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 9.29 ) 말씀/ 에베소서 2:1-10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사람은 누구나 다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사람이 된 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과거처럼 단지 생존을 위하여 먹고 마시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는데도 불신자들과 다름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무엇인가 삶이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매당 심인곤 장로는 선천 신성학교 교사 시절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파면이 되자 학교 앞에서 신발 보수장사를 하며 제자들의 신을 기워주는 가운데 무언의 교육을 하였습니다. 그 분의 저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신자의 인생관과 불신자의 인생관이 다르고, 자연은 동일하지만 신자의 자연관과 불신자의 자연관이 다르고, 사회는 동일하지만 신자의 사회관과 불신자의 사회관이 다르고, 출생은 동일하지만 신자의 출생 관과 불신자의 출생관이 다르고, 결혼은 동일하지만 신자의 결혼관과 불신자의 결혼관이 다르고, 사망은 동일하지만 신자의 사망 관과 불신자의 사망관이 다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신자가 되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넌 크리스천과 다른 것은 당연합니다.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숨겨진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가치를 발견하고 아이덴티티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최고의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서 목표도 알 수 있고, 삶의 방식과 태도도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다이아몬드광산 개발이 시작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한 상인이 남아공의 어느 마을에 머물렀을 때 선반 위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는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상인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돌멩이는 누구의 것입니까?" "저것은 내 아들이 산에서 주어온 것입니다." 상인은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좋은 장난감을 하나 줄 테니 저 돌멩이를 내게 주지 않겠소?" 주인은 선반에 놓인 광채 나는 돌멩이를 상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감사하지요. 제 아들도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주인은 상인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것이 값비싼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습니다. 결국 이 돌은 케이프타운의 보석상에게 12만 5천 달러에 팔렸습니다. 지금으로는 수백만 달러ㅁ9수십억)를 호가하는 가격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면 무가치하게 살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다 그런 것이 아니냐?” 하면 그런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을 단지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존재, 진화된 인생으로 생각한다면 동물적인 인생 그 이상을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비하하여 헛되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살 필요가 없는 존재야” 하며 인생을 비관하며 죽는 사람이 40분 간격에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돈이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인생살이 실패를 했다고 해서 그렇게 포기해도 좋은 존재입니까? 쇼펜하우어는 살패 좌절돠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언젠가 인터넷 기사에서 2,000원이 없어서 죽은 필리핀 13세 소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난하던 어린 시절 생각나 마음이 아파한적이 있습니다. 숙제를 해야하는데 2,000원만 주실 수 없느냐고 어렵게 물었는데 막노동하는 아빠는 돈이 없어서 주지를 못했고 소녀는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3일 결석을 했고 아빠가 2만원을 가불해서 돌아와 보니 목을 메어 죽어 있었습니다. 돈 없어서 못 먹고 숙제 못하고 손들고 벌 서고...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인간의 존엄한 가치 때문이지요. 삶이란 그 가치를 발견하는 만큼 가치 있게 사는 것이고 또 그 가치를 안다면 그렇게 살도록 도와줘야합니다. 우리가 흔히 갖고있는 핸드폰이나 컴을 보면 그 기능이 어마어마 합니다. 물론 가치를 모르면 게임이나 하겠지만 가치를 알고 활용을 잘하면 억만장자도 될 수 있습니다. 전쟁에 대승을 거둘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스라엘이 히즈볼라 대원들 삐삐에 폭탄을 장치해서 300여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헤즈볼라가 핸드폰이 정보가 샐 것을 우려하여 삐삐를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이스라엘과 연관되 업체가 거기에 폭탄을 설치한 것입니다. 핸드펀, 컴 퓨터 알면 노다지이지만 모르면 깡통입니다. 사람의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인슈타인도 15%밖에 활용하지 못했다고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5%-10%입니다. 인간은 창조적 지혜를 가진 존재들로서 제대로 가치를 활용하면 누구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치를 발견하고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먹고 마시며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고, 작은 일에 절망과 좌절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상해하고 죽이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가치의 존재입니까? 첫째,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죽어도 당장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자부할 수 있는 최고의 긍지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과거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하였습니다. 2절에 보면 ‘죄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불순종의 아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했습니다. 과거 나 라는 존재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인생은 내 일 죽기 때문에 오늘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이 최상입니다. 힘들면 죽는 것이 다였습니다. 과거 힘든 시절 어머니들은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되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 은혜로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습니다(5). 12절에 그 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언약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 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13절). 진노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의 피가 그렇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피! 그 귀중한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우리는 본질상 죽을 죄인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주님의 피 값을 치루고 사신 바 된 자들입니다. 그냥 살다 죽을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는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로서 긍지가 약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만났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예.”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갑니까?” “예.” 대답을 잘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녀로서 멋진 자신의 삶을 소개하거나 예수님을 당당하게 선전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구원받은 자임을 머리로는 알지만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삶으로까지 증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가치 존재이면서 그런 가치를 나타내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마치 빛이 나는 다이아몬드 광석을 갖다가 선반위에 놓았지만 그 가치가 얼마인지는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자녀로서 자유를 얻은 자들로서 천국분 아니라 현실도 멋지게 잘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아침 카톡을 보낸 후에 군산의 연쇠가 80되신 전도사님이 카톡이 왔습니다. “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님의 차박 장소보면서 목사님처럼 멋지게 사는 분을 본적이 없어 감탄하고 있네요. 그저 상상만 하고 있는 중 입니다 대리만족 하면서요 오늘도 주안에서 행복하시고 강건하시길!“
”전에는 저도 아주 재미없게 살았어요. 하나님이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분이심을 깨다고 그 자녀답게 살아아아겠다고 생각하면서 삶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천국뿐 아니라 현재 삶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고 누리고 나누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11 전도사님도 건강하시고 남은 인생 평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가치 있게 멋있는 삶을 살기를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걸작 품입니다. 본문 에베소서 2장 10절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공동 번역에서는 "우리는 그의 작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창조된 위대한 걸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눈, 코, 귀, 두 손, 두 발…… 누구 닮았습니까? 엄마 아빠 아닙니다. 원숭이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숨결, 생명이 숨쉬고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에 인간이 만든 위대한 작품들이 많이 있지만, 어떤 예술가도 이런 걸작품을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특히 구원받은 영혼은 더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영혼은 유정란입니다. 똑같은 달걀이라도 무정란은 시간이 경과하면 골아서 죽습니다. 유정란은 온도를 부과 하면 부화하여 병아리가 나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 안에는 영생이 있고 성령이 거하십니다. 우리는 이제죽을 존재가 아니라 살 존재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생명의 열매를 맺거 살다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존재들입니다. 4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런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자신을 닮은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누가 나를 어떻게 보든 생각하던 우리의 가치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있는 존재입니다. 창세기 1: 31절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very good!” “나는 하나님이 매우 사랑하시는 존재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런 가치를 깊이 깨닫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사 49:5)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 이것이 우리의 건강한 자화상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자신을 자학하거나 다른 사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여한 절대적 가치를 사람이 비하할 수 없습니다. 인생이 성장 발전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기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얼마든지 가치 있는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잘하고 못하고 상관 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은 성공신화로서 가치를 평가합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했으면 조금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합니다. 남보다 성취를 못했으면 스스로 열등감에 모든 자신을 비하시킵니다. 외적인 조건으로 인해서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다른 사람의 가치를 파괴시키는 일을 합니다. 의사들에 의하면 지나친 자기 열등감에 빠진 사람들이 3분의 1이나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가치 기준은 무엇을 잘 하고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그 자체가 가치입니다. 예수생명이 있는 존재로서 가치,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보아야 합니다.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신의 걸작품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다.” “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패치마우스 라는 비디오가 있습니다. 주인공 소년은 키가 자라는 것이 멈춘 장애아입니다. 키가 다른 친구들의 반박에 안됩니다. 그런데 그의 엄마는 늘 그에게 너는 영웅이라고 심어줍니다. 그는 언제나 “나는 영웅이다” 고백하고 선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이들과 삶 속에서 그는 정신적 리더가 됩니다. 그러면서 가끔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만드셨을까? 분명히 만드신 목적이 있을 텐데... 그러다가 어느 날 주일학교 버스가 호수에 추락하였는데 그 안에 갇히 아이를 건져냅니다. 그리고 자신은 죽습니다. 그는 겉으로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장애아였지만 영웅으로 살다가 영웅으로 죽었습니다. 내가 나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 안에서 사랑받은 걸작품으로 나 자신의 가치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너는 ㅇㅇ웅이다. 세상에서 구원받고, 또 세상을 구원으로 인도할 영웅이다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 받은 자입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는 것은 누구나 선한 일을 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만한 가치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세상 먹고 마시며 살다가 죽을 존재가 아닙니다. 더 이상 진노의 자식이 아닙니다. 열매 없는 일에 참여하다 죽을 자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생명의 씨앗이 있습니다. 본래는 죄 때문에 열매 맺을 수 없는 돌감람 나무였습니다. 열심히 살아도 어떤 선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슬픈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참감람나무 되신 예수님께 접붙임 바 되어 무슨 일을 하던지 다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선한 일을 하도록 독특한 달란트와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한 열매 맺는 인생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8)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물론 저절로 가치가 창출되고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열매는 우리 스스로 맺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옛 사람인 내가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사셔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삶이 이제는 브랜드화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나에게만 주신 선한 일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브랜드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다(롬 12:2). 그 뜻을 좇아 은사를 계발하고 영향력있는 삶을 브랜드화 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브랜드가치 무시 못합니다. ‘삼성’하면 생각나는 전자제품, 디지털, 신용 있고 믿음직한 삼성, 서비스 좋은 삼성, 이렇게 브랜드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러시아에 도시락 라면 초코파이, 명품 브랜드는 몇백 만원이라도 살려고 줄을 섭니다.
푸른초장 교회는 세계를 품는 우주교회, 우주교회. 바다해 김해영 목사가 있고, 우주교회를 서기는 주영정공이 있고. 김지홍이라는 장군 집사님이 있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브랜득ㅏ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고 주님의 복음의 증인들도 독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증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르게 만드셨고,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교회도 교회마다 다양하고 독특합니다. 사람과 경쟁할 필요가 없고, 크고 작음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나의 브랜드를 찾아 사랑, 겸손, 섬김. 충성.... 이런 나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고 새롭게 단장하며 인생을 업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일의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노브랜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싼 맛으로 사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본받을 것은 못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최고의 하나라도 가치로 승부를 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최고의 걸작품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거룩한 목적있는 존재로 빚으셨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발견하고 나만의 은사를 브랜드화 시키고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로서의 최고가치의 목적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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