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무도장이나 감자도장이나 가짜 도장이긴 마찬가지다! - 쓰시마에서 제 2신
1978년 2월이었다. 내가 주독대사관에 1등 서기관 겸 영사로서 부임하였을 때이다. 오스트리아에서 2등 서기관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군대도 늦깎이로 마쳤고 구주 국과 통상 국에서 근무 후 부임해 독일에 가보니, 이OO 대사님께서 대사님으로 계셨고 이 대사님과 사모님께서는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 공부하시던 아들이 혹시나 한국말을 잘 못 할 까봐,
새까맣게 깨알로 한국말 편지를 미국의 아들한테 써 보내셨는데 지금 연세대 교수로 계시는 그 아드님....부모님의 노고가 없었던들 한국말을 그렇게 잘하지는 못하였으리라.
독일에 부임하고 보니 독일에 취업 2년 차 되는 한국 광부들과 간호요원들이 광산과 병원에서 온갖 굳은 일을 하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추후에 밝혀진 바지만, 이들을 위해 독일 은행이 3천만 달러 정도의 지불보증을 서준지라 이들은 매달 금사라기 같은 월급에서 이 빚을 갚고 있었다.
세계에서 못사는 나라로 맨 꼴찌에 가까운 나라에 지불보증을 해 줄 나라의 은행이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 그 만큼 우리 대한민국은 국제적인 신용이 없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지금의 G & P 같은 신용등급 회사가 있다 하여도, 이들은 부자나라의 꿈같은 이야기 이었다. 우리나라 같은 가난한 나라에게는 해당이 안 되던 이야기였다.
이래서 64년 12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거리엔 널려있고 이들은 무직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남녀가 공통상황이었다. 그리고 국내엔 굴뚝산업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여 이들을 소화할 능력이 없었다.
이래서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빈곤을 없애 보자고, 군사혁명을 해 놓고 보니 이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을 위시하여 혁명 주체 세력들은 미국으로 갔다.
Kennedy대통령을 만나,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물리치려면 잘 살아야 한다는 점을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Kennedy대통령은 이들을 문전박대 하였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소리쳤다. “박 장군, 군으로 원대복귀 하시오.”
그래서 이들은 열이 올랐다. 문전박대뿐만이 아니고 농산물무상원조도 중단했다.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던져주던 농산물무상원조 덕분에 그런대로 연명하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어려웠다.
일본에 요청하는 것도 검토하였지만, 국교가 없는 상항에서 할 수도 없고, 때 마침 2차 대전 후, 연평균 8% 대를 고속 성장하고 있던 서독을 주시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처럼 분단국가의 아픔과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히 일어서는 서독을 보고,
군사정부는 혁명 후 6개월 뒤인, 1961년11월
백 원장은 독일에 머물면서 본인의 지도 교수였던 Voigt 교수에게 Erhardt 경제장관을 만나게 해 달라고 매일 동기 동창인 Voigt 교수 사모님에게 애걸복걸 하였으나 독일 정부는 끄 덕도 안 했다.
미국의 영향력은 그만큼 대단히 컸다.
서독의 경제장관은 아데나워 수상에 이어 2년 뒤에 수상이 되는 Voigt 교수의 친구였던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수상이었다. 라인 강의 기적은 사실상 Erhardt 신임수상의 작품 이었다. 그러나 이때 독일도 소위 ‘마샬 플랜’으로 미국의 영향권 내에 들어 있었고 Kennedy 대통령의 입김은 한마디로 이곳에도 미쳐, 대단 하였으며 파키스탄에서 시작된 군사 혁명의 회오리를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 측에서 허용할 경우 동남아 각국에 번질 혁명의 회오리는 것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Voigt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경제개발을 위한 상업차관이었다. 분단국인 경우, 양 체제에 공히 동일한 형식의 Hermes 차관 형식도 아닌 한국에 유리한 차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독일에 남아 있던 백 원장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은행의 지급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간인 출신의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백 원장과 대학을 같이 다닌 Schmidt 노동부 과장이
“지금 서독에는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웬만한 데는 다 파내, 지하 1,000m를 파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지고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갔다. 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 보내줄 수 있겠는가? 간호조무사도 한 2,000명 정도 필요하다. 시체 닦는 일등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 독일인들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줄 수 있다면 이 사람들 담보로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
신 대사는 한국정부에 긴급 전보를 쳤고 한국에서는 바로 모집 광고가 났다. 당시 한국 광부의 한 달 월급은 국내 임금의 7-8배에 해당하였다. 당시 한국의 실업률은 40% 가까이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 달러) 태국 (260 달러)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며, 한국은행의 외화잔고는 2,000만 달러도 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정부에서 발표한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운집하였다. 6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선별 기준을 경력 2년 이상으로 내걸었는데도 탄광갱도조차 구경하지 못한 “가짜 광부”들이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응모하였다. 대 도시에 사는 대학졸업자들도 무조건 신청하였다.
“신체검사에서 실격된 1,600명을 제외한 1300여 명 중 절반이 광부 경력이 없는 고등실업자임이 밝혀졌다. 노동청 관계자에 의하면, 이들 광부 모집에 응모한 가짜 광부들이 300원 내지 500원을 내면, 가짜 취업증명서를 사서 제출하였으며, 이 증명서 중에서 유령광산 20여 개소가 발견되었다. 노동청은 전국 광산지역에 감독관을 파견해 조사할 계획이다.”
이렇게 선발된 아국 광부 1진 123명이
서독 정부는 지열이 말이 아닌, 지하탄광 1,000m에 들어가 일하는 우리 광부들과 굳은 일을 마다 안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일하는 친절한 우리 간호요원들에게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어, 병원에 입원하였던 독일 고위인사 들은 한 결 같이 좋은 이야기뿐 이었다.
그 중의 한 분이 Johan Wagner 집권 기민연합(CDU) 사무총장이었다. 그래서 이들 서독 정치인은 “한국이란 나라의 대통령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한국 대통령을 공식 초청해야 한다!”고 서독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정부에 대한 건의안을 채택하였다. 이래서 가는 비행기도 없이 상용 칸에 대통령 내외분을 모시고 박 대통령의 서독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 3월 28 목요일이었다.
나는 대한민국외교협회 회원들로 주요국 대사를 역임한 7~90대의 인텔리 노인 40여명과 자리를 같이했다. 비가 내리다가 맑게 갠 대한해협의 일본 섬 쓰시마(대마도) 섬에 배편으로 도착했다.
그런데 이 쓰시마 섬사람들의 양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그렇게도 재독동포들과 유사할까 하고 무릎을 쳤다. 다른 게 아니고 이러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막 정권을 잡았을 당시, 모든 서류가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이름으로 발급되었다. 그런대 한국과 일본에서는 상대방의 이런 특수한 사정을 이해 않고, 장군 명의로 우리 황제에게 서신을 해? 고얀 놈들 같으니라고!’고 삐져 있어, 쓰시마 군주로서는 죽을 지경이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중국을 쳐야 되겠는데, 조선 보고 길을 비켜달라고 하였는데 답장이 없다’고 야단이었다.
쓰시마 섬은 고래로 조선이 없으면 먹고 살기가 어려울 정도로 조선에 의지하고 살았는데 큰일이었다.
이에 대마도, 즉 쓰시마 군주는 가까운 사람들과 상의 끝에 문서를 위조하기로 하고, 한국측 황제의 편지와, 그리고 일본 측은 “도요또미” 장군의 서한이 아닌 황제의 관인을 위조 고무로 새겨 길을 비켜 달라는 일본 측 요구에 환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하였다.
그리고 그 도장들을 의젓하게 “대마 역사 민속자료관”에 전시해 놨다.
내가 독일에 도착하여 대사님으로부터 영사 임무를 받고 영사로서 첫 업무를 개시하던 1978년2월 어느 날이었다. 통역관이 결혼 서류라고 가져 온 서류가 이상하였다. 이때는 각 광산마다 통역관이 있어 이들이 대사관 출입을 할 때였다. 결혼서류라고 가져왔는데 한국 각 면사무소에서 발행한 호적등본을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관인이 너무 선명하고 어제 호적등본에 찍은 관인마냥 뭔가 이상하였다.
감자라는 것이 도장파기에 손쉬웠다. 그래서 자주 광부들이 애용하였다. 그것을 추려놓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부터 처리를 하였다.
그렇잖아도 독일에 도착 이후, 호적등본 번역확인 작업 관계로 애 아버지가 총각으로 여러 번 둔갑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둘이 있는 한국에서의 애 아버지가 갑자기 총각으로 변하여 처녀 간호사하고 결혼한다는 것이다. 하기야 내가 그 동안 입버릇처럼 해오던 ‘할머니라도 좋다, 우리 집 할머니만 아니면!’ 남자들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들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수당 때문에 생긴다. 내가 이렇게 지금 중얼댄다고 해서 독일 사람들한테는 입도 뻥끗 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말한다고 하면, 불합리한 것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애가 셋이 있어 매월 2천 마르크씩 수당을 더 탄다면 (총 월급 4천 마르크 정도) 1,000m 지하갱도에 들어 가 있는 사람들의 눈 색이 변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아이들 수당이 봉급수준 가까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 아이가 두 명씩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한국 측 입장에서 보면 이 돈이 몽땅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로 송금이 된다. 그러다가 결혼 하려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위조가 횡횡 했던 것이다. 통역관들은 부탁한 사람들에게 해다 줘야 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그러나 이들은 솔직할 때를 안다.
그래서 영사의 한마디가 중요하였다. “어떻게 된 거요?” “다 아시면서 그러세요!” 그러면서 통역관들은 솔직히 그 사람의 경력 전체를 이야기한다. 사실대로 말이다. 이들은 솔직할 때 솔직하고 안면을 바꿀 때, 바꿀 줄 안다.
그러다가 쓰시마 사람들의 거짓말이 탄로가 나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혼 줄에 혼비백산하였다는 이야기를 안내여인이 하였다. 나는 독일 쪽을 보고 그 동안 외무고시에 되어, 대한민국을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왔다. 그래서 국내 사정엔 밝지를 안아, 비교를 해 보려고 거제도와 완도를 다녀 왔다. 거제도를 바라보다가 우리 온양온천을 보고, 나는 그 초라함에 쇼크를 받았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정치 할 사람은 아니다!
중국의 상해는 허허 벌판이었다. 중국의 동해안(우리측은 서해안)에는 공업 도시가 몰려 있다. 중국에서 보아서, 동해안엔 그런 도시들이 새로 생긴 것이다. 소위 우리측의 서해안 시대를 활짝 여는 것이다. 우리가 중국의 몇째 안가는 투자 국으로 변모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동해안엔 황하의 영향으로 수심이 그리 깊지를 않다. 5-6m가 고작이다. 그러니 서해안에서 가장 북 항인 아산/당진/평택은 화강암산과 평야 등으로 고래로 해저를 파면 팔수록 훌륭한 항구가 되어, 큰 배 몇 척이 접 안 할 수 있고, 중국이 발달하면 할수록 좋은 물류도시가 된다. 이점은 요즈음 제2함대 사령부가 평택 항에 자리를 잡고 그 유명한 NLL 사건이 연평 도 근해에서 벌어졌던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아시고 있다. 게다가 아산시장이라는 사람이 평택 항을 조성하는데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아산 쪽에 대고 항구를 조성할 흙을 팔라고 하였다가 면전에서 거절을 당하였다고 볼 맨 소리였다. 이 흙을 팔았으면 산이 하나 평지가 되고, 여기에다가 훌륭한 공장부지를 조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온양에서 산을 넘어 꼬불꼬불한 길로 얼마 안 되는 새로 이전한 세종시가 터널을 뚫어 50km정도 밖에 안 된다면, 훌륭한 물류도시로서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점을 우리는 노려야 한다. 게다가 세종 시는
제발 현실적인 시장님이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아산시를 고향으로 둔 사람으로서 말이다, 끝.