 꼴...
"우리는 군병력을 파견하는 것이 중대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당신 나라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반대로 더 악화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외부세력 뿐만이 아니라 당신 나라 사람들 대다수를 상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국민들은 절대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장관회의 의장. 당시 아프간 대통령이었던 타라키의 군병력 파견 요청에 대한 답변
세간에는 마치 소련이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당초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소련군 개입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을 서방에 넘겨줄 수 없다는 KGB측의 강력한 주장으로 1970년대 중~후반까지는 아직 구체적인 군사개입은 여러 옵션들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에서 소련의 개입에 결정적인 구실을 주는 사건이 터진다. 그것은 1979년 3월의 하지-헤라트 사건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명령을 받고 반정부시위 진압에 투입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육군 17사단 병력들이 이스마일 칸 대위의 선동으로 오히려 반정부군 세력에 가세해버린 사건으로, 이 사건에서 소련 군사고문단과 명백한 민간인인 간호사, 군인 가족들까지 합쳐 300~500명에 달하는 소련인들을 학살하고 시체를 막대기에 꽂아서 거리에 전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연히 이는 소련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소련의 개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소련은 결정적인 오판을 하는데, 바로 친소 성향인 아민 정권을 제거하고 카르말 정권을 세우는 한편 적극 개입하여 아프간 전역을 확실하게 갈아엎는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리하여 197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 소련군 제40군은 아프간 접경 테르메즈 인근의 아무다르야 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본격적인 침공 시작 전인 12월 7일에 이미 민간인으로 위장한 KGB 예하 스페츠나츠 대원 700명과 친소파 인사인 바브라크 카르말을 전부 입국시켜놓았다. 사실 초기에는 이 스페츠나츠 대원들을 이용하여 아민 대통령 관저의 식사에 독을 타는(!) 방법으로 아프간 지도부를 혼란시키려 했으나 미리 식사를 먹어보는 시식자들(...) 때문에 실패했고, 저격 또한 오발로 실패하였다. 결국 소련군의 본격적인 침공에 맞춰 관저를 전면공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일날 아프간군 지휘관들을 초청하여 모아두는 등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두고 1979년 12월 27일 작전개시와 동시에 아프간군 지휘관은 모조리 체포, 대통령궁은 스페츠나츠들이 습격했다. 당시 대통령궁을 지키고 있던 아프간 대통령 호위대 2백여 명은 모조리 사살당했고, 스페츠나츠들은 하피줄라 아민 대통령과 그 가족들까지 전부 사살해버렸다. 스페츠나츠를 지원하기 위해 공수부대의 장갑차와 전차, 소련-아프간 국경에서 전차와 장갑차들이 국경을 뚫어오고, 예정대로 지상으로 달려온 기갑부대와 보병들은 몇 개 안되는 아프간 도시들을 점령해서 전쟁은 순식간에 끝난 것 같았다.
공산 정권 수립 후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급기야 아프간 주둔 소련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산악지형이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해 산악전 대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소련군을 게릴라전 등으로 공격하여 사상자들을 냈다. 한편으로 무자헤딘은 소련군뿐만 아니라 소련이 세운 친소 카르말 정부군도 동시에 공격하였다. 그러자 빡돈 소련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무자헤딘 토벌에 나섰다.
이 때 무자헤딘을 이끌던 7명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아흐마드 샤 마수드였다. 마수드의 활약지가 소련 보급로 위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마수드는 주요 거점에 병력을 남겨두고 전투발생시 해당 지역에 기동부대를 보내어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애용하여 친소 카르말 정권과 소련군을 울화통 터지게 만들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북쪽으로 70km 떨어진 판지시르 계곡(Panjshir Valley)에서 소련군과 카르말 정권의 대규모 공세가 무려 9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마수드의 군대를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전투 과정에서 마수드 군도 만만찮은 손실을 입었으나 결국 제압에는 실패했다.
1982년에 행해진 5차(1만 2천여 명 동원), 6차 공세 모두 합쳐 소련 측에서 3천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와중에 공산 아프간군 1천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수드는 소련과 공산 아프간 측에서 노획한 물자와 서방에서 근근히 전해주는 원조물자와 무기, 민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소 항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1984년 7차 공세에서는 소련-공산 아프간군 2만 1천여 명이 동원되었지만 5천여 명의 무자헤딘을 당해내지 못하고 2천 5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돌아갔다.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아프간군 5백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했고 공산 아프간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소련측은 1986년에 공세를 결국 중단, 1988년이 되어서야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문제는 판지시르 계곡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상황도 가히 막장급이었다는 것이다. 1985년 후반기에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3km 떨어진 자와를(Zhawar)에서도 소련군과 무자헤딘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곳에서 무자헤딘은 동굴을 뚫어 창고와 모스크, 의료시설을 지어놓고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다.
1985년 후반의 1차 공세에는 공산 아프간군이 주축이 되어 무자헤딘에 무리한 공격을 가했다가 패배했고 그 결과 오히려 무자헤딘의 사기만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6년 초에 가해진 2차 공세에는 1만 2천여 명의 소련-공산 아프간 동맹군(이 중 2천 2백여 명이 소련군)이 다시 재차 공격을 가해서 어찌저찌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다시 후퇴해버렸다.
1987년 중반에는 파키스탄 남부 국경지역의 아르간다브(Arghandab)에서 공산 아프간 군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가며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으나 결과적으로 물라 나키브가 이끄는 무자헤딘 군에 대패하여 1천 7백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포로, 이탈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러나 소련이 맞고만 다닌 것은 아니다. 상대가 미국과 맞설 수 있는 강대국인 소련이다 보니 모든 전투에서 소련 측의 사상자보다 무자헤딘 측의 사상자가 더 많았다. 10년 동안의 전쟁에서 소련군은 1만 5천명이 전사했는데 무자헤딘의 전사자는 20배에 달하는 30만 명이었다. 1987-1988년 사이 겨울에는 소련군 2만 명, 아프간 공산군 8천 명이 파키타 주(Pakita Province)에서 무자헤딘 2만 명에게 대규모 공세를 펼쳐서 무자헤딘 3천 명을 죽이는 등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승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동년 후반에는 무자헤딘 측이 공세로 나서, 일명 '화살' 작전을 발동,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서 공산 아프간 정부군을 대패시키기도 하였다. 게다가 코스트 주(Khost Province)에서는 10년에 걸쳐 소련-공산 아프간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결국 소련측이 퇴각하는 일도 있었다.
참고로 소련군은 62만명(...) 정도의 대군을 아프가니스탄에 주둔시켰는데도 전과가 크지 않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것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 전체의 '연인원' 개념이다. 전쟁 기간 동안 평균적으로 8~10만명 정도의 소련군만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였고, 내무부 보안군과 KGB의 특수부대는 다 합쳐봐야 1만명 수준이었다. 더구나 광활한 아프가니스탄의 각 주요도로와 거점지역으로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던 소련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생각하면 이것도 애초부터 이기기 불가능한 전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간은 외부에서 막대한 지원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상자가 만단위로 올라가자 소련군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온갖 대응방법을 내놓는다. 산악지대인 아프간의 특성에 대처하기 위해 Mi-24 공격헬기 부대를 투입해 성과를 올렸다. 거기다 공격헬기뿐만 아니라 공군을 동원해 공습과 폭격, 미사일 공격을 했으며 독가스 등 화학무기를 살포하고 무자비한 대게릴라 작전을 펼쳤으나, 효과는 거의 없었고 아프간 국민들의 반감만 올라갔다. 유명한 특수부대 스페츠나츠도 투입되어 게릴라전에 게릴라전으로 반격을 펼쳐보았다. 쿠란에 폭탄을 설치해서 이슬람 교도들이 쿠란을 펼치는 순간 터지도록 만드는가 하면, 위장폭탄으로 무자헤딘의 집이나 기지 속에서 터지도록 만들기도 하는 등 꽤나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승리하지는 못했다.
무자헤딘이 미국이 준 스팅어를 들고 있다. 종전 후 미국이 아프간에게 돈을 주고 스팅어를 다시 돌려 받았으나 받은 양은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남은 스팅어는 아프가니스탄에 남아있었으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선 쓰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국이나 서독, 중국 등 다른 나라가 준 무기들(M16, G3, 중국제 무기들)은 미군들을 공격하는데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이러다보니 소련은 서방이 문제를 악화시킨다며 반발했다.
한편 이 전쟁은 세계 각국이 개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버금가는 대규모 국제 대리전(Proxy War)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캐나다, 터키, 독일 등 서방세계 국가들은 소련군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소총부터 미사일까지 온갖 무기들을 지원하였다. 또한 정보기관 요원들도 직접 파견해서 정보 지원도 하였다. 당시 CIA가 무자헤딘에 제공한 무기의 총 가치는 약 30억 달러로 추산된다.
한편 냉전 동안 공산권의 맹주 자리를 두고 소련과 대립하던 중국도 미국과 수교하고 한참 개혁개방에 나서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과 손잡고 무자헤딘을 지원하였다. 소련제 무기를 무단복제해서 사방에 뿌리는게 특기던 중국인지라, 이때도 역시 AK-47소총부터 온갖 무기를 생산했고, CIA가 이 중국산 무기를 사들여서 파키스탄을 경유해서 무자헤딘에 넘겼다. 중국과 미국 양쪽과 동맹관계였던 파키스탄은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배후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 (19세기말 영국이 일방적으로 그은 듀런드 라인 때문에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양쪽에 나뉘어서 살던 파슈툰족이 양쪽을 연결하는 통로역할을 하였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이란,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같은 이슬람권 국가들도 무자헤딘을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인 경로로 지지하거나 자금 및 무기 등을 지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지원을 했던 곳이 이집트였는데, 그 당시 지도자였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맺은 평화 조약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고 있었고,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을 지원하여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다.
반면에 이 전쟁에서 소련을 지원하였던 나라들은 별로 없었다. 중국은 대놓고 무자헤딘을 지원했고 북한, 쿠바는 소련에 대해 극한 유감과 실망을 나타내었으며,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도 마찬가지였고,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대통령을 사살하고 괴뢰정권을 세우며 점령군 행세를 보이자 아프가니스탄을 무단 침공한 소련을 격렬하게 비난하거나 유감을 표시했다. 그나마 소련과 친했던 인도가 소련을 지지했으나(무자헤딘을 지원하였던 파키스탄과 전통적으로 앙숙관계), 그 외 소련을 지지했던 나라들은 극히 드물었다.
이래저래 제대로 되는 건 없이 피해만 늘어나는 상황,.. 싸울래야 싸울 적도 잘 안보이는데 어디선가 뭔가가 날아오거나 터지면서 사상자만 늘어가는 애매한 그런 나날이 계속되다가 외교적으로도 욕을 먹기 시작하고 소련 내에서도 예상외로 길어진 장기전을 염증을 느껴 철수하자는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89년 소련군의 전격적인 철수로 끝난다.
10년간 지속된 아프간 전쟁은 소련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이 전쟁이 곧바로 소련 붕괴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SDI 추진에 따른 군비경쟁, 1985년 유가 붕괴,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와 함께 소련 경제가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은 원인으로 항상 거론된다.
또한 약 10년 가량 지루하게 이어지던 전쟁은 당시 소련 젊은이들에게 반전주의와 염세적 허무주의를 널리 퍼트렸다고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허무함에 빠진 일부 군인들은 술과 마약, 매춘에 탐닉하게 되었고, 이들은 귀국후에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련의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아프간 참전군인들의 상당수는 술, 마약, 매춘에 쩔어 살았고 그 중 일부가 에이즈에 감염되기도 했다. 게다가 마약 중에서도 악명이 높은 크로코딜에 중독된 참전자들이 꽤 있다. 특히 이들을 통해서 소련 전역에 마약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사병 참전자는 거진 대부분 하층민이 되었고 심지어는 장교 참전자 역시 위관급 정도는 사병 참전자와 별다를게 없었다.
거의 10년 간의 전쟁에 투입된 소련군은 62만 대군인데 이들 중 8만-10만 정도가 평상시 유지 숫자였다는 게 함정. 전쟁으로 인한 소련 측의 전사자는 1만 5천여 명, 부상자 5만 4천여 명이며,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힌 숫자도 수백여 명에 달한다. 거기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귀환한 소련군 장병들 중 포탄 쇼크나 정신 이상 증세, 부상,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40만이나 되었다. 또한 친소련 아프간 정부군은 1만 8천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1980년대라는 시대상을 감안해보면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많은 것은 아니다. 전쟁 10년동안 소련군 1만 5천명이 전사했는데, 미군도 이라크 전쟁 첫 5년에서 4,000명 이상 전사하였고 아프간 전쟁에서 ISAF는 11년 동안 3,300명이(이중 미군은 2,200명 정도) 전사했다. 2010년 6월에는 103명이 전사하였다(2010년 7월 미군 65명 전사) (이라크는 2008년 이후 미군 전사자가 감소하였지만 아프간은 2009년 이후 전사자가 증가하였다). ISAF가 80년대에 비해 발전된 보급/의료 지원체계를 갖췄으며 ISAF의 적 탈레반은 무자헤딘보다 대체로 규모와 조직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소련군이 ISAF에 비해 아주 열세한 전과를 올린 건 아니다. 소련의 아프간 전쟁이나 미군의 아프간, 이라크 전쟁은 걸프 전쟁처럼 치고 빠지는 전쟁이 아니었다. 소련군도 하피줄라 아민 정권만 붕괴시키고 빠졌으면 전사자가 19명이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형편없었다고 주장하는데, 소련이 패퇴한 10여년 후 같은 곳에 들어온 미군 및 ISAF가 온갖 첨단무기로 도배하고서도 무자헤딘보다 훨씬 조직력이 떨어지고 고립된 탈레반 반군을 진압하지 못했음을 상기하면, 소련군은 적어도 전술적으로 미군만큼은 전과를 올린 편이다. 특히, 소련군은 미국으로부터 온갖 무기를 공급받으며, CIA로부터 정기적으로 정보를 제공받던 무자헤딘과 싸우면서도 아프간 정부군을 모양새 있게 조직해서 연합작전을 효율적으로 펼칠 정도였으니, 자신이 조직한 아프간 정부군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미군보다는 보조병 운용도 더 잘한 셈. 진짜 굴욕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군이 제1차 체첸 전쟁 때 그로즈니 시가전에서 당한 것이다. 물론 이쪽도 할 말은 있는게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 정예부대만 엄선해서 나름 준비를 한 다음 파병한 반면, 그로즈니에서 러시아군은 그냥 무작위로 부대를 차출해서 아무 생각없이 파병했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아프간 전쟁은 무엇보다도 소련 군부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점에서 단지 소련군이 잘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아프간 전쟁은 소련군에게 있어 단지 전략적 실패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소련군, 특히 소련군 장성 출신 인사들은 아프간 전쟁 전까지 2차대전에서의 승리라는 막대한 정치적 명분으로 소련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세력 중 하나였다. 아프간 전쟁 역시 뒷배경에는 소련군의 역할이 어느 정도 있었고, 이런 소련군에게 있어 아프간 전쟁의 패배는 단순히 군 차원에서 전략적 실패가 아닌 정치적인 책임이 뒤따르는 엄중한 정치적 실패였다. 게다가 아프간 전쟁을 치루면서 발생한 대규모 부상, 사상자와 소련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소련 국민들이 소련군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현재의 러시아 공화국이 아닌 소련 내 발트 3국이나 캅카스, 중앙아시아의 자치 공화국들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다치거나 죽으면서, 해당 자치 공화국 국민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침략 전쟁에 개입한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고, 이는 조국의 수호자라는 소련군의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비단 정치적인 차원 뿐만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소련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소련군은 1989년까지 지속된 아프간 전쟁으로 군사적 역량을 소진한 이후 각 공화국들에서 벌어진 분쟁들에 대규모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웠고, 이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 소련 지도자들이 군사력 사용에 소극적으로 나서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몇십 배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일단 무자헤딘 병력은 20만 ~ 25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무자헤딘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60만-200만명이 사망하고 300만-500만명이 부상을 당했다. 또한 수백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어떤 도시는 전쟁 전 인구가 20만이었는데 전후 계산해보니 단 2만 5천명만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을 미국 이상으로 악랄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90년대 후반 체첸에게 두들겨 맞을 당시조차도 러시아에서 앙케이트로 러시아의 주적을 무작위 선정했더니 1위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나올 정도였다. 참고로 2위가 미국, 3위가 중국, 4위가 체첸이었다. 당시 체첸 전쟁 와중이었음에도... 덕분에 러시아 역사에 최대 굴욕을 안겨준 몽골-타타르의 멍에 못지않은 멍에라고 부를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소련에 끼친 영향은 베트남전이 미국에 끼친 영향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한편 이 시기에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흘러들어간 수많은 무기들은 상당수 미국이 거액(예를 들어 스팅거 한발에 10만불)을 주고 되샀지만 남은 무기들이 지금은 미군을 노리고 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공산 정권(대통령 무하마드 나지불라)만이 남았지만 희한하게도 소련군이 철수하고 난 뒤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나지불라는 정권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91년 12월 소련 붕괴 이후 뒤를 이은 보리스 옐친이 정권을 잡은 후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러시아는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렸고, 이후 헬리콥터를 돌릴 기름도 부족했던 나지불라 정권은 결국 1992년 4월 무자헤딘 반군들의 공세에 밀려 붕괴되고 말았다.
미국은 철수하는 소련군을 보며 "아프간이 괜히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 아닌데 멋도 모르고 쳐들어간 소련 놈들 보소."하고 배를 잡고 비웃었지만 20년 정도 후에는 정작 자기네가...
미국은 이 전쟁에 항의한다는 의미로 다음해에 열린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고, 대부분의 서방권도 이에 동참한다. 이에 열받은 동구권은 4년 뒤에 열린 1984 LA 올림픽에서 똑같이 갚아줬고, 이 반쪽짜리 올림픽은 1988 서울 올림픽에서야 끝이 난다.
당시 소련군의 사기와 군기도 말이 아니었다. 당시 아프간에서 간염 걸린 병사가 11만 5천 명, 장티푸스 걸린 병사가 3만 1천 명. 도합 42만여 명의 병사가 앓아눕는 데도 의무대는 턱없이 부족했고 병사들에 대한 복지도 개판이었다. 그리고 전방의 병사들은 무자헤딘 때문에 하루종일 10분 쉬기도 힘들 정도로 바빴으나 후방의 병사들은 군수품을 아프간 민간인들에게 팔아 비자금을 마련하면서 배를 불렸다(...). 이는 당연히 전방 병사들과 후방 병사들의 갈등을 부추겼고 단합도 되지 않았다.
장교들도 병사들처럼 개판이긴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쟁통의 비참한 현실을 부정하려고 마약과 매춘에 찌든 자들이 많았고 많은 장교들이 PX 여종업원, 여비서, 식당 여직원 등 여성 군무원들이나 여군들과 매춘 및 성관계를 맺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인기가 좀 있는 여군이나 여군무원을 두고 장교들끼리 총이나 수류탄을 동원한 전투나 다름없는 알력다툼을 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소련군이 전투에서는 늘상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으나 전쟁에서는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3. 미국의 전쟁 유도
사실 이 전쟁의 시작은 미국의 숨은 노력이 많기도 하다. 1979년, 미국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고의적으로 유도했는데, 당시 주 아프간 미국 대사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본국에 그런 식의 외교는 소련의 침공을 불러올테니 제발 조심해 달라고 항의성 경고를 했으나, 이미 미국 내부에서는 소련을 아프간에 끌어들여 소련판 베트남전을 하는 쪽으로 결정이 나 있었으니 먹혀들 리가 없었다.
전 CIA 국장 로버트 게이츠는 1996년에 쓴 회고록 「음지로부터: 냉전에서 승리한 다섯 대통령의 숨은 이야기」에서 미국 정보기관들이 실제로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가 아닌 이미 그 6개월 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 게릴라를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밝혔고, 2년 후 지미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도 프랑스 주간지「누벨 옵세르바튀르」와의 인터뷰에서 게이츠의 주장을 분명하게 입증해 주었다.
그 인터뷰에서「누벨 옵세르바튀르」는 브레진스키에게 "게이츠의 주장이 정말 맞느냐?"라고 물었는데, 브레진스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무자헤딘에 대한 CIA의 지원은 1980년, 즉 1979년 12월 24일 소련 군대의 아프간 침공 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비밀이 유지되어 온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실 카터 대통령이 카불의 친소련 정권 반대파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첫명령을 승인한 것은 1979년 7월 3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그러한 지원이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유도하리라고 대통령에게 설명했던 자료를 내가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벨 옵세르바튀르」의 인터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누벨 옵세르바튀르」: 지금 당신은 이 점과 관련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가?
브레진스키 : 무슨 후회를 할 게 있는가? 그때의 기밀 작전은 기발한 구상이었다. 그 작전은 러시아를 아프가니스탄의 함정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소련이 아프간 국경을 넘었던 그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을 베트남 전쟁으로 몰아세우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라고.
「누벨 옵세르바튀르」: 그러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미래의 테러 집단들에게 무기와 군사 참모를 제공한 사실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브레진스키: 세계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 탈레반인가, 아니면 소련 제국의 붕괴인가? 이슬람교도의 일부를 약간 동요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중부 유럽의 해방과 냉전의 종식인가?
여담으로 미국내 대표적인 좌파지식인 하워드 진은 9.11 테러가 터진 다음에 이게 이슬람 교도의 일부의 '약간의 동요'인가? 라고 한탄에 가까운 비판을 했다.
반면에 존 미어샤이머를 비롯한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그렇다. 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