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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목씨 (泗川 睦氏) 관향 | 경상남도 사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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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목효기(睦孝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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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집성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전라남도 고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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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 목덕창, 목인길, 목충, 목자안, 목진공, 목세칭, 목첨, 목수흠, 목서흠, 목장흠, 목취선, 목대흠, 목겸선, 목행선, 목내선, 목천성, 목임유, 목임중, 목임일, 목창명, 목호룡, 목지경, 목시경, 목조수, 목만중, 목인재, 목인배, 목인회, 목태림, 목자상, 목치숙, 목일신, 목요상, 목영준, 목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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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2015년) | 8,71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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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목씨(泗川 睦氏)는 경상남도 사천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목효기(睦孝基)는 고려 고종
사천 목씨의 시조 목효기(睦孝基)는 고려 고종
목효기의 아들 목덕창(睦德昌)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면서 1269년(고려 원종 10) 교위(校尉)로서 서북방면 역신들의 반란을 평정하다가 영주성(靈州城 : 지금의 평안북도목준평
목효기의 6세손 목인길목인길의 사촌 동생인 목충(睦忠)과 목자안(睦子安)도 밀직부사
7세손 목진공(睦進恭)이 조선 태종조에 우부대언(右副代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지내고, 세종조에 호조참판
11세손 목세칭(睦世秤)의 아들 목첨(睦詹)이 선조 때 이조참판·도승지를 역임하였고, 목첨목서흠(睦敍欽)은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조에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고, 둘째 목장흠(睦長欽)은 인조반정 후 호조참판·도승지를 지냈으며, 막내 목대흠
목서흠의 아들 목내선(睦來善)이 숙종조에 남인의 중진으로서 1689년 우의정에 이르렀고, 기사환국에서 서인을 제거하여 좌의정
목장흠의 아들 목행선(睦行善)은 대사성·대사간·승지·예조참의·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목행선의 아들 목창명(睦昌明)은 숙종조에 형조판서와 병조판서
목수흠의 증손 목천성(睦天成)이 호조참의·좌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고, 목천성의 증손 목만중(睦萬中)은 순조조에 대사간으로서 천주교 박해를 주도하였으며 형조판서
고려조와 조선조에 전성기를 누리던 사천 목씨는 갑술옥사를 고비로 남인의 몰락과 함께 세력이 약화되었고, 목호룡
일제 탄압에 대항한 독립운동가로는 목자상(睦子商), 목치숙(睦致淑), 목준상
목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삼설이 존재한다.
- 최초 목씨의 기록은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扶餘氏)를 비롯 백제의 귀족 성씨로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刕氏)·해씨(解氏)·진씨(眞氏)·정씨(貞氏)·국씨(國氏)·목씨(木氏)·백씨(苩氏) 등이 대성팔족가야를 침공해 가라국왕 기본환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질(百久至)·옥수질(阿首至)·국사이(國沙利)·이나미주(伊羅麻酒)·이민질등(爾汶至) 등이 백제로 도망쳐오자 목라근자백제가야백제목만치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부여 서씨(扶餘 徐氏), 여씨
- 641년(고구려 영류왕 22년)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에 의해 당(唐)나라의 8학사(八學士)인 목충(睦沖)·홍천하(洪天河)·은세통(殷世通)·위령(魏齡)·방비(房丕)·기모(奇牟)·길령(吉寧)·봉수현(奉守賢)이 유학과 문화 교류를 위해 고구려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